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무는 인연 5화 귀가(2)
어디선가 알쌀한 가을 공기와 함께 어슴푸레한 안개가 아득하니 몸을 쓰다듬어와 어깨가 오싹하니 아려온다... 반쯤 뜬 눈을 다시 감고 몸을 뒤척여 보지만 오히려 한 줄기 바람이 등골로 스며들어와 싸늘하기만 하다.
"응...추워.. 하암-"
웅크려 어깨를 감싸며 손을 더듬어 이불을 찾다가, 손 끝을 까끌거리는 낯익은 감촉에 뭔가 싶어 쓸어보자 맨 어깨가 아니라 푸석한 감촉이 전해온다. 뭔가 싶어 손등으로 눈가를 부비고는 하품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왠지 익숙한 푸른 원피스다. 어...? 내가 왜 이걸 입고 있지? 의아해 벌떡 몸을 일으키자, 이미 반쯤 흘러내려 있던 이불이 스르르 흘러내린다. 흘러내리는 이불 옆으로 드러나는 덩그라니 빈 자리. 불과 얼마 전까지 누군가 있었다고 일러바치는 것만 같은 시트가 접히고 말린 흔적. 그제서야 유카리가 찾아왔던 기억과 마리사가 자고 간 기억이 살아난다.
"...마리사도 의외로 빨리 일어나는구나"
어제 저녁부터 잠든 탓인지 평소에도 이른 편인 내 기상시각보다 일찍 일어났는데, 마리사는 더 빨리 일어나는 모양이다. 제멋대로인 그녀라면 필시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늦잠을 잘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사람은 겉모습으로 속단하면 안 된다. 마리사는 일어나선 창문을 열고 바로 날아갔는지 열린 창문 사이로 서늘한 새벽 공기가 쏟아진다. 모자가 없는 걸 보니 분명 그런 게 틀림없다. 창문이라도 닫고 갈 것이지, 무신경하기는. 창문을 닫으며 양 팔을 부둥켜안은 채 부르르 떨었다. 입고 있던 옷 그대로 잠들었기에 망정이지 잠옷을 입고 있었으면 또 감기에 걸려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옷을 살펴보니 여기저기 눈물이 말라붙어 빨아야겠기에 갈아입으려 단추를 끄르다, 또 어제 일이 생각나 움직이던 손가락이 멈췄다. 왜인지 눈물이 핑 돌아 침대에 주저앉고 잠시 눈가를 꾹꾹 눌렀지만 결국 한 방울이 흘러내린다.
"후- 진정하자. 진정.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잖아?"
애써 스스로를 다독이며 천천히 나머지 단추를 풀었다. 블라우스를 벗자 맨 살 위로 면직물이 스르르 흘러내리는 감촉에 나긋히 쓰다듬던 유카리의 손길이 겹쳐와 한 차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오기에 입술을 사려문다. 아마도 한동안은 이럴 때마다 같은 꼴이겠지.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수치스런 기억을 털어버리고는 간단한 셔츠와 짧은 바지를 꺼내 입고 바닥에 흩어진 원피스와 블라우스를 개어들었다. 그러고보니 상해는 어디 있지? 어? 이건..
"상해!?"
