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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바람에 우는 칼
제 1막. 동부 거인족 반란을 평정하다
서안 2년, 어느 늦은 가을. 제국의 동쪽 끝은 산세와 기후가 험해, 그 땅에는 이미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하얗게 눈 덮인 산맥을 바라보았다. 이 땅 너머로는 제국의 징수관이 가지 않으니, 이는 곧 제국의 경계였다. 사위는 고요 속에 침잠해 있었다.
“준비는 끝났다.”
돌아보니 적장이 마침내 준비를 갖추고 일어섰다. 거인족의 족장은 그 키가 삼 장에 이르렀고 오른손에는 큰 도끼를, 왼손에는 전투 망치를 들었다. 제철 기술이 모자란 거인족에게서 흔히 보기 어려운 중병기였다. 이 전쟁이 시작된 이후 노획한 것이 분명했다. 그는 제국 거신병에게 맨손으로 덤벼 무기를 빼앗고 다시 그 무기로 스무 기가 넘는 거신병을 쓰러트렸다.
그 족장의 뒤로 삼백이 넘는 거인들이 모여 있었다. 산맥에 뿔뿔히 흩어져 살던 거인들을 규합한 것만으로도 그 능력의 끝을 짐작하기 어려운데, 일신의 무용마저 뛰어나니 제국 동부군은 지리멸렬하였다. 규합된 거인들은 무서운 힘으로 제국의 영토를 유린했다. 육개월간 밀리고 밀린 끝에 마침내 동방이열대부 대장군 엄루가 전사하니,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제국은 은성공 단야를 파견하였다. 그가 군을 정비하여 반격하니 전선이 고착되어 마침내 작금에 이르렀다.
단야가 나직히 물었다.
“그럼 약속을 지킬 테냐.”
거인족의 장이 답했다. 저 먼 곳의 동굴이 울리는 듯한 소리였다.
“산의 혼은 약속을 지킨다.”
“그렇다면 나도 제국 무사의 명예를 걸고 약속을 지키마.”
그는 돌아서서 자신의 부하들에게 향했다. 일천여명의 병사와 십여명의 장수가 도열하고 있었다. 거인들은 가장 작은 자도 이장 반을 넘어가고 그 족장과 같이 큰 자는 삼장에 달하였으나, 그런 자들을 앞에 두고도 제국군은 군기가 삼엄하고 기치가 정연했다. 그들을 돌아보다 부관인 마람 앞에 가서 섰다.
“마람, 너의 뇌호를 빌리겠다.”
“영광입니다.”
마람이 공손히 푸른 옥구슬을 내밀었다. 그것은 혼옥주라고도 불리고 넋구슬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거신병을 움직이는데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었다. 그는 도열한 부하들의 뒤, 무릎을 꿇고 있는 열 기의 거신병들 중 가장 왼쪽의 것에 올라탔다. 자리에 앉으면 바로 아래에 거신병의 이름이 쓰여진 명판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 구슬을 끼워 넣을 만한 자리가 있있었다. 있을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을 놓으니 혼옥주와 함께 명판의 뇌호라는 글자가 파랗게 타올랐다.
혼옥주의 청염이 거신병의 가장 깊숙한 내부에 이르러 쟁여둔 귀석이 불타고 뜨거운 열기가 일어났다. 자신의 기와 신, 그리고 쇠로 만들어진 체를 하나로 모으니 이를 합신이라 한다. 이십이 개의 큰 톱니바퀴와 백 팔십 구개의 중간 톱니바퀴, 팔백 사십 팔 개의 작은 톱니바퀴, 삼천 삼백 삼십 삼개의 아주 작은 톱니바퀴와 지렛대가 돌아가며 육중한 쇳덩이가 인체의 움직임을 모방했다. 그 정묘함이 인세에 다시 없을 정도였으며 오직 신의 창조물들만이 이보다 낫다 할 수 있었다.
거신병 뇌호는 그의 움직임을 충실하게 따라 창을 들어올렸다. 제국의 전통적인 창술에 따라 적을 향해 비스듬히 서며 양 다리를 어깨 너비로 벌렸다. 오른 다리는 가볍게 굽히고 왼 다리는 좀 더 굽히며 그 발 끝이 적을 향하여 섰다. 등은 곧게 펴고 시선은 적을 똑바로 향했다. 양 팔은 자연스럽게 늘어뜨리며 창을 앞으로 내밀었으나 길게 뻗지 않고 절반 가량 몸의 권역에 넣었다. 거인의 족장이 이 모습을 보니 기본에 충실하며 안정감이 있어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아라라라랏!”
기괴한 거인의 전투 함성이 가라앉은 공기를 흔들었다. 하늘을 향해 양 손을 뻗은 터라 그 가슴이 훤히 열렸는데,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창이 뻗어나왔다. 뒷발로 땅을 밀며 반보 앞으로 나가 창을 밀어넣는다. 한 손을 완전히 놓고 오른손으로 밀어 뻗으니 거인의 걸음으로도 네 발자국은 떨어진 거리를 단숨에 갈랐다. 무게가 삼만관에 달하는 거신병이 내딛는 걸음에 대지가 탄식하니 눈보라가 분분하였다.
그러나 거인의 족장은 민첩하게 움직여 이를 피했다. 그렇게 큰데도 발놀림이 가볍고 소리며 진동이 거의 없었다. 피할 뿐만 아니라 옆으로 돌아 가까이 다가와 도끼를 후려치는데, 육중한 거신병은 가까스로 허리를 돌려 창대로 이를 튕겨내었다. 강철로 이루어진 무기가 충돌하자 주홍 불꽃과 함께 공기가 깨어지고 산이 웅성거렸다. 거인은 그 힘을 받아 뒤로 물러서 거리를 벌렸다. 거신병이 재차 창을 내찌르는데 이번에는 다리를 노려 아래로 찔렀다. 거인은 또 다시 뒤로 움직여 피하나 싶더니 도끼를 내리쳐 창대를 찍어버렸다. 창을 도끼로 눌러 멈춰세우고 내딛어 망치를 휘둘러왔다. 이 망치는 거신병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무기로 당하면 거신병의 갑주가 우그러들 뿐만 아니라 그 충격은 안의 탑승자를 부상입히고 때론 죽일 수도 있었다.
맹포한 일격이 바람을 흔들어 놓았다.
거신병은 창을 놓으며 칼을 뽑았다.
거인족의 족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잘려져 나간 자신의 팔과 어느새 거리를 격하여 베고 지나간 거신병을 번갈아 보았다. 떨어진 망치 위로 끈적이는 피가 흘러내렸다. 얼마 있지 않아 그의 머리통이 굴러떨어졌다. 피의 비가 내려 병사들을 적셨지만 그들은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미안하다, 마람. 너의 뇌호를 망가트렸구나.”
“아닙니다. 장군님의 무를 감당하기에 뇌호가 부족했을 뿐. 그러한 경지를 보여주시니 오직 경탄할 따름입니다.”
망치가 횡으로 날아오는 짧은 한 순간에 몸을 숙이며, 오른 발은 오히려 숙인 가슴까지 치켜들고, 손은 칼을 뽑아 휘두른다. 그 칼이 적을 치는 순간 발이 땅에 떨어지며 발구름을 더한다. 이 모든 행위가 망치가 절반도 채 휘둘러지지 못한 사이에 이루어졌다. 인간의 몸으로 펼치기에도 어려운 한 수를 육중한 거신병으로 펼쳐내니 뇌호의 무릎 관절이 부숴져 버렸다. 다리를 완전히 교체하기 전까지는 다시 움직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마람은 그러한 경지를 본 것만으로도 기뻐 어찌 할 줄을 몰랐다.
