싹트는 인연 5화 마가트로이드 저택의 일상(2)
"-어-"
어디선가 묘하게 늘어지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동굴 속에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되돌아오는 메아리처럼 웅웅거리는 소리. 운율을 갖춘 소리가 파문처럼 귓가를 두드린다.
"-! -리-"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며 손에 잡힐 듯 말 듯한 신기루처럼 명멸하는 소리에, 짜증이 치솟기 시작했다. 대체 뭐라는 거야...
"-리스!!"
누가 확 끌어당긴 것처럼 소리가 한순간에 가까워지며 덮쳐왔다. 동시에 검은 막 너머로 망가진 듯 일그러져 쏟아지는 틔미한 빛. 꿈꾸는 듯한 기분으로 어렵사리 막을 밀어올리니, 어디선가 본 듯한 흑백과 금발이 물거울에 비친 듯 흔들려 와 어지럽다.
"괜찮은거야?"
"으..응?"
다소 멍한 머리로 몸을 일으키자, 수면이 가라앉듯 마리사의 모습이 또렷해진다. 초점이 잡히고 마리사의 옆에서 걱정스레 바라보는 상해까지 눈에 들어오자 단번에 상황을 이해했다.
"별 것 아냐. 좀 피곤했던 것 뿐이야"
"별 것 아니긴 뭐가 별 게 아니야?"
따지듯이 얼굴을 들이밀며 쏘아붙이는 마리사가 부담스러워 몸을 다시 뒤로 뉘었다. 그리고-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
"이제 알겠어?"
선반에 얌전히 앉은 일곱 인형들. 협탁과 작은 농, 옷가지가 걸린 옷걸이 하나. 그리고 책상 하나-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내 방이었다. 분명 소파에서 잠깐 눈을 붙였을 뿐인데...?
"보통 열이 펄펄 끓고 식은땀을 흘리는 걸 별 거 아니라곤 안 한다구"
"그러건 말건, 내 마음이야..."
"아 참 말 안 듣네"
고집이 아니라 사실이다. 사식 사충의 마법을 익힌 이후, 어지간한 병이나 몸살은 잔병치레처럼 넘어가게 되었다. 이것도 간단한 영양제를 먹고 잠깐 쉬면 거짓말처럼 사라지겠지. 마리사는 아직 그 주문에 손대진 않았지만 그걸 모르는 건 아닐 텐데...
"이 마리사님께서 대 서비스로 특제 영양버섯 수프를 만들어주실 테니, 얌전히 쉬고 있어라? 상하이, 너도 도와"
"됐어, 그냥 약 먹을 테니까-"
"상-하이!?"
손을 내저으며 마리사의 참견을 거부하려 했다. 하지만, 흑백의 사고뭉치 덩어리는 멋대로 상하이를 끌고 방을 나가버렸다. 단순히 먹고 뒷정리가 귀찮은 주제에 선심 쓰는 척이라니... 누군가에게 빚지는 건 정말로 익숙치 않다. 계속 목을 간지럽히는 거리낌에 지금이라도 내려가서 간이라도 봐 줄까 싶었지만, 온몸이 퉁퉁 부은 것처럼 감각이 애매해 그만두었다. 이 상태로 간을 봤다가는 마리사보다도 처참하게 망쳐버릴 게 분명하다. 대강 분량을 아는 상해를 믿을 수밖에.
가만히 누워있자니 허전해, 실이나 찾아 둘 생각으로 벽장에 놓인 일곱 인형 중 티벳 아가씨에게 마력의 실을 드리운다. 수천 번도 더 거친 공정이지만 지금은 왠지 낯설다. 아무래도 진짜 많이 아픈 모양이다. 인간이었다면 며칠은 앓았을지도... 조심스레 현을 늘어트리고, 당기고, 감고, 푸는 공정을 반복한다. 막 수선용으로 빼 둔 풀 먹인 실타래 둘을 꺼낼 즈음, 문이 벌컥 열렸다.
