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접지몽(胡蝶之夢) 5화
달구지를 타고가면서 하늘을 본다.
여전히 우중충한 빛깔로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모양새다.
손끝으로 눈주변을 더듬는다.
그리고 깨닫는다, 자신은 지금 『눈을 감고있다』라는 사실을…….
눈을 감고있는 상태인데도 앞이 보인가?
이것이 영안의 효능인가?
아니면, 자신이 영력에 대한 깨우침을 얻고 익힌 새로운 힘일까?
본래의 눈보다야 못하지만, 그래도 기존의 영안과는 달리 색을 구별할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꽤 기쁘다.
그렇게 기뻐한다 치더라도, 역시나 자신이 육체를 다시 얻었다는 것은 꽤 충격적이다.
내가 구더기 소굴에 들어가기 전만 하더라도, 현세에서 사신들이 자신의 신분을 속인채로 생자 무리에 섞여 활동해야하는 필요성이 부각되고 있었다.
때문에 『의사육체』라는 생육의 대용품인 껍질의 개발이 시작된 무렵이었다.
하급사신이었던 나에게 공개될 정보는 아니었지만, 우노하나 선생님께서 흘리듯이 그런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알게된 사실.
혹시 이 육체가 그 의사육체라는 것이 아닐까?
내가 구더기 소굴에 갖힌지 수십년의 세월이 지났으니 어쩌면 완성이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도 이토록 실제 인간의 육체와 전혀 틀린점과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신체라니, 왠만한 영력을 지니지 않은 사람들은 이 육체가 거짓육체라는 사실도 모를것이다.
사실은 나 자신도 이 육체가 거짓육체라고 생각치 못하고 있고 말이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눈을 떠보니 되살아났다는 이야기보다는 그쪽이 납득하기 쉽다.
그렇다고는해도, 왜 자신에게 이런 육체를 줬냐와 사실상 탈옥을 한 나를 방치했냐는 것은 영문을 알 수 없다.
어쩌면 자신을 샤먼이라 소개한 퀸시 노파의 힘이 아닐까?
영혼으로 대화하는 그 신통한 능력이라면, 어쩌면 이런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여러가지 상상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달구지가 덜커덩 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두방울 떨어지는 빗방울을 느끼며, 비오기전에 비를 피할 곳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한가한 생각을 한 자신을 깨닫고는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
운좋게도 달구지를 얻어탄 덕분인지 비가 거세지기 전에 촌락에 당도할 수 있었다.
가는 동안 주인장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빈번하던 전쟁도 많이 사그라 들었고, 또한 최근에는 성에서도 치안 관련으로 이곳저곳에 도적들을 토벌하러 다닌다고 한다.
갑작스레 육신이 주어졌지만, 그리고 자신이 살던 땅에 다시금 발을 들였지만, 그것은 말그대로 갑작스러운 일이었기에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는 정하지 않았다.
주인장의 말을 들어보면 민생도 꽤나 안정적인 것 같으니 앞으로 무엇을 해야할지 못정하면 여행이라도 가볼까.
생전에는 스님을 따라다닌게 전부였던 여행이니, 이번에는 느긋하게 돌아다니는 것도 좋을지 모르겠다.
"이곳이 저희 마을입죠."
달에 한두번씩 큰마을에 가서 마을에서 생산하는 물품등을 식료나 생필품등으로 바꿔오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간다는 이 마을은, 말그대로 촌락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자그마한 곳이었다.
남자가 달구지를 끌고 귀환하고 있던 것도 곡식을 사오던 와중으로 내가 누워있던 달구지 안의 곡식들은 마을의 생산품으로 교환해온 곡식이라 한다.
덧붙여서 마을에서 생산하는 것은 간단한 조각품부터 크게는 옷감에 이르른다고 한다.
이런 작은 촌락이라면 예전에는 자급자족으로 사는 수 밖에 없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큰 도시와 왕래하기 위해서는 전국 곳곳에서 횡행했던 도적떼들을 조심해야 했기에 이와 같은 상황은 나에게는 신선하다.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아무런 동행없이 달구지 하나에 물품을 싣고 큰 마을로 왕복하곤 한다는 주인장의 말을 들어보면 근래의 야마토의 치안이 무척이나 좋아졌음은 분명하다.
"이렇게 만난것도 인연인데, 비도 피하실겸 소인의 집으로 가시지 않겠습니까요?"
"그건 무척이나 고마운 제안이지만……."
