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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 핀 꽃은 일곱 빛깔로 시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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싹트는 인연 4화 마가트로이드 저택의 일상(1)


사각- 사각-

목탄이 종이를 갉는 소리가 적막한 공기를 가득하니 채우며 속삭여 온다. 상해조차 청소할 때를 빼면 들어오지 못하는 3층. 두꺼운 커튼을 씌우고 마법의 불빛을 밝혀 햇빛마저 거부한 이곳이 내 공방이다.

"기초 구조는 type-β로 잡고.. 골격 구성은.."

목탄을 내려놓고 널판지를 덧댄 작업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새삼스레 스치는 약품냄새에 코를 한번 훔치고는, 사방에 둘러친 흰 무명 커튼 중 하나를 감아쥐었다. 동쪽 벽의 커튼을 걷어내자 손때 묻은 체리나무 선반의 물결과, 선반 위 벨벳 천에 나란히 늘어앉은 수많은 인형 동체들이 눈에 들어온다. 대개 만드는 인형은 상해와 같은 축소인체형이지만 1:1 비례형 동체도 재고는 충분하다. 예전에 모코우 씨에게서 매입해 둔 것이.. C열에 두었던가?

드르륵-

세 번째 선반 왼쪽 끝의 줄을 잡아당기자 나즈막히 돌돌거리며 방습천이 걷힌다. 목재는 물론이고 금속, 고무, 뼈, 종이에 이르기까지 총망라된 다양한 소재의 동체와 골격들을 훑어보며 적당한 걸 고른다. 아큐의 치수가...

"치수가... 어떻더라?"

...

..

.

​"​3​1​-​2​5​-​3​1​"​

잘록한 허리에서 줄자를 떼자 얇디 얇은 나의가 스르륵 흘러내렸다. 그렇잖아도 낙낙한 나의가 여윈 몸 때문에 하늘거릴 지경이다. 줄자를 접어 말며 수치를 부르자, 상해가 종이에 펜을 사각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칭찬해달라는 듯 빤히 쳐다보는 상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도구함에 줄자를 집어넣었다.

"저.. 이제 갈아입고 와도 괜찮나요?"

"음. 정밀측정이 필요하겠는데. 지금까지 잰 만큼만 재면 될거야"

도구함에서 시선을 돌리자 양손으로 낙낙한 옷깃을 꼬옥 여며쥔 채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묻는 아큐가 보였다. 그게 너무도 재미있어 시치미를 뚝 떼고 답하자 복숭아빛으로 물든 뺨에 핏기가 가시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헬슥해졌다. 꼭 겁먹은 토끼 같아 당장이라도 배를 쥐고 웃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빙긋 웃으면서 달래주었다.

"농담이야. 어서 갈아입고 오렴"

"...앨리스 씨!"

그녀는 소리를 빽 지르고는, 잘 익은 홍시처럼 붉어진 뺨을 감싸쥔 채 건넛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아무래도 안이 비치는 얇은 나의를 입고 이곳 저곳 치수를 재는 게 많이 부끄럽고 민망했던 모양이다. 킥킥 웃으며 공구함을 정리하고 색조도를 꺼내면서 아큐의 가녀린 몸을 떠올렸다. 아무리 집필 때문에 운동부족이라고 해도...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게 빈말은 아닌 모양이다.

펜에 잉크를 적셔 몇 가지를 끄적대고 있으니,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옷을 갈아입은 아큐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뿐사뿐 걸어왔다. 아직도 발그레 뺨을 붉힌 그녀는 입술을 삐죽이며 소매를 걷어붙이고는 차를 달여 왔다. 잠시 후 딱 알맞게 우러난 홍차로 목을 축이고 색조도의 번호를 대조하며 물었다.

"평소에도 그렇게 입으면서 아깐 왜 그렇게 부끄러워했어?"

"이거랑 그건 다르잖아요..."

"그래? 나는 잘 모르겠는걸"

"웅큼하시긴"

"..어디가?"

"흥, 안 가르쳐드려요"

뾰루퉁한 그녀가 재미있어 깔깔 웃으며 대략적인 기록을 마쳤다. 이 정도면 일단 골격을 구성하기엔 충분한 자료다. 펜에 뚜껑을 씌우며 아까부터 느꼈던 것을 입에 올렸다.

"그런데.. 너무 야윈 것 아냐? 아무래도 좀더 잘 먹어야 하지 않을까"

"저곳 밥은 넘어가질 않으니 어쩔 수 없죠"

과연, 차나 다과야 어떻든 조달하는 모양이지만 손에 흙 한번 안 묻혀봤을 명가의 여식이 한두 번도 아니고 매일 식사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분명 세 끼 밥만큼은 집 밥을 입에 댈 터, 그나마 그마저도 가문의 것이라고 제대로 안 먹는 모양이다.

"좀 과한 거 아냐? 그래도 그중엔 널 아끼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한때는, 그럴 거라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어요"

본채가 있을 방향을 바라보며 곱씹는 말에는 깊은 체념이 베어있어, 대번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크게 실수했다 싶어 긴장될 정도로 그녀의 얼굴이 표정을 잃어간다.

