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진비래(興盡悲來) 10화
이상한 감각이다.
전후좌우상하(前後左右上下).
사방팔방전위(四方八方全圍).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보였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들렸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느껴졌다.
마치 육체에서 정신이 붕 떠올라, 객관적인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 보듯, 심지어 내 모습마저도 보이고 들리고 느껴진다.
공터를 내리비추는 달빛도, 미약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도, 아이들의 숨소리도, 그리고 심지어 내 피부 아래에 피가 흐르는 것 까지도ㅡ 전부 말이다.
이 기묘한 감각을 뭐라 표현 할 수 있을까.
그래, 이것은 마치 의식이 확장된듯한 기분.
감각이 점점더 선명해질수록, 치솟는 것은 혼란도 분노도 의지도 아니었다.
ㅡ명경지수(明鏡止水)
정(靜)을 근간으로 하는 마음가짐의 극의ㅡ
ㅡ쨍!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순보를 사용해 적을 향해 튀어 나갔다.
◆
ㅡ캉!
최초의 부딪힘은 힘없는 소리였다.
사신으로 치자면 만해 상태인 『에스쿠도 네가시온(盾反 Escudo.Negacion)』이었으나, 부딪히기 직전에 힘을 빼고 끌어당겨 충격을 완화시킨데다가 검면을 비스듬이 기울여 남은 충격마저도 흘려버린 『천타(賤打)』를 베어버리지는 못하는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충격을 덜 흘렸다면 천타는 분명 사용자와 함께 반으로 쪼개졌을 것이다.
ㅡ캉!
이어서 퍼진 이격째의 울림도 힘없는 소리였다.
일격도 아니고 이격 모두 흘렸다.
처음이라면 우연으로 치부하겠지만, 두번째의 부딪힘에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디에즈는 삼격째가 막히자마자 뒤로 뛰어 올라 거리를 벌렸다.
디에즈로서는 전혀 그에게 질 요소가 없었기에 그대로 몰아붙여도 됐을테지만, 삼격째에 마주친 그의 눈을 보고 거리를 벌렸다.
처음의 분노에 담긴 눈빛도, 그렇다고 절망이나 혹은 의지로 차있는 눈빛도 아니었다.
실로, 아무런 동요도 없는 고요함.
마치 심연과도 같은 눈빛이었다.
자신을 꿰뚫어 관조하는 듯한 눈.
그것이 꺼림직해서 거리를 벌린 것이다.
하지만ㅡ
이 남자도 결국 죽여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
그렇기에 그 꺼림직한 기분을 무시하고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
보이고 들리고 느껴진다.
달빛도, 잎새소리도, 숨소리도ㅡ 그리고 적의 움직임도.
ㅡ캉!
빠르다.
순보를 쓰고 거기에 내가 낼 수있는 최단의 검로를 통해 들어간 검격을, 적은 그저 팔을 휘저어 검을 움직이는 것 만으로도 쳐냈다.
그리고 이어서 들어온 적의 공격 또한, 내 눈이었다면 쫒아가기는 커녕, 휘둘렀다고 인식하기도 전에 베였을 검격이었다.
그런 빠르기인데도 자신은 검을 흘리며 막았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의 싸움에 익숙하다지만, 이정도로 확연한 차이가 있는 상대에게는 그 경험은 무용.
그런데도 마치 맑은 거울과도 그리고 고요한 물과도 같은 심상으로 상대를 관조하면 그 움직임이 짐작이 간다.
ㅡ그래, 자신은 『예측』했다.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상대의 『예비동작』을 아는 것 만으로도 이어져 뿜어질 검격을 『예측』가능한 것이다.
상대의 공격을 예측할 수 있기에 그보다 미리 검을 움직인다.
때문에 인식조차 버거운 검격을 몇바탕이나 막은 것이다.
벌써 육합째의 검을 섞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각은 사라지지 않아, 여전히 상대의 공격을 읽고 예측해 막아낸다.
ㅡ질것 같지 않다.
검격을 나누며 문득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분명 오만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금방이었다.
◆
도합 십합째의 검격을 나눈다.
그제서야 나는 상대에게서 느낀 꺼림직함의 정체를 깨달았다.