그러나 제국의 군사들이 승리에 기뻐하는 동안 침울한 표정의 거인들이 다가왔다. 그 중 가장 작은 거인이 앞으로 나왔다. 가장 작다 하여도 이 장 반이나 되어 앳됨을 알기 어려워으나, 육 척이 조금 못되는 단야 앞에 서자 그 기세가 위축되어 그제야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제국의 장군이여. 무명 드높은 당신이라면 명예를 지켜줄 줄 아오.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게 해 주시오.”
제국은 본래 벤 적장의 목을 기치에 걸고 제를 올려 전사자의 원혼을 달래곤 했으므로, 이는 상당히 무리한 요구였다. 그러나 은성공 단야는 군인인 동시에 무인이었기에 결투에서 벤 적장에게는 그러한 수치를 주지 않았다.
“그리 하라. 그리고 약속을 지켜라.”
“알겠소. 앞으로 삼년 간 산에서 나오지도 말고 인간을 잡아먹지도 않으면 되는 것이지. 그러나 삼년 뒤에는 반드시 돌아오겠소.”
거인들은 쓰러진 족장의 시신을 수습하여 산 속으로 들어갔다. 그것으로 거인과의 전란은 끝났다고 할 수 있었다.
“저들을 몰살하거나 산맥 너머로 쫓아보낼 수도 있었을 것을, 이렇게 유예를 주며 끝내야 하다니 원통합니다.”
승리의 기쁨도 잠시, 마람은 이 상처뿐인 승리에 개탄했다. 격퇴하기는 했으나 은성공이오기 전까지 패배를 거듭해 잃어버린 장수가 수십이요, 병사의 수는 기천, 민간인의 피해는 사람이 아니라 사라진 마을 숫자를 세는 것이 빠를 지경이었다. 단야는 대답하지 않고 투구와 갑옷를 벗었다. 홀가분한 무복 차림이 되어, 자신의 칼을 허리에 차고는 말 위로 뛰어올랐다.
“폐하께서 부르시니 장수 된 자가 거부할 수가 없다. 더구나 이 결투를 이끌어내기까지 아흐레나 걸렸으니 너무 늦지 않았나 한다. 나는 이만 가봐야겠다. 마람, 새로운 칙령이 올 때까지 네가 동방이열대부의 직무를 수행하라.”
“장군님, 설마 지금 바로 떠나시려는 겁니까?”
“마람, 내 말을 들어라. 곧 운룡궁에 암운이 드리울 것이다. 제국의 중심이 흔들리면 제국 전체가 흔들린다. 거인들은 삼년간 나오지 않을 테니, 너는 산맥에는 신경쓰지 말고 압강을 주시해라. 큰 거미들이 강을 건너려 할 것이다. 유역에서 기다리며 강을 건너는 중에 격파하면 수월하게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말을 걷게 하기 시작한 그를 쫓기 위해 마람은 정신없이 달려야 했다.
“장군님, 장군님! 이 무슨 말씀으십니까? 또 압강은 북방삼열대부의 관할이며 북방군이 막아낼 텐데, 저희더러 막으라는 것은 무슨 의미이십니까?”
“북방삼열대부는 아마 운룡궁으로 향할 것이다. 그들을 막지 마라. 싸우지 마라. 제국의 군대가 서로 싸워서는 아니될 노릇이다. 다만 그 빈 자리를 대신해라. 기억해라, 마람. 동부와 북부가 모두 네게 달렸다.”
거기까지 말한 단야는 홀연히 말을 박차고 떠났다. 마람은 그 뒤를 쫓아 달렸으나 사람의 다리로 말을 쫓을 수는 없었다. 그는 장탄식하며 눈시울을 붉혔으나, 장수나 병사들 중 이를 책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가진 재주가 뛰어나나 마음이 여린 마람 뿐 아니라, 마음의 준비를 이미 하고 있던 동부군의 정예들 중 울고 싶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들은 이미 어떤 비극을 예감하고 있었다.
제 2막. 운룡궁에 돌아와 황제를 알현하다
은성공 단야의 본래 직책은 친왕수호대 적호단 단주이며, 현 황제 서안제가 왕위계승서열 3위의 서친왕이 되자 그 호위직을 맡았다. 서친왕이 열 살 나이에 왕위에 봉해진 후 열 세살에 서안제로 황제로 즉위할 때까지, 약 삼 년간 여든 한 차례의 암살 시도를 막아내었다. 암살을 막지 못한 서열 1위의 만친왕과 2위의 우친왕은 물론 서열 10위까지의 친왕이 모두 죽었음을 미루어 보면 그의 공이 얼마나 큰 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그에 더하여, 거인족의 반란으로 패주를 거듭하던 동부군을 지휘하여 거인들을 밀어내고, 불세출의 영웅이었던 족장을 결투로 쓰러트리니 그 군공이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개선 장군의 귀환은 너무나도 조용히 이루어졌다.
며칠이고 말을 달려 겨우 도착한 운룡궁은 제국의 동쪽 끝만큼이나 고요했다. 문무 백관도 없고 경비병도 없고 시녀들도 없었다. 마르고 앙상한 가지에 매달린 나뭇잎들만이 늦가을 바람에 흔들거렸다.
제지하는 경비병이 아무도 없었으나, 나한문에 이르러서는 말에서 내려 궁궐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대신 법륜문을 지나면서도 칼을 끄르지 않았다. 본래 친왕수호대의 자리에 있었을 뿐 아니라, 현 서안제의 즉위와 함께 태무황위호장의 직위를 받아 황제를 알현할 때도 칼을 찰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세선각에 들어서려 하니 창을 내밀어 제지하는 자가 있었다.
“멈춰라. 그대가 은성공 단야인가?”
단야가 가만히 보니 키가 팔척에 이르고 도끼눈에 수염이 덥수룩한 자가 서 있었는데, 전혀 보지 못한 인물이었다. 운룡궁을 호위하는 이를 모두 알지는 못하나 세선각은 직접 뽑은 이들로만 호위하도록 했었다.
“그러는 그대는 누구이기에 나를 막는가?”
“나의 이름은 악위라 한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는 되물었다.
“남방의 맹장 악위인가. 그런 그대가 무슨 권한으로 나를 막는가? 오히려 내가 찾아오는 그대를 막아야 할 터인데,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구나.”
“나를 아는군. 제국 태무황위호장께서 알아주시니 영광으로 여겨야 하는 건가?”
“내가 세 번째로 묻는 것은 신성한 궁에 피를 뿌리고 싶지 않아서 일 뿐이다. 만약 이번에도 어째서 나를 막는지 답하지 않는다면 더는 참지 않겠다.”
“참으로 오만하구나. 그런 말을 듣고도 참을 무장이 어디……”
악위는 호탕하게 웃으려던 자세 그대로 멈췄다. 서늘한 칼이 목에 닿아 있었다. 그는 보지 못했다. 자신의 창대가 베어지는데도 알지 못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눈만 굴리는데, 짝, 짝, 짝 하고 어디선가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단야는 칼을 거두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친우인 서백이 서서 웃음짓고 있었다. 서백은 호방하게 한 번 웃고는 악위에게 말했다.
“악위, 자신보다 경지가 높은 이를 함부로 시험하지 마라.”
