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리치 왕의 분노' 확장팩의 노스랜드 줄드락에 소개되는 동명 연계 퀘스트를 참고한 팬 픽션입니다
오리지널 캐릭터가 등장하며, 사건의 순서나 상세한 장소 등에 변경사항이 있습니다.
돌마냥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밀어올리자 강판 사이로 드러난 복잡한 기계 장치들과 거기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만들어낸, 눈에 익은 듯 하면서도 낯선 풍경이 시야를 채운다. 머릿속이 하얘진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방금 전을 떠올리려 하자 금속성의 마찰음이 사정없이 고막을 괴롭히며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머릿속이 웅웅 울리는 것 같아 막 다시 눈을 감으려는 차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힘겹게 고개를 돌려 본다.
"이봐, 에델로이아. 괜찮나?"
팔뚝에 붕대를 칭칭 감은 낯익은 드워프가 험상궂은 얼굴로 물어왔다. 그의 짜증스런 듯 찡그렸으면서도 한켠에는 걱정이 묻어나는 눈매를 보자, 방금 전의 기억이 되살아나 밀물처럼 밀려온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증기 전차에 시험양산형 시포리움 폭약을 잔뜩 실은 채 줄드락의 폐허를 달리고 있었다. 은빛십자군 격전지의 팔스타브 사령관에게 나바리우스의 스컬지 요새를 무너트릴 폭약을 전달하기 위해 한창 스컬지들을 밟아뭉개며 전진하던 중에... 갑자기 둔중한 충격과 함께 전차가 크게 흔들렸고... 그 다음은-
"부르, 뭐가 어떻게 된..콜록"
"말을 아끼게. 많이 안 좋아 보이니까"
부르의 말에 내 몸을 내려다보자, 반쯤 풀어헤쳐진 판금 갑옷 중 흉갑 왼쪽 밑으로 피범벅이 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숨을 들이쉬면 싸하게 아려오는 게 상처가 꽤 깊은 것 같다.
"하필 틈새에 파편이 끼었네. 뽑긴 했는데 제대로 손을 쓰기에는 상황이..."
쾅-
반쯤 동강나다시피 한 전차의 바깥쪽에서 들려온 커다란 폭발음이 부르의 말허리를 잘랐다. 바닥이 들썩이자 상처가 쓰라려 와 신음을 삼키고 있으니, 스컬지들의 피와 살점으로 엉망진창이 된 다르가스와 게르크 그리고 맥켈라르가 쫓기듯 전차 안쪽으로 몰려들어오는 광경이 보인다.
"빌어먹을, 너무 많아! 완전히 스컬지 지뢰밭 한가운데라고!"
"성스러운 빛이 우리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지 않으실 모양이군요"
"그래도 진짜 지뢰 맛을 봤으니 좀 뜨끔하겠지? 오 꼬맹아, 일어났냐?"
그늘 진 얼굴로 실의에 빠져 있는 게르크와는 달리, 상기된 얼굴의 맥켈라르는 아직 불태울 전의가 남은 모양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두 손으로 들어야 할 쯔바이핸더를 한 손에 들고는 손인사라도 하듯 흔들어대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묻는다.
"방금 전에...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이야"
"스컬지 바르굴들에게 포위당했다. 아니, 이 경우는 우리가 제 발로 걸어들어왔다고 하는 편이 옳겠군. 여하튼... 이 일대는 나바리우스의 스컬지 공장인 것 같다. 여기는 그 외곽 부분이고. 뭐가 들었는지 상당한 커다란 철창 옆이다"
"빠져..쿨럭, 나갈 수 있어?"
언짢은 표정의 다르가스는 침울한 게르크나 흥분한 맥켈라르와는 달리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가 언제나 차분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묻자 그 차분한 표정 그대로 고개를 젓는다.
"아니, 리드가 살아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써는 방법이 없다"
"..성스러운 빛이시여, 부디 그의 영혼을 구원하시기를"
다르가스의 말에 게르크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성호를 긋기에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자, 아무렇게나 덮어 놓은 은빛십자군의 휘장 밑으로 사람의 형체 같은 것이 보인다. 그 밑으로 빼꼼히 보이는 눈에 익은 푸른 작업복 소맷자락을 보자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이 된다. 괜시리 잔기침이 들끓어 다시금 왼쪽 옆구리가 쑤셔 온다.
"콜록, 콜록-"
"젠장! 그 하사관년은 지도 하나 제대로 못 주나? 어쩐지 스컬지가 너무 많다 했어"
"제대로 된 지도가 있을 턱이 없지 않나. 리아나 하사관에겐 최신 지도였겠지"
"썩을, 나도 알고 있어 그건... 이래서 테라모어 연놈들은!"
"맥켈라르, 나도 테라모어 출신이다. 옳지 못한 선입견이군"
"..."
맥켈라르는 이런 상황에서도 차분한 표정으로 저런 말을 꺼내는 다르가스에게 질렸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후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던 그는 불행하게도 다시금 입을 다물어야 했다. 훨씬 큰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며 대기를 흔들었으니까.
"이―겁――쟁이들아―――――! 그 거북이 등딱지에서 기어 나와라―――! 싫다면, 구워 줄까――――!"
기분나쁜 목소리가 두터운 전차 내벽 안까지도 울려대는데도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귀를 막을 수가 없다. 때문에 한동안 얼굴만 찌푸리고 있다가, 누구에게랄 것 없이 불평하듯 물음을 던진다.
"저건 누구야?"
"스컬지 바르굴들의 대장인 모양이다. 바르굴들은 선택받은 알가르라고 부르는 모양이더군"
"그 놈이 직접 나섰다면 시체벌레같은 나바리우스 자식도 옆에 있겠군. 뭐가 무섭다고 이쪽으론 기어오지도 못하는 새끼가 누구보고 겁쟁이라고?"
맥켈라르는 욕을 궁시렁거리며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는다. 당장 달려나가서 대거리라도 할 기세였지만.. 지친 모양이다. 다르가스 역시 꼿꼿이 세운 방패 위에 체중을 올려둔 채 불편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견시창으로 바깥을 내다보던 부르에게서 당혹감에 젖은 외침이 들려온다.
"이, 이보게들. 구워 준다는 말이 허세가 아닌 모양이네만?"
그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잔뜩 녹아 있어, 다르가스와 맥켈라르는 물론이고 실의에 빠져 있던 게르크조차도 튕기듯이 몸을 일으켜 견시창으로 몰려든다. 그렇지 않아도 빛이 부족한 실내가 한층 더 어두워진다.
"오, 빛이시여!"
"저... 미친 놈들이!"
몸을 일으킬 수가 없기에, 성스러운 빛을 외치며 머리를 감싸쥐는 게르크와 이를 갈며 욕을 내뱉는 맥켈라르와는 달리 아직까지도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다르가스에게 설명해달라는 시선을 던진다. 하지만 그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다.
"저 정도 양을 밀어넣으면 아무리 증기 전차라도 타 버릴걸세"
"웃기네, 그 전에 우리가 잘 익은 찜이 될걸?"
"둘 다 틀렸습니다. 우리가 뭘 운반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렸습니까?"
바르굴들이 불이라도 지르려는 걸까나.. 앞다퉈 비관적인 결과를 내뱉거나 상상하던 우리는 다르가스의 말에 일제히 전차 한쪽 구석을 바라보았다. 사이사이에 충격완충제를 잔뜩 베어문 채 겹겹히 쌓여 있는 나무 상자들. 은빛십자군의 인장이 새겨진 이 상자들에는 볼타루스의 역병 장치를 공격하기 위한 시포리움 폭약이 잔뜩 실려 있다. 맥켈라르의 얼굴이 구겨지고, 게르크는 물론 부르의 얼굴에서마저 핏기가 가신다.
"으...젠장, 어쩌지? 어쩌냐고!"
"뭐, 뭔가 방법이 있을 걸세"
머리를 움켜쥐고 신음을 흘리는 맥켈라르와 부르. 다르가스는 그 둘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쉬더니 아밍 소드를 뽑아든다. 바르굴들의 살점과 체액으로 더럽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날카로운 예기가 흐르는 잘 손질된 검이 그렇잖아도 알쌀한 공기를 더욱 서늘하게 만든다. 노기 서린 얼굴과 예기 어린 칼날이 그 끝에 있는 자들을 겨눈다. 맥켈라르에게 한 번, 그리고 부르에게 한 번.
"이보시오! 스컬지를 앞에 두고 어쩌냐니? 희망의 빛 예배당의 맹세를 잊어버렸소?"
"머릿수가 너무 많잖아!"
"어차피 누군가 이 전차에서 나가지 않는다면, 스컬지가 우리 모두 다 죽일 겁니다"
맥켈라르를 똑바로 바라보던 다르가스의 시선이 갑작스레 나에게 돌아온다.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잠자코 마주보자, 그의 입에서는 아주 웃긴 말이 튀어나온다.
"...적어도 한 명은 남아서 소식을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르가스가 모두의 목숨으로 한 명을 살리자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입에 담으며 나를 쳐다보기에 눈을 치켜뜨며 고개를 저었다. 어리다고, 여자라고 특별취급 받을 생각은 없다.
"웃기지 마!! 콜록, 콜록.. 나도, 나도 성스러운 빛 앞에 맹세한..쿨럭"
억지로 소리를 질러서인지 기침에 반쯤 묻혀 버렸지만, 맥켈라르라면 하지 못한 말까지 모두 들었겠지. 그도, 나도 희망의 빛 예배당에서 리치 왕 앞에 복수를 맹세했으니까. 맥켈라르라면 설령 리치 왕에게 닿지 못하고 도중에 스러지더라도, 그 순간까지 함께 복수의 칼날을 겨누자고 일으켜세울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그는 어째서인지 침음성을 흘릴 뿐 별다른 말대꾸를 하지 않는다. 초조함 속에 짧은 침묵이 흐르고, 이내 힘있게 들어올리는 쯔바이핸더와 함께 꾹 다물렸던 입이 열린다.
