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및 문화 콘텐츠 사이트 삼천세계

못다 핀 꽃은 일곱 빛깔로 시든다


원작 |

여무는 인연 2화 외출(2)


"여기까지 어쩐 일인가?"

"그렇게까지 놀랄 일은 아니잖아"

"아, 음. 일단 들어오게나"

자주 들리는 포목점에서부터 물어물어 도착한 카미시라사와 댁은 다소 외딴 곳에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케이네 씨는 당황하면서도 연락도 없이 온 나를 일단 맞아 주었다.. 수수한 싸리문을 지나자, 작지만 기와를 올리고 회반죽을 바른 집의 아담하면서도 기품있는 자태에 저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처마의 수키와마다 새겨진 무늬가 신기해 고개를 젖히고 구경하자 케이네 씨가 머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제자 중에 목수 부자가 있어서, 제작년에 막내아들까지 공부를 마친 데 감사하다면서 집을 수리해 준다더니 거의 개축해 버렸지 뭔가. 혼자 사는 집이라 괜찮다는데도.."

"육십사괘에 오행상생이라.. 훌륭하네"

예상외로 정교하고 정확한 상징과 기호에 고개를 주억거린다. 마루에 앉아 부츠의 끈을 풀고 있자니 무슨 연유에선지 귓가를 스치는 케이네 씨의 나직한 한숨소리에 의아해 돌아보지만, 물어볼 새도 없이 먼저 밥은 먹었는지 물어오기에 그저 섬돌에 신을 벗어놓고 마루로 올라섰다.

"식사는 했는가?"

"아니, 못 먹었는걸"

"좀 이르지만 마침 한술 들려던 참인데 같이 들겠나?"

"어머, 고마워"

"여기서 잠시 기다리게"

미닫이문을 열자 보이는 방은 슥 둘러본 것 만으로도 차분해 질 정도로 주인을 닮아 정갈하다. 한쪽 벽엔 척 보기에도 훌륭한 병풍이 펼쳐져 있고, 바로 옆의 선반에는 손때 묻은 책들히 나란히 뉘어 늘어서 있다. 얌전히 입을 닫은 농에는 내가 모르는 주술적인 기호와 문자들이 일정한 방진을 이루고, 책상에는 서철에 곱게 눌린 죽편이 펼쳐져 방에 함뿍 지식의 향기가 피어난다.

"죽편이라.. 진짜 읽는 물건인 모양이네"

그간 죽편에 관한 기록만 접해봤지 이렇게 실물을 접하는 건 처음인지라 호기심이 동한다. 그렇게 호기심의 충동질에 고개를 숙여 갸웃거리니 단단히 연결된 대나무 판자들에 적힌 생소한 문자들의 인상적인 자태가 한층 더 위험한 호기심을 부채질한다. 목표인 완전자율인형과는 상관 없어보이는 자료지만 나도 마법사인지라 미지의 지식을 접하면 논리라던가 양심이라던가 하는 것들은 우선순위가 뒤로 밀려버린다. 결국 호기심에 자제력을 팔아넘기고 죽편에 손을 가져갈 즈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마루에서부터 들려오는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손을 떼고 그 자리에서 돌아앉았다. 잠시 후 상을 들고 들어온 케이네 씨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뚝 잡아떼는 나에게 빙그레 웃으며 다 안다는 듯이 말을 건네왔다. 과연 수백년 경력의 서당 선생님, 강적이다.

"오래 전부터 모아왔던 것들이라 잊허진 기록도 좀 있다네"

"대단해. 나로서도 이것저것 처음 보는 게 꽤 많은걸"

"칭찬 고맙군. 밥은 이정도면 되겠나?"

"딱 적당해"

작은 공기에 소복히 담긴 밥그릇을 건네받았다. 크지 않은 상에 정갈하게 올려진 가을 나물 몇 종류와 찐 계란, 그리고 구운 산천어는 소박하면서도 입맛을 다시게 하는 매력이 있어 사양치 않고 수저를 들었다.