“… 당신이 비록 진군만병호장이라 하더라도 이 악위에게 명령할 수는 없소. 나는 오직 중현공을 따를 뿐이오.”
“그렇다면 그 목이 떨어져야 정신을 차릴 것인가? 물러나라. 그대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악위는 분하였으나 감히 대꾸하지 못하고 자리를 떠났다. 은근히 자신의 강함을 과시하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데, 오히려 경지가 다름을 느꼈으니 자신감을 잃었다. 그가 떠나자 단야는 칼을 갈무리 하였고 서백은 그 어깨를 두드렸다. 여섯 달 만에 만나는 친우 앞에서 단야는 엷게 웃음지었다.
“하하, 이 친구, 반년만에 돌아와서는 집에도 들르지 않고 곧장 궁으로 가는지 원.”
“칙명을 받았으니 지체할 수 없지.”
“거 참 사람 하고는. 그리 서두를게 무에 있는가? 오랫만에 봤으니 가볍게 술이라도 한 잔 하는 것은 어떤가?”
단야는 한 걸음 물러서서 서백의 손을 떼어냈다. 그들은 서로를 말 없이 주시했다. 언제나 진중한 단야와 언제나 웃는 서백의 얼굴은 서로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스산한 바람에 낙엽이 흩날렸다.
“폐하를 알현해야겠네.”
“알겠네, 알겠어. 고지식해서는. 하지만 나중에 술 한 동이 지고 찾아가지.”
서백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을 내젓고는 휘적휘적 걸어갔다. 단야는 그제야 칼집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서백마저 사라지자 운룡궁은 진정 고요해졌다. 정적 속에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세선각은 육건 십이년에 지어진 것으로 수백년이나 된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불을 피워 내부를 덥힐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안은 싸늘하였고 한 점의 온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문가에 무릎을 꿇었다. 본래 시종이 등청하는 이를 호명해야 했으나 아무도 없었다.
“폐하, 신 단야의 등청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한참 뒤, 세선각의 가장 심처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답했다. “들어라.” 그와 같은 무인이 아니었으면 듣지 못했을 정도로 작고 가냘픈 목소리였다. 그는 신을 벗고 청 위로 올랐다. 내딛는 걸음 마다 냉골 아닌 자리가 없어 발걸음이 무거웠다.
“은성공인가.”
“황제 폐하 만세. 폐하의 부르심을 받자옵니다.”
황제가 물었다.
“거인족은 어찌 되었는가?”
“봉월산맥까지 밀어내었으며 그 족장을 베었습니다. 3년간 제국 땅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하고 방비를 두텁게 쌓았습니다.”
“짐은 그들을 소탕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렇지 않았는가?”
“황송하오나, 돌아오라는 칙명을 따르기 위해 서둘렀기에 그리 되었습니다. 임시로 군을 통솔하는 동부군 전벽요장 마람은 성실하며 믿을 수 있는 자라……”
“시끄럽다!”
황제가 소리질렀다.
“전장에 나간 장수를 이치에 맞지 않게 불러들이는 황제가 어디 있느냐? 짐이 그리 어리석게 여겨지더냐?”
황제의 목소리는 날카로웠고 쇳소리가 났다.
“정녕 그대마저 나를 능멸함이냐? 내가 그대를 변방에 쫓아내어서, 내가 그대의 것을 빼앗아서 그런 것이냐?”
그는 아무 말 없이 다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비어 있는 세선각은 참기 어려울 정도로황량하고 공허했다. 그 안에서 울리는 황제의 말 또한 공허했다.
“고개를 들어라.”
“… 삼가 존안을 뵙습니다.”
황제는 쇠약해져 있었다. 늦가을에 접어들었는데도 용포는 얇은 비단으로 된 여름용이었고 그마저도 흐트러져 있었다. 혼자 힘으로는 입기 어려운 용포를 억지로 걸친 탓이다. 머리는 풀어헤치고 있었고 화장도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 안색이 푸르고 호흡이 불규칙했다.
“가까이 오라.”
단야는 무릎걸음으로 용상 앞으로 다가갔다. 황제가 작고 여윈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졌다.
“은성공, 나를 안아라.”
“폐하.”
“어서, 예전 나를 안아주던 그 때처럼 안아라.”
팔을 뻗어 황제를 끌어안았다. 그의 품 안에서 황제는 작은 새처럼 떨었다. 그녀의 손발은 시체처럼 차가웠고 이마는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열에 들뜬 그녀는 쉼없이 속삭였다.
“은성공, 나를 버리지 말아라. 그대마저 나를 버려서는 아니된다. 은성공, 나를 보아라. 이제 나는 혼자 용포를 입을 수 있다. 도움 없이 식사를 할 수도 있다. 물로 씻기도 하였다. 은성공, 나는 이제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폐하. 감히 청컨데 은검의 넋구슬을 돌려주십시오.”
황제가 그를 밀어냈다. 힘은 없었지만 완강한 거부의 몸짓에 단야는 순순히 밀려났다.
“혼옥주가 필요했구나. 그걸 가지러 온 게냐? 어림도 없다. 난 그걸 아무에게도 주지 않았어. 아무에게도 주지 않았다고. 왜인 줄 아나? 내가 그걸 갖고 있어야 그대가 돌아올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대의 목숨처럼 소중한 은검을 내가 갖고 있어야 했다. 내가 맞았지? 그대가 요구하는 것을 보니 내가 맞았구나. 역시 맞았어.”
울면서 웃다가 또 표독스럽게 웅크렸다.
“폐하께서 부르신다면 신은 언제든지 돌아옵니다.”
“거짓말!”
황제가 악을 썼다. 기력이 쇠잔하여 다 죽은 짐승마냥 꺽꺽거렸다.
“그러면 왜 떠나갔느냐? 저 먼 동부로, 춥고 험악한 동부로.”
“신은 오직 폐하의 뜻을 따를 뿐이옵니다.”
“원하지 아니하였다! 내 뜻이 아니였어! 그것도 모르는가? 그대는 그토록 모르는가?”
황제가 갑자기 앞섶을 풀어헤쳤다. 열 다섯 소녀의 젖가슴이 드러났다. 앙상하게 말라 늑골이 도드라진 비참한 광경이었으나 제국의 무장은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황제는 품에 숨겨놓았던 구슬을 자랑스레 꺼내보였다.
“내가 이걸 지켰다. 흉측한 무리들이 이걸 빼앗으려 했으나 내가 지켜내었다. 은성공, 내가 그대의 은검을 지켰다. 놈들이 아무리 윽박지르고 조르고 회유하여도 나는 이것을 지켜내었어. 저 간사한 무리들, 사이한 무리들로부터…”
황제가 또 울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돌려주면 그대는 내게 무엇을 줄 것인가?”
“아무 것도 드릴 수가 없습니다, 폐하.”
그는 혼옥주를 받아들었다. 소녀가 품에 품고 있던 구슬은 아직 온기가 조금 남아 있었다.
“폐하는 제국 만백성의 어버이시며 문무 백관을 다스리시는 군주이시옵니다. 이미 폐하께서 가지신 것을 다시 폐하께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 것이 되어라, 은성공.”
황제가 다시 안겨왔다. 검불처럼 작고 마른 몸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하게 끌어당겼다.
“날 안아다오.”
그는 황제를 감싸안았다. 황제가 발버둥쳤다.