"그거.. 나쁘잖군"
"..뭐라고? 잠깐, 콜록"
그는 건틀렛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내 말은 듣지도 못했다는 듯이 몸을 돌린다. 맥켈라르에 이어 부르와 게르크 형제도 자신들의 무기를 뽑아들고는, 나만 남겨둔 채 천천히 전차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잠깐 담배라도 피우고 오겠다는 것만 같이 담담하기 그지없는 얼굴들의 행진. 도저히 누워만 있을 수 없어 억지로 몸을 일으키자, 폐부를 찔러오는 통증과 함께 기침이 격렬하게 터져나온다.
"가만히 있게, 상처가 꽤 깊어"
"...아냐. 조금만..쿨럭, 안정되면 내가 치유할 수 있어.. 나도 같이.."
"꼬맹아, 발루스에게나 전해줘. 약속한 쿨 티라스 포도주는 무덤에서 받겠다고"
"맥켈라르? 부르...! 돌아, 콜록!"
어느 새 다시 쓰러졌는지 눈 앞엔 일그러진 채 울렁거리는 전차 천장만이 보인다. 동지들의 외침인지 바르굴의 괴성인지 분간하기 힘든 함성들이 뒤섞여 전차 외벽을 울리며 귓가를 울려온다. 나도 일어나 검과 방패를 쥐고 그 대열에 서고 싶어 손이 부들부들 떨려오지만 몸이 도저히 말을 듣지 않는다.
그렇게 휘몰아치는 함성들이 잦아들어, 이윽고―고요히 가라앉을 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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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늘한 바람과 아릿한 고통에 눈을 뜬다.
정신을 잃었던 건가?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내가 아까 전까지 뭘 하고 있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노스랜드의 찬 공기에 몸은 움츠러들고 기침을 너무 많이 뱉어서인지 머리는 멍하니 어지럽다.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게 남의 일처럼 아련하게 떠올라 요퇴갑과 흉갑을 들춰보자, 부르의 임시 처치인지 찢어헤쳐진 내갑의 사이로 붕대가 대강 감기고 뭉쳐 있다. 피에 젖어 있는 것을 보니 출혈이 상당히 심한 모양이다. 그래서 어지러웠나? 길게 한숨을 쉬며 마음을 가라앉히자 내면으로부터 성스러운 빛의 응답이 들려온다. 아무래도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정도로는 회복된 것 같다.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몸을 일으켜 견시창을 바라보자, 빛을 잃어버린 우증층한 잿빛 하늘에서 피를 토하듯 흰 눈송이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그리 오래지 않은- 예전 어느 날 즈음에는 눈을 반가워했었지만... 어느샌가 그저 짜증나는 날씨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연중 절반 이상이 겨울인 노스랜드에 눌러앉은 탓이려나.
"아윽"
추억에 젖어드는 걸 억지로 깨우기라도 하듯이 다시금 환부가 쓰라려 온다. 그나마 멀쩡한 전차 내벽을 골라, 등을 기대고 쓰러지듯 주저앉아 내면의 환한 빛과 교감한다.
"성스러운 빛이시여, 고난의 끝에 작은 불빛을 예비하시어 지친 자들을 쉬게 하시고 병든 자들을 낫게 하소서"
기도를 올리자 상처를 덮은 손에서 아늑하고 환한 빛이 피어오르고- 한동안 정신을 집중하자 통증과 함께 점차 사그라든다. 이윽고 빛이 아지러지자 상처가 있던 자리에는 환부였음을 상기시키는 실낱같은 흔적과 늘어붙은 핏자국 뿐.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어느새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자 몸이 부르르 떨려와 붕대를 걷어내고 흉갑과 요퇴갑을 덮었다. 찢어진 내갑의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바람이 시리지만 수선할만한 도구가 없으니 별 수 없다. 몸을 일으켜 전차 안을 둘러보자 남아있는 것이라곤 여기저기 흩어진 군수품과 휘장에 덮인 리드의 시신이 전부. 그 휑한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으니 이제서야 동지들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실감된다. 가슴 한복판이 마치 송곳으로 찌르는 것만 같이 아려 온다.
"또.. 홀로 남아버렸네"
리드, 부르, 게르크, 맥켈라르, 다르가스... 마지막 발걸음을 옮기던 그 담담한 얼굴들이 눈 앞에 어른거린다. 가까운 사람도 먼 사람도 전부 잃어버리고 홀로 살아남은 것이 이걸로 세 번째. 뜨거워 오는 눈시울을 꾹 누르고 있으니, 계속해서 눈가를 차갑게 쓸어내리는 설풍 때문인지 마음이 쉽게도 가라앉는다. 아니면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건가?
깡-
감상에 젖을 새도 없이, 뭔가 딱딱한 것이 전차 외벽에 날아들었는지 금속음이 울려퍼진다. 피가 싸늘하게 식는 듯한 긴장과 함께 잊고 있던 것을 깨달았다.
이곳은 적진 한복판이다.
반사적으로 바닥을 둘러보자, 낡은 검과 은빛십자군의 문장이 그려진 방패가 누워 있던 자리 옆에 내팽개쳐져 있는 것이 보인다. 완갑을 풀어놓은 행운에 감사하며 조용히 검과 방패를 집어든다. 의외로 별달리 소용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적 앞에서 믿을 건 이것뿐이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움직여 견시창을 내다보려는 참에, 이번엔 좀 더 위쪽에서 비슷한 소리가 울린다.
깡-
밖에서 견시창을 들여다보기 쉽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조심스레 고개를 빼꼼 내밀어 견시창을 내다보자, 두어 명의 바르굴들이 돌멩이들을 던져 대는 것이 보인다. 돌멩이들이 날아드는 곳은 이 전차가 아니라 바로 옆의 높은 철창이었다. 높은 벽을 둘러치고 그 위로 새장같은 창살이 뻗은 탓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보이지 않지만... 어쨌든, 다르가스가 말했던 철창이겠지. 대체 무엇을 가두어 놓았길래 저렇게 커다란 감옥이 필요할까 궁금해하던 차에 궁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별로 원하지는 않았던 방향으로.
"이――썩은―버러지들아!!―――던져봤자―날―화나게―할―――뿐이다!"
머리가 울리는 것 같고 눈 앞에 떨어지는 별이 보인다. 손을 들어 이마를 짚으려니 머리가 너무 아래쪽에 있길래,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제서야 내가 넘어져 있다는 걸 깨닫는다. 대체 뭐였지? 전차 안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귀를 먹먹하게 할 정도로 엄청난― 마치 천둥같은 외침이었다.
"끄응-"
몸을 일으키는데 아직도 귓가가 울리는 것 같아 다리가 휘청거린다. 현기증이 일어 한동안 흐느적거리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견시창을 내다보자, 바르굴들이 비틀거리는 동작으로 도망치듯 감옥에서 멀어지는 것이 보인다. 왜 감옥이 격리시키듯 이런 외곽에 떨어져 있는지 너무나도 이해가 잘 된다... 저 감옥에 갇혀 있는 건 대체 뭘까?
....뭐든간에, 내겐 상관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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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더욱 차가워진 밤공기에 곱아가는 손가락에 입김을 불어넣자 조금이나마 온기가 돈다. 견시창을 통해 간신히 들어오는 틔미한 달빛에 비쳐 굳은살이 잔뜩 박힌 손마디가 보인다. 스컬지 역병이 오염시킨 공기는 이렇게 달빛과 별빛조차도 꺾어 버린다. 녹여보려는 노력도 부질없이 추위가 에어오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풀어주고는 짓던 매듭을 마무리한다. 남은 압박붕대로 장갑을 끼고 힐트를 쥔 그대로 오른손을 감아버렸더니 너무 바짝 조였는지 벌써부터 손가락이 뻣뻣하다. 하지만 어쨌든 이제 손이 곱아 검을 떨어트리는 일은 없으리라. 마지막으로 왼팔을 끼워 방패를 들어올렸다. 이로써 완전무장이다.
저벅-
조심스레 전차 바깥으로 걸어나오자, 주변이 조용해서인지 발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원래 스컬지 군단은 밤에 잘 필요가 없지만, 바르굴들은 되살아나기 전의 습관 때문에 밤이 되면 활동이 뜸해진다. 그리고 이곳에서 본 스컬지는 바르굴뿐이었다.
저벅-
그래. 그러니까 긴장할 필요 없다. 검에 비반사 처리는 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달빛이 틔미하니 별다른 문제는 없을 테고, 눈이 잔뜩 쌓여 있으니 갑주가 덜그럭거리는 소리도 줄어든다. 바르굴 하나나 둘 정도는 얼마든지 눈을 가릴 수 있고... 쓰러지기 전까지 적어도 일곱이나 여덟 정도는 벨 수 있겠지.
휘이이이- 스아아아-
전차에서 나서 몇 발자국 떼지도 않았는데 매서운 바람 소리에 이질적인 소리가 섞여온다. 살아있을 리 없는- 메마르고 스산한 죽음의 소리가. 등골에 싸늘하게 내달리는 한기를 무시하고 오른손에 묶인 검을 내지르며 몸을 돌려 뒤를 노려본다.
"밴시!?"
아뿔싸! 설마 밴시가 있었을 줄이야. 힘껏 내지른 검은 부유물 마냥 일렁이는 희부연 영체를 허무하게 투과했다. 예상치 못한 일에 당황해 비틀거리는 사이, 젊은 아가씨를 닮은 그 투명한 팔이 뻗어와 얼굴을 쓰다듬는다. 메마르고 차가운 것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듯 한 느낌에 머리카락이 쭈삣 솟는다. 달빛마저도 어두운 밤, 소복히 눈이 쌓인 설원 한가운데서 일렁이는 동상마냥 생기가 빠져나간 얼굴. 그 중에서도 희부옇게 투명하여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운 입술이 입맛춤이라도 하려는 듯 점차 가까이 다가오자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린다. 발작적으로 방패를 들어올리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기도문을 읊는다.
