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사휴의(萬事休矣) 2화
여기, 모든것을 잃은 남자가 있다.
지위, 의지, 의미, 꿈, 희망, 친구, 가족, 명예 등등.
세상을 살아가야하는 의미도 의지도 없다.
살아 생전에도 가족을 잃고 떠돌이로 떠돌다 억울하고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으며, 죽어서는 힘들게 쌓아온 공든탑이 무너져 내렸다.
힘이 없었기에 자신의 가족이자 정신적 지주인 스승을 잃었고, 남은 소중한 가족은 친구의 손에 의해서 간신히 지켰다.
그 자신은 그저 지켜보는게 한 일의 전부였을 뿐.
재능이 없었기에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으며, 단지 기적과도 같은 인연에 의해서 꿈을 이뤘다.
다만, 그 꿈은 허무하게 무너져내렸지만.
하루에도 수천 수만번의 검을 휘두르며 스스로 되새기곤 한다.
자신은 후회할 만큼, 원망할 만큼 노력을 해왔는가?
자만이라 할지 모르지만, 자신있게 그렇다라고 대답할 만큼은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결국, 의미없는 헛수고에 지나지 않았지만.
비웃음, 경멸, 모욕, 비하, 자멸, 후회.
가진것이라고는 검 하나.
해낸 것이라고는 검을 다루는 방법 뿐.
그마저도 남들에게는 통용되지 않은 자기만족의 결과물일 뿐이었다.
허리에 차고있는 검의 무게가 유난히 무겁다.
지금 당장이라도 어딘가에 버려버리고 싶지만, 그것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미련일까?
비틀비틀 정처없이 해매다보면, 날이 밝고 어두워지고를 반복한다.
이슬비에 장마비에 몸이 젖고 마르고를 반복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정처없이 그자리를 맴돈다.
그때문이었을까?
어떻게 왔는지는 모르지만, 호로가 자신을 향해 덤벼드는 것에도 큰 저항을 하지 않은 것이.
이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호로의 공격에 자신을 노출시킨다.
하지만, 호로는 자신을 죽이지 않았다.
단지, 바닥에 억눌렀을 뿐.
무언가에 저항하듯이 바들바들 떠는 호로.
그제야 조금 제정신이 돌아온 그가 호로를 살핀다.
호로 치고는 가느다란 체구에 윤기있는 긴 흑발.
옷은 사패장인가? 호로가 사패장을 입었다는 것이 우습다.
그 기묘한 모습에 웃음을 지으려던 그는 그 입꼬리를 올린 표정 그대로 굳었다.
호로에게서 나직히 새어나온 말이 그의 귀에 들려왔기 때문이다.
"… 오…… 빠…………."
"시즈…카냐……?"
백여년 전, 친구였던 둘과 인연을 끊은 뒤로 가족과의 만남이 소원해졌다.
그것은 가족들이 자신보다 높은 직위에 있었기에 스스로 기피한 것일까?
아니면, 단지 마음이 망가졌던 탓일까?
하지만, 그 긴 세월이 지났더라도 가족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할리 없다.
"오… 빠……."
다시금 반복되는 목소리, 그에 확신을 했다.
이 아이는 시즈카다!
하지만, 어째서 부대장인 이 아이가 호로화가 되어있는 것인가?
그때, 꿈에서도 잊지 못하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떤가? 그녀의 호로화에 대한 감상이?"
하얀 가면.
그리고 검.
여화침입사건때, 자신의 스승을 벤 자.
"…디에즈!"
그 녀석이었다.
◆
실험을 원할하게 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의 방해를 막아야만 했다.
때문에 토센의 참백도 청충의 힘을 빌어 다른이들의 감각을 빼앗고, 시바 시즈카와 그의 감각만을 정상으로 해 놓았다.
그가 처음 보인 반응은 체념 혹은 자포자기.
자신이 잠깐 신경쓰지 않은 사이, 스스로 풍화되어 마모된듯하다.
사실 예상했던 반응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래서야 그의 정신력과 의지에 대한 것은 알 도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계기를 주었다.
『그의 원수가 시바 시즈카를 호로화 시켰다』라는 계기를.
과연, 예상대로 호로의 정체가 시바 시즈카라는 사실에 혼란스러워하며, 디에즈 에스파다에 대한 증오를 보인다.
애써, 그를 습격했던 자가 에스파다라는 사실을 알아온 보람이 있었는가?
그의 눈에 허무한 감정이 사라지고 강한 복수심이 떠올랐다.
그래, 너는 검을 휘둘러야 한다.
다만, 휘두르는 대상이 다르지만 말이다.
이번 실험에 씌인 경화수월의 암시는 두가지.
하나는 시바 시즈카가 호로화가 되었다는 것.
이성이 마비된 시바 시즈카로서는 그녀가 호로화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에게 전할 도리가 없다.
때문에 경화수월로, 시바 시즈카가 말하는 것처럼 느끼게 해, 그녀가 호로화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암시.
그것은 디에즈라고 여기고 있는 대상에 대해서다.
그래, 경화수월은 최면을 걸었다.
실제로 시바 시즈카인 호로를 디에즈 에스파다로 보이게 하는 것을.
그를 넘어트리고, 그에게 시바 시즈카라는 점을 알린 것은 단순한 실체가 없는 허상.
디에즈라 여겨진 존재가 진짜 시바 시즈카다.
