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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 핀 꽃은 일곱 빛깔로 시든다


원작 |

싹트는 인연 3화 히에다 가 방문(2)


"안녕하세요 앨리스 씨. 히에다노 아큐, 이곳의 당주입니다"

"앨리스 마가트로이드, 만나서 반가워 히에다 양"

"아큐로 좋아요. 유화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녹차로 좋으세요? 역시 홍차를?"

"홍차로 부탁해. 그리고 나도 앨리스로 좋아"

그녀는 겉옷을 휙 벗어 구석에 던져놓더니, 구석에서 차를 달이기 시작했다. 당주가 직접 차를 달이는 건 의아했지만, 흥미로운 풍경에 의문은 잠시 접어두고 관 안을 휘 둘러보았다. 이 커다란 방 하나와, 옆에 달린 작은 문으로 미루어 아마도 작은 방 하나가 관의 전부인 듯 하다. 다다미가 깔린 방에는 벽을 따라 경첩 달린 장과 농이 늘어서 있고, 농 위를 빼곡히 메운 것은 두루마리와 서적들이었다. 필시 안에도 같은 것으로 가득하리라. 벽면은 대충 못을 박아 액자도 없이 걸쳐놓은 글씨와 그림들이 메우고 있었다. 때문인지 종이와 먹 내음이 방에 은은히 베어 있었지만 이정도는 내 공방에 비하면 아무래도 좋을 수준이기에 불쾌하진 않다.

"샹~하이-"

턱을 괴고 다소 질릴 정도로 많은 글씨와 그림들을 둘러보던 중, 상해가 옷깃을 잡아당기며 어떤 그림 앞으로 이끌었다. 처음 방문한 곳에서 별일이다 싶어 그림을 기웃거리니, 매우 익숙하면서도 어색한 그림이었다.

"지난 축제 때 그렸답니다"

"대단할 것 없는 공연이었는데, 영광이네"

팔을 걷어붙이고, 무릎이 드러나도록 치마를 질끈 묶어 올린 당주가 찻잔 두 개와 간단한 전병이 든 소반을 내려놓았다. 차림새는 과히 파격적이지만 예법과 몸가짐은 우아하고 기품있어 질투가 날 정도다. 쓸데없는 시샘은 밀어두고 전병을 하나 집어 오독이며 상해와 봉래, 그리고 둘을 움직이는 나를 그린 그림을 감상했다. 지난 축제 때 재료비를 벌기 위해 벌였던 인형극인 모양인데, 그런 목적으로 한 공연을 이렇게 그려놓으니... 기분이 참 묘하다. 전병만 씹고 있자니 목이 메어, 몸을 돌려 찻잔을 들었다.

"잘 그렸지만.. 별일이네. 홍차도 그렇고, 보통은 녹차잖아?"

"특별히 준비해놓았답니다"

"어머, 고마워"

"뭘요. 저- 앨리스 인형극의 팬인 걸요"

이건 또 예상하지 못한 공격이라, 황급히 찻잔으로 시선을 내리며 표정을 관리했다. 전병을 물고 있어 화끈거리는 뺨을 감싸지도 못하고 묵묵히 찻잔만 바라보고 있자니, 쿡쿡대는 웃음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침착하자. 목적이 어쨌든 제법 인기였으니, 팬이 있을 수도 것이다. 뭐...꽤나 신경써서 준비하기도 했고. 이상한 일은 아니다. 진정. 진정.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고, 동요를 가라앉히자 눈에 안 들어오던 찻잔이 신경쓰인다. 단아한 백색 자기에 담아낸 맑고 고운 빛깔의 홍차는 지금껏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찻잎도, 다도도 훌륭하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그런데, 당주도 손수 차를 끓이는 게 마을의 관습이야?"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동안 봐왔던 홍마관의 레밀리아라던지, 백옥루의 유유코라던지.. 당주들이 뭔가를 손수 하는 건 본 적 없다. 혹 인간들만의 전통인가 싶어 별 생각 없이 물었지만, 대답은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 사람들은 그다지 보고싶지 않으니까요. 뭘 넣는지도 모르고"

말투는 담담했지만, 미소가 사라진 그녀의 얼굴에서 노인에게서 느꼈던 이질감을 다시금 곱씹었다. 가신은 당주에 대한 근심이 없고, 당주는 가문을 멀리한다... 남의 일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지만, 천년의 명가와 깐깐한 가신 그리고 파격적인 소녀 당주. 이 정도로 배역이 완벽하면 없던 흥미도 피어날 법하다.