초면인데도 왜 이렇게 잘대하는 것일까?
과거에는 도적이 횡행했던 때라 민심이 흉흉하던 와중이었기에 낯선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심각했었다.
하지만 요새 치안이 좋아졌다고해서, 주인장이 생면부지인 나를 이토록 잘해주는 이유로는 되지 않는다.
뭔가 다른걸 노리는 걸까?
그런 의문이 안든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비피할 곳은 필요했으므로 주인장의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여 그 집으로 초대되었다.
"나왔구만, 마누라!"
"와! 아빠다!"
주인장이 큰소리를 치며 문을열고 들어가자 몇명의 아이들이 그를 반겼다.
아빠라고 하는 것으로 보나, 주인장의 집에 있는 것으로 보나, 이 아이들은 주인장의 자녀가 틀림없었다.
한동안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 주인장은 호기심어린 눈동자로 나를 보고있는 아이들에게 나를 소개시켜줬다.
'길가다가 만난 여행자분이란다.'라는 그의 말에 아이들이, 그리고 어느새인가 다가온 그의 부인으로 여겨지는 중년의 여인이 웃으며 납득한 것을 보면, 그가 외인을 데리고 집에 온 것은 처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갑자기 방문해서 죄송합니다. 비를 피할 곳이 없어서 난처하던 차에 바깥분께서 매력적인 제안을 해오셨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오게되었습니다."
조용히 감사와 사죄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숙이니 그에 주인장과 그의 부인분은 깜짝놀라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어이구 아닙니다요. 저희같은 무지렁이가 나으리를 모신것만으로도 영광이구만요."
남자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나으리라고 부르지 마십시요. 저는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분위기가 다르구만요. 라면서 말하는 주인장에게 몇차례에 걸쳐서 설득한다.
생전의 나나 소울소사이어티 때의 나나.
나는 평범한 민초였을 뿐이다.
귀족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부유한 집안의 사람도 아니었다.
어찌보면 주인장과 그 가족보다도 못한 처지가 바로 나였다.
그런데 나으리라는 소리를 듣는것은 역시 껄끄럽다.
처음 나으리라고 불릴때부터 정정을 부탁하려 했지만 기회가 엿보이지 않아 미루다 이 틈에 말한다.
아니, 사실은 나으리라는 존칭으로 불린게 기뻐서 일부러 늦춘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도움까지 받은 상태인데 거기에 윗사람 행세까지 하고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몇차례 이야기가 오가고, 내가 자신들과 같은 일반 민초라는 사실을 납득한 주인부부는 그제야 편하게 말을 했다.
"그럼 나그네께서는 정처없이 돌아다니는거구만유?"
"예, 일단 별 목적없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나으리 대신에 나그네라고 부르게된 주인장의 말에 긍정한다.
딱히 목적도 목표도 없다.
처음에는 퀸시를 만나 그들의 전투법을 익히는게 목적이었지만, 그것도 이국에서 만난 샤먼노파와의 대화를 하면서 점차 원하던 마음이 약해졌다.
지금에 와서는 아무래도 좋다는 느낌일까?
정처없이 각지를 구경하다보면, 운좋게 퀸시를 만날수도 있고, 만나지 못하더라도 전국을 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수확일터였다.
그래서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고 있다고 한 것이다.
"와! 그럼 아저씨는 다른데도 가봤어요?"
이때다! 싶었을까,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나를 보던 아이들이 물어왔다.
주인장과 그 부인은 '어른들이 말할때는 함부로 끼어드는게 아니다."라며 나무랐지만, 나는 웃으며 아이들에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에 마을밖에 별로 나가보지 못했음이 분명한 아이들이 이것저것 물어오기 시작했다.
다른곳은 어떻게 되어있는가?
마을 밖에는 정말로 소문대로 무서운 괴물이 있는가?
등등, 실로 아이들다운 물음에 웃음이 나왔고, 관심없는척 하면서도 귀를 기울이고있는 주인부부를 보며 다시한번 미소를 짓게되었다.
"아저씨는 말이지…….'
빗방울이 점차 굵어지며 결국 장대비가 쏟아졌다.
떨어지는 빗방울이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를 배경으로 나는 어릴적 스님을 따라다니며 보고 듣고 느낀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런 평화로운 시간이 얼마만일까?
◆
ㅡ따닥따닥
지붕에 부딪히는 빗소리를 배경삼아 사색에 잠긴다.
누워있는 곳은 창고.