“그렇게 안지 말고 여인을 안 듯이 안아라. 나를 그대의 것으로 만들어라. 어서, 어서. 이제 은검마저 주었으니 내게 남은 것이 그것밖에 없다. 황명이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쳐도 강철같이 단련된 무사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황제는 마구 깨물기 시작했다. 귀도 물어뜯고 턱도, 빰도, 어깨도, 물어뜯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물어뜯었다. 근육까지 닿는 상처는 없었으나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몹시 흘렀다. 단야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끌어안고 있다가, 돌연 나직히 노래하기 시작했다.
매가 나무에 내려와 쉴 적에
구름이 해를 덮었다.
깃털을 고르니 바람이 험하다.
창칼을 다듬는 자
피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하늘을 배회하는 매의 그림자
내 육신 스러지면
너와 같이 쉬련다
전몰한 장병들을 위로하는 장송곡이었다. 자장가와는 거리가 멀었으나 그는 같은 노래를 반복하여 불렀다. 그것이 도움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황제는 마침내 잠잠해졌고, 흐느끼다 이윽고 잠이 들었다.
피와 눈물로 더럽혀진 얼굴을 닦아주려다 그만두었다. 황제가 다시 깰까 두려웠던 것이다. 황제를 용상에 조심스럽게 눕히고 앞섶을 여며주었다. 또 그 위에 자신의 겉옷을 덮어주었다. 그는 뒷걸음질쳐 세선각을 나왔다.
“신 단야, 퇴청하겠습니다.”
갑자기 울음소리가 커졌으나 그는 뿌리치고 걸어나갔다. 가을 바람이 스산하여 추운 것을알았다.
제 3막. 평생의 지기와 술과 칼을 나누다
운룡궁을 나와 말을 끌고 길을 걸었다. 제국의 수도 경성은 인구가 일만여 호에 달하니 진실로 역사에 유래가 없는 대도시였다. 그만큼 도시가 넓다 하나 운룡궁이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또 여러 관청과 대부호, 관료들과 유수의 가문들이 땅을 많이 차지하였기에 필연적으로 많은 인구가 좁은 땅에서 번잡하게 살 수 밖에 없었다.
허나 경성의 대로를 걷는데도 이전의 영화는 간 곳이 없고, 칼을 차고 창을 든 병사들만이 간혹 보일 뿐이요 백성은 거의 보기가 어려웠다. 장사치가 몇 명 거리에 보였으나 맥이 없고 또 물건 살 사람도 없으니 외려 착잡함을 더할 뿐이었다.
“나으리, 한푼만 적선해 주십시오.”
더러운 아이들이 손을 벌리고 구걸했다. 그냥 구걸하는 아이도 있었고 어디서 꺾어온 꽃을 파는 아이도 있었다. 하나같이 비쩍 말랐고 기운이 없는 아이들이었다. 처음 한 두번은 동전을 떨구어 주었으나 세 번, 네 번 같은 일이 있자 더 이상 그럴 수도 없었다. 돈을 잘 주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아이들 사이에서 금방 퍼졌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는데 한 무리의 부랑자들이 그를 포위했다. 손에 손에 조악하나마 칼을 들었고 눈이 희번득거리며 피맛을 여러번 본 듯 하였다. 긴 칼을 찬 제국의 무사를 상대로 노상강도 짓이라니, 본래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백성의 피를 보고 싶지 않으니 물러서라.”
“그게 뭔 소린가 잘 모르겠고, 나으리가 말도 있고 돈 좀 있어뵈는데 적선 좀 하시면 복 받을 거외다. 어서 당하고 왔는지 모르지만 몸도 성치 않은데 또 험한 꼴 보실 수 있겠소이까?”
킬킬대며 웃더니, 단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자 주춤하며 칼을 내밀었다.
“이러지 마쇼. 우리도 송장 치우면 영 찜찜하거든, 그냥 가진 것만 내놓고 가는 것이 이로울게요.”
그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려다, 다시 고개를 내렸다. 하늘을 향하자니 부끄러움이 많고 땅에 탄식하자니 조상을 뵐 면목이 없었다. 앞을 보는 것 외에는 고개 돌릴 곳 조차 없었다.
“미안하구나.”
그는 칼을 뽑아 말의 목을 베었다. 그 눈부신 일격에 질린 자들이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는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칼을 갈무리하며 그들에게 말했다.
“이 말을 나눠 먹어라. 주변의 굶주린 자들도 불러 먹여라. 허나 길가는 행인을 공격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는 참담한 심정으로 길을 걸었다. 많은 관청들이 비어 있었다. 병사도 없고 나졸도 없는 관청들이 수두룩했다. 그 많은 병사들이 다 어디 갔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연 부랑자들이 들끓었고 백성들은 더욱 더 거리로 나서지 않았다. 양무감 병기고도 인적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으나, 다만 거신각에서만은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양무감 병기고는 각 군에 배치되기 전의 병기들을 보관하는 곳이었고, 그 중 거신각은 이름 그대로 거신병들을 보관하고 있었다. 허나 거신각 안은 텅텅 비어 있었고 오직 하나의 거신병만이 남아 있었다.
백철로 만들어져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고 외피의 갑주는 날렵하고 완곡한 곡선을 가지고 있다. 제국 십이검의 하나이며 그 역사는 제국의 건국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작에 선계의 손이 닿았다는 설이 있으나 선도의 맥이 끊긴지도 천년, 이제와 그 진위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이제야 오셨군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너무 늦으셨습니다. 이제와 그런 말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시면 속이라도 덜 끓지요.”
노인은 망치를 들어 내리쳤다. 깡, 하고 불꽃이 일었다. 제국 십이검은 골격부터 갑주까지 백철로 만들어져, 설사 부서지더라도 혼옥주가 있는 한 스스로를 복구할 수 있었다. 허나 무구는 백철로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애초부터 무구를 갖고 있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선인의 도는 병기를 들지 않는다 하여 거신병이 전쟁에 쓰이는 것을 비난하였다. 이 또한 확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여, 병기는 철에 여러 금속을 섞어 만들 수 밖에 없었고, 무뎌지면 날을 세워야 했는데 그 거대한 무구를 관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번에 전부 달굴 수가 없어 일정 부위를 달구고 두드려 원하는 모양을 잡은 뒤 다음 부분을 다시 달구고 두드리는 작업을 연이어 하는데, 이 때 각 부위의 연결점은 덜 달구어진채로 두드려져 차후에 쉽게 깨어질 염려가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다시 그 연결부를 달구고 두드리는 작업을 거친다. 창이나 망치에 비해 도끼와 칼은 날을 세우기가 특히 어려웠는데 은성공 단야가 가장 자신있어하는 무기가 칼이라 장인의 수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단야는 돕지 않았다. 무사에게 무사의 도가 있듯이 대장장이에게는 대장장이의 도가 있다. 불과 철을 다루는 그들의 기술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 자가 함부로 다가설 수 있을 만큼 쉬운 것이 아니었다. 노인은 웃통도 벗고 망치질에 매진했다. 한 번 망치를 휘두를 때마다 거기에 쌓은 세월이 묻어나온다. 그 박자, 그 정교함. 보이지 않는 철의 결을 따라 약하게, 때로는 강하게 때려 형태를 만든다. 형태를 만들 수 있는 대장장이는 많으나 그 형태 속에 강인함을 새길 수 있는 자는 몇 되지 않는다.
“좋은 대장장이로군.”
서백이 말했다. 그는 정말로 술을 한 동이 둘러메고 있었다. 이미 몇 잔 했는지 얼굴이 붉었다. 단야가 돌아보자 입가로 웃음을 흘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놀랍군. 양무감 병기고에 아직도 이런 대장장이가 남아 있다니.”