"고, 고개를 들어... 빛을 우러러보라! 양식도 없고, 피난처도 없고, 네 어둠을 돌보는 이도 없으리니!"
청아한 빛무리가 방패에 아로새겨진 은빛십자군의 문장을 타고 휘몰아친다. 악령 퇴치의 구문이 제대로 먹힌 것인지, 안개처럼 너울거리던 모습 그대로 경련하듯 흐느적거리더니 정 반대 방향으로 내달린다.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주변을 둘러보며 몸을 숨길 곳을 찾는다. 밴시를 상대하려면 검에 축복을 내려야 하는데 검을 손에 묶어버렸기에 당장은 방법이 없는데다 약식 퇴치구문이 벌어주는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다. 이름모를 무언가가 갇힌 철창과 우그러지고 깨진 증기 전차 사이의 틈새로 서둘러 몸을 날린다. 몇 걸음 뛰지도 않았는데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하다.
솨아아아아아아-
전차의 잔해 뒤에 숨어 바깥을 내다보자, 바람은 부딪는 창검 마냥 날카롭게 노래하고 틔미한 달빛이 쏟아지는 가운데 몇이나 되는 밴시들이 이리저리 너울거리며 사후세계가 있다면 이럴까 싶은 몽환적인 광경을 만들어낸다. 저녁무렵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스컬지 역병이 아직 이 곳에 완연히 전염되지 않아서인지 밴시들은 밤에만 떠도는 모양이다.
"성가시네"
검을 축성하기 위해 결국 칭칭 묶어놓은 압박붕대를 풀어내려는데, 매듭을 워낙 단단히 묶어놓은 탓에 영 풀어내기 어렵다. 방패를 내려놓고, 왼손과 입으로 간신히 첫 번째 매듭을 풀어낸 참에, 거울 같은 칼날에 희부연 빛이 어른거린다. 설마-
스아아아-
오른쪽 경갑 사이로 살을 에는 듯한 한기가 스며든다. 소용 없는 줄 알면서도 검을 휘두르자 밴시는 전혀 개의치 않고 이번엔 목으로 그 손을 뻗어온다. 그보다 빠르게, 방패를 놓은 왼손으로 흉갑을 짚었다. 꾹 누르자 내갑의 위로 두터운 성표의 감촉이 와닿는다.
"빛을 피하지 말라, 언젠가 반드시 외길에서 만나게 될지어다"
기도를 마침과 동시에 반투명한 혼백 안에서 신성한 빛이 타오르자 밴시가 기괴한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물러난다. 그러나 짧은 안도감도 잠시 뿐, 찢어지는 듯한 망자의 울부짖음이 울려퍼지자 하늘거리며 허공을 떠돌던 아가씨들의 시선이 차례차례 이쪽에..아니, 내게 꽂힌다. 하나.. 둘..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목과 등골을 타고 싸늘한 공포가 내달린다.
텅- 끼익-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는지 견갑이 뭔가에 부딪는 느낌과 함께 금속성의 충돌음이 날카롭게 퍼진다. 그걸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천천히 허공을 유영하며 다가오는 밴시들의 움직임에 소름이 돋아난다. 수는 적어도 여덟.. 아홉 이상. 일단 어떻게든 앉아서 몸을 바치는 꼴만은 피하기 위해 늘어붙은 듯 눈에 빠진 다리에 힘을 주자- 어째서인지 세상이 빙그르 돌아간다.
"..어-?"
끼익- 쿠당탕-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세상이 소용돌이친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떠 보니, 그제서야 하필이면 등이 닿은 곳에 사람 하나쯤은 밀어넣을 만한 균열이 열려 있었다는 걸 알아챈다. 딱딱하고 차갑기 그지없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것도 꼴사나워 일어나려는데- 몸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다른 꼬마들 같지 않구나, 쬐끄만 녀석아. 네게선 케케묵은 죽음의 냄새가 나질 않는군"
크다. 정말 크다. 이렇게 커도 되나 싶을 만큼 크다.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 콧구멍엔 내 방패를 통째로 집어넣어도 될 것만 같고 바로 내 머리 위까지 늘어진 수염을 엮으면 군선의 돛을 만들어도 될 것 같다. 전차 충각만한 투구 밑에서 딱정벌레처럼 번득이는 나만한 눈동자에 대해 뭐라고 평해야 좋단 말인가? 나는 전혀 배운 바가 없다.
"뭐...야?"
그 얼척없을 정도로 커다란 누군가는, 대답은 하지 않고 흠- 하고 말꼬리를 끌며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내 몸보다도 커다란 손을 들어올린다. 저 손가락만 내리쳐도 나는 형체도 찾기 힘들게 찌부러져 버리겠지. 그걸 눈 앞에서 지켜볼 용기는 없어 왼팔로 눈앞을 가린다. 주변이 좀 더 어두워지는 느낌에 눈을 질끈 감을 무렵-
천둥이 대지를 휩쓸었다.
"꺼―져―라―아―아―아―!!!"
귓가에서 불똥이 튄다. 머리 위에서 수 천 마리의 종달새가 지저귄다. 이 원초적이고 가차없는 폭력에 속이 뒤집히는 것만 같아 숨을 헐떡이고 있는데, 장엄한 신의 음성같은 울림이 들려온다.
"일어나도 된다 작은 녀석아. 기웃거리던 천쪼가리들은 전부 내뺐을 게다"
어둡던 주변에 다시금 틔미한 빛이 돌아온다. 그제서야, 이 어처구니없게 커다란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기 전에 손으로 나를 덮었다는 걸 깨닫는다.
"당신...누구야?"
"자이머"
그는 그 이상의 어떤 말이 필요하냐는 듯 한 마디로 대답을 일축하며 껄껄 웃었다. 웃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몸이 들썩거린다.
"네 이름도 말해야지"
"에델로이아. 은빛십자군의 일원"
"그래? 그럼 난 폭풍 거인의 왕이다"
그는 그 왕방울같은 눈을 찡긋이며 씩 웃었다. 험상궂은 아저씨에 갓난아기의 얼굴을 붙여둔 것 같은 그 웃음은- 의외로 썩 어울린다. 그는 다시금 소리내어 웃음을 터트리더니 자뭇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말이지...쬐끄만 녀석아. 은빛십자군이 대체 뭐냐?"
"...'저것'들을 죽이는 사람들"
아직까지도 검이 단단히 묶인 오른손을 들어 바깥을 가리킨다. 높은 철벽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리라. 그는 내가 이 곳에 오기 훨씬 전부터 이 감옥 안에 있었으니.
"리치 왕과 싸우나? 전사들이군"
"맞아"
"잠깐. 네녀석도 은빛....뭐라고 했잖아"
"은빛십자군이야"
"뭐-라고! 그 작은 녀석들 중에서도 더 쬐끄만 녀석이 전사라고?"
그는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무릎을 탁 치며 껄껄 웃는다. 대번에 기분이 최악으로 나빠졌다. 어리다고 무시하는 건 질색이다. 리치 왕에게서 받은 고통은 모두 똑같은데 말이다. 그는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눈치가 빠른지 넉살도 좋게 내 심중을 입에 올린다.
"삐졌나?"
"바란 게 없으니 속상할 것도 없어"
"작은 녀석이 속도 작구나!"
"그래, 나 작아. 그게 뭐? 이렇게 큰 당신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데?"
끄흥, 하는 헛기침 소리가 들린다. 헛기침 소리마저도 마치 고함을 지른 것처럼 크다. 그런 큰 목소리가 조용히 입을 닫고 있는 것은 묘한 느낌이다. 딱히 대답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기에 입으로 손과 검을 묶어 둔 붕대를 풀어낸다.
"배신이다"
한동안 침묵을 고수하던 그는, 내가 손에서 검을 다 풀어낼 무렵에서야 내뱉듯이 말을 받는다.
"뭐가?"
"내 형제 타이시가, 그가 나를 배신했단 말이다!"
그 눈망울에 처음으로 내가 기대했던 것이 깃든다. 의외로 그 눈에서 이글거리는- 덩치에 어울리는 분노를 담담히 바라볼 수 있다. 배신당한 기분이라면...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럼 당신도 똑같네"
"무슨 소리지?"
"나도 배신당했으니까. 나의 왕에게"
거인에게 다시 침묵이 내려앉는다.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으려나 싶어 위를 올려다보자- 그는 얼굴만 뚝 떼어놓았다고 해도 믿을 만큼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덮어쓰고 있다. 그 고민과 침울함이 내려앉은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왠지 모르게 그의 덩치가 별로 크지는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당신, 어쨌든 원해서 여기 갇혀있는 건 아니지?"
"당연하지"
아마도 전차가 들이받아서 생긴 듯한 사람 하나 드나들기에 충분한 균열과 어지간한 폭발에는 까딱도 하지 않을 덩치를 보니 자연스레 전차 안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시포리움 폭약 상자에 생각이 뻗는다. 어쩌면-
"...어쩌면, 저 틈을 더 크게 찢어 볼 수도 있을지도 모르는데"
"정말이냐?"
의외였던 것인지, 자이머는 갑작스레 몸을 숙이며 되물어 온다. 그는 단순히 고개를 숙인 것이겠지만 내게는 작은 산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달갑잖은 위압감에 가만히 고개만 끄덕여 긍정한다.
"그거 좋군! 어떤 방법이지!?"
시포리움 폭약이야. 라고 대답해주려고는 했는데, 귀가 얼얼해서 아무 말 없이 눈살만 찌푸릴 수밖에 없다. 자이머는 초조한지 내 멱살을 쥐고 흔들어대기라도 할 기세로 대답을 재촉해 온다.
