서초패왕(西楚霸王). (13)
신아가 항우의 대검을 부쉈다. 손힘만으로 부서진 대검의 조각들은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가 땅으로 떨어졌다.
항우의 마기, 만인지적은 단순히 육체를 강화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만인지적, 말 그대로 일만 명을 능히 대적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 그것은 육체뿐 아니라 무기, 기, 정신 등 시전자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강화시킨다. 다시 말해서 항우의 대검은 만인지적으로 만 명이 동시에 달려들어 공격하고 때려도 부서지지 않는 무기가 되었다는 소리였다.
“이제 좀 재미없어졌어. 그만 하자.”
신아가 왼손을 휘둘렀다. 뜨거운 열기를 품은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닿는 자리, 지나간 곳에 있던 모든 것이 불타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불이 붙었다. 불은 건물을 태우고 땅을 태우고 하늘을 태웠으며 결과적으로 악령의 둥지를 태웠다. 불길과 바람이 지나간 자리, 그곳에는 재조차 남지 않았다.
둥지가 조금씩 불타며 인과율의 지배를 받는 바깥세상의 빛이 새어 들어왔다. 둥지로 조금씩 인과율이 개입하고, 동시에 둥지로 인해 봉인되었던 신아의 힘 또한 돌아오고 있었다.
“안 돼!”
항우가 두 팔로 얼굴을 가리며 뒤로 물러났다. 항우의 두 팔, 두 다리, 몸도 심각한 화상을 입었고 옷도 대부분이 불타 없어졌다. 시체들마저도 불타고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항우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만인지적으로 인한 육체강화와 회복력 상승효과, 그리고 열 내성 때문이었다. 그 세 가지가 아니었다면 항우는 진작에 불타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만인지적이라고 해도 이 열풍을 이기지는 못했다. 치유되는 속도보다 화상을 입는 속도가 더 빨랐고, 열풍은 열 내성이라는 능력을 뛰어넘었다.
버티지 못한다. 이 생각만이 항우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권능, 기록말살(記錄抹殺).”
신아가 권능을 발동했다. 항우의 몸이 멈추고 그 자리에 붙들린다. 괴로워하는 것처럼 얼굴을 찌푸린 항우는 최대한 신아에게서 멀리 달아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헛짓거리에 불과했다. 영혼붕괴가 발동된 이상, 항우는 신아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육체를 잃고 이미 한 번 죽었던 악령들에게 다시 한 번 ‘죽음’이라는 것을 들이미는 데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악의 반대되는 개념, 선을 에너지화 한 신성을 이용해 악령의 근원이 되는 죄악을 없애는 것.
두 번째는 악령의 상위 개체,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악을 더 큰 악으로 제압하여 악마와 계약자의 안에 영구히 가두는 것.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악령이라는 영혼 자체를 제거하는 것.
권능 기록말살은 바로 세 번째 방법에 속했다. 영혼이라는 기록, 한 존재가 살아가며 기록된 영혼, 그것을 완전히 지워버림으로써 세계에서 애초에 존재했던 적이 없던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영혼이란 개체와 개체를 구분하는 것이며 존재의 격과 격을 나누는 것이었다. 천기로는 영혼을 제거할 수 없으며 설령 할 수 있다 해도 그 후폭풍을 쉬이 감당할 수 없었다. 영혼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권능.
힘도 돌아왔겠다, 권능을 써서 빨리 끝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크아아악!”
항우가 달아나는 것을 포기하고 신아를 공격했다. 기록말살의 효과로 항우의 움직임은 이전보다 한없이 느렸다. 빼앗은 육체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영혼. 영혼이 바스라지고 있으니 육체의 통제권 역시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지금 항우가 하고 있는 것은 마지막 발악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나는! 서초의 패왕이다!”
“항우, 넌 이제 패왕이 아니야.”
신아가 작게 비웃으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항우의 주먹이 신아의 손바닥에 닿았을 때, 손바닥에서 나온 거대한 기가 파도처럼 항우를 덮쳤다. 그것은 압도적으로 거대하며 항우 자신을 뛰어넘는 폭력적인 패기였다.
“아······ 아아······ 천택패왕(天擇霸王, 하늘이 택한 패왕), 이라는 것인가.”
항우의 두 무릎이 꺾였다. 눈에서는 점차 빛이 사라져갔고 입에서는 헛웃음만이 나왔다.
“크크큭, 천지망아(天之亡我)구나······. 크, 크하하핫! 크하하핫!”
갑자기 항우가 미친 듯이 웃었다.