상해는 누가 버려둔 업동이마냥 줏어든 옷가지 밑에서 널브러져 있었다. '그래, 영면과 수면의 경계라도 보고 있을까나?' 유카리의 조롱이 섬뜩하니 귓가에 메아리치는 것 같아 황급히 상해를 안아들고 상태를 확인해 보니 다행히 단순히 인식주문에 과부하가 걸려 의식을 차단했을 뿐 심각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어쨌든 별 탈 없어 다행이라는 생각에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와 가슴을 쓸어내렸다. 보통 때라면 먼저 기동을 시작해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을 상해가 잠들기라도 한 것처럼 품에 안겨 있으니 기분이 좀 묘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제 일이 자꾸 떠오르자 아직도 몸 위를 뱀이 기어다니는 것만 같아 씻어내고 싶기에, 일단 상해를 책상 위에 조심스레 올려두고 내려와 욕조에 물을 채웠다. 그다지 느긋히 목욕을 즐기고 싶은 기분은 아니라 대충대충 물을 채우고 덥히고 있자니 직접 씻을 준비를 하는 것도 꽤 오래간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동안 인형들에게 생활을 너무 맡기고 있었던 걸까?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보고 손을 담궈보자 생각하는 사이에 충분히 덥혀진 지 오래다. 가만히 옷을 벗고 찬찬히 욕조 안에 몸을 담그자 차오르는 물결마저 날 만져오는 것 같아 꺼림칙하다. 몸서리칠 것 같은 불쾌함을 억누르고 몸을 눕혔지만 오래 견디지 못하고 상반신을 일으켰다. 마치 지금이라도 뒤에서 누군가 귓가에 숨을 불어넣을 것 같은 초조함과 불안함. 이를 꾹 악물고는 유카리가 희롱해댄 몸뚱아리를 몇 번이고 거칠게 닦아냈다. 결벽증이라도 걸린 것처럼 씻어내고 또 씻어내 눈물자국이고 땀이고 깨끗이 흘려보낸지 오래지만 아직도 기억만은 생생해 눈을 질끈 감고 두 팔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목욕은 별로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충분히 쉬지도 못하고 욕조에서 나와, 벗어 둔 옷은 내버려두고 농을 들어엎다시피 뒤지며 일부로 꽉 죄는 옷을 찾았다. 이것도 아냐. 이것도, 이것도.... 얼마를 그러고 있었을까. 널브러진 옷들에 둘러싸인 내 꼴이 한심해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쉬었다. 어째 한숨만 느는 것 같다. 결국엔 포기하고 처음에 꺼냈던 셔츠와 바지를 입었다. 잔뜩 내팽개쳐둔 옷들을 직접 정리하려니 한 건 별로 없는데 지치는 것 같아 어깨가 처진다. 습관적으로 인형들에게 시키기 위해 실을 감아들이려다, 왠지 실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멈칫 멈칫 주문을 중단했다. 그리고,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온다.
"...나, 왜 이렇게 약해졌지"
잠깐 고민하다 숨을 들이쉬고는 익숙한 마력의 실을 드리워 화란과 티벳의 실을 감아들이고 풀어낸다. 어젯밤엔 허무하게 파훼당했던 술법이 언제 그랬냐는 듯 원숙하게 발동해 직접 정리한 것 보다도 깔끔하게 남은 옷들을 정리했다. 그래, 몸에 익힌 마법이 그렇게 쉽게 망가질 리가 없지. 어제는 당황해서 손도 못 썼지만 찬찬히 알아보면 유카리의 수도 간파할 수 있을 거다. 실제로 봉래는 아무런 관계 없이 잘 움직였고.
"역시 인형이 아니라 날 손댄 거였나. 그럼 상해는 왜 아직도.."
닫혀 있던 마력과 마법이 다시금 공명해오지만 상해는 아직도 실 끊어진 마리오넷마냥 가만히 누워 있을 뿐. 아무래도 상해만큼은 유카리가 직접 손을 본 모양인데... 사실 봉래는 상해보다도 먼저 만들고, 더 일찍 교감한 인형이지만 유카리는 거기까지는 몰랐던 모양이다. 만약 봉래마저도 손을 댔다면- 과연 무슨 꼴을 당했을지...
또다시 마음을 좀먹어 가는 기억을 한켠으로 치워두고 슬슬 상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해를 안아들고 공방으로 올라갔다. 작업대 위에 새로운 널판지를 덧대고는 서랍에서 주홍색 비약이 담긴 병과 상해의 골격을 만들 때 썼던 마술처리된 진은가루가 담긴 작은 사발, 그리고 황동 나침반을 조심스레 꺼냈다. 비용을 전부 스스로 조달하는 나에게는 아무래도 부담되는 재료들이라 다루기가 조심스럽다.
깨끗한 비커에 정량의 진은가루와 비약을 섞어 혼합하고 마력을 퍼트리자 주홍빛 비약 속을 떠다니던 진은가루가 녹아들며 용액이 에메랄드빛으로 서서히 물들어 간다. 비커 안이 완연히 에메랄드빛을 띄자 검지손가락 끝에 조심스레 찍어 정방형을 그리고, 네 귀퉁이와 여덟 방위에 각각 수비학적인 기호를 채워넣는다. 마지막으로 상해를 정방형 속에 바르게 눕히고 양 손등과 이마에 용액으로 정해진 문자를 써넣자 두 마술이 연동하며 간이 진식이 맥박치기 시작했다.
"인식에 과부하가 걸렸으니까... 감각 제어 부분이려나? 일단 다른 부분도 같이 확인을.."