"어서! 어서 더 찢어봐라 이 녀석아. 그럼 네놈의 바램이 뭐든 간에 얼마든지 이뤄주마!"
내 의사는 신경쓰지도 않고 재촉하는 그의 모습이 기억 속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어서인가? 이유 모르게 심술이 피어올라 냉담한 얼굴을 가장하며 쏘아붙인다.
"미안, 소원 같은 건 없어"
...그 말을 들은 거인의 얼빠진 얼굴이란, 몇 년 전에 잃어버린 줄 알았던 웃음이 돌아올 만큼 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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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병 구름들에 가리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마알간 빛을 잃지 않은 햇살이 천천히 눈밭 위를 물들이는 것이 보인다. 신도레이들의 말에 따르면 하루의 햇살 중에서도 가장 정순한 서광이 하늘을 수놓자, 허공을 떠돌던 밴시들은 하나 둘씩 어딘가 모를 곳으로 도망쳐 간다.
"시간이다. 쬐끄만 녀석아"
"알고 있어"
아니나 다를까, 새벽 내내 소리 듣고 달려 온 녀석들은 쫓아내겠다는 둥 불 붙이고 도망가면 상관 없지 않냐는 둥 몇 시간이라도 먼저 시도하라고 재잘거리며 재촉해 오던 자이머가 해가 비치기 무섭게 다시금 재촉해 온다. 틈새 사이로 나와 감옥의 높은 철벽을 바라보자, 새벽 내내 찔끔찔끔 설치한 시포리움 폭약들이 진흙멀록이 감고 다니는 거머리들마냥 중구난방 질서 없이 붙어있는 모습이 보인다.
"발파할 거야. 어느 정도 폭발인지는 모르니까 조심해"
나도 시포리움 폭약이 폭발하는 걸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대량으로 발파하는 건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부싯돌을 내리쳐 연결해둔 심지에 불을 붙이자 뱀이 기어가듯 불꽃이 심지를 뒤쫓는다. 눈 때문에 심지가 타들어가지 않을까봐 리드의 시신 위를 덮고 있던 휘장을 밑에 깔았다.. 미안해요 리드.
치이익-
심지가 첫 번째 폭약에 붙은 꼬리로 차츰 타들어가자, 되찾은 방패를 들고 전차 안으로 들어가 대비를 단단히 한다. 볼티루스의 역병 장치를 파괴할 폭약을 전부 털어넣었으니 설마 모자라지는 않겠지.
잠시 후, 첫 번째 폭음이 울려퍼진다. 그리고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폭음의 행진곡이 끝나자 막고 있던 귀에서 손을 뗀다. 전차 밖으로 나오자 보이는 것은 여기저기 뒤틀리고 찢어진 감옥. 자이머는 호언장담하긴 했지만, 정말로 찢고 나올 수 있는 걸까?
"아~주 좋아... 조금만 기다려라 쬐끄만 녀석아"
자이머가 찢어진 틈에 손을 집어넣고 밀어젖히자 기분 나쁜 철 찢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정말로 찢을 수 있는 거였구나. 손으로 금속 벽을 찢어내는 그 장엄한 광경을 지켜보는데, 어디선가 커다란 고함 소리가 들려온다.
"왠――놈들이냐――!!"
무의식중에 방패를 치켜 들며 뒤를 돌아보지만, 뒤에는 소복히 쌓인 눈밭뿐이다. 주변을 휘휘 둘러봐도 아무도 없다... 어디지?
캉-
순전히 운으로 막았다고 해도 할 말 없을 것이다.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방패에 갑작스레 묵직한 힘이 부딪혀 오자 다리에 힘이 풀린다. 털썩 주저앉아 올려다보자 왜 외침의 주인공을 찾을 수 없었는지 이해가 간다. 그 주인공은 서리고룡을 탄 채 공중에 떠 있었으니까. 서리고룡 위의 건장한 바르굴 전사가 긴 창을 재차 집어드는 것이 보인다. 그 창 끝에 놓인 것은 벽을 뜯어내는 손. 생각보다도 빠르게 입이 기도문을 읊는다.
"어둠을 밝히는 봉화는 빛을 우러르는 마음만으로도 피어오르니, 그 하나 하나가 창이요 검이라"
손을 떠나 날아간 밝은 빛이 서리고룡의 턱을 후려치자 바르굴의 손을 떠난 창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눈밭 위에 떨어진다. 그는 고삐를 감아쥐어 울부짖으며 머리를 흔드는 서리고룡을 진정시키더니, 고개를 돌려 나를 똑바로 쳐다봐온다. 되살아난 시체 주제에 산 사람도 흉내내기 힘들 만큼 눈매에 가득한 분노를 여기서도 느낄 수 있다. 자이머는 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거지?
"그래, 그럼 네가 첫번째다!"
바르굴의 어깨가 팽팽히 부풀어오르며 두 번째 창이 내게 겨눠지는 게 보인다. 아까 방패에 부딪었던 묵직한 공격을 기억한다. 주저앉은 채 방패로 받아내려다간 팔이 성할지 모르겠다. 자세를 고쳐 잡기에는 이미 늦었고...
캉-
결국, 검을 놓고 양 팔로 방패를 받쳐들어 창을 막아냈다. 두 팔이 찡하니 울리는 것이 보통 힘이 아니다. 어쩌면 다음 창은 방패를 꿰뚫어 버릴지도 몰라. 그가 다시금 창을 집어드는데 방패로 다시 받아낼 자신이 없어 망설임 없이 기도문을 읊는다.
"믿음이 나의 방패라, 믿음을 잃지 않으면 반석을 딛고 서니 두려워할 것은 오로지 빛을 잊는 것 뿐이라"
이번에 던져진 창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미끄러진다. 그 바르굴은 나를 감싼 반구 형태의 투명한 장막이 창을 받아낸 걸 믿을 수 없었는지 재차 창을 던져온다. 점으로만 보이는 창이 연이어 떨어지자 해를 입히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눈을 질끈 감고 방패를 들어올리고 만다.
"이 비겁한 놈!"
보호의 손길이 감싸주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창이 모두 미끄러진 것을 확인하고 검을 집어들며 일어나자마자 장막이 엷어지더니 대기 중으로 흩어져 간다. 나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킨다. 솔직히 다음 투창을 막을 자신이 없다. 하지만- 그 바르굴은 다음 창을 던질 수 없었다.
"비겁한 건 찔끔찔끔 이쑤시개나 던져대는 너 아니냐 이 쥐방울만한 녀석아!"
나나 그나, 소름끼치는 커다란 쇠 갈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금속 벽이 찢어져 무너져내리는 광경에 할 말을 잃어버렸으니까. 감옥 밖으로 발을 내딛은 자이머는 손을 뻗어 마치 참새라도 잡듯 서리고룡과 바르굴을 움켜쥐었다. 손아귀에서 바스러진 뼛조각들이 밑으로 후드득 떨어진다.
"이 덩치만 큰 밥벌레 자식이!"
...정말 경악스럽게도, 그 바르굴은 저 상황에서도 싸울 마음이 드는지 자이머의 손가락에 창을 내찌른다. 조금 존경스럽기까지 한 그 패기에 자이머는 씩 웃더니, 다른 손으로, 바르굴의 목을 쥐었다. 그리고...
"자유다!!! 이제 폭풍의 왕의 분노를 보여주마!"
설원을 휘몰아치는 목소리와 함께, 뭔가 부서지고 끊어지는 끔찍한 소리가 들린다... 감았던 눈을 뜨니 뽑혀나온 바르굴의 목이 발치를 굴러간다. 찢겨진 근육과 목뼈들 위의 부릅뜬 눈을 바라볼 자신이 없어 고개를 위로 치켜들자, 그 목을 뽑아버린 거인이 흉폭하게 웃으며 저 멀리서 허겁지겁 달려오는 바르굴들을 가리킨다.
"자, 이제 저 녀석들을 전부 부숴주마"
"그 전에 동지들을 찾아야 해"
"흐음? 그래, 동지는 소중하지. 타라"
위에 타라는 듯, 그가 손을 내민다. 울퉁불퉁한 손 위에 어렵게 올라서서 손가락에 바늘마냥 꽂혀 있는 바르굴의 창을 뽑았다. 창을 뽑자 검붉은 피가 약간 흘러나오기에 치유하려는데 갑작스레 바닥이 움직여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윽, 뭐 하는 거야?"
"크하하하! 그런 긁힌 상처에 연연하면 내가 뭐가 되겠나"
"이런 바보같은, 스컬지의 무기는 조심해야 한다고?"
"그래봤자 이쑤시개 아니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가 내려놓는 대로 투구 위에 앉아 투구의 뿔을 꼭 잡았다. 다행히 투구 중앙에 움푹한 부분이 있어 앉을 만하다. 내가 잘 올라갔다는 표시로 그의 투구를 두드리자,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의미 모를 말을 외치며 스컬지 군단에게 성큼성큼 걸어간다. 첫 걸음을 떼자마자 몸이 뒤로 홱 젖혀지며 떨어질 뻔했다.
"네놈들 몸뚱이로 장화나 닦아야겠다!"
...앉을 만 하다는건 절대로 취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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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상대조차 되지 못한다는 건 이런 걸 말하는가보다. 자이머가 성큼성큼 걷는 것만으로도 바르굴들이 으깨지고, 그 장화에 채인 녀석들은 형편없이 널브러지며 허공으로 날아간다. 게다가, 이 정도 덩치가 되면 목소리조차 무기다. 그는 이따금씩 숨을 깊이 들이마쉬고는 포효를 내질렀는데, 그 때마다 스컬지 군단이 귀를 부여잡으며 낙엽처럼 땅에 쓰러진다. 스컬지는 자이머를 대체 무슨 수로 가둬넣은 걸까..?