“네놈! 결코 잊지 마라! 이건 네놈이 이긴 것이 아님을! 그리고 기억해라! 이 몸이 패한 것은 오직 하늘이 날 망하게 한 것뿐임을 말이다!”
천지망아(天之亡我).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다. 지구에서 마지막이나 다름없는 전투에 임하기 전에 항우가 병사들 앞에서 했던 말이었다. 하늘을 찌르는 오만. 실력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 병사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와 용병술.
“나는! 하늘이 버린 패왕! 항우다!”
이 위대했던 패왕을 패망시켰던 하늘을 탓했던 남자의 영혼은 이제 서서히, 그리고 완전히 스러졌다.
신아의 앞에, 무릎 꿇은 이 거한은 죽었다. 영혼은 사라졌고 죄업은 서서히 희미해졌다.
“끝났네.”
거대한 몸이 천천히 뒤로 쓰러졌다. 감기지 못한 두 눈은 색이 사라졌다. 항우의 영혼도, 항우에게 먹혔던 연율 황자의 영혼의 잔재도 함께 스러졌다.
악령이 사라지자 둥지도 더 이상 유지될 이유도, 능력도 사라졌다. 사사삭. 공간이 무너졌다. 황궁을 감쌌던 검은 하늘이 가루가 되어 무너져 내렸다. 푸르른 하늘이 모습을 드러내며 밝은 햇빛이 황궁을 은은하게 감쌌다.
“끄, 끝난 건가요?”
“그래, 다 끝나······.”
“맞아요. 아주 훌륭하게 끝을 내주셨군요.”
뒤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난입했다. 신아는 처음 들어보지만 유와는 귀에 익은, 아주 낯익은 목소리였다.
“그러니 이제 제가 당신을 끝내드리죠.”
신아가 몸을 돌려 검기를 날렸다. 하지만 검기는 땅에서 솟구친 피의 기둥에 묻혀버렸다. 콰과과! 피의 기둥은 신아마저 삼키며 하늘 높이 치서 올랐다.
유와는 망연자실한 눈으로, 믿고 싶지 않다는 눈으로, 또 다시 끔찍한 진실을 마주한 눈으로 신아를 공격한 자를 바라봤다.
“······태화.”
주 왕국의 왕녀, 태화 공주가 웃었다. 핏빛 눈이 부드럽게 휘었고 뺨에 묻은 피가 꽃모양 장신구처럼 보였다. 아름다운, 너무 아름다워서 도리어 소름끼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
노이아는 눈앞에서 쓰러지는 거구의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황궁을 감싼 어둠이 무너지면서 병사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한 대를 툭 하고 치니 도미노처럼 천조문에 있는 병사 수십이, 함경성 전역의 병사 수백이 쓰러졌다.
노이아도 드디어 편하게 숨을 쉬고 드러누웠다. 노이아의 상태는 한눈에 보기에도 심각했다. 잘린 왼팔은 물론이고 어깨부터 배까지 길게 상처가 났고 다리는 뼈가 들어날 정도로 심하게 베였다.
흘린 피의 양으로 보자면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출혈량이었으나 노이아는 아직까지 살아있었다. 악착같은 정신력을 끝까지 붙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이상은 무리였다. 한계까지 몰아붙인 육체와 정신은 이제 피로가 극에 달해 있었다. 힘겨웠던 전투가 끝나자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고 이겼다는 안도감 때문에 더 이상 몸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콰과과! 황궁에서 피의 기둥이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노이아가 있는 곳까지 피가 튀었다.
노이아는 다시 검을 쥐었다. 일어나야 했다. 하지만 몸은 이미 한계를 넘었다. 이 이상 움직이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움직이려는 정신과 다르게 한계를 인지하고 있는 육체는 강제로 휴식에 취하기 시작했다.
노이아의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눈앞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또 흐려지며 손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피의 기둥. 그것이 노이아가 기절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것이었다.
***
“제 이름은.”
피처럼 붉은 치마와 어깨가 훤히 드러난 개량한복을 입은 태화 공주가 치맛단을 잡아 우아하게 허리를 살짝 숙여보였다. 서양식 인사법이었다.
“엘리자베트 바토리. 십이 악령의 일좌, 체이테 성의 악녀랍니다.”
그 순간 부서졌던 항우의 둥지가 다시 복구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검은 색이 아니라 피처럼 붉은 세계였다. 사방에 피가 넘쳐흘렀다. 피가 강을 이루고 호수를 이루며 바다가 되어 둥지를 가득 메웠다.
그리고 피의 파도가 유와를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