철을 두드리는 장인의 손길에는 변한 것이 없다.
“의기를 가진 자는 다 죽고, 처세를 아는 자는 다 비굴해졌지. 그런데 여기 어디에도 끼지 않은 자가 있군.”
망치질이 돌연 뚝 멈추더니 퉁명스럽게 이르기를, “은성공 나리. 거기 시끄러운 자가 있는데 좀 치워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서백은 웃었다. 아무튼 그는 많이 웃었다. 기분이 좋아도 웃었고 기분이 나빠도 웃었다. 아무 이유 없이 웃을 때도 많았다.
“나가지. 노을이 좋더군.”
해가 저물고 있었다. 가장 일상적인 풍경도 빛과 그림자의 장난 속에 아름다움을 더하는 시간이었다. 낙엽 떨어지는 빈 뜰에 서서, 텅 빈 가슴이 참을 수 없이 아려올 때까지 석양을 바라보았다. 서백이 술잔을 내밀었고 그는 말없이 그것을 받았다.
“참 어지간 하구나.”
서백이 말했다.
“반년만에 돌아와서는 운룡궁부터 가더니, 결국 집에도 안 돌아가고 병기공에 오다니. 집에는 돌아가지 않을 셈인가.”
“장수 된 자가…”
“부인이 회임했다는 사실은 아나?”
단야는 깜짝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큰 소식이 있다면 응당 편지를 보냈을 터이나 그가 나간 곳이 변방이고 또 험한 전장이라 편지가 닿지 못했다.
“전장에 나간 남편이 언제 돌아오려나 노심초사하는 부인이 안쓰럽지도 않던가.”
단야가 아무 대답이 없자 서백은 웃음에 한숨을 섞어 술을 따랐다. 그것을 단숨에 마시고, 이번에는 단야가 서백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서백도 그것을 단숨에 마셨다. 술이 몇 순배 돌자 이번에는 단야가 그에게 물었다.
“오다가 길에 보니 병사들이 보이지 않더군. 질서가 어지럽고 험한 무리가 횡행하더라. 무슨 일인가?”
“동쪽으로, 서쪽으로, 북쪽으로 또는 남쪽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으니 남은 병사가 몇 없고, 그나마 남아있던 병사들은 대장장이들과 비슷한 일을 겪었다. 의기 있는 자는 죽었고, 그렇지 않은 자는 적을 바꾸었지. 이제 중앙에 남은 병사는 없다.”
“이제 한 명도 없다는 말인가?”
“한 명 있지. 자네가 돌아왔으니.”
둘이 아니고 하나라고 하니 그 마지막 하나가 된 자는 슬픔을 감출 수가 없었다. 술잔을 나누는 자는 둘인데도 어깨를 나란히 할 자가 어디에도 없었다. 길어진 그림자 두 개가 외로웠다.
“황제 폐하를 폐위시키려는 것인가?”
“그렇다.”
서백은 잠시 단야를 쳐다보다 말을 이었다.
“나라가 안팎으로 혼란한데 떼를 쓰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소녀가 나라를 다스리게 할 수는 없지.”
“그분께서 아직 보령이 어리시니, 잘 보필하는 것이 신하의 의무 아니겠는가?”
“간신의 말과 충신의 말을 가릴 줄도 모르는 소녀를 어찌 보필할 수 있단 말인가? 자네에게서 그런 말이 나오니 충격을 금할 길이 없군. 현 서안제를 위해 가장 공을 많이 세운 자네를, 그것도 태무황위호장의 직위를 가지고 황제의 친위대를 이끄는 자네를 변방으로 파견하고, 또 뭐가 두려웠는지 자네의 은검을 빼앗지 않았는가? 자네가 너무 많은 총애를 받으니 그걸 두려워한 간신배들이 자네를 몰아내고자 하는데, 황제라는 자가 자네를 감싸주지는 못할 망정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서백은 분기탱천하여 스스로 술을 따르고는 마셔버렸다. 얼굴이 붉어졌으나, 원래 술을 서 말을 먹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사내이니, 필시 그것은 노을빛이나 분노 때문이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현 서안제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가? 우친왕처럼 현명하지도 않았고, 만친왕처럼 무용이 뛰어나지도 않았지. 곡산친왕처럼 덕이 많은 것도 아니오, 유친왕처럼 지방 호족의 지지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야심도 없고 재주도 없고 덕도 없던 서친왕, 눈물 많은 어린 소녀가 황제가 된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는가? 오직 자네 때문이었어. 자네라는 무사가 있어서, 그 많은 암살 시도를 막아내고, 막아내고, 또 막아내서, 그래서 형제가 형제를 찔러 죽이고 독으로 죽이고 쏴 죽이는 이 피비린내나는 궁중암투 속에서 그냥 살아남았다는 것이 다 아니겠는가.”
“그러면 그 다음은 누가 되는 것인가? 중현공인가?”
중현공은 전 황제의 서자로 계승 서열에서 뒤로 밀려 친왕의 위를 받지 못하고, 공의 위를 받아 군문에 투신했다. 군사를 부리는데 재능이 있어 곧 남방사열대부 대장군에 올라 남부군을 통솔하게 되었다. 그보다 계승 서열이 높은 공들이 서너 명 있으나, 실질적인 세력이나 인망에 있어 그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그런 그가 차기 황위에 대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중현공은 그렇게 믿고 있지.”
서백의 웃음은 의미심장한 데가 있었다. 그는 술잔을 치켜들고 열변을 토했다.
“중현공의 재주야 현 서안제보다 뛰어나지만, 어차피 황가는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몇 년이고 이어진 피비린내나는 정쟁 속에서 수탈은 계속되었고 백성들은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데, 변경에서는 적들이 준동하니 황실의 권위는 추락한지 오래. 현 서안제를 폐위한다 해도 중현공이 그 자리에 들어선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뜻이다. 제국의 치세는 오래되었고, 이제 새로운 국가가 들어설 때가 되었다. 그 나라는 아침의 나라,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 백성이 참 주인되어 노래하는 나라가 될 거야.”
단야는 그 술잔을 빼앗아 마셨다.
“그러면 폐하께서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죽어야겠지. 모든 백성 앞에서, 분명한 방식으로 처형되어 구 시대의 종말을 알려야지.”
“내가 용납하리라 보는가?”
“만백성의 안녕보다 한 사람의 안위가 소중하다는 말인가?”
“만백성을 위해 죽어야만 하는 한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쉴 새없이 서로 술을 나누니 마침내 가져온 술동이가 비었다. 빈 술동이를 기울이던 서백은 입맛을 다시며 그것을 던져버렸다.
“술이 다 떨어졌군.”
“아직 석양이 남았는데, 이대로 끝내기는 아쉽군.”
“그래. 아직 해가 남아 있는 동안은…”
서백은 일어나 칼을 뽑고, 휘둘러 허공을 베었다. 바람이 울고 빛이 갈라졌다. 어린 시절부터 그와 칼을 겨뤄왔기에 칼 가는 길이 훤히 보였다. 그의 칼은 위세가 맹렬하나 휘두름을 소홀히 하는 법이 없고, 치고 끊는 것이 자연스러우며, 진퇴가 물 흐르는 듯 하였다.