ㅡ이 자, 자신이 검격을 가하기도 전에 그 위치에 검을 움직인다.
미리 움직인다 하여도, 내쪽의 속도가 빠르기에 결국 둘은 거의 동시에 검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이렇게 몇합이나 검을 섞으면 자연스레 알게 되는 것이다.
실로, 경이로운 검술.
상대를 관찰하는 눈, 그리고 다수의 강적을 상대해본 경험, 마지막으로 무수한 수련으로 인한 검술에 대한 깨달음.
이 세가지가 만족해야만 할 수 있는 신기다.
하지만 그뿐이다.
분명 경이롭고, 흥분되는 실력이지만ㅡ 그것을 바쳐주는 육체(영력)이 없다.
검격을 주고받을 수록 숨이 거칠어져 가는 것을 보면, 체력적인 한계도 있을 것이며, 지금은 검을 흘리고 있기에 막고는 있지만 결국은 검과 함께 두동강이 날 것이다.
만약, 이자가 좀더 강한 신체(영력)이 있었다면 어떠할까?
그 가정에 돋아오는 소름과 흥분감은 매우 강렬한 유혹이었다.
때문에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ㅡ이자를 호로로 만든다면 어떠할까?
사신을 호로로 만든다고 하더라도, 자신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될 수는 없다.
애초에 그러한 일을 행하려면 특수한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신과 호로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방법이 아닌, 사신 자체를 타락시켜 호로로 만든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래서야 평범한 호로가 될 뿐이겠지만, 호로는 사신과는 달리ㅡ 『다른 영체를 먹어치움으로서 영력을 자기것으로 할 수 있다』.
영력이 강한 영혼을 먹어치우게 한다면, 이자 또한 순식간에 강해질 것이다.
ㅡ캉!
십이격째의 검을 섞는다.
이번에도 다시 거리를 벌리며, 말한다.
"더욱 강해지고 싶지않나?"
◆
"더욱 강해지고 싶지 않나?"
왜 아니겠는가.
나는 좀 더 강해지고 싶다.
하지만ㅡ 그렇다고 호로가 되라고 한다면 거절하겠다.
분명, 내가 추구하는 것은 무력(武力)적인 강함이다.
ㅡ강한 힘.
그 과거,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불꽃과도 같은 압도적인 『힘(爆力)』
하지만, 스승님께서는 말씀하셨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단순히 물리적으로 그리고 보이는 강함 만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그래서는 과거처럼, 내가 재능에 절망하고 주저앉아버린 것처럼, 그리고 스스로를 낙오자 취급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될 뿐이다.
검을 휘두르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근력이 있어야 하듯이, 강한 힘을 가지고 쓰기 위해서는 그에 준하는 강한 의지와 신념, 그리고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나는, 그것을 배웠고 느꼈고 깨달았다.
때문에 아는 것이다.
호로가 되어서 강해지는 것이 내가 추구하는 강함이 아닌, 사신으로서ㅡ 그리고 『나』로서 강해지는 것이 내가 추구하는 강함이라는 사실을ㅡ
그러니ㅡ
"개소리군."
거절한다.
◆
나의 확고한 대답에 상대는 진심으로 유감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 아쉽군."
ㅡ스팍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적이 유감스럽다고 말함과 동시에 비죽이 자신의 가슴을 꿰뚫고 있는 검.
감각은 멀쩡했기에 분명 보고 느꼈지만, 그것을 인식했을 때에는 이미 꿰뚫려 있었다.
"비검(飛劍)ㅡ 이라고하나. 자네의 그 『예측』은 분명 『경험』으로 인해서 분석하고 결론을 예측하는 것. 그말은 반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검은 무방비하다는 것이지.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이 맞은듯 하군ㅡ 역시 자네는 검을 던진다는 기술에는 어떠한 경험도 없었어."
아니, 경험이라면 있다.
분명, 우노하나 선생님께서 그에게 검을 가르칠때, 비검의 존재 또한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가 하는 수련은 그리고 그가 상대해온 사람들은 검을 던진다는 행위는 하지 않고 베고 찌를 뿐이다.
때문에 지식으로만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지배하는 의식확장의 감각 상태에도, 그는 어처구니 없게 던져진 검에 꿰뚫린 것이다.