"짜잔!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노크 정도는 해"
"자꾸 깐깐하게 굴면 안 준다?"
"나야말로 부탁한 걸 안 주는 수가 있어"
"하지만~ 이렇게~ 성공적으로 빌렸습니다"
안 먹어도 상관없지만 아니, 솔직히 말하면 안 먹고 싶지만 여기서 거절하기도 애매해 될 대로 되라는 기분으로 포기했다. 실타래 두 개를 들어 모자 안에 집어넣는 걸 가만히 내버려두자 뭐가 그리 좋은지 신나서는 침대에 간이 식탁과 접시를 올리고 수프를 담아 준다. 다행히 정상적인 흰 수프인 걸 확인하자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자, 먹어보면 더 찾게 될걸? 어서 들라구"
"..글쎄"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마리사의 몇 안되는(아니, 거의 없는) 장점 중 하나는, 어떻게 나올 수 있는지 궁금한 마리사식 요리를 어쨌든 불평 없이 먹는다는 것이다. 억지로 한 술 뜨자, 다행인지 불행인지 무슨 맛인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입맛이 망가졌다.
"어때?"
"뜨거워서 좋네"
잔뜩 자신감에 차 물어보는 그녀에게 적당히 대답하자 바늘에 찔린 풍선처럼 얼굴에서 기대감이 빠져나가며 입술을 삐죽인다. 맛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뜨거운 유동식은 괴로운 식도를 달래주기에 떠넣고 어떻게든 넘긴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것마저도 힘들어 반도 못 먹고 스푼을 놓았다. 마리사는 매우 마땅찮은 표정이었지만, 왠일인지 툴툴대지 않고 좀 의외인 방향으로 힐난해 왔다.
"참 살풍경한 방이네. 그나마 얘들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네 '창고'보다는 이 편이 낫지 싶은데"
"그, 그건 창의력의 산물...일 거야"
내 방엔 처음 들어오는 그녀가 인형들을 멋대로 이리저리 잡아당기며 내뱉는 감상에 그쪽 방을 떠올리며 맞대꾸해주자, 아무래도 그건 좀 부끄러웠는지 더듬거리며 말을 얼버무린다. 이전에 묻지 않고 '빌려간' 시약을 받아내러 갔을 때 봤던(라기보다는 뒤졌던) 마리사의 방은 정리하는 것 보다 소각하고 새로 채우는 게 빠를 지경의 난장판이었으니까. 말문이 막히자 금새 또다른 걸 참견해 왔다. 너무 그녀다워서 이젠 뭐라고 할 기분조차 들지 않는다.
"대체 뭘 하길래 이 지경이야? 넌 시간도 많으면서"
"그렇다고 쓸 시간이 넉넉한 건 아니야"
"...너 오늘 참 이상하네"
"뭐가?"
"자기 몸 상태도 모르고, 멍하니 중얼거리고 있질 않나, 거기다 묘하게 촉박해 보이고. 애초에 마법사가 아무 이유없이 이 꼴이라니 척 봐도 이상하잖아. 너무 무방비라구"
"옳으신 말씀이네. 그럼 이제부터 제대로 쉴테니, 불만없지?"
속에 뭔가 집어넣자 그래도 기운이 나는 것 같더니만, 궁시렁대다 보니 목이 아파오면서 다시금 머리가 흔들리는 것 같다. 결국엔 힘없이 중얼거리고는 얌전히 배개에 머리를 파묻었다. 마리사가 뭐라뭐라 떠드는 것 같았지만 윙윙대고 울리는 것 같아 뭐라는 건지 모르겠어 깔끔히 무시한다. 아, 수프를 기세좋게 너무 많이 만들었을 게 뻔하니 남은 건 올려두라 해야 하는데-
아- 모르겠다
일단 자고 나서 생각하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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