"그럼 잘 먹을게"

"부족하면 언제든 말하게"

케이네 씨는 예상 외로 엄격한 면이 있어 식사중엔 과묵했다. 나도 음료를 곁들인 다과가 아닌 이상 먹으면서 떠드는 취미는 없기에 조용히 밥그릇을 비웠다. 화식을 자주 접하진 않았지만, 레이무네와 비교하자면 깔끔하나 감칠맛은 덜하고 파츄리네와 비교하자면 고소하나 다소 억세다. 음식은 성품 따라간다는 말도 제법 맞는 구석이 있는 법 하다.

"거기 소금 좀 건네주겠나?"

"여기. 도라지가 쓴맛이 엷은데, 어떻게 한 거야?"

"쌀뜨물에 헹궜네"

케이네 씨가 필요한 말 이외에는 간략히 줄이기에 나도 덩달아 말수가 줄었다. 마치 사찰의 공양처럼 조용한 식사가 끝나고, 녹차 한 잔씩을 놓고 마주앉아서야 비로소 그녀와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온 겐가?"

"궁금한 게 생겼는데, 당신이라면 알지 않을까 싶어서 좀 물어볼까 하고"

녹차를 홀짝이며 차와 함께 내온 라쿠간을 한 입 베어 물었지만 식후라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이런 맛인지 밋밋하게 아무런 맛도 없어 나머지는 내려놓았다. 녹차향이 쌉싸름하니 좀 단 것도 괜찮을 텐데.

"그래? 답해줄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답해주겠네"

"고마워. 그럼 히에다가의 역사에 대해 물어봐도 괜찮을까?"

​"​히​에​다​가​의​.​.​역​사​라​.​ 흠, 단순한 개요를 묻는 건 아닌 것 같군"

"맞아. 최근의 일일수록 좋아"

"역사라고 해도 기준이 되는 시점이 있고 관점이 있지. 자네가 궁금한 건 어떤 눈으로 바라본 역사인가?"

과연 역사와 지식의 반수라는 이명에 걸맞게 히에다가의 역사를 초대부터 늘어놓는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내가 궁금한 게 어떤 것인지 정확히 집어 물어오는 반문에 잠시 내가 원하는 걸 생각하며 말을 골랐다.

"응, 그렇네...그래, 히에다가의 현 당주의 눈으로 바라본 역사를 원해"

"..."

케이네 씨가 잠시 눈을 감고 말이 없기에, 찻잔을 들어 홀짝이며 대답을 기다린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가만히 눈을 뜨고 답하는 그녀의 손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건 답해줄 수 없네"

"..어째서?"

"자네가 어떤 이유로 묻는지 알 도리가 없기 때문이네"

몰라서 묻냐는 듯 나를 힐난하는 단호한 눈초리가 곤혹스럽다. 거절당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기에, 의아하다기보다는 당황스러워 입을 떼려다가도 멈칫거리는 바보같은 행동을 계속하고 있자니 그녀는 지독하리만치 차분하게 말을 덧붙여 온다.

"다시 말해, 못 믿겠다는 걸세"

"..어떤 면이?"

단호한 눈초리에 측은함이 깃들어 더욱 당황스럽게 한다. 케이네 씨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조근조근 설명해오는데 마치 동정하는 것 같아 뺨이라도 맞은 것처럼 얼떨떨하고, 이유를 알 수 없이 억울하다.

"그럼 자네가 그런 걸 묻는데 누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겠는가"

"...?"

"자네는 남의 일엔 관심이 없잖나"

"내가...?"

"아니라고 할 셈인가?"

"....."

피할 수 없고, 눈돌릴 수 없는 말. 단순한 말일 뿐인데, 말일 뿐인데... 찬 바람처럼 살에 꽁꽁 에어든다. 뭔가 반론하고는 싶은데 말이 목구멍에서 엉켜버려 풀리질 않는다. 고작해야 케이네 씨의 말에 우물거리며 말꼬리를 흐리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자네는 모든 일을 자기만의 틀에 가둬버리잖는가"

"나만 그런 게..."

"그렇지, 사실 많은 사람이 그렇고 나도 그렇지만.. 자네는 심하네"

"고작 그 정도로? 저기.."

"매사에 나름대로 이해하고 나면 흥미를 잃어버리고 이해하지 못할 일에는 관심을 끊어버리지는 게 고작은 아니라고 생각하네만"

"그건.."