"잠깐! 조, 조금만 천천힉..!"
몸이 정신없이 흔들리는 통에 제대로 말하기조차 힘들다. 악쓰듯이 내지른 소리를 들었는지 흔들림이 조금 덜해진다.
"흔들리나? 내가 좀 흥분했군. 걱정 마라!"
아 네, 뭘 걱정하지 말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고맙군요. 같은 말로 한껏 비꼬아 주고 싶지만 매달리다시피 뿔을 붙잡고 있는 상황이라 그것도 여의치가 않다. 하지만, 몇 걸음 안 되어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릴 만한 풍경이 보인다.
"자이머, 가만히 갇혀 있었으면 편안한 죽음을 맞았을 텐데 굳이 마다하고 벌주를 마시는구나"
이리저리 흔들리는 통에 잔뜩 시달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신경이 잔뜩 곤두설 만큼 음산하고 소름끼치는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독을 마시는 것 같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보자, 투명한 보랏빛 장막 안에 창백한 피부와 생기를 잃어버린 눈, 그리고 귀족적인 복장의 누군가가 보인다. 신도레이와 묘하게 닮은 저 자는 샨레인이리라. 이 곳에 있을 샨레인이라면..
"나바리우스?"
"호오, 나를 아나? 아~ 은빛십자군이었나. 알겠다. 네가 그를 풀어주었구나. 맞나? 상관없다. 그를 죽였다가 재조립하는 일이 조금 빨라졌을 뿐이니. 너도 저기 십자군 나부랭이와 같이 영광스런 실험에 동참하면 되겠군"
투구 위에 덤처럼 앉아 있는 나를 용케도 알아본 모양이다. 그가 냉소하며 가리키는 곳에는 몇 개의 역병 수조들이 늘어서 있는데, 그 중 하나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게르크?"
그 시원스레 벗겨진 대머리와 불뚝 튀어나온 인중, 늘어진 코의 드워프는 틀림없는 게르크다. 그렇다면 저 쪽의 나무판 위에 여기저기 토막난 채로 매달려 있는 것은 부르이리라. 속에서 뭔가 뒤집히듯이 올라오려는 것을 겨우 억눌렀다. 목이 타들어가는 듯한 느낌... 부르르 떨리는 입술을 짓물어 진정시키고는 힘들게 입을 연다. 입을 열자 뭔가 찝찔한 액체가 입으로 흘러들어온다. 말을 꺼내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자이머"
"듣고 있다"
"소원이 생겼어"
"말해 보아라"
"다.. 부숴버려"
별다른 대답도 없이 자이머의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한껏 뒤로 젖혀진 그의 오른손에 바르굴이 한 마리 버둥거리고 있는 것을 보인다. 뭘 하려는 건지 알아채고는 눈을 꾹 감은 채 두 다리까지 사용해서 그의 뿔에 매달린다.
휘이이이이이잉-
돌멩이라도 되는 마냥 나바리우스에게 똑바로 날아간 바르굴이 문자 그대로 산산조각나 흩어진다. 흑마법의 장벽처럼 보이는 뭔가를 휘감고 있는 그는 무사했지만 그를 위시하던 수행원들은 그 여파에 나가떨어지거나 주저앉아, 자이머가 홀로 남은 나바리우스를 장막 째로 들어올릴 때까지도 일어나지 못한다.
"애쓰지 마라. 네 명을 재촉할 뿐이니까"
"으하하하! 쥐방울만한 녀석이 입만 살았구나! 뭉개주마!"
나바리우스를 장막 째로 짓이기려는 듯 자이머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손가락에는 힘줄과 핏줄이 돋아나 겉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나바리우스를 짓누르는 어마어마한 힘이 짐작된다. 그를 휘감은 장막이 점점 더 진해지며 요동쳤지만, 자이머의 악력에는 미치지 못하는지 천천히 일그러진다. 이제는 호리병처럼 일그러져 터져나갈 것만 같이 위태위태해진 장막 속에서, 한 줄기 붉은 액체가 뱀처럼 기어나와 아까 창에 찔린 상처로 스며든다. 걱정되어 자이머의 투구를 툭툭 두드려 보지만 장막과 힘겨루기 중인 그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 같다.
쿵-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다. 뿔에 심하게 부딪혀 어지러운 머리를 느릿느릿 흔들며 내려다보자, 자이머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가슴에 손을 얹고 신음을 억누르는 게 보인다.
"명을 재촉할 뿐이라니까... 리치 왕을 섬길 준비나 해라"
다시 땅에 내려선 나바리우스는 비웃으며 장막을 다시 구형으로 회복시키더니 손을 들어 자이머를 가리킨다. 그의 손으로부터 피보라를 닮은 검붉은 안개가 피어나더니, 날벌레 떼 마냥 뭉실거리며 손을 벗어나 자이머에게 날아오른다.
"자이머? 일어나! 일어나라고!"
투구를 툭툭 치다가, 힘껏 두드리고, 아예 발로 차 보지만 자이머는 신음을 흘릴 뿐 일어서질 못한다. 이미 자이머의 무릎까지 피어오른 안개에 발만 동동 구르다가, 이를 악물고 나바리우스를 바라보자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지금 뛰어내려 주문을 방해한다면...
..불가능하다. 오늘은 보호의 손길로 이미 한번 가호받았는지라 뛰어내릴 수단이 남아 있질 않다. 가호가 없어도 그냥 뛰어내릴 수는 있지만 그래서야 나바리우스의 주문을 막을 여력이 없다. 이번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처지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어째서, 누군가 떠나려 할 때마다 이렇게 무력할까?
"빛이 나를 불렀고 빛이 나를 구하였으니 나는 빛에 속하리라. 빛을 걸음으로써 어떤 어둠 밝힐 수 있음을 믿고 어떤 역경도 태울 수 있음을 믿으리라. 오늘 이곳에 혼을 살라 한 줌 봉화를 피우고, 몸을 눕혀 광휘의 탑의 초석을 쌓으니..."
나도 모르게 올리던 기도와 함께 환한 빛이 차오르더니, 이내 터져나오며 눈을 가린다. 몸을 휘감은 채 명멸하는 빛의 파도를, 성스러운 빛의 축복을 영문을 모른 채 바라보았다. 빛으로부터 노스랜드의 추위마저도 잊게 만드는 열기가 범람한다. 수없이 많은 빛의 속삭임. 마음과 몸에 활기를 불어넣는 그 속삭임들로부터 해야 할 일을 깨달아, 그 열기를 폭풍의 왕에게 전한다.
"성스러운 빛이여, 임하소서"
태양이라도 피어난 듯 맹렬하게 치솟는 눈부신 빛과 함께, 모든 것이 희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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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나이프가 빵에 꽂히듯 간단하게 철골이 땅에 차례차례 꽂힌다. 그 철골들 위에 은빛십자군의 휘장을 하나 하나 걸어나간다.
"게르크"
햇빛도 제대로 비치지 않는 탓에 제대로 말리지도 못한 휘장이 축 늘어진다. 휘장 세탁이나 할 상황은 아니지만, 역병 수조에 푹 젖었던 탓에 별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마지막에 빛을 찾았으니 편히 쉬기를.
"부르"
반쯤 찢어지고 피가 말라붙어 인장을 가린 휘장이 엉성하게 걸려 바람에 나부낀다. 시신을 수습하기도 힘들었다... 그의 혼은 잠들 수나 있을지.
"리드"
리드의 휘장은 이미 써 버렸기에, 내가 입고 있던 휘장을 벗어 건다. 입버릇대로 전차와 함께 묻히지는 못했군요 리드.
챙-
검을 뽑아 꼿꼿이 세우고 떠나 버린 동지들을 애도한다. 이 일대를 샅샅이 뒤졌지만 다르가스와 맥켈라르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다. 흔적도 남기지 못해 기억의 저편에서만 떠올릴 수 있는 사람들이 또 둘이나 늘어간다...
짧은 침묵이 끝나고 검을 거두며 눈을 감자, 커다랗지만 나직한 소리가 사이에 탑 하나쯤 쌓아도 될 정도로 위쪽에서 들려온다.
"썩어빠진 놈들을 싹 쓸어버렸으니 이 녀석들도 편히 쉬겠지"
"...아니, 리치 왕을 쓰러트릴 때까진"
골짜기를 타고내려오는 북풍처럼 커다란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헤어질 때가 되었기 때문일까, 왠지 한숨 소리에 아쉬움이 섞인 것 같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그럼 잘 있어라, 쬐끄만.. 친구여. 더 좋은 상황에서 다시 만나자!"
"운이 좋으면. 당신도 스컬지 무기 조심하고"
공성 전차가 성문이라도 들이받는 듯 지축을 울리는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 간다. 심장까지 울려오는 그 발소리를 들으며, 결국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를 입에 담았다.
"고마웠어"
오리지널 캐릭터가 등장하며, 사건의 순서나 상세한 장소 등에 변경사항이 있습니다.
(21) 폭풍의 왕과 작은 십자가
돌마냥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밀어올리자 강판 사이로 드러난 복잡한 기계 장치들과 거기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만들어낸, 눈에 익은 듯 하면서도 낯선 풍경이 시야를 채운다. 머릿속이 하얘진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방금 전을 떠올리려 하자 금속성의 마찰음이 사정없이 고막을 괴롭히며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머릿속이 웅웅 울리는 것 같아 막 다시 눈을 감으려는 차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힘겹게 고개를 돌려 본다.
"이봐, 에델로이아. 괜찮나?"
