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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 핀 꽃은 일곱 빛깔로 시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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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르익는 인연 2화 사소한 비밀들(2)


카미시라사와 댁의 싸리문이 보일 때는 이미 다소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다. 아무래도 마을 외진 곳에 있는지라 걸어서 왔더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돌아가면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꼽으며 문설주에 달린 종을 울리려다가,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멈칫하며 손을 물렀다.

싸리문 안쪽으로부터, 마루에서 이야기라도 나누는 듯 두 사람분의 목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온다. 하나는 익숙한 케이네 씨의 목소리고 다른 하나도 어딘지 낯익은 목소리다. 대체 누굴까 궁금해 싸리문 틈으로 슬쩍 들여다보다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으며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다. 순간 풀릴 뻔한 다리를 다잡으며 싸리문에서 떨어진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살금살금 지나가려 했지만, 다리가 후들거려 와 결국 달린다. 하지만 그다지 오래 뛰지도 못하고 겨우 옆집 담벼락에 손을 짚고 몸을 의지했다.

"...우욱! ​헉​.​.​.​헉​.​.​하​아​.​.​하​아​.​.​"​

속이 요동치며 헛구역질이 올라와, 입을 틀어막고 몸을 진정시켰다. 너무 힘이 들어가 핏기가 빠져나간 새하얀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토할 것 같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그제서야 좀 진정되는 것 같아 두근거리는 가슴을 짚고 고개를 들었다. 싸리문 사이로 보인 두 명은 분명 케이네 씨와 유카리. 정말 안 어울리는 한 쌍이 사이에 교자상을 두고 담소를 주고받던 광경이 아직도 눈 앞에 어른거린다. 입가엔 미소를 띄우면서도 얼음처럼 차갑던 자색 눈동자가 손에 잡힐 듯 어른거린다. 현기증이 나 몸을 돌려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은 채 숨을 골랐다.

"이제 좀 진정되니?"

"웃, ​누​구​.​.​.​꺄​아​아​.​.​!​.​.​컥​,​ 케...켁"

"시끄러워"

​"​하​.​.​.​하​앗​.​.​힉​.​.​하​.​.​.​우​아​아​.​.​"​

숨을 고르고 있으니 갑자기 귓가에 두려운 목소리가 스산하게 속삭여 와, 머리칼이 쭈삣 서는 느낌에 새된 비명을 지른다. 아니, 비명도 미처 지르지 못했다. 차가운 눈으로 경멸하듯 흘겨보는 보랏빛 눈 밑으로 목을 죄고 있는 새하얀 손이 보인다. 무의식중에 달달 떨리는 두 손으로 유카리의 손을 어떻게든 해보려 하지만,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다. 점점 더 목을 세게 쥐어오자 머리가 멍해지고 감각이 사라져간다.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는 듯 숨이 새는 소리가 들린다. 힘이 죽 빠지며 공중에 붕 뜬 것처럼 기분이 나른해온다. 섬뜩한 보랏빛 눈도 이제는 흔들리며 멀어지는 것만 같아 몽롱하다.

"쿨럭...컥, 카학! ​하​악​.​.​.​하​읏​.​.​.​"​

유카리가 손을 내리자,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처럼 머리로 몰려들어 현기증을 참을 수가 없다. 한동안 목을 감싸쥐고 괴로운 기침과 신음을 토하다 고개를 드니, 나는 어느새 담벼락에 몰린 채 주저앉아 있었다. 마치 장난감이라도 쳐다보듯 얄팍한 웃음기를 띈 채 바라봐오는 유카리의 눈초리가 두렵다. 그렇게 보지 마. 무서워. 싫어.

"독이 약했던 걸까? 아니면 독나비에 홀려버렸니?"

"흑...흐윽, 대체 왜...힉.."

"하, 봉래라고 했던가? 그 인형도 안 데리고 나왔네... 대체 무슨 배짱일까? 혹시 이런 거 즐기는 중?"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덜덜 떨며 몸을 그러안았다. 지독하게 춥다. 그녀는 한가하게 부채를 펼쳐 입을 가리며 몸을 숙여 눈을 맞춰온다. 덜덜 떨리는 이를 꽉 깨물고, 속으로 내게 외치며 마음을 다잡았다. 언제까지 갖고 놀게 놔둘 셈이야!

"웃기지 마! 누가 너 따위..."

짝-

"무슨 따위라고?"

