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르익는 인연 4화 사소한 비밀들(4)
신세진 것도 있고 거기다 두루마리를 훔쳐본 것까지 더해 굉장히 미안해져서 케이네 씨의 팔을 슬며시 붙들었지만 그녀는 턱짓으로 벽에 걸린 보자기를 가리키며 나를 자리에 앉혔다. 하지만 그런 죄책감도 잠시, 문지방 너머로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저절로 화장대의 서랍에 눈길이 머문다. 서랍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던 손가락들은 이윽고 부엌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어느새 서랍을 열고 있었다.
아까 황급히 쑤셔넣다시피 집어넣느냐 다소 흐트러진 두루마리를 조심스레 펼친다... 뒤숭숭한 마음에 한 자 한 자 엉성히 읽어내려가며 아까 읽던 곳을 찾아 다음 문장을 읽으려는 참에 부엌에서 케이네 씨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와 팔이 움찔 떨린다. 사소한 소리 하나하나에 신경만 곤두세우고 있으니 어느새 참방거리고 달그락거리던 소리가 잦아들어 간다.
결국 눈을 감은 채 긴 한숨을 내쉬고는, 조바심과 죄책감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미련 없이 조심스레 두루마리를 말았다. 얌전히 있던 자리에 놓아두고 화장대의 서랍을 닫을 무렵 케이네 씨가 부엌에서 나오는지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기에 천연덕스럽게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책을 무릎에 얹고 막 펼치고 있으니 커다란 쟁반을 든 케이네 씨가 문지방을 밟는다. 어지간한 도마만큼이나 큰 쟁반에 달랑 찻잔 두 개와 쪽칼 두 개만 올려 있어 위태위태할 법 한데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게 신기할 정도다.
"약은 바른겐가?"
"아니. 뒤적거리기도 그렇고.."
"우문이었군. 잠시 기다리게"
그녀는 약장을 열어 어제 본 약병을 꺼내더니 능숙하게 솜에 적셔 뺨과 목을 톡톡 두들겨 주었다. 하룻밤 새에 꽤 많이 아문건지 어제처럼 따끔하거나 쓰라리지는 않지만... 이것도 꼭 어린애가 된 것 같아서 은근히 부끄럽다. 그녀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담담하게 약병을 함 안에 갈무리하고는 옆에 치워둔 쟁반을 끌어당겼다. 이어서 벽에 걸린 보자기를 내려 끄르자 토실토실한 밤톨이 가득히 얼굴을 드러내는데, 방금 전에 상을 물렸는데도 군침이 돌 정도다. 케이네 씨는 보자기를 펼치며 쟁반에서 내 몫의 찻잔과 쪽칼을 건네주었다.
"껍질은 보자기에, 밤은 쟁반에 담으면 되네"
"알았어"
쪽칼을 쥐고 밤을 쪼갰다. 밤껍질이 쪼개지며 상아빛 알밤이 모습을 드러낸다. 단아한 접시에는 모난 알밤들이, 성긴 보자기엔 깎아낸 밤껍질들이 소복히 쌓여간다. 단순한 반복작업이지만 규칙성 속에 또 의외성이 있어 생각보다는 재미있다. 한동안 간간히 녹차를 홀짝이며 말없이 밤을 까고 있으니, 케이네 씨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나지막히 운을 떼었다.
"유카리와 알게 된 지는 꽤 오래되었네"
"응..?"
"생각해 보니 정말 오래 전이군...천 년 가까이 흘렀으려나"
"...그건 추억이라기보다는 역사네"
나도 사식 사충의 주문을 사용한 뒤로 불멸에 접어들긴 했지만 살아온 시간은 내 또래들과 얼추 비슷하다. 때문에 천 년이라는 시간의 무게는 아직 마음에 와닿지는 않는다. 내 얼굴을 힐긋 쳐다본 케이네 씨는 빙긋 웃더니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녀를 이해하긴 힘들군"
"..."
"유카리는 도통 남에게 공감하질 못해. 항상 멀고 장대한 것만 바라보지... 그녀가 좀 더 평범했다면 필시 별을 바라보다 발 밑의 진창에 빠지는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을 걸세"
밤을 깎으며 지나온 시간을 회상하는 케이네 씨의 표정은 씁쓸함에 젖어 있었지만 그 한켠에는 어딘지 장성한 후에 어릴 적의 오래된 보석함을 열어보는 듯한 아련함이 어려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유카리는 그러기엔 지나치게 유능해. 그녀의 계획은 항상 불화를 일으키면서도 결국에는 맞아들어갔고, 그래선지 지금까지 조금도 바뀌지 않았어. 매번 하던 대로 남들과 갈등을 빚어왔지... 나도 예외는 아니었군"
케이네 씨는 잠시 말을 끊고 초점 없는 시선으로 문 밖을 내다보았다. 먼 곳에 시선을 던져두고 찻잔을 가만히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은 고고해 보이면서도 어딘지 오싹해 나도 모르는 새 쪽칼을 놀리던 손을 멈췄다.
"항상 그랬지.. 전염병을 막기 위해서라면 주저없이 환자를 죽이고 시체까지 불태우는 게 그녀라네"
그녀가 가만히 고개를 돌려 나를 마주보자 그 복잡다단한 표정에 놀라 헛칼질을 할 뻔 했다. 황급히 칼을 고쳐쥐고 새 밤을 집어 껍질을 벗기고 있으니 케이네 씨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자기 몫의 밤을 집어들었다.