팔뚝에 붕대를 칭칭 감은 낯익은 드워프가 험상궂은 얼굴로 물어왔다. 그의 짜증스런 듯 찡그렸으면서도 한켠에는 걱정이 묻어나는 눈매를 보자, 방금 전의 기억이 되살아나 밀물처럼 밀려온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증기 전차에 시험양산형 시포리움 폭약을 잔뜩 실은 채 줄드락의 폐허를 달리고 있었다. 은빛십자군 격전지의 팔스타브 사령관에게 나바리우스의 스컬지 요새를 무너트릴 폭약을 전달하기 위해 한창 스컬지들을 밟아뭉개며 전진하던 중에... 갑자기 둔중한 충격과 함께 전차가 크게 흔들렸고... 그 다음은-
"부르, 뭐가 어떻게 된..콜록"
"말을 아끼게. 많이 안 좋아 보이니까"
부르의 말에 내 몸을 내려다보자, 반쯤 풀어헤쳐진 판금 갑옷 중 흉갑 왼쪽 밑으로 피범벅이 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숨을 들이쉬면 싸하게 아려오는 게 상처가 꽤 깊은 것 같다.
"하필 틈새에 파편이 끼었네. 뽑긴 했는데 제대로 손을 쓰기에는 상황이..."
쾅-
반쯤 동강나다시피 한 전차의 바깥쪽에서 들려온 커다란 폭발음이 부르의 말허리를 잘랐다. 바닥이 들썩이자 상처가 쓰라려 와 신음을 삼키고 있으니, 스컬지들의 피와 살점으로 엉망진창이 된 다르가스와 게르크 그리고 맥켈라르가 쫓기듯 전차 안쪽으로 몰려들어오는 광경이 보인다.
"빌어먹을, 너무 많아! 완전히 스컬지 지뢰밭 한가운데라고!"
"성스러운 빛이 우리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지 않으실 모양이군요"
"그래도 진짜 지뢰 맛을 봤으니 좀 뜨끔하겠지? 오 꼬맹아, 일어났냐?"
그늘 진 얼굴로 실의에 빠져 있는 게르크와는 달리, 상기된 얼굴의 맥켈라르는 아직 불태울 전의가 남은 모양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두 손으로 들어야 할 쯔바이핸더를 한 손에 들고는 손인사라도 하듯 흔들어대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묻는다.
"방금 전에...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이야"
"스컬지 바르굴들에게 포위당했다. 아니, 이 경우는 우리가 제 발로 걸어들어왔다고 하는 편이 옳겠군. 여하튼... 이 일대는 나바리우스의 스컬지 공장인 것 같다. 여기는 그 외곽 부분이고. 뭐가 들었는지 상당한 커다란 철창 옆이다"
"빠져..쿨럭, 나갈 수 있어?"
언짢은 표정의 다르가스는 침울한 게르크나 흥분한 맥켈라르와는 달리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가 언제나 차분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묻자 그 차분한 표정 그대로 고개를 젓는다.
"아니, 리드가 살아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써는 방법이 없다"
"..성스러운 빛이시여, 부디 그의 영혼을 구원하시기를"
다르가스의 말에 게르크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성호를 긋기에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자, 아무렇게나 덮어 놓은 은빛십자군의 휘장 밑으로 사람의 형체 같은 것이 보인다. 그 밑으로 빼꼼히 보이는 눈에 익은 푸른 작업복 소맷자락을 보자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이 된다. 괜시리 잔기침이 들끓어 다시금 왼쪽 옆구리가 쑤셔 온다.
"콜록, 콜록-"
"젠장! 그 하사관년은 지도 하나 제대로 못 주나? 어쩐지 스컬지가 너무 많다 했어"
"제대로 된 지도가 있을 턱이 없지 않나. 리아나 하사관에겐 최신 지도였겠지"
"썩을, 나도 알고 있어 그건... 이래서 테라모어 연놈들은!"
"맥켈라르, 나도 테라모어 출신이다. 옳지 못한 선입견이군"
"..."
맥켈라르는 이런 상황에서도 차분한 표정으로 저런 말을 꺼내는 다르가스에게 질렸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후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던 그는 불행하게도 다시금 입을 다물어야 했다. 훨씬 큰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며 대기를 흔들었으니까.
"이―겁――쟁이들아―――――! 그 거북이 등딱지에서 기어 나와라―――! 싫다면, 구워 줄까――――!"
기분나쁜 목소리가 두터운 전차 내벽 안까지도 울려대는데도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귀를 막을 수가 없다. 때문에 한동안 얼굴만 찌푸리고 있다가, 누구에게랄 것 없이 불평하듯 물음을 던진다.
"저건 누구야?"
"스컬지 바르굴들의 대장인 모양이다. 바르굴들은 선택받은 알가르라고 부르는 모양이더군"
"그 놈이 직접 나섰다면 시체벌레같은 나바리우스 자식도 옆에 있겠군. 뭐가 무섭다고 이쪽으론 기어오지도 못하는 새끼가 누구보고 겁쟁이라고?"
맥켈라르는 욕을 궁시렁거리며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는다. 당장 달려나가서 대거리라도 할 기세였지만.. 지친 모양이다. 다르가스 역시 꼿꼿이 세운 방패 위에 체중을 올려둔 채 불편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견시창으로 바깥을 내다보던 부르에게서 당혹감에 젖은 외침이 들려온다.
"이, 이보게들. 구워 준다는 말이 허세가 아닌 모양이네만?"
그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잔뜩 녹아 있어, 다르가스와 맥켈라르는 물론이고 실의에 빠져 있던 게르크조차도 튕기듯이 몸을 일으켜 견시창으로 몰려든다. 그렇지 않아도 빛이 부족한 실내가 한층 더 어두워진다.
"오, 빛이시여!"
"저... 미친 놈들이!"
몸을 일으킬 수가 없기에, 성스러운 빛을 외치며 머리를 감싸쥐는 게르크와 이를 갈며 욕을 내뱉는 맥켈라르와는 달리 아직까지도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다르가스에게 설명해달라는 시선을 던진다. 하지만 그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다.
"저 정도 양을 밀어넣으면 아무리 증기 전차라도 타 버릴걸세"
"웃기네, 그 전에 우리가 잘 익은 찜이 될걸?"
"둘 다 틀렸습니다. 우리가 뭘 운반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렸습니까?"
바르굴들이 불이라도 지르려는 걸까나.. 앞다퉈 비관적인 결과를 내뱉거나 상상하던 우리는 다르가스의 말에 일제히 전차 한쪽 구석을 바라보았다. 사이사이에 충격완충제를 잔뜩 베어문 채 겹겹히 쌓여 있는 나무 상자들. 은빛십자군의 인장이 새겨진 이 상자들에는 볼타루스의 역병 장치를 공격하기 위한 시포리움 폭약이 잔뜩 실려 있다. 맥켈라르의 얼굴이 구겨지고, 게르크는 물론 부르의 얼굴에서마저 핏기가 가신다.
"으...젠장, 어쩌지? 어쩌냐고!"
"뭐, 뭔가 방법이 있을 걸세"
머리를 움켜쥐고 신음을 흘리는 맥켈라르와 부르. 다르가스는 그 둘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쉬더니 아밍 소드를 뽑아든다. 바르굴들의 살점과 체액으로 더럽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날카로운 예기가 흐르는 잘 손질된 검이 그렇잖아도 알쌀한 공기를 더욱 서늘하게 만든다. 노기 서린 얼굴과 예기 어린 칼날이 그 끝에 있는 자들을 겨눈다. 맥켈라르에게 한 번, 그리고 부르에게 한 번.
"이보시오! 스컬지를 앞에 두고 어쩌냐니? 희망의 빛 예배당의 맹세를 잊어버렸소?"
"머릿수가 너무 많잖아!"
"어차피 누군가 이 전차에서 나가지 않는다면, 스컬지가 우리 모두 다 죽일 겁니다"
맥켈라르를 똑바로 바라보던 다르가스의 시선이 갑작스레 나에게 돌아온다.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잠자코 마주보자, 그의 입에서는 아주 웃긴 말이 튀어나온다.
"...적어도 한 명은 남아서 소식을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르가스가 모두의 목숨으로 한 명을 살리자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입에 담으며 나를 쳐다보기에 눈을 치켜뜨며 고개를 저었다. 어리다고, 여자라고 특별취급 받을 생각은 없다.
"웃기지 마!! 콜록, 콜록.. 나도, 나도 성스러운 빛 앞에 맹세한..쿨럭"
억지로 소리를 질러서인지 기침에 반쯤 묻혀 버렸지만, 맥켈라르라면 하지 못한 말까지 모두 들었겠지. 그도, 나도 희망의 빛 예배당에서 리치 왕 앞에 복수를 맹세했으니까. 맥켈라르라면 설령 리치 왕에게 닿지 못하고 도중에 스러지더라도, 그 순간까지 함께 복수의 칼날을 겨누자고 일으켜세울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그는 어째서인지 침음성을 흘릴 뿐 별다른 말대꾸를 하지 않는다. 초조함 속에 짧은 침묵이 흐르고, 이내 힘있게 들어올리는 쯔바이핸더와 함께 꾹 다물렸던 입이 열린다.
"그거.. 나쁘잖군"
"..뭐라고? 잠깐, 콜록"
그는 건틀렛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내 말은 듣지도 못했다는 듯이 몸을 돌린다. 맥켈라르에 이어 부르와 게르크 형제도 자신들의 무기를 뽑아들고는, 나만 남겨둔 채 천천히 전차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잠깐 담배라도 피우고 오겠다는 것만 같이 담담하기 그지없는 얼굴들의 행진. 도저히 누워만 있을 수 없어 억지로 몸을 일으키자, 폐부를 찔러오는 통증과 함께 기침이 격렬하게 터져나온다.
"가만히 있게, 상처가 꽤 깊어"
"...아냐. 조금만..쿨럭, 안정되면 내가 치유할 수 있어.. 나도 같이.."
"꼬맹아, 발루스에게나 전해줘. 약속한 쿨 티라스 포도주는 무덤에서 받겠다고"
"맥켈라르? 부르...! 돌아, 콜록!"