단야는 사양하지 않고 그 춤판에 끼어들었다. 아무도 없는 허공을 베던 춤사위가, 서로 가까워지다 마침내 부딪쳐 불꽃을 피워올렸다. 단야가 서백을 아는 만큼 서백은 단야를 알았다. 석양을 두고 술을 나누고, 또 칼을 나눌 친우가 있으니 그 즐거움을 어디에 비하랴.
“단야, 전부터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대답해 줄 건가?”
“무엇인가?”
무거운 칼은 가볍게 흘리고 가벼운 칼은 무겁게 눌러 담는다. 서로의 칼을 너무 잘 알기에 기술을 겨루는 것만으로는 일진일퇴,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다.
“소문에 의하면 선황비 마마와 서로 연모하였다는데 사실인가?”
다른 때라면 크게 일갈하며 황실을 능멸한 자의 죄를 물었을 것이나 술과 칼을 나누는 지기에게 어찌 거짓을 말하는가. 조밀하게 찔러들어오는 칼을 몸을 돌려 피하고 돌아서는 탄력을 실어 사선으로 내리긋는다.
“사실이네.”
비껴 쳐 튕겨내며 그대로 내리치는 칼이 매섭다. 공간을 점해 앞으로 몸을 내보내 밀착하니 칼이 흘러가고, 다시 허리를 틀어 칼을 끌어올렸다. 서백은 그 기술을 잘 알고 있으니 앞으로 치고나가는 기세를 더해 피한다.
“서안제가 그 분과 자네 사이의 딸이라는데 사실인가?”
등 돌린 뒤를 노리는데 앞으로 고꾸라지듯 상체가 사라진다. 서백의 발이 단야의 손목을 쳐내고, 땅 위를 굴러 일어나며 칼을 치켜드는 변칙적인 일격이었다.
“연모하였으나,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었네.”
단야는 물러서 그 칼을 피하고 다시 달려드는데 서백이 그를 맞아 칼을 뻗으니 두 칼이 허공에 얽혔다. 서로 힘을 주어 밀어내는데 튕겨내기가 쉽지 않다. 칼을 미끄러트려 빼려 하면 따라 붙고, 물러서려 하면 밀며 쫓아온다.
“자네 부인을 사랑하는가?”
“사랑하네.”
“그렇다면 왜…?”
불꽃이 튀고 쇳가루가 튀었다. 둘 다 명공이 만든 좋은 칼이었으나 격렬한 충돌을 몇 번이나 반복했으니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러선 두 사람이 동시에 칼을 휘둘렀다. 바람에 흔들리던 낙엽이 두 칼 사이에 말려든다. 그리고, 산산히 흩어졌다.
“해가 졌다.”
단야가 망연히 중얼거렸다. 노을빛이 사라지고, 하늘은 어두워졌다. 서로의 얼굴도 잘 알아보지 못할 만큼 어두워지는지도 모르고 칼을 휘둘렀다.
“단야.”
단야는 칼을 갈무리하고 돌아섰다. 풀벌레 우는 소리 사이로 망치질 소리가 저만치 들린다. 양무감 병기고에서 들리는 소리다.
“단야!”
서백은 이제 웃지 않았다. 완전히 굳은 얼굴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서백.”
단야가 조용히 말했다.
“그럼 내일 아침 보세나.”
아직 빼어들고 있는 칼이 번득인다. 부르르 손을 떨다 이를 악물고 돌아섰다. 그러나 몇 걸음 걷지 않아, 서늘한 바람이 두 사람 사이로 불었다. 견딜 수가 없어 뒤를 돌아 외치려는데, 저만치 걸어가는 단야의 등이 눈에 들어왔다. 그 단호하고 외로운 등에 아무것도 외칠 수가 없었다.
제 4막. 은검이 꺾이다
그날 아침, 제국의 수도에 첫눈이 내렸다. 많이 내리지는 않았다. 엷게 덮힌 눈 밑으로 듬성듬성 흙이 보일 정도였다. 단야는 난간 위에 쌓인 눈을 긁어모아 얼굴을 씻었다. 몸을 정갈하게 하고 싶었으나, 양무감 어디에도 그럴 만한 시설이 없었다.
“이제 곧 겨울이로군.”
대장장이 정 노인이 그의 옆에 서서 눈 내린 거리를 내다보았다. 일은 조금 전에 막 끝난 참이었다.
“제 아들놈이 죽던 날에도 첫눈이 내렸지요.”
그 사정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으나, 그의 아들은 일반병으로 종군하다 적의 거신병에 짓밟혀 전사하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런 그가 오랜 시간 거신각에 근무하였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자네는 이제 어찌 하려는가.”
“글쎄요, 처자식도 다 떠나 보낸 늙은이 무어 할 일 있겠습니까. 괜한 것을 물어보시는군요.”
단야가 어렵게 말했다.
“자네에게는 여러 가지로 정말 감사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부탁하고 싶네. 들어 줄 수 있겠는가.”
“곧 돌아가실텐데, 무어 미련을 남기시려는 겁니까. 남기시는 것마다 남은 자의 한이 되니, 그냥 다 가져가시지요.”
“가져갈 수가 없으니 그렇네.”
단야가 그에게 주머니를 하나 건네었다. 작았으나 묵직했다.
“운룡궁으로 가, 세선각에 들어가면 어린 소녀가 한 명 있을 걸세. 아마도 내 웃옷을 덮고 있을 테니 알아 볼 수 있겠지. 그 아이를 데리고 나와 보살펴주게.”
“이 늙은 목숨 아쉬울 것 없으나, 그래도 당장 죽으라는 것은 좀 너무하십니다 그려. 그 아해를 데리고 있으면 목이 열개라도 남아나지 않을 텐데…"
“짐은 내가 다 가져 가겠네. 남는 것은 어린 소녀 뿐이야.”
정 노인은 웃었고, 단야는 겨우 안심했다.
“무거운 줄 알지만 가져갈 수 있는 건 다 가져가십시오. 이 노인네는 공과 일할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자리를 비켜드리지요.”
무슨 말인가 하는데, 저 만치 입구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보퉁이를 끌어안은 여인이었다. 깜짝 놀라 하는 와중에, 여인은 종종걸음으로 뛰어와 그의 앞에 섰다. 그의 아내였다. 배는 분명하게 부풀어 있었으나 얼굴이 수척하고 그늘이 져 있었다. 오랫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그 얼굴이 안쓰러워 차마 위로하지 못하고 다른 말이 나왔다.
“여긴 어찌 알고 오셨소.”
“진군만병호장 나으리께서 서방님이 여기 계시다기에…”
허, 그 친구 하고 혀를 차는데, 아내는 보퉁이를 풀고 여러 가지를 꺼내었다. 새로 지은 것으로 보이는 흰 무복이 한 벌, 외투, 신발 등 의복이 한 짐이고 또 주섬주섬 차려놓는 조반 상이 하나였다. 수도 전체가 궁핍하여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고기와 정갈한 찬이 세 가지에 아직 따스한 밥, 혹 식을까 저어하여 달군 사기그릇에 담은 국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단야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상에 앉아 밥을 먹었다. 밥을 다 먹고, 수저를 내려놓고 아내를 바라보니 아내는 고개를 떨구고 앉아 있었다.
“아이 이름은 정하였소?”
“아직… 인편에 편지를 보내었으나, 답장이 없어 지금까지…”
“남아라면 조라고 이름 짓고, 여아라면 려라고 지으시오. 그리고,”
단야는 가만히 그녀의 볼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차가웠다.
“항상 몸을 중히 여기시오.”