처음에는 주인부부가 방을 하나 내주려던것을 내가 거절하고 우겨서 이쪽으로 온 것이다.
이런 집이 방이 많다면 얼마나 많겠는가?
기껏해야 2개정도가 최대수고, 방이 하나인 경우가 당연한 정도다.
이 집은 방이 2개나 되는것 같았지만, 다른 방은 직물이나 기타 생계에 관련된 물품이 있는 곳이다.
아무리 친절을 받는다지만 외인이 그러한 방에서 묶는것은 실례일터이다.
그래서 창고중에 쓸만한 창고가 있냐고 물어, 다행히도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창고가 있다하여 이곳을 빌렸다.
원래는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쓰던 창고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각자가 창고를 만들거나 생계를 이어가게 되면서 이 창고의는 결국 쓰이지 않게 되었다고한다.
그때문인지 거미줄이라던가 곰팡이 냄새가 나긴 했지만, 이 밤중에 비를 피하고 밤바람을 막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치이리라.
창고 지붕의 일부는 비가 새어들어왔지만, 창고에 방치되고있던 바가지 등으로 비를 담고 있다.
그런데 바가지등에 빗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도 나름 일품인지라 그 운치를 즐기며 기쁜 마음으로 누워있다.
창고 한구석의 거적대기를 덮고, 영력을 피부에 돌려 추위를 막은 상태기에 쾌적한 상황이다.
다시금 이런 비피할 곳을 외지인인 나에게 제공해준 주인부부와 마을사람들에게 감사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
◆
간밤에 내리던 비가 그쳤다.
구더기 소굴에 있었을 때는 시간감각이 없어졌었기에 그저 자고 일어나는 것을 감각에 의존했었다지만, 이렇듯 해가 뜨기 직전의 여명때 눈을 뜬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눈을 잃어버리고, 벼랑과 지하에 위치해있는 구더기 소굴에 감금된 이후로는 볼 수 없었던 태양.
비록 눈이 온전한 것이 아닌 대체품이기에 그 정도는 흐려보였지만, 그래도 태양이 뜬다는 세상의 이치를 본다는 것은 매우 감격적인 일이다.
처음에는 습관처럼 검을 단련하고 싶었지만, 검을 가지고 있지가 않아 구더기 소굴과 같이 몸을 단련하는 것 만으로 그쳤다.
'검이 필요하겠군.'
별 목적이 없었기에 정했던 방랑길에 최초의 목적이 생겼다.
스승님의 천타수준까지는 바라지 않고, 적당히 쓸만한 검을 얻는 것.
하지만, 현재 이곳이 전쟁이 사그라들어가는 시점이더라도, 검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며 만약 찾더라도 그 검으로 인한 시비에 말릴 가능성이 있음을 알고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매일같이 몸만 단련할 뿐 검을 다루지 않는다면 분명 나의 검술을 무뎌질 것이다.
일단, 간단하게 목검이라도 조각할까?
마침 집에서 농기구등을 챙기고 밭으로 향하는 마을 주민이 있어서 도끼를 빌리고자 했다.
처음 마을 주민에게 도끼를 부탁하자 의심으로 가득찬 경계태도를 보였지만, 내가 주인부부의 도움으로 이 마을에서 잠을 청할 수 있었던 나그네임을 알리자 이내 경계를 풀고 도끼 한자루를 빌려주었다.
남자의 가라사대, 주인부부는 이 마을의 중요 인물이란다.
마을에서 난 물건을 타지에 내다 파는 것으로서 생계를 꾸려가는데, 이런 마을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경제에 대한 이치가 밝지않아 헐값에 팔거나 생필품을 비싸게 사왔다고 한다.
그때 도시에서 장사를 하고있던 주인부부가 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외지인이라고 무시하기 일수였지만, 점차 같이 살게되고 마주치고 이야기하고 도와가면서 주인부부는 마을의 일원이 되었고, 후에 주인부부가 도시에서 장사를 하던 솜씨로 마을의 물품을 정당한 가격에 팔고, 생필품도 매우 싼 가격으로 사오게 되면서 마을의 생활이 윤택해졌다는 것이다.
도시에서 장사를 해온 주인부부였기에 사람보는 눈 또한 좋다하여, 나같은 외지인이 올 경우에도 주인부부의 소개로 오게 된다면 이렇듯 간단한 도움은 준다는 것이다.
과연, 이런 시골마을에 방이 두개인 집이라하여 괜찮게 사는 집인 것은 알았다지만, 그러한 내막이 있었다.