어느 새 다시 쓰러졌는지 눈 앞엔 일그러진 채 울렁거리는 전차 천장만이 보인다. 동지들의 외침인지 바르굴의 괴성인지 분간하기 힘든 함성들이 뒤섞여 전차 외벽을 울리며 귓가를 울려온다. 나도 일어나 검과 방패를 쥐고 그 대열에 서고 싶어 손이 부들부들 떨려오지만 몸이 도저히 말을 듣지 않는다.
그렇게 휘몰아치는 함성들이 잦아들어, 이윽고―고요히 가라앉을 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 것도.
- - - - - - - - - - - -
싸늘한 바람과 아릿한 고통에 눈을 뜬다.
정신을 잃었던 건가?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내가 아까 전까지 뭘 하고 있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노스랜드의 찬 공기에 몸은 움츠러들고 기침을 너무 많이 뱉어서인지 머리는 멍하니 어지럽다.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게 남의 일처럼 아련하게 떠올라 요퇴갑과 흉갑을 들춰보자, 부르의 임시 처치인지 찢어헤쳐진 내갑의 사이로 붕대가 대강 감기고 뭉쳐 있다. 피에 젖어 있는 것을 보니 출혈이 상당히 심한 모양이다. 그래서 어지러웠나? 길게 한숨을 쉬며 마음을 가라앉히자 내면으로부터 성스러운 빛의 응답이 들려온다. 아무래도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정도로는 회복된 것 같다.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몸을 일으켜 견시창을 바라보자, 빛을 잃어버린 우증층한 잿빛 하늘에서 피를 토하듯 흰 눈송이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그리 오래지 않은- 예전 어느 날 즈음에는 눈을 반가워했었지만... 어느샌가 그저 짜증나는 날씨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연중 절반 이상이 겨울인 노스랜드에 눌러앉은 탓이려나.
"아윽"
추억에 젖어드는 걸 억지로 깨우기라도 하듯이 다시금 환부가 쓰라려 온다. 그나마 멀쩡한 전차 내벽을 골라, 등을 기대고 쓰러지듯 주저앉아 내면의 환한 빛과 교감한다.
"성스러운 빛이시여, 고난의 끝에 작은 불빛을 예비하시어 지친 자들을 쉬게 하시고 병든 자들을 낫게 하소서"
기도를 올리자 상처를 덮은 손에서 아늑하고 환한 빛이 피어오르고- 한동안 정신을 집중하자 통증과 함께 점차 사그라든다. 이윽고 빛이 아지러지자 상처가 있던 자리에는 환부였음을 상기시키는 실낱같은 흔적과 늘어붙은 핏자국 뿐.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어느새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자 몸이 부르르 떨려와 붕대를 걷어내고 흉갑과 요퇴갑을 덮었다. 찢어진 내갑의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바람이 시리지만 수선할만한 도구가 없으니 별 수 없다. 몸을 일으켜 전차 안을 둘러보자 남아있는 것이라곤 여기저기 흩어진 군수품과 휘장에 덮인 리드의 시신이 전부. 그 휑한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으니 이제서야 동지들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실감된다. 가슴 한복판이 마치 송곳으로 찌르는 것만 같이 아려 온다.
"또.. 홀로 남아버렸네"
리드, 부르, 게르크, 맥켈라르, 다르가스... 마지막 발걸음을 옮기던 그 담담한 얼굴들이 눈 앞에 어른거린다. 가까운 사람도 먼 사람도 전부 잃어버리고 홀로 살아남은 것이 이걸로 세 번째. 뜨거워 오는 눈시울을 꾹 누르고 있으니, 계속해서 눈가를 차갑게 쓸어내리는 설풍 때문인지 마음이 쉽게도 가라앉는다. 아니면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건가?
깡-
감상에 젖을 새도 없이, 뭔가 딱딱한 것이 전차 외벽에 날아들었는지 금속음이 울려퍼진다. 피가 싸늘하게 식는 듯한 긴장과 함께 잊고 있던 것을 깨달았다.
이곳은 적진 한복판이다.
반사적으로 바닥을 둘러보자, 낡은 검과 은빛십자군의 문장이 그려진 방패가 누워 있던 자리 옆에 내팽개쳐져 있는 것이 보인다. 완갑을 풀어놓은 행운에 감사하며 조용히 검과 방패를 집어든다. 의외로 별달리 소용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적 앞에서 믿을 건 이것뿐이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움직여 견시창을 내다보려는 참에, 이번엔 좀 더 위쪽에서 비슷한 소리가 울린다.
깡-
밖에서 견시창을 들여다보기 쉽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조심스레 고개를 빼꼼 내밀어 견시창을 내다보자, 두어 명의 바르굴들이 돌멩이들을 던져 대는 것이 보인다. 돌멩이들이 날아드는 곳은 이 전차가 아니라 바로 옆의 높은 철창이었다. 높은 벽을 둘러치고 그 위로 새장같은 창살이 뻗은 탓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보이지 않지만... 어쨌든, 다르가스가 말했던 철창이겠지. 대체 무엇을 가두어 놓았길래 저렇게 커다란 감옥이 필요할까 궁금해하던 차에 궁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별로 원하지는 않았던 방향으로.
"이――썩은―버러지들아!!―――던져봤자―날―화나게―할―――뿐이다!"
머리가 울리는 것 같고 눈 앞에 떨어지는 별이 보인다. 손을 들어 이마를 짚으려니 머리가 너무 아래쪽에 있길래,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제서야 내가 넘어져 있다는 걸 깨닫는다. 대체 뭐였지? 전차 안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귀를 먹먹하게 할 정도로 엄청난― 마치 천둥같은 외침이었다.
"끄응-"
몸을 일으키는데 아직도 귓가가 울리는 것 같아 다리가 휘청거린다. 현기증이 일어 한동안 흐느적거리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견시창을 내다보자, 바르굴들이 비틀거리는 동작으로 도망치듯 감옥에서 멀어지는 것이 보인다. 왜 감옥이 격리시키듯 이런 외곽에 떨어져 있는지 너무나도 이해가 잘 된다... 저 감옥에 갇혀 있는 건 대체 뭘까?
....뭐든간에, 내겐 상관없지만.
- - - - - - - - - - - -
"하아~"
더욱 차가워진 밤공기에 곱아가는 손가락에 입김을 불어넣자 조금이나마 온기가 돈다. 견시창을 통해 간신히 들어오는 틔미한 달빛에 비쳐 굳은살이 잔뜩 박힌 손마디가 보인다. 스컬지 역병이 오염시킨 공기는 이렇게 달빛과 별빛조차도 꺾어 버린다. 녹여보려는 노력도 부질없이 추위가 에어오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풀어주고는 짓던 매듭을 마무리한다. 남은 압박붕대로 장갑을 끼고 힐트를 쥔 그대로 오른손을 감아버렸더니 너무 바짝 조였는지 벌써부터 손가락이 뻣뻣하다. 하지만 어쨌든 이제 손이 곱아 검을 떨어트리는 일은 없으리라. 마지막으로 왼팔을 끼워 방패를 들어올렸다. 이로써 완전무장이다.
저벅-
조심스레 전차 바깥으로 걸어나오자, 주변이 조용해서인지 발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원래 스컬지 군단은 밤에 잘 필요가 없지만, 바르굴들은 되살아나기 전의 습관 때문에 밤이 되면 활동이 뜸해진다. 그리고 이곳에서 본 스컬지는 바르굴뿐이었다.
저벅-
그래. 그러니까 긴장할 필요 없다. 검에 비반사 처리는 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달빛이 틔미하니 별다른 문제는 없을 테고, 눈이 잔뜩 쌓여 있으니 갑주가 덜그럭거리는 소리도 줄어든다. 바르굴 하나나 둘 정도는 얼마든지 눈을 가릴 수 있고... 쓰러지기 전까지 적어도 일곱이나 여덟 정도는 벨 수 있겠지.
휘이이이- 스아아아-
전차에서 나서 몇 발자국 떼지도 않았는데 매서운 바람 소리에 이질적인 소리가 섞여온다. 살아있을 리 없는- 메마르고 스산한 죽음의 소리가. 등골에 싸늘하게 내달리는 한기를 무시하고 오른손에 묶인 검을 내지르며 몸을 돌려 뒤를 노려본다.
"밴시!?"
아뿔싸! 설마 밴시가 있었을 줄이야. 힘껏 내지른 검은 부유물 마냥 일렁이는 희부연 영체를 허무하게 투과했다. 예상치 못한 일에 당황해 비틀거리는 사이, 젊은 아가씨를 닮은 그 투명한 팔이 뻗어와 얼굴을 쓰다듬는다. 메마르고 차가운 것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듯 한 느낌에 머리카락이 쭈삣 솟는다. 달빛마저도 어두운 밤, 소복히 눈이 쌓인 설원 한가운데서 일렁이는 동상마냥 생기가 빠져나간 얼굴. 그 중에서도 희부옇게 투명하여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운 입술이 입맛춤이라도 하려는 듯 점차 가까이 다가오자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린다. 발작적으로 방패를 들어올리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기도문을 읊는다.
"고, 고개를 들어... 빛을 우러러보라! 양식도 없고, 피난처도 없고, 네 어둠을 돌보는 이도 없으리니!"
청아한 빛무리가 방패에 아로새겨진 은빛십자군의 문장을 타고 휘몰아친다. 악령 퇴치의 구문이 제대로 먹힌 것인지, 안개처럼 너울거리던 모습 그대로 경련하듯 흐느적거리더니 정 반대 방향으로 내달린다.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주변을 둘러보며 몸을 숨길 곳을 찾는다. 밴시를 상대하려면 검에 축복을 내려야 하는데 검을 손에 묶어버렸기에 당장은 방법이 없는데다 약식 퇴치구문이 벌어주는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다. 이름모를 무언가가 갇힌 철창과 우그러지고 깨진 증기 전차 사이의 틈새로 서둘러 몸을 날린다. 몇 걸음 뛰지도 않았는데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하다.