"앨리스"
"듣고 있어"
"아무리 분해도 벽과 싸우려 들진 말게나. 돌아보면 남는 건 상처뿐이니.."
그 말을 마지막으로 케이네 씨는 가만히 손만 놀리며 밤 까는 데만 몰두했다. 묻고 싶은 건 산더미 같았지만 그녀의 무거운 분위기에 덩달아 입을 닫고 말았다. 다시금 밤 까는 소리가 사각대며 방을 채워간다... 그녀도 나도 한참이나 말 한 마디 꺼내지 않았다. 마주앉아서는 각자 쪽칼만 놀리고 있자 굉장히 어색하다. 뭔가 좀 더 가볍게 할 만한 이야기가 없을까? 아, 그래...
"아 참, 아큐의 생일은 언제야?"
"생일 말인가? 닷새 후네만"
"생일엔 여러 사람이 축하해주는게 마을의 풍습이었지?"
"본디 그렇지만... 벌써 몇 년 전부터 히에다가에선 당주의 생일을 그냥 넘어가고 있다네"
"그 정도로 가문과 사이가 나빠?"
"나도 세세히 아는 건 아니네만, 그녀와 히에다가 사이의 앙금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많은 게 얽혀 있다네. 그리 단순히 설명가능한 건 아닐세. 그런 일이라면 예전에 풀렸겠지"
"그건 그렇네. 사람간의 문제도 참 복잡하구나... 어떻게 보면 술식보다도 복잡한 것 같아"
"그럴 수도 있겠지. 아무리 복잡한 술법이라도 결국 하나의 길일 뿐이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불확실한 길들이 끊임없이 나타나 문제를 바꿔버리니까"
케이네 씨는 보자기에 껍질을 뿌리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저 정도라면 아큐만 가문에 감정이 있는 게 아니라 가문에서도 당주에게 쌓인 게 꽤 많다고 봐야겠지. 다시 생각해보니 용케 가출하지 않았구나 싶다. 사실 명가의 규수에겐 가출한 뒤가 막막하긴 하겠지만. 잠시 쪽칼을 놓고 생각에 빠져 찻잔을 기울이던 중, 머릿속을 어떤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음, 그래. 그 불확실한 길 중 하나라는 걸로, 이런 건 어떨까?"
은근히 고개를 낮추며 케이네 씨에게 방금 생각난 것을 속닥였다. 처음엔 제법 놀란 듯 하던 그녀의 표정이 차차 누그러지더니 이윽고 선선한 미소를 띄운다.
"근래 들어 그간 내가 얼마나 수동적이었는지 새삼 돌아보게 된 것 같네... 그게 옳은지 그른지를 떠나서 말이지"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 웃는 그녀에게 나도 살풋 마주 웃어주며, 어느새 마지막이 된 알밤을 그릇에 또르르 굴려넣었다.
"이게 마지막이야"
"거들어 줘서 고맙네"
"나야말로"
케이네 씨는 밤껍질이 가득 담긴 보자기를 거두어 일어났다. 생각보다 밤이 많아서 껍질만 담겼는데도 보자기가 소복하니 밑으로 늘어진다. 고개를 드니 햇살이 투명한 게 벌써 점심나절이 가까워지는 것 같다. 슬슬 집으로 돌아가면 도착할 때 쯤 점심때가 되려나. 무릎을 주무르고 허리를 피며 갈 채비를 챙기려니 마루에서 케이네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담아줄 테니 잠깐 기다리게나"
"괜찮은데..."
"어차피 나 혼자 먹기엔 많네"
케이네 씨라면 서당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느냐 자기 몫이 안 남을 것 같지만, 실하고 단단한 햇밤의 유혹은 꽤나 강했기에 못 이기는 체 자리에 앉았다. 가방을 정리하며 잠시 기다리고 있자, 케이네 씨가 얼굴만한 보따리를 들고 나타났다. 잠깐, 저거 아까 깐 알밤의 반은 넘을 것 같은데.
"어어, 너무 많이 주는 거 아냐?"
"잣이랑 개암, 호두도 좀 넣었네. 제자들이 막무가내로 떠맡겨서 말일세"
"아이 참...고마워. 잘 먹을게"
"별거 아닐세"
신세도 졌는데 너무 많이 받는 것 같아 사양하려 했지만 케이네 씨는 막무가내로 보따리를 안겨주었다. 하는 수 없지, 가방은 인형에게 맡길 수밖에. 인형을 시켜 싸리문을 열고 나서며 품에 안아든 보따리 때문에 말로만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럼 언젠가 또 들를게"
"언제든지 좋네. 서당에 들러도 괜찮네만.."
"음...그것도 고민해 볼게"
"조심해서 돌아가게"
발걸음을 옮기다 힐긋 돌아보니, 뒷짐을 진 채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손을 흔들었다. 어째서인지 묘하게 익숙한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가볍게 목례해 답하고 돌아섰다.
"아, 상해!"
아직 기억에 생생히 남은 케이네 씨의 모습에 문 앞에서 배웅하는 상해의 모습이 겹쳐든다. 지금쯤이면 아마 깨어났을 텐데... 상해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어벙함을 자책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