얼얼한 느낌에 부채가 후려갈긴 뺨을 감싸쥐었다. 볼 위로 무언가 뜨거운 게 한 방울 흘러내린다.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자니 유카리의 부채가 턱을 밀어올린다. 나 따위는 언제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듯 거만하기 그지없는 눈길과 마주치자 어디선지 오기가 솟아올라, 입술을 사려물고 부채를 거머쥐고 다른 손으로는 유카리의 머리칼을 잡아챘다. 부드러운 금발을 한 움큼 잡아채자 손에 살의가 담기면서 지금까지 쌓인 억하심정이 터져나와 있는 힘껏 머리칼을 잡아당겼다.

"어? 악, 놔! 이거 안 놔? 어디서 누구한테.."

"안 놔!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그래, 나 만만하다! 그러니까 절대 안 놔! 차라리 날 죽여!"

마리사나 할 법하게 머리끄댕이를 붙잡고 잡아당기며 배짱 좋게 억지를 퍼부었다. 맞을 때 맞더라도 한 번쯤은 쏘아붙여 줘야 시원할 것 같다. 잡아당길수록 형편없이 일그러지는 유카리의 얼굴에 속이 다 후련하다.

"너, 정말 죽고 싶구나?"

퍽!

어느 순간 갑자기 손가락 사이로 머리칼이 미끄러지더니, 뭔가가 배를 후려쳤다. 캑캑거리며 바닥에 엎드려 당겨오는 배를 얼싸안고 있으니 유카리가 아까 내가 한 것과 똑같이 머리칼을 감아쥐고는 잡아올렸다. 고개를 들자 불 속에 집어던진 자수정마냥 영롱하게 이글거리는 자색 눈동자가 마치 감정을 깎아내 버린 것 같이 잔혹하다. 지독한 한기와 함께 다시금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녀가 사독하게 웃으며 입에 올리는 끔찍한 말을 듣자, 건들면 안 될 걸 건드렸다는 생각과 함께 어깨가 사시나무 떨듯 떨려와서 겉잡을 수가 없다.

"그래, 원한다면 여자로써 최악의 죽음을 안겨 줄게. 너덜너덜하게 능욕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해 줄 테니까!"

단지 말이 들려올 뿐인데 독약을 들이키는 것 같아 숨이 멎어온다. 어느샌가 볼을 타고내려와 턱에 고여 떨어지는 눈물이 차갑게 느껴진다. 거칠게 단추를 뜯어내려는 손길에 몸부림치지만 다시금 부채가 뺨을 후려갈기자 그마저도 의미 없는 버둥거림이 되어버렸다. 안 돼, 안 돼. 제발-

"그만. 그쯤에서 멈추던지, 아니면 둘 다 나가서 해결하게"

뜬금없이 들려 온 엄정한 목소리에 유카리의 손이 멈칫하더니 화들짝 놀란 것처럼 몸에서 떨어진다. 일순간 그녀의 눈이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었지만, 곧 다시 무정하게 가라앉는다. 처음 보는 반응이다... 유카리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옷매무새를 바로잡더니 케이네 씨의 권고를 자못 살벌한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하지만 거기에 왠지 부끄러움과 고집이 섞여 들려오는 건 내 착각일까.

"흐응, 지금 설마 이 내게 명령하는 걸까?"

"적당히 해두게"

"...흥"

멍하니 고개를 올리자 엄한 눈초리를 한 케이네 씨가 손을 들어 마을 바깥을 가리키며 서 있었다. 유카리는 한동안 케이네 씨를 쏘아보더니 고개를 반쯤 허공으로 돌리고는 콧방귀를 꼈다. 거만한 반응이지만 어쩐지 어색하게만 보인다. 유카리가 뭐라뭐라 중얼거리며 투덜거리더니 손을 휘저어 허공에 섬짓한 틈새를 긋는다. 그녀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틈새 안으로 발을 들여놓다 말고 고개를 느릿하게 돌리더니, 나를 보고 오싹하게 웃으며 섬뜩한 말을 남긴다.

"다음엔 좀더 치명적인 독을 준비할게. 기대하렴?"

"유카리!"

"네~네.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금방 간답니다?"

유카리는 늘어지는 목소리로 빈정거리더니, 틈새 안으로 쑥 들어갔다. 그녀가 들어가자마자 허공에 생겨난 경계가 거짓말처럼 사그러든다.

"..괜찮은가?"

케이네 씨가 손을 내밀더니 어깨를 감싸며 부축해 일으켜세운다. 그녀의 나직한 목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휘청거리며 일어서려고 노력하지만 몸에 힘이 없어 케이네 씨에게 안기듯 몸을 기대고서야 간신히 일어설 수 있었다. 아무나 잡고서라도 울고 싶은 심정이지만 꾹 억누르며 숨을 고르고 있자, 케이네 씨가 집 쪽으로 잡아끌었다.