그녀가 흐느끼기 시작했으나 단야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고픈 말이 많으나 그걸 쏟아내면 결심이 흐트러질 것 같으니 모질게 대해야 하는 것이 큰 아픔이었다.
그는 자신의 거신병, 은검에 올라탔다. 사만 관에 달하는 무게가 몸을 일으켜 거신각을 나서니 처마와 가지에 쌓인 눈이 흘러내렸다. 은검이 대지를 울리며 나아가 제국의 수도를 걷기 시작했다. 그의 아내는 오래도록 큰절을 하고 있었다.
은검이 제국의 수도를 걸었다. 운룡궁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커다란 광장이 있었는데 사열식을 하던 자리였다. 그 곳까지는 거신병으로도 무리 없이 걸을 수 있었다. 공기마저 뻣뻣하게 긴장된 거리에 백성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고개를 내밀었으나 그 부모들이 집안으로 밀어넣고, 덧문과 창문을 모두 닫아 걸었다.
그가 광장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열 한 기의 거신병이 그를 둘러쌌다. 그 중 하나의 가슴팍이 열리고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크게 고했다.
“나는 남방사열대부 대장군 중현공의 휘하로 이름을 악위라 한다. 은성공 단야, 그대의 무용이 드높음을 알고 있으나 장수의 무란 무릇 전장에서 가리는 법. 여기서 그 끝을 보고 싶다.”
단야의 은검이 칼을 치켜들었다. 패배에 굴하지 않고 도전하는 것은 좋은 자세이나 격차란 그리 쉽게 좁혀지지 않는 법, 분수를 깨닫지 못하는 무사에게 지켜줄 명예란 없었다.
악위가 크게 웃고는 창을 쥐고 덤벼들었다. 그가 탄 거신병은 붉은 색으로 칠했으며 철염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제국 십이검의 하나이나 제국의 군문에 속하지 않았다. 은퇴한 별무성상령의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사유물인데 악위가 갖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필시 힘으로 뺏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정당하건 아니건, 은검과 동등한 성능을 가진 제국 십이검의 하나였으므로 그 내찌르는 창의 속도며 움직임의 정교함이 여타의 거신병으로는 흉내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단야는 창이 가까워지기를 기다려 섰다가, 마침내 그것이 지척에 이르었을때 물러서며 한 칼을 크게 떨쳤다. 은빛 궤도가 번득이니 철염이 크게 휘청였다. 악위가 다시 공격하려 하였으나, 문득 보니 철염의 오른팔이 이미 부숴져 떨어지고 왼팔까지 칼이 파고들어 자국을 남겼다. 한 팔 만으로는 창을 자유자재로 다루지 못하니 당황하여 뒷걸음질치는데, 그 거대하고 육중한 발이 민가를 몇 채나 부수었다. 다행히 그 일대는 백성들이 이미 피난한지 오래였다.
단야의 은검이 다시 칼을 휘두르니 똑같은 궤도를 그리며 파고드는데 악위는 대경하여 몸이 굳었다. 그 칼이 철염의 가슴을 깊숙히 베어 그 칼끝이 악위의 코 한치 앞에서 멈추어 섰다. 악위는 패배를 인정하였다. 아직 목숨은 붙어 있었으나 팔이 부서지고 무엇보다 힘을 전달하는 가슴께의 톱니바퀴가 모두 부서졌기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단야가 보니 남은 열 기의 거신병들 또한 제국 십이검으로, 움직일 수 없게된 철염을 합하여 이 광장에 제국 십이검이 모두 모인 셈이었다. 그 중에는 긴 칼을 치켜세운 서백의 청풍도 있었다.
단야의 은검과 열 기의 거신병까지 움직이니 도합 사십사만관에 이르는 무게가 일순간에 부딪치는데, 제국의 수도에 흔들리지 않는 기둥이 없었다.
단야는 날아오는 칼을 몸을 돌려 피하고, 그 도는 힘을 이용해 크게 옆으로 휘둘러 베었다. 간밤에 서백과 겨룰 때 수십번 보인 바로 그 동작이었으나, 서백이 아니면 이를 막아낼 자가 없었다. 거신병끼리의 무게는 거의 동일했으나 이 기술은 본디 전신의 무게를 모두 싣는 강검이었으며 그것을 막아서는 자 또한 무게중심을 옮겨 전신의 무게로 막아야 했다.
허나 녹색 정화에 탑승한 무사는 칼을 세워 팔힘만으로 버티려 했으니, 막아내는 칼과 팔이 크게 뒤틀리며 휘청대었다. 단야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허리를 찍어내렸다. 허리의 갑주가 찌그러져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거신병은 사람의 형상을 흉내내었으나 또 사람과는 다르니, 허리의 이 작은 찌그러짐에 가장 중요한 톱니 두 개가 서로 맞물리지 않아 하체를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이 때 뒤에서 적이 둘 달려드니 하나는 망치를 내리치는 건산이고 또 하나는 두 개의 칼을 교차하여 찌르는 현빙이었다. 단야는 겨우 칼을 피했으나 망치 끝이 등의 장갑을 스쳤다. 건산과 현빙의 움직임은 군더더기가 없고, 특히 건산은 무거운 망치를 휘두르는데 그 일격 일격이 견실해 틈이 없었다. 그 움직임이 익숙해 단야는 놀라 부르짖었다.
“만령백 서덕인가!”
허나 서덕은 답하지 않았다. 명예를 아는 자가 이미 명예마저 잊고 있으니 그 일격의 통렬함이 사무쳤다. 그것을 피해 뒷걸음질치니 현빙이 연속해 찔러오는데 연계에 빈틈이 없었다. 한 칼로 둘을 상대하기 어려우나 형세의 변화를 기다리며 참기도 어려웠다. 적독이 긴 극을 휘둘러 다리를 노리니 이 이상 물러서면 셋, 넷으로 적이 늘어나니 병법에서 이르기를 살려 하는 자 죽고 죽으려 하는 자 산다고 하였다.
망치가 어깨를 비껴치니 몸을 앞으로 밀어 흘려보낸다. 치는 것이 정확해 견갑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막지는 못했으나 팔은 아직 움직였다. 무릎을 찌르고 비틀어 끊어버리고, 늦기 전에 몸을 움직여 위로 올려 찌른다. 철과 철이 맞물려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현빙이 칼을 떨어트리나, 남은 왼손으로 은검의 칼을 붙들었다. 찔린 부위의 톱니를 조여 칼을 물고 놓아주질 않으니, 홀로 싸워야 하는 단야는 칼을 놓을 수 밖에 없었다.
적독이 다시 극을 휘두르는데 몸을 낮춰 피하고, 팔을 허리로 모았다가 몸이 일어남에 따라 주먹을 뻗어 쳤다. 흔들리는 적을 반 걸음 가깝게 다가서, 어깨를 잡고 밀며 동시에 오금을 당겨 차니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삼만 삼천근에 달하는 쇳덩어리가 땅에 넘어지니 그 깔린 집들이 무너지는데, 단야는 쓰러진 건산의 망치를 빼앗아 그 위에 내리쳤다. 한 차례 벽력이 터지니 거신병을 다루는 자가 왜 망치를 두려워하는지 그 결과가 여실히 보였다. 비산하는 쇳조각 무리로 단야와 은검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제국 십이검 중 철염, 정화, 건산, 현빙, 적독의 다섯이 쓰러져 남은 것은 번룡, 보묵, 양창, 격금, 탄랑, 청풍인데 이 중 섣불리 나서는 자가 없었다. 멀리서 군막에서 내다보는 중현공이 속이 답답해 물을 들이켰다.