"믿을 걸 믿었어야 했다고- 알아차렸을 때, 늦지 않았던 건 정말 ​천​운​이​었​으​니​까​.​.​"​

"..미안,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한 말을 한 것 같네"

그제야 깨달았다. 어제 들은 '뭘 넣을지도 모른다' 는 게 단순한 거리낌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음을. 동시에 내가 그녀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통감했다. 그래- 아무리 친근히 대하더라도 결국 외부인일 뿐. 너무 들떠있었던 걸지도.

입술을 꾹 깨물고 울음을 참는 듯한 그녀에게, 나는 더 이상 어떤 것도 물을 수 없었다. 결국 별로 급하지 않은 나머지 사항은 다음 방문을 기약하기로 하고, 간단히 정리한 후 상해에게 짐을 들려 일어났다.

"이 정도면 대략 설계는 마칠 수 있을 테니까, 필요할 때 다시 들를게"

"너무 신경쓰진 마세요. 이젠 괜찮으니까...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그녀는 담담한 체 인사를 받아주었지만, 손끝이 떨리는 것마저 숨길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파르르 떨리는 무명지가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 온다.

"..."

툇마루에 앉아 신발끈을 조이다 말고, 파르라니 떨리던 무명지가 눈에 걸려 그녀를 돌아보았다. 뭔가가 목구멍을 꽉 채워 입은 열었지만, 벙어리가 된 마냥 입만 뻥긋거리지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결국 뭘 하고 싶은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어 간단히 목례만 하고 발걸음을 떼었다.

.

..

...

"..정말 주제넘게 참견했지"

연이어 떠오르는 후회스런 기억에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는 것으로 회상에서 돌아왔다. 일단은 일하는 중이니 마음을 가다듬고 상념을 되짚는다. 그래서 치수가 얼마였더라..?

​"​3​1​-​2​5​-​3​1​"​

"아, 그랬었지. 고마.."

"뭔진 몰라도 계속 ​중​얼​거​리​고​.​.​.​히​끅​?​"​

찰칵-

이해하는 데 1초, 진열장의 인형이 칼을 뽑는 데 1초, 날아들어 겨누는 데 1초. 스스로도 제법 빨랐다 싶은 반응에, 칼날 앞의 누군가는 질린 표정으로 딸꾹질을 내뱉었다.

"워- 워- 진정해 진정. 릴렉~스"

"..진정하게 생겼어?"

선반의 그림자가 만든 그늘에 슬쩍 가리웠지만, 저 짜증나도록 익숙한 금빛 곱슬머리를 못 알아볼 리는 없다. 두근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인형을 뒤로 물렀다. 인형을 진열장에 얌전히 갈무리하고 천천히 심호흡을 한두 번 하자 그제서야 놀란 게 좀 가라앉는다. 정말이지 이 녀석은-

"다짜고자 칼을 들이대다니 너무하잖아"

"그보다 내 공방에, 아니 그 이전에 내 집에 멋대로 들어오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그거야 그렇지만- 아무리 불러도 대답도 없으니 어쩔 수 없잖아. 걱정되기도 하고"

뻔뻔스레 늘어놓는 변명에 불만을 가득 담아 쏘아붙였다. 이 녀석에겐 대답이 없으면 적당히 포기하거나 나중에 온다는 선택지는 없는 걸까.

"민폐도 변명도 적당히 해"

"응, 안 다쳤으니 오늘도 적당적당 세이프"

"..일단 내려가자"

"ok. 2층에 있을게"

하아- 긴 한숨을 내쉬고는, 방으로 내려가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갈아입고 나와 마리사를 찾자 소파에 팔자 좋게 뒹굴고 있는 행태를 볼 수 있었다. 진지하게 자택에 결계 설치를 고민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파츄리에게 부탁하면 술식 구성 정도는 도와주겠지.

"요오, 그런데 차도 한잔 안 주냐?"

"그래서, 무슨 일이야? 성실한 용건이 아니라면 당장 나가는 편이 좋을거야"

지금 기분이 별로거든- 뒷말을 삼키며, 자각없는 흑백 민폐 덩어리의 차 타령을 깨끗이 무시했다. 내 결정중에 가장 후회되는 것 중 하나가 마법의 숲에 자리잡은 것... 아니다, 저 민폐덩어리는 명계까지라도 날아올 게 뻔하다.

"아아, 버섯을 꽤나 많이 캤다제. 혼자 먹기에 많아서. 풀 먹인 실도 빌려갈 겸 겸사겸사"

"덤이 아니라 그쪽이 목적인것 같은데"

"좋게좋게 넘어가자구. 제철 느타리버섯이 얼마나 향긋한지 알아? 먹버섯도 있어"

"..넌 정말 말로 해선 못알아듣는구나"

말을 해도 알아들을 생각이 없으니 벽에 대고 혼잣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기에, 포기하고 다소 뜨끈한 이마를 짚으며 손짓으로 상해를 불렀다.

"샹-하이?"

​"​.​.​느​타​리​버​섯​이​든​ 먹버섯이든 상해랑 알아서 해. 풀 먹인 실이라면 좀 나눠줄 테니까"

"굵은 걸로 두 타래쯤 부탁한다제"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야"

뻔뻔스럽게 희망사항을 밝혀오는 마리사의 등을 떠밀어 내려보내고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축 늘어졌다. 왠지 모르게 지쳐온다. 아, 이렇게 늘어져 있을 게 아니라 실타래를 꺼내와야 할텐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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