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의 출전과 상제의 우려
“그러면 바가지 청구의 사자로 누구를 보내랴?”
고, 상제께서 군귀(群鬼)에게 하순(下詢)하였다. 천사가 대답하되,
“이것은 미리가 가장 합당합니다. 신익 작일에 확신(確信)을 들은즉 민중들은 아직 그렇게 천국을 배척하지 않는데 원수놈의 드래곤이 민중의 머리 속으로 돌아다니며, 상제와 상제 이하 내지 인세(人世)의 지배계급의 세력은 모두 민중의 시인(是認)으로 존재한 것인즉 민중이 만일 철저히 부인만 하면 모든 세력이 추풍의 낙엽이 되리라고 자꾸 민중들을 꾀어 민중이 이같이 반기(叛起)하였다 합니다. 그래서 민중들이 금일의 드래곤을 전일의 상제보다 더 믿는다 합니다. 만일 드래곤의 동의이면 민중들이 우리에게 바가지 하나씩은 줄 듯 합니다. 미리는 드래곤의 전형인즉 미리를 보내면 아마 드래곤의 동의를 얻기가 쉬울까 합니다.“
상제가
“옳다.”
하시고 즉일에 미리를 옥중에서 불러 손목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내가 생각지 못하여 하마터면 너 같은 현신(賢臣)을 죽일 뻔하였구나.”
하고, 바가지 청구의 결의된 경과를 일일이 말씀하신즉
“안 됩니다. 안 됩니다. 그것은 절대로 안 됩니다. 바가지는 거지가 차는 것이요, 상제가 차는 것이 아니올시다. 거지가 바가지를 차고 민중의 문 앞에 가서 한 술 주시오 하면, 민중이 동정의 밥을 줍니다. 그러나 상제께서 차신다면 ‘야, 상제 거지, 전일의 존엄은 어디다 두었느냐?’고 손가락질을 할 것이올시다. ‘전일에 우리에게서 빨아먹은 피를 다시 토하여 내 놓으라’고 주먹질이나 할 것이올시다. 바가지를 주기커녕 차고 간 바가지나 깰 것이올시다. 그리고 황송하옵니다마는 상제의 이마까지라도……안 됩니다. 안 됩니다. 바가지 청구는 절대로 안 됩니다.”
고 미리가 울면서 청한다.
“그러니 어찌 하잔 말이냐. 철도자살이나 하였으면 좋겠다만 천궁에 어디 철도가 있느냐. 칼로 자살은 차마 못하겠고……”
“신이 입을 한번 벌리면 제왕·통령(統領)·자본가……등물(等物)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신이 지국(地國)에 내려가 또 입을 벌리어 보겠습니다.”
“오늘날에야 똥작대기만한 힘도 없는 제왕·통령 등물을 아무리 토하여 놓은들 민중이 무서워하겠느냐. 그것도 전날 말이지.”
“신이 지상에 내려가 강국 민중의 애국심을 고취하여 식민지 민중을 잡아먹게 하고, 식민지 민중에게는 자치나 참정권을 준다고 속이어 강국 민중에게 잡히어 먹게 하며 민중이 상식(相食)하는 틈에 천국의 권리를 회복할까 합니다.”
“자각한 민중들이 그런 꾀임에 속느냐 그것도 옛말이지.“
“그렇지만 상제께서 절대로 바가지를 차서는 안 됩니다. 여하간 신이 지국에 내려가 친히 실지의 정형을 정찰하고 돌아오리다. 싸울 만하면 싸우고 그렇지 않으면 천국 군신이 다 손을 잡고 아사(餓死)할 뿐이언정 바가지를 차서는 안 됩니다.”
하고 미리가 곧 상제께 하직하고 구름차를 타고 지국을 향하여 출발할 새, 상제 천사 이하 선관(仙官)·선리(仙吏)·선녀(仙女)·권속들이 모두 그 주린 가슴을 퉁기어 쥐고 운두(雲頭)까지 따라 나와 일제히 손을 들고 목멘 소리로 “미리님 만세!”를 부르니, 이 소리가 곧 천국의 흥망 존폐를 한 등에 실은 미리를 지송(祗送)하는 소리더라.
“미리님? 내가 작일(昨日)에는 천상(天上)의 미리놈이요 지상의 미리님이리니, 금일에는 천상의 미리님이요 지상의 미리놈이로구나, 천지의 위치가 이다지 변환(變換)하였구나” 라고, 미리가 속으로 홀로 생각하고 눈물이 두 뺨에 젖는다. 반공(半空)에 이르지 못하여 천사가 헐떡이며 쫓아와서
“다시 잠깐 돌아오시랍니다. 상제께서 할 말씀이 있다고 그럽니다. 미리님.”
하고 부르거늘, 미리가 곧 회군(回軍)하여 상제를 가 본즉
“오늘 격노한 민중을 위력으로 눌러서는 안 될 일이니, 아무쪼록 정리(情理)로 애걸하소. 이 말이 혹 나의 그대에게 주는 최후의 부탁이 아니 될까…….”
하고 상제가 미리의 손을 잔뜩 쥔다. 미리가
“예, 상제는 너무 우려치 마소서. 지국에 가서 신이 모든 일을 천사만사(千思萬思)하여 행하리이다.”
하고 다시 총총히 등거(登車)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