“왜 저들을 내보내셨소이까?”
이 때 서백이 들어서 중현공을 추궁하는데 화가 역력한 표정이었다. 중현공은 군주의 품위를 잃지 않고 대답했다.
“곽문 그자가 움직인다 하니 어찌 그가 어부의 이득을 보게 놔둘 수 있겠소? 이미 군을 몰아 내려오니 이튿날이나 그 다음날이면 도착한다 하더이다.”
서백은 혀를 찼다. 북방삼열대부 대장군 곽문은 전통있는 공신의 가문으로 선황제의 서자인 중현공을 아래로 보니 서로 백안시하는 사이였다. 그러므로 북부군의 준동을 경계하는 것은 이해하나, 어부지리를 취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전력을 보존해야 하는데 가장 상징적인 제국 십이검을 저렇게 내보내 망가트리니 이는 명백한 잘못이었다.
이 잠깐의 대화를 나누는데 단야의 은검이 어느새 두 대의 거신병을 또 쓰러트렸다. 번룡과 양창이 짧게 끊어지는 망치에 맞아 쓰러지고, 격금과 탄랑이 덤벼들었으나 이번에는 양창의 창을 들어 격금은 다가오지 못하게 하고 그래도 다가오는 탄랑은 창대로 후려쳐 쓰러트렸다. 이에 중현공은 신경질적으로 물잔을 내려놓았다.
“도대체 부하들은 뭘 하는 건지, 아직도 서안제를 잡아오지 못하고 있는 건가!”
“아, 그들 말인데, 아마 돌아오지 못할 거요.”
중현공이 잠시 그 말을 곱씹다 인상을 찌푸렸다. 서백의 얼굴에 서늘한 웃음이 맺혔는데 이는 그가 늘 보이던 미소와는 달랐다.
“…그 아이를 놓아 주었소?”
“훌륭한 대장장이는 죽여서는 안 되는 법이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구 시대의 상징이라며, 그 아이를 죽여야 한다고 가장 강하게 주장하던 것이 바로 그대였던 것으로 기억하오만?”
서백은 칼을 뽑았다. 중현공이 흠칫 놀랐으나 서백은 개의치 않고 그 칼로 멀리서 싸우는 단야의 은검을 가리켰다.
“저기 제국 십이검 중 열 한 기와 싸워 이기는 단 한 기가 있소. 제국의 마지막 신하, 최후의 무사, 그리고 최강의 무의 상징이오.”
마침내 마지막 남아 있던 보묵과 청풍마저 쓰러졌다. 청풍의 위로 보묵이 쓰러지니 그 소리가 요란하여 서백의 다음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태무황위호장 은성공 단야는 제국의 모든 것을 대신 짊어 지고 처형장에 선 것이오.”
서백은 가만히 칼을 휘둘렀다. 중현공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다 천천히 쓰러졌다. 흘러나온 피가 땅을 적시는데 서백은 일별하지도 않고 막사를 나섰다.
단야는 지쳐 있었다. 은검 또한 지쳐 있었다. 왼쪽 견갑과 대퇴부의 갑주를 잃어 톱니바퀴가 드러나고 관절은 모두 피로가 극심했다. 등 쪽도 갑주가 찌그졌는데 어깨를 움직일 때마다 톱니바퀴가 갑주에 긁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백철로 만들어진 거신병은 스스로 복구하는 성질이 있으나 이는 단시간에 될 일이 아니었다.
칼은 이가 빠지고 무뎌져 있었다. 본디 거신병의 무구란 소모품이었다. 철로 된 무구로 사람을 해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나 철로 된 무구로 철로 된 갑주를 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비록 무구에는 흑철을 섞어 단단하게 만드나 이는 무구를 쉽게 깨어지게 만들 뿐 아니라, 흑철이라 하더라도 백철에 비하면 무른 금속이었다. 제국 십이검은 모두 백철로 만든 거신병들이라, 철과 흑철로 만든 칼이 백철을 몇번이나 치고 베어내었는지 그 무리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단야!”
이 때 누군가 소리치니 이는 서백의 목소리였다. 단야는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또 다른 거신병이 다가왔는데 이를 보니 갑주가 하얗게 빛나 백철로 만든 것이 분명해 보였다. 허나 가슴과 팔, 다리에 금으로 선을 넣어 장식하고 투구에는 늠름한 용의 머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결코 제국 십이검의 하나가 아니었다. 그 열린 가슴에는 낯익은 얼굴의 서백이 앉아 있었다.
“서백.”
서백과 단야는 서로 마주보았다. 서백의 새 거신병은 그 이름을 운룡이라 했으며, 그것이야말로 제국의 성립과 역사를 같이하는 선도의 결정체였다. 제국을 일통한 패황 마우지의 거신병이었으나 이후 어떤 무사가 타도 혼옥주가 빛나지 않으니 주인을 가리는 영험한 거신병이라 했다. 단야는 청풍이 어찌 그리 쉽게 쓰러졌는지 겨우 이해했다. 거기에는 서백이 타고 있지 않았다.
“운룡의 허락을 받았군.”
“그래. 새 시대를 열 때가 된 것이지.”
눈이 내리고 있었다. 계속되는 격전으로 기관을 무리시킨 은검은 달구어져 눈이 닿는 즉시 녹았다. 운룡은 아직 차가웠다. 그 위로 눈이 엷게 쌓이다, 바람이 한켠을 쓸어갔다. 벼락처럼 섬광이 일고 불꽃이 튀는데 이를 지켜보는 자들의 눈이 아팠다. 서로 기와 술을 잘 아니 칼을 겨뤄도 우열을 가릴 수 없는데, 서로를 죽이고자 하면 승부를 가르는 것은 의와 혼 뿐이었다.
단야는 한 손으로 은검의 개폐구를 잡아 뜯어버렸다. 찬 바람이 들어와 뜨거운 내부를 식혔다. 움직일 때마다 철이 마찰하는 소리가 신음과 같았다. 끝이 멀지 않았다.
또 한 번 두 개의 칼이 부딪쳤다. 서로가 힘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가, 무릎에 힘을 주어 일어났다. 뒤로 칼을 늘어트렸다가, 단숨에 몸을 일으키며 칼을 휘두르는데 그 칼끝에 탄력이 붙어 하늘을 스쳐 땅으로 향했다. 이 때 발을 앞으로 밀고 상체를 숙이며 전신을 옮겨 실어 그 칼에 몸과 마음을 다 맡겼다.
두 무사는 이미 휘두르는 순간 깨달았다. 이 한 칼은 단야가 앞섰다.
서백의 칼이 아직 다 휘둘러지지 못하나 그 그리고자 하는 궤도가 단야의 칼에 부서지고, 운룡의 어깨 깊숙히 칼이 박혔다.
서백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성한 왼팔을 뻗어 어깨에 박힌 칼을 뽑아내었다. 은검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귀석은 남김없이 타 없어졌고 넋구슬은 빛을 잃었다. 칼을 찔러 은검의 가슴팍에 꽂아넣었다. 은검의 열린 가슴사이, 앉아있는 단야의 모습이 선명했다. 그는 웃고 있었다.
늙은 대장장이는 하늘을 보고 병든 소녀는 고요히 잤다. 만삭의 아내가 고개를 돌리고 친우는 다만 눈을 감았다.
눈이 오는데
칼 든 자가 울지 않으니
피묻은 칼 만이 바람 속에 울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