"일단 들어가세"

멍한 머리로 비척비척 몸을 옮겨, 어떻게 부츠를 벗었는지 기억도 없이 케이네 씨가 이끄는 대로 아랫목에 주저앉았다. 몸이 따듯해져 오자 눈물이 나올것만 같아 눈을 감고 우두커니 앉아있으니, 배가 시큰거리고 뺨이 얼얼하다. 언제 가져왔는지 케이네 씨가 찬 물에 적신 수건을 건네주기에 꾸벅 고개를 숙이며 뺨에 가져다 댔다. 부어오른 뺨에 냉기가 서리자 살이 에어오는 것 같다.

"미안하네. 유카리가 성격이 좀 급하지"

"당신이 사과할 게 아니잖아?"

"...그도 그렇군"

엉뚱한 사과에 퉁명스럽게 반문하자 케이네 씨는 말을 얼버무리며 고개를 돌렸다. 무엇인지 모를 걱정이 잔뜩 담긴 눈에는 어쩐지 말하지 않은 무언가가 담긴 것 같아 기어코 입을 떼게 만든다.

"유카리를 잘 아나봐?"

"...마을을 지키는 나와 환상향의 관리자가 서로 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나"

머뭇거리며 한 박자 늦게 나온 대답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그녀는 거짓말을 잘 못 하는 모양이다. 유카리와 케이네 씨 사이에 흐르던 공기는 좀더 개인적인 뭔가를 공유하는 사이의 것. 하지만 어찌되었든 지금은 더 묻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진실이 중요할지라도 한 조각 의심 때문에 진심에서 우러나온 친절을 차 버리는 것 만큼 멍청한 일도 없다.

"잠깐 누워보겠나? 따끔하겠지만 좀 참게"

몸도 정신도 굉장히 피곤하기에 케이네 씨가 권하는 대로 아랫목에 순순히 누웠다. 그녀는 어디서 꺼냈는지 작은 병에 담긴 투명한 액체를 솜에 적셔 내 빰을 톡톡 두들기는데, 말한 대로 따끔따끔하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다. 간호받으며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이번엔 목덜미에도 약을 발라주었다. 뺨이 더 부은 줄 알았는데 목을 더 심하게 졸렸는지 부어오른 살갗이 쓰라리다. 케이네 씨는 흘러내리는 약을 수건으로 닦아주더니, 약병은 닫아 아직 손때가 묻지 않은 목재 함에 집어넣었다. 아마도 영원정에서 방문판매하기 시작한 구급약인 모양이다. 분명 그 토끼가 우리 집에도 함을 놓고 갔었지.... 그녀는 함을 닫더니 의미모를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 얼마든지 쉬다 가게. 묵고 가도 좋네"

"...아, 전해줄 게 있어"

"음? 뭔가?"

케이네 씨가 챙겨와준 가방을 열어 책과 두루마리를 꺼낸다. 의아한 듯 떨떠름하게 받아드는 그녀에게 애써 기운 차린 척 수다를 늘어놓으니 얻어맞은 뺨이 쓰라려 와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큐의 답례야. 그나저나 옷감 고르는 안목이 굉장하던걸? 다시 봤어"

"..흠흠, 재단사가 신경써 준 덕이지 내가 뭐 한 게 있겠나"

헛기침을 하며 재단사 덕으로 공을 돌리지만, 책과 두루마리를 펼쳐드는 그녀의 입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인자한 표정으로 두루마리를 찬찬히 훑는 그녀의 차분한 분위기에 잔뜩 날 서 있던 정신이 가라앉으며 졸리웁다... 케이네 씨는 두루마리를 다시금 돌돌 말더니 꼴사납게 흩어진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정돈해 주었다. 언니가 있었다면 이런 느낌일까? 손길이 따스하고 부드러워 솔솔 잠기운이 찾아든다.

"그 아이와는 잘 지내는 모양이군"

"응, 그럭저럭.."

"고맙네"

두루마리에 내 얘기라도 쓰여 있었던지 그녀가 지나가듯 아큐와 잘 지내는지 물어 왔다. 길게 대답하기는 쑥스러워 대강 대답했는데, 고맙다고 답하며 어깨를 다독여 주니 더 쑥스럽다. 슬슬 뜨끈한 아랫목이 몸을 덥혀와 노곤한 몸을 녹이기에 정신이 몽롱해 뭐가 고맙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깨를 다독이는 그녀의 손길이 지친 마음을 따스하게 달래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따스함 속에 침몰당해 단잠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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