나는 도끼를 빌려준 남자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산에서 목검을 만드는데 적당한 크기인 나무를 찾아 벌목을 했다.
거기에 몸의 단련겸 나를 재워준 주인부부에게 감사를 표할 겸 숲에 떨어진 마른가지나 방금 벌목한 나무등을 챙겨 마을로 내려갔다.
내가 땔감으로 쓸 나무를 건네자 주인장의 아내가 한사코 거절했지만, 조각칼이 필요한데 빌려달라고하며 이 땔감은 재워준것과 식사 그리고 조각칼의 대여값이라고 하며 억지로 넘겼다.
주인장의 아내에게 조각칼을 빌려온 나는 그대로 창고에 돌아가 베어온 나무를 가지고 검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조각 자체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조각칼에 영력을 담아 예리하게 하는 것 만으로도 무리없이 나무는 베어졌으며, 검술을 할 때와 같이 섬세한 손놀림으로 조각칼을 움직이면 된다.
생전부터 이런저런 잡일을 해왔던 탓에 손재주가 없지않았기에 나뭇가지는 금세 꽤나 그럴듯한 목검으로 바뀌었다.
"와! 아저씨 대단해요!"
조각을 하던 중반쯤부터 와있던 아이들이 내가 목검을 완성하자 조잘댄다.
이 마을에도 조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많지만 그들은 필요할때 물건은 만드는 수준의 조각만을 할 뿐이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아무래도 영력과 검술로 조각을 하는 내쪽이 좀 더 화려해 보였으리라.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아이들을 보며, 문득 시즈카를 떠올린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너희에게도 뭘 만들어줄까?"
"정말요?"
"그래."
내가 그리말하자 애들이 서로 무엇을 만들어 줬으면 한다고 재잘댔다.
주인부부의 아이들중 유일한 딸인 소녀는 새모양의 조각이, 그리고 막내는 말 모양을, 그리고 첫째는 특이하게도 달구지를 만들어 달라고했다.
"나도 크면 아빠처럼 할거야!"
웃으며 자기의 꿈을 말하는 첫째를 비롯해, 나름대로의 이유를 대는 아이들에게 나는 웃으며 조각칼과 남아있는 나무조각을 들어올렸다.
◆
아이들에게 조각을 준 뒤 슬슬 마을을 떠날 채비를 하고있던 와중에 또다시 아이들이 들이닥쳤다.
이번에는 주인부부의 세자녀 뿐만이 아닌 다른 처음보는 아이들도 끼어있었다.
처음본 아이들에게 둘째인 소녀가 "이 아저씨야."라며 말하자 아이들이 나를 본다.
처음에는 무슨일인가 했지만, 이내 이 아이들이 들이닥친 것이 조각 때문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아마도, 이 아이들은 주인부부의 세자녀가 조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는 궁금해서, 혹은 부러워서 온 것일터다.
내 조각은 결코 잘만들었다고 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이런 시골에 아이들이 가지고 놀만한 도구는 적을 터이다.
아이들의 놀이는 숨바꼭질이나 제비던지기 등의 놀이 뿐으로, 조각이라는 새로운 장난감은 아이들에게 호기심을 줬으리라.
마을의 어른들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돈을 벌고자 일터에서 일을 하시기에 바쁘고, 간혹 장난감을 만들어 준다고해도 금세 질리고마는 아이들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그럼, 어떻게 할까?
이대로 아이들에게 조각을 해줘도 괜찮고, 무시하고 마을을 떠나도 괜찮다.
그렇지만 마을을 떠나더라도 주인부부에게 감사의 인사는 전하고 싶었으므로 주인장이 돌아오는 시간까지 기다리던가 이쪽이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면 된다.
일하고 있는데 찾아가는 것은 실례이지만, 주인장이 돌아오는 것은 해가 질 무렵일테니 오전중에 마을을 나서야 다음 마을에 해지기전 도착하는 내 입장으로서는 염치없더라도 찾아뵈어 인사를 드리는 쪽으로 하려했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거 아이들에게 조각이라도 해주며 주인장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자, 아니면 점심중 새참을 먹고자 쉴 때 인사를 드리는 것도 괜찮고.
이런저런 생각 끝에 나는 아이들에게 조각을 해주고자 다시 자리를 잡았다.
◆
아이들이 조각을 가져가고 조용해진 창고에서 사색에 잠긴다.
어떠한 물체에 영력을 불어넣어 사용해본건 처음이 아니다.