"사람이 사물과 다른 점은 남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자신을 담금질해 가는 것이지.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자기 실타래만 따라 움직이는 자네는 인형과 다를 게 없네"

"아니-"

"그런 자네가 히에다가에 기웃거리고 아큐의 개인사를 알려는 덴 필시 원하는 바가 있을 터, 나는 무얼 원하는지도 모를 뿐더러 설령 자네가 말한다 해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는 입장이네"

동정하는 듯한 눈빛, 말투, 목소리... 분하다. 모든 게 분하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분한 건 내가 할 말이 없다는 거다. 하지만 이대로 얌전히 돌아가기에는 쓸데없는 자존심히 허락하지 않아, 내가 듣기에도 궁색한 논리를 구질구질하게 늘어놓았다.

"..그래, 그럴 지도 몰라. 하지만 당신하고는 크게 상관없는 문제잖아?"

"그런 식이기에 자네에겐 말해 줄 수 없다는 거네"

"그런 식이라니.."

"상관없으니 알려달라니, 그게 뒷담화와 다를 게 뭔가? 게다가 난 아레의 논객이었고 아이치의 말벗이었네. 상관없는 일도 아닐세"

​"​하​,​하​지​만​.​.​.​!​"​

"돌아가게. 자기 손발을 실에 매달아버린 사람과 말을 섞고싶지 않네"

케이네 씨는 그렇게 내리긋고는 눈을 감아 버렸다. 너무나 분하고 억울해 어떻게든 할 말을 생각해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공허한 단절뿐. 가슴이 아플 정도로 저릿해 오지만 더 이상 매달려봤자 상처만 깊어질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에 힘이 없어 비틀거리며 간신히 일어났지만, 그녀는 들을 걸 듣고 볼 걸 본다는 듯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하아, 바보 같아"

어떻게 부츠를 신고, 싸리문을 나서, 마을을 벗어났는지 기억이 없다. 아니, 그런 걸 떠올릴 기운조차 없다. 마치 뺨이라도 여러 대 맞은 것 같이 몸은 휘청거리고 눈 앞은 흐려온다. 소매를 끌어당겨 흐릿한 눈을 비볐더니, 주체할 수 없이 소매가 젖어들어 도저히 팔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애써 유지해온 표정이 흔들리고, 세워온 심지가 무너져내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지만 알량한 자존심에 그것만은 면한다.

이제 여기 서 있는 건 단순한 인형일 뿐일까.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게 아닌데... 비수같이 꽂혀오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나 아파 말이 나오질 않는다.

"인정 못 해... 아니, 안 해"

아무도 없는 길가에서 누가 볼까 두려워 얼굴을 가리고, 아무도 들을 리 없는 억지나 주워담으며 눈물흘리고 싶은 만큼 울지도 못하는 내가 너무나도 한심해 이를 꾹 악물었다.

  ​                  ​인​형​사​는​ 결국 자신에게도 실을 매달아 버렸습니까?

  ​                                          아니. 그럴 리 없어.

  ​                          ​그​래​요​.​.​.​ 그런데, 그걸 믿을 수 있습니까?

  ​                                          ​증​명​해​야​지​.​ 스스로.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들끓는 감정의 파도를 수면 아래로 가라앉혔다. 자신을 가라앉히는 건 자주 해온 일이기에 굉장히 쉽다. 그리고 억누르는 건 더욱 더 쉽다. 말이 꽂혀와 벌어진 상처에서 쏟아져나오는 후회와 자책감을 죽여갈 때마다 흐느낌도 잦아든다. 이윽고 눈가에 번진 자국을 닦아내며 가방을 열자 이것저것 무언가에 필요한 준비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비록 봉래와 상해는 없지만-그래도 준비는 충분했다. 꼼꼼히 확인을 마친 후 표정을 바로잡으며 고개를 들자 저 멀리 있을 카미시라사와 댁이 손에라도 잡힐 듯 눈에 선히 아른거린다.

"취소해야 할 걸"

중얼거리며 마음을 다잡고는, 가방을 단단히 붙들고 날아올랐다. 이미 한 번 거절당했던 곳을 향해서.
일반적인 동인경향과는 좀 다른가요? 음...사실 동방 프로젝트의 동인 작품에 대해서는  음악 쪽에 집중하고 있는지라 이런저런 설정은 공식 설정만 참고하고 있긴 합니다 ..)a

댓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