단지 지식으로만 가지고 있었고, 감각으로 검이 던져진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상대의 검이 무서운 속도로 그의 가슴을 꿰뚫은 후.
실제적인 경험이 없었기에 예측을 하지 못했다.
ㅡ그것이 이 상황의 원인이다.
"실로 유감이다."
적이 다시한번 말한다.
다만, 그 뜻은ㅡ
"자율적 의사가 아닌, 강제적으로 호로화 시킨것이."
강제로 호로화를 시킨다는 것에 대한 유감.
아마, 최초의 유감이다라는 말 또한 이와 같은 의미였을 것이다.
뚜벅뚜벅, 적이 다가온다.
일어서려고 힘을 줘보지만, 어째서인지 몸은 나른해지고 의식확장의 감각은 이미 사라져버렸다.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서 무릎을 꿇는다.
"내 검이 꿰뚫은 곳은, 영력을 생성시켜주는 『백수(魄睡)』부분. 이곳이 심하게 망가지는 사신은 죽거나 혹은 영력을 잃어버리지. 자, 평범한 혼백이 되어라, 그리고 그 상태로 사신이 아닌ㅡ 호로가 되어라."
사패장이 흩어진다.
그것은 그가 사신으로서의 힘을 잃어간다는 증거.
그 곳에 남은 것은 단지 가슴에 구멍이 생긴 평범한 혼백이었다.
"호로화라는 것도 실로 간단한 것이다. 바로 가슴의 구멍을 넓히기만 하면 돼. 그것 뿐이지."
디에즈의 손이 그의 구멍에 다가간다.
그리고 그 손은 구멍을 서서히 넓혀ㅡ
그만둬ㅡ
그가 외친다.
하지만, 영력이 사라져가는 그에게 더이상 말 할 힘이 남아있을리 없었다.
그때였다.
ㅡ툭
작은 소리.
디에즈에게 무언가가 날아와 부딪히고 떨어진다.
눈을 슬쩍 내려보면, 그곳에는 작은 돌맹이 하나가 굴러다닐 뿐이었다.
돌이 날아온 방향을 살폈다.
그리고 그제서야 디에즈는 다시금 떠올렸다.
자신은 시바가문을 멸문시키기 위해서 왔으며, 아직 가문의 생존자가 있음을 말이다.
"어리석군, 이 틈을 타서 도망갔다면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거늘."
돌이 날아온 곳, 그곳에는 양손에 돌을 가득 들고있는 시바가문의 아이들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
도망쳐ㅡ!
아이들에게 외치고 싶었다.
그리고 푸른 피부의 적의 주의를 끌어 그 시간을 벌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안나온다.
입은 커녕 혀조차 움직여지지 않는다.
몸 하나하나가 서서히 사라지는 감각.
이것이 영력이 사라지는 감각이라는 것은, 오른팔을 잃었을 때에 뼈저리게 알아버렸다.
영체를 존속시켜주는 백수와 쇄결, 그 중에서 백수 부분이 꿰뚫렸으니 아마 자신의 혼은 팔과 같이 흩어져 소멸할 것이다.
그 생각과 함께 덜컥하고 공포가 찾아온다.
죽고싶지 않다.
그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다.
하지만, 그보다 견딜수 없는 것은 아이들을 지키지 못하고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흐릿해져가는 시야.
그 끝에는 조요히 누워계시는 스승님이 보였다.
이상한 감각에 들뜨는 바람에ㅡ 그리고 지지않을거라는 이유없는 자신감 때문에 결국 일이 이렇게 되었다.
자신은 언제나 그렇게 실패하면서도 발전없이 결국 실수를 할 뿐이다.
일어서고자 힘을 준다.
부들부들ㅡ 그렇게 떨리는 근육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시야가 흐릿해진다.
좀 전에 보았던 말라비틀어진 나무의 환영이 다시 보인다.
죽고싶지 않아.
그렇게 생각할 무렵, 그자가 다시금 말했다.
"호로가 되면 살 수 있다."
사신이 아니고 호로가 된다면 살 수 있다는 말.
그 말은 너무도 달콤한 유혹이었다.