그렇지만 나의 천타는 영력을 분해하는 성질을 지닌데다가, 전투 상황에서 신체를 강화하기에도 벅찼던 터라 검에는 영력을 넣은 적이 없었고, 이번 조각칼에 영력을 넣은 것이 어찌보면 영력을 물체에 넣고서 무언가를 베어본 최초의 상황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미량이라지만 영력이 불어넣어졌다고 조각칼이 놀라울만큼 날카로워 진 것은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였다.
현세로 오게되며 잃어버린 천타대신 사용할 진검을 찾는 동안 사용할 이 목검.
이 목검은 과연 나의 영력을 어느정도까지 담을 수 있을것인가?
예전 하급사신으로 있을 때 동료에게 듣기로는 물체에 과도한 영력이 불어넣어지면 그 힘을 감당치 못하고 터져나간다고 했다.
나의 영력은 거의 무한하다지만 한번에 낼 수 있는 양은 정해져있다.
그렇다면 나의 최대 영력은 이 목검을 터트릴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그 간단한 호김심이 나를 움직이게한다.
처음에는 영력을 조금씩 넣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많이 넣는다.
초반에 미량의 영력이 들어올때는 아무런 징후도 보이지 않았던 목검이 시간이 지나면서 영력이 강해질수록 조금씩 진동하기 시작했다.
ㅡ우웅!
내 영력의 최대 출력까지 담은 목검이 강하게 진동한다.
그렇다지만 터져나가지 않은 것은 내 영력이 부족해서인가?
예상은 했던 일이지만 역시 씁쓸한 기분은 어쩔수 없다.
그렇지만 이만한 양의 영력을 물체에 담은 후에도 몸에는 영력이 끝없이 샘솟는 이 감각은 그 씁쓸함을 덮고도 남는 기쁨을 안겨줬다.
검에 영력을 유지하며 신체에 영력을 돌린다.
경락에 통할 수 있는 영력의 양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목검에 가는 영력의 양이 줄어들 수 밖에 없다지만, 그래도 전에 비하면 검에도 육체에도 영력을 통한 강화가 배는 늘었음을 확신한다.
내부에서의 강화를 시험해봤으니 이번에는 외부의 차례다.
영력을 외부에 분출하여 몸을 감싸게 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어제 추위를 피하고자 했던 일의 연장선으로 강한 영압을 몸에 두를 수록 피부는 베이지 않게 된다.
일단 최대의 영압으로 피부를 감싼 뒤에 조각칼로 그어본다.
아무런 가공도 되어있지 않은 조각칼은 피부에 생체기 하나 내지 못했다.
때문에 이번에는 순수한 근력만으로 강하게 피부를 베어본다.
이번에도 베이지 않는다.
영압이라는 것은 특성상 영적인 가공이 되어있지 않은 물건으로는 상처가 나기 쉽지않다 라는 말은 어디선가 들었던 것을 떠올리고는 조각칼에 영력을 조금 넣어서 베어본다.
ㅡ주욱
가볍게 베이는 영압.
비록 피부에까지는 영향이 가질 않았다지만, 이토록 적은 영력 만으로도 나의 영압은 쉽게 베였다.
이 영압을 이용한 방어는 영적인 공격에는 무용지물임을 알았으니, 영적인 공격 외의 공격에는 사용해도 되리라.
그외에도 이것저것 확인해본다.
이번 여행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기에 이런 간단한 점검은 필수 일 것이다.
사실 아이들이 조각을 해달라고 오지 않았다면 영력과 육체에 대한 점검은 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보면 될 일.
좀 더 조각을 멋드러지게 해 줬으면 좋았을텐데라고 미묘한 후회를 한 뒤에 창고를 나선다.
시간은 생각보다 늦어진 탓인지 점심이 막 시작된 참이었다.
식사를 하고가라는 주인부부에게 정중하게 사양한 나는, 그대로 아이들과 작별을 나눈다.
단 하루의 인연이었지만 아쉬워하는 아이들과 주인부부에게 미소를 짓는다.
만든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인지 나무내음이 강하게 나는 목검을 간단한 거적대기에 감싸서 가린채 주인부부가 건네준 짚으로 만든 피풍의(避風衣)를 동여맨채로 마을을 나선다.
그럼 어느쪽으로 갈까?
그렇게 잠시 생각한 뒤에 나는 해가 뜨는 쪽이 여명을 보기쉽지 않을까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동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