"가문에서 평판이 별론가봐?"

"아무래도- 여자니까요"

"에?"

"건강 문제라는 사람도 있지만, 여자라서 그런 거에요. 히에다노 아요는 결핵이었다고 하니까.... 그저 다음 대를 수태할 몸뚱이 취급인 거죠"

다소 흥분했는지 씹어내뱉는 독설에 서린 노기와 울분이 생생하게 전해져 온다. 아마 불만을 털어놓을 상대가 없었던 거겠지... 케이네 씨의 '잘 대해주라' 는 말은 아마 이런 걸 말한 모양이다. 여자인 게 뭐가 문제인지 이해하기 힘들긴 하지만, 음. 뭐, 단명하는 인간이니까. 그런 게 중요할수도 있겠지. 더 이상 묻는 것도 껄끄럽다 싶었지만 딱히 돌릴 화두도 없어 가만히 찻잔만 기울였다.

"뭐, 그렇고 그런 이야기죠"

"그래서, 자신과 똑같이 생긴 인형을 주문한 거야?"

"네. 별채에 반쯤 가둬 두고 없는 사람 취급하려는 가문에 내가 여기 살아 숨쉬고 있다고, 똑똑히 지켜보고 있다고... 휴- 이것도 결국 가벼운 변덕, 쓸모없는 투정이려나요"

한숨을 쉬며 흥분을 가라앉히는 그녀에게 넌지시 묻자 씁쓸하게 웃으며 자조적으로 얼버무렸다. 평소라면 관심이 쏠렸다가도 귀찮은 일에 엮이는 게 싫어 피했겠지만, 이번엔 왜인지 미묘하게 신경이 쓰이고 흥미가 동한다. 한동안 말없이 찻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고민하다 결국 명가의 당주에게 빚을 만들어 두는 것도 남는 장사라고 좋을 대로 이유를 만들어냈다. 빈 찻잔을 옆으로 치우고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며 물음을 던졌다.

"그래서, 언제까지 제작하길 바래? 재료나 골격은 제작기간에 영향을 좀 받거든"

"기간은 상관없어요. 착각할 정도로 똑같이만 부탁해요"

"알겠어. 이것저것 재고 결정해야 할 게 많으니 내일 중에 준비를 갖춰서 올게"

"...고마워요. 사실 거절할 줄 알았어요"

"무슨 실례되는 소릴. 완전자율인형이 아닌 이상 앨리스 공방에 불가능이란 없다고"

어쩐지 울먹이는 것 같은 아큐의 감사인사에 대꾸하기 계면쩍어 공정의 난이도를 말하는 게 아닌 줄 알면서도 엉뚱하게 답했다. 속으로 머쩍어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상해에게 짐을 들려 일어나자 역시 눈치챈 것인지 숨죽여 쿡쿡대는 웃음소리가 뒤를 밟는다. 돌아보니 어딘지 후련해보이는 얼굴로 던져놓은 겉옷을 걸치고 있기에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미닫이문을 밀며 손사레를 쳤다.

드르륵-

"괜찮아. 나올 필요는 없어. 내일도 이 시간에, 홍차로 부탁할게?"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어느새 내려앉은 석양과 함께 작별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며 양 손을 들어 미미한 열기가 도는 뺨을 쓰다듬었다.

..괜한 말을 했더니 아무래도 좀 부끄럽다.

"..나답지 않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무러면 어떠랴 하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도 안 믿을 변명을 담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뭐, 팬 서비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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