그렇다.
그는 자신의 복수심과 검을 시바 시즈카에게 겨눈 것이다!
둘중 한명이 죽음을 맞이할 때 쯤, 이 경화수월은 풀리겠지.
그가 디에즈의 환영을 베던, 베이던.
결국 그는 자신의 가족에게 검을 들이댄 것이다.
어느 쪽이던간에, 이 실험이 끝나고 그의 정신이 온전할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말이다.
◆
빠르다.
영안이 아닌 단순한 눈이었다면 움직임을 따라 갈 수 조차 없는 속도.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라기에는 요란한 폭음이 울린다.
상대의 움직임은 짐승과도 같아, 솔직히 말하자면 전에 싸웠던 디에즈가 맞는지조차 애매해졌다.
이상하다라는 감은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감각은 그가 디에즈가 맞다고 계속 호소해온다.
혼란스럽다.
검을 휘두르는데에도 주저함이 생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상처가 늘어난다.
처음 상처는 어깨가 베인 것.
두번째 상처는 오른쪽 허벅지가 파인 것.
그 외에도 점차 늘어나는 상처는 몸을 둔하게 한다.
천타가 무겁다.
그렇게 느낀 순간, 디에즈의 움직임이 이상해졌다.
뭔가에 주춤거리듯 엉성한 움직임.
그것이 돌파구다!
본능적으로 느낀 나는 검을 휘둘렀다.
◆
겨우 이것 뿐이었다.
시바 시즈카가 이성을 잃고 덤비는 상황.
그 상황에서 그의 방어 능력은 겨우 그정도이다.
부대장급과 하급사신의 차이는 이리도 압도적이다.
인간으로서 가지는 자비, 망설임 따위가 사라진 시바 시즈카는 본연의 힘을 거의 대부분 발휘하고 있었고, 그것은 원수를 만난 환영에 사로잡힌 그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서로의 기백이 순수하게 부딪혀서, 깨진 것은 결국 압도적으로 약한 쪽이었다는 이야기.
이대로라면 단숨에 결판 날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야 극한의 상황이 되지를 않는다.
내가 원하는 상황은 『그가 그의 검으로 가족을 죽이는 상황』인 것이다.
때문에 귀도술을 이용해 시바 시즈카의 사지중 일부를 부러트렸다.
아마, 경화수월에 걸린 둘은 알아차리지 못했겠지만.
그 이후도, 계속 그 행위를 반복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판이 나지않은 것은 둘의 실력차가 그만큼 컸던 탓일까?
아마도, 호로화 때문이겠지.
그같은 검부림을 계속하니, 과연 망가졌다하더라도 노련한 그 답게 단숨에 승기를 잡는다.
호로화라는 껍질은, 그가 가진 영자분해의 천타 앞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듯 계속 상처를 냈다.
자, 그럼 이제 마무리다.
순보로 시바 시즈카의 뒤로간 나는 참술로 단숨에 전신을 낭자했다.
아무리 호로라 하더라도 이정도 상처라면ㅡ
그 이상사태를 알아차리지 못한 그는 검을 들어ㅡ 시바 시즈카의 심장에 찔러넣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는 경화수월을 풀었다.
◆
미친듯이 검을 휘둘렀다.
스승의 복수를 위해서,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자신의 생명을 태워버리기 위해서.
이상하다고 감이 고한다.
하지만, 전혀 이상이 없다고 감각이 말했다.
그 모순 속에서 나는 단지 마음이 편하고 싶어서 검을 휘둘렀다.
거동이 주춤하다가 마침내 쓰러진 디에즈.
이상하다.
그는 싸움이 일어난 뒤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상하지 않다.
그와 자신은 대화를 나눌 이유가 없다.
이상하다.
그렇게 압도적으로 강했던 상대가 이리 쉽게 당하다니?
이상하지 않다.
나도 나름 강해졌던 것 아닐까?
아니야. 아니야.
이상해. 이상해.
이것은 명백하게 이상하다.
자신은 그를 벨 실력이 되지 않는다!
"깨져라 경화수월."
쨍그랑.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자신의 검이 상대의 심장 깊숙히 박혀들었다.
"시즈…… 카……?"
심장이 찔린 이는 시즈카.
심장을 찌른 이는 나 자신.
털썩.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마음이 정신이 마모된 탓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강한 충격을 받은 탓이다.
예전의 그였다면, 시즈카와 디에즈를 구별하지 못했던 것에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예전의 그였다면, 거동이 수상한 디에즈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을 것이다.
예전의 그였다면, 모순점을 알아채고 깨달았을 것이다.
ㅡ하지만, 그러기에 그는 이미 너무 심하게 망가져 있었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부들부들.
검을 잡던 손을 떨며, 바닥에 주저앉아 웃음을 터트린다.
"내, 내가……."
내가 무슨짓을?
그 말이 차마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세계가 무너진다.
손과 발 끝이 점차 감각이 사라져가며, 허무하게 웃는다.
"네가 죽인 것이다."
누구의 목소리였을까?
하지만, 그 말은 그의 깊숙한 곳에 고스란히 박혀들었다.
그렇다.
내가 죽인 것이다!
시바 시즈카를ㅡ 자신의 하나뿐인 가족을 죽인 것이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ㅡㅡㅡㅡㅡ! ! ! ! ! ! !"
마음이, 결국,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