진식이 맥박치며, 피가 몸 안을 흐르듯 에메랄드빛 시약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한다. 완전히 상해와 진식이 동기화되면 유카리가 건드린 부분을 상징하는 기호가 흐트러지리라. 아마도 인형의 '핵'과 인형이 인식하는 '인지' 간의 접속을 상징하는 남동방의 기호겠지. 잠시 기다리자 강이 흐르듯 진식 전체가 느릿느릿 움직이며 변화가 일어났다.
"역시....어?"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외부와 격리되는 '자신' 의 개념을 상징하는 북방의 기호가 어두운 빛깔로 물들어간다. 물 속에 스포이드로 떨어트린 잉크처럼 퍼져나가 기호를 물들인 빛깔은, 피처럼 걸쭉한 자색이었다.
"이건 뭐지? ...아읏!"
놀라서 무심코 검지로 기호를 짚었더니, 자색 용액이 손 끝에 진득하니 묻어나는데 포름산이라도 닿은 것처럼 얼얼하고 화끈하다. 서둘러 작업대에 항상 상비중인 소독제를 꺼내 뿌리고는, 검지를 무명천으로 감쌌다. 다행히 그리 해롭게 변질된 건 아닌 것 같다... 서서히 통증이 가라앉자 자색으로 물든 기호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일반적으로는 특정한 색을 띌 정도로 힘이 형태를 갖추는 일은 없기 때문에 별달리 색과 현상을 연관짓지 않을 테지만 그게 자색이라면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지금같은 경우, 의심하는게 바보짓이겠지.
"상해의 자아 쪽을 건든걸까? 침식과 융해 정도겠네"
이마를 톡톡 두드리며 한동안 고민했다. 유카리의 요력은 미심쩍기 그지없는 만큼, 효율성을 논한다면 상해의 의식부를 교체하는 쪽이 빠르고 간편하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다. 인형은 인형사의 설계를 따라 움직이지만 그게 그 인형의 100%는 아니다. 마법적으로 의식을 부여받은 인형이라면 어떻게든 좋을 정도로 미미하겠지만, 경험이 쌓이는 것이다. 큰 차이는 없겠지만 상해만큼은 애착이 가는지라 그 경험을 지워버리고 싶진 않다...
결국 불안하고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정화하는 쪽을 택했다. 사방에 둘러친 흰 무명 커튼 중 서쪽의 커튼을 감아쥐었다. 커튼을 걷어내자 유리문 달린 합금 선반들과 그 안에 수납된 온갖 비약과 시약, 산, 분말과 계량기들이 비춰대는 반사광이 어지럽게 쏟아져 산만하다. 금잔화는 A-7-2, 산작약은 A-4-6 이었지. 졸인 정화수는 어디였더라?
유리문을 조심스레 열고 각가의 재료들을 계량 스푼으로 플라스크에 정량만큼만 덜어넣는다. 금잔화와 산작약을 빻은 가루와 졸인 정화수에 걸쭉한 회색 비약을 두 큰술 더하고, 플라스크를 천천히 돌리며 알콜 램프로 중탕시키니 금새 플라스크 안이 뿌옇게 우윳빛으로 물들어 간다. 완성된 시약을 붓에 묻혀, 상해와 동기화된 간이 진식의 둘레에 원을 그리고 거기다 원의 내부와 외부로 통하는 스물네 갈래의 길을 더한다. 마지막으로 상해의 첨단부에 시약을 살짝 흘리는 것으로 정화의 식을 마무리. 나머지는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빠르면 열두 시간 정도 걸리려나?
당분간 작업대는 못 쓰게 되었기에 따로 장소를 마련할걸- 하고 혀를 찼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별달리 좋은 장소도 없다. 상해가 만들어진 이곳이 가장 상성이 좋기도 하고.
"그럼 외출 좀 다녀올게. 푹 쉬고 있어"
정화의 식 안에서 눈을 감고 잠들어있는 상해를 보자 왠지 감상적이 되어 들리지도 않을 인사를 남기고는, 이렇게 된 이상 계속 미뤄오던 히에다 가 방문이나 해결하자는 생각에 가방을 꺼내 작업물을 몇 가지 챙겨들었다. 솔직한 심경이라면, 오늘만큼은 누구라도 좋으니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방을 닫고 공방을 나가기 전에 의례적으로 한번 휘 둘러보고 상해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자꾸 신경쓰자니 상해의 눈꺼풀이 움찔움찔 떨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애도 아니고 나도 참 조급하기는... 마지막으로 상해에게 보이지도 않을 간단한 손인사를 한 후 공방의 불을 끄고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