하지만ㅡ
그때였다, 남자가 한가지 조건을 더 추가한 것은.
"만약, 자네가 호로가 된다면 저 아이들도 살려주지."
ㅡ쿵!
그 말을 듣자, 마음이 흔들려 버린다.
내가 호로가 된다면 아이들을 살릴수 있다.
ㅡ실로, 대의명분이 갖춰진 거군.
아이들을 살릴 수 있다.
ㅡ결국, 그건 대의명분으로 살고싶은건 너잖아?
내가 호로만 된다면ㅡ
ㅡ웃기지마, 개자식.
"웃… 기지마…, 개자식……."
남은 힘을 억지로 짜내 말한다.
개소리하지마라.
이것은 나의 긍지다.
낙오자였어도, 패배자였어도, 약자였어도, 주위에 도움을 받으며 끈질기게 지켜온 나의 긍지다.
일순, 그 긍지로 인해서 스승님께서 지키고자한 아이들을 살릴 기회가 사라진것에 대한 죄책감이 들었으나, 나를 보며 끄덕여주는 시즈카를 보고 내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아이들을 하나씩 눈앞에서 죽이면 마음을 바꾸겠지."
남자의 말에 아이들이 흠칫한다.
ㅡ핏
검을 휘두른다.
숨쉬기조차 버겁지만 휘두른다.
그리고 그것은 남자의 발에 작은 생채기를 남기었다.
꿈틀하고, 남자의 눈썹이 움직였다.
그의 인내는 더이상 이어지지 않은 듯, 검을 들어올린다.
눈을 감는다.
어둠속, 바람을 가르는 검의 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이윽고 내 몸을 헤집어, 스승님의 곁으로 나를 보낼것이다.
ㅡ미안하다, 애들아.
지켜주지 못한 아이들에게 사죄를 한다.
이윽고 검이 나에게 도달한다.
그리고 그것은 예상과는 달리, 가벼운 쇳소리를 내며 중간에 가로막힌다.
"이런, 성질급한 녀석이군."
어느새 나타났는가, 남자의 검을 막은 이가 혀를차며 남자를 밀어낸다.
그리고 뒤이어 다른 이가 나타나 아이들의 앞에 섰다.
갑자기 나타난 두명.
"미안, 늦었군."
슌스이와 쥬시로였다.
◆
"강… 하…… 다……."
두명에게 띄엄띄엄 적의 강함을 알린다.
비록 둘 모두가 천재라고는 하지만, 상대에 비하면 힘이 약한 것은 사실이니 아이들만이라도 데리고 탈출해주기를 바랬다.
그런 나의 바램에 둘은 씩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마.""
그 한마디.
그것은 어느 것보다도, 심지어 아까의 감각보다도 더욱 큰 믿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래, 걱정되지 않는다.
둘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나와 아이들 앞에 둘이 나선다.
"일단, 내 친구와 그의 가족들에게 해준 짓을 보답해줘야겠지."
"그래."
쥬시로와 슌스이가 각자 천타를 뽑아 겨눈다.
그런 둘을 남자는 무심한 듯이 쳐다본다.
하지만, 이내ㅡ 남자의 그 여유는 산산조각나게 되었다.
"모든 파도는 나의 방패가 되고, 모든 번개는 나의 칼이 되어라!! 시해ㅡ, 『쌍어리(雙魚理)』"
"꽃바람 흩날려 화신(花神)이 울고, 하늘바람 흩날려 천마(天魔)가 웃는다. 시해ㅡ, 『화천광골(花天狂骨)』
시해(始解)ㅡ 참백도의 해방.
그 여파로 인해 느껴지는 영압은 지금까지 내가 알고있던 둘을 아득하게 뛰어넘었다.
그래, 너희들ㅡ 시해를 할 수 있었구나.
이렇게 강했구나.
안심했기 때문인가, 눈이 감긴다.
부릅떴던 눈을 감은 탓인가, 아니면 아이들이 살거라는 안도감 때문일까, 눈물이 조금 새어나왔다.
그래, 나는 분명히 그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다른 이유 따위는 없을 것이다.
ㅡ감기는 눈, 그 눈은 이도일대(二刀一對)의 참백도를 들고 강한 적과 싸우는 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