솨아아아아아아-
전차의 잔해 뒤에 숨어 바깥을 내다보자, 바람은 부딪는 창검 마냥 날카롭게 노래하고 틔미한 달빛이 쏟아지는 가운데 몇이나 되는 밴시들이 이리저리 너울거리며 사후세계가 있다면 이럴까 싶은 몽환적인 광경을 만들어낸다. 저녁무렵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스컬지 역병이 아직 이 곳에 완연히 전염되지 않아서인지 밴시들은 밤에만 떠도는 모양이다.
"성가시네"
검을 축성하기 위해 결국 칭칭 묶어놓은 압박붕대를 풀어내려는데, 매듭을 워낙 단단히 묶어놓은 탓에 영 풀어내기 어렵다. 방패를 내려놓고, 왼손과 입으로 간신히 첫 번째 매듭을 풀어낸 참에, 거울 같은 칼날에 희부연 빛이 어른거린다. 설마-
스아아아-
오른쪽 경갑 사이로 살을 에는 듯한 한기가 스며든다. 소용 없는 줄 알면서도 검을 휘두르자 밴시는 전혀 개의치 않고 이번엔 목으로 그 손을 뻗어온다. 그보다 빠르게, 방패를 놓은 왼손으로 흉갑을 짚었다. 꾹 누르자 내갑의 위로 두터운 성표의 감촉이 와닿는다.
"빛을 피하지 말라, 언젠가 반드시 외길에서 만나게 될지어다"
기도를 마침과 동시에 반투명한 혼백 안에서 신성한 빛이 타오르자 밴시가 기괴한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물러난다. 그러나 짧은 안도감도 잠시 뿐, 찢어지는 듯한 망자의 울부짖음이 울려퍼지자 하늘거리며 허공을 떠돌던 아가씨들의 시선이 차례차례 이쪽에..아니, 내게 꽂힌다. 하나.. 둘..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목과 등골을 타고 싸늘한 공포가 내달린다.
텅- 끼익-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는지 견갑이 뭔가에 부딪는 느낌과 함께 금속성의 충돌음이 날카롭게 퍼진다. 그걸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천천히 허공을 유영하며 다가오는 밴시들의 움직임에 소름이 돋아난다. 수는 적어도 여덟.. 아홉 이상. 일단 어떻게든 앉아서 몸을 바치는 꼴만은 피하기 위해 늘어붙은 듯 눈에 빠진 다리에 힘을 주자- 어째서인지 세상이 빙그르 돌아간다.
"..어-?"
끼익- 쿠당탕-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세상이 소용돌이친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떠 보니, 그제서야 하필이면 등이 닿은 곳에 사람 하나쯤은 밀어넣을 만한 균열이 열려 있었다는 걸 알아챈다. 딱딱하고 차갑기 그지없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것도 꼴사나워 일어나려는데- 몸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다른 꼬마들 같지 않구나, 쬐끄만 녀석아. 네게선 케케묵은 죽음의 냄새가 나질 않는군"
크다. 정말 크다. 이렇게 커도 되나 싶을 만큼 크다.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 콧구멍엔 내 방패를 통째로 집어넣어도 될 것만 같고 바로 내 머리 위까지 늘어진 수염을 엮으면 군선의 돛을 만들어도 될 것 같다. 전차 충각만한 투구 밑에서 딱정벌레처럼 번득이는 나만한 눈동자에 대해 뭐라고 평해야 좋단 말인가? 나는 전혀 배운 바가 없다.
"뭐...야?"
그 얼척없을 정도로 커다란 누군가는, 대답은 하지 않고 흠- 하고 말꼬리를 끌며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내 몸보다도 커다란 손을 들어올린다. 저 손가락만 내리쳐도 나는 형체도 찾기 힘들게 찌부러져 버리겠지. 그걸 눈 앞에서 지켜볼 용기는 없어 왼팔로 눈앞을 가린다. 주변이 좀 더 어두워지는 느낌에 눈을 질끈 감을 무렵-
천둥이 대지를 휩쓸었다.
"꺼―져―라―아―아―아―!!!"
귓가에서 불똥이 튄다. 머리 위에서 수 천 마리의 종달새가 지저귄다. 이 원초적이고 가차없는 폭력에 속이 뒤집히는 것만 같아 숨을 헐떡이고 있는데, 장엄한 신의 음성같은 울림이 들려온다.
"일어나도 된다 작은 녀석아. 기웃거리던 천쪼가리들은 전부 내뺐을 게다"
어둡던 주변에 다시금 틔미한 빛이 돌아온다. 그제서야, 이 어처구니없게 커다란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기 전에 손으로 나를 덮었다는 걸 깨닫는다.
"당신...누구야?"
"자이머"
그는 그 이상의 어떤 말이 필요하냐는 듯 한 마디로 대답을 일축하며 껄껄 웃었다. 웃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몸이 들썩거린다.
"네 이름도 말해야지"
"에델로이아. 은빛십자군의 일원"
"그래? 그럼 난 폭풍 거인의 왕이다"
그는 그 왕방울같은 눈을 찡긋이며 씩 웃었다. 험상궂은 아저씨에 갓난아기의 얼굴을 붙여둔 것 같은 그 웃음은- 의외로 썩 어울린다. 그는 다시금 소리내어 웃음을 터트리더니 자뭇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말이지...쬐끄만 녀석아. 은빛십자군이 대체 뭐냐?"
"...'저것'들을 죽이는 사람들"
아직까지도 검이 단단히 묶인 오른손을 들어 바깥을 가리킨다. 높은 철벽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리라. 그는 내가 이 곳에 오기 훨씬 전부터 이 감옥 안에 있었으니.
"리치 왕과 싸우나? 전사들이군"
"맞아"
"잠깐. 네녀석도 은빛....뭐라고 했잖아"
"은빛십자군이야"
"뭐-라고! 그 작은 녀석들 중에서도 더 쬐끄만 녀석이 전사라고?"
그는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무릎을 탁 치며 껄껄 웃는다. 대번에 기분이 최악으로 나빠졌다. 어리다고 무시하는 건 질색이다. 리치 왕에게서 받은 고통은 모두 똑같은데 말이다. 그는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눈치가 빠른지 넉살도 좋게 내 심중을 입에 올린다.
"삐졌나?"
"바란 게 없으니 속상할 것도 없어"
"작은 녀석이 속도 작구나!"
"그래, 나 작아. 그게 뭐? 이렇게 큰 당신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데?"
끄흥, 하는 헛기침 소리가 들린다. 헛기침 소리마저도 마치 고함을 지른 것처럼 크다. 그런 큰 목소리가 조용히 입을 닫고 있는 것은 묘한 느낌이다. 딱히 대답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기에 입으로 손과 검을 묶어 둔 붕대를 풀어낸다.
"배신이다"
한동안 침묵을 고수하던 그는, 내가 손에서 검을 다 풀어낼 무렵에서야 내뱉듯이 말을 받는다.
"뭐가?"
"내 형제 타이시가, 그가 나를 배신했단 말이다!"
그 눈망울에 처음으로 내가 기대했던 것이 깃든다. 의외로 그 눈에서 이글거리는- 덩치에 어울리는 분노를 담담히 바라볼 수 있다. 배신당한 기분이라면...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럼 당신도 똑같네"
"무슨 소리지?"
"나도 배신당했으니까. 나의 왕에게"
거인에게 다시 침묵이 내려앉는다.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으려나 싶어 위를 올려다보자- 그는 얼굴만 뚝 떼어놓았다고 해도 믿을 만큼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덮어쓰고 있다. 그 고민과 침울함이 내려앉은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왠지 모르게 그의 덩치가 별로 크지는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당신, 어쨌든 원해서 여기 갇혀있는 건 아니지?"
"당연하지"
아마도 전차가 들이받아서 생긴 듯한 사람 하나 드나들기에 충분한 균열과 어지간한 폭발에는 까딱도 하지 않을 덩치를 보니 자연스레 전차 안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시포리움 폭약 상자에 생각이 뻗는다. 어쩌면-
"...어쩌면, 저 틈을 더 크게 찢어 볼 수도 있을지도 모르는데"
"정말이냐?"
의외였던 것인지, 자이머는 갑작스레 몸을 숙이며 되물어 온다. 그는 단순히 고개를 숙인 것이겠지만 내게는 작은 산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달갑잖은 위압감에 가만히 고개만 끄덕여 긍정한다.
"그거 좋군! 어떤 방법이지!?"
시포리움 폭약이야. 라고 대답해주려고는 했는데, 귀가 얼얼해서 아무 말 없이 눈살만 찌푸릴 수밖에 없다. 자이머는 초조한지 내 멱살을 쥐고 흔들어대기라도 할 기세로 대답을 재촉해 온다.
"어서! 어서 더 찢어봐라 이 녀석아. 그럼 네놈의 바램이 뭐든 간에 얼마든지 이뤄주마!"
내 의사는 신경쓰지도 않고 재촉하는 그의 모습이 기억 속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어서인가? 이유 모르게 심술이 피어올라 냉담한 얼굴을 가장하며 쏘아붙인다.
"미안, 소원 같은 건 없어"
...그 말을 들은 거인의 얼빠진 얼굴이란, 몇 년 전에 잃어버린 줄 알았던 웃음이 돌아올 만큼 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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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병 구름들에 가리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마알간 빛을 잃지 않은 햇살이 천천히 눈밭 위를 물들이는 것이 보인다. 신도레이들의 말에 따르면 하루의 햇살 중에서도 가장 정순한 서광이 하늘을 수놓자, 허공을 떠돌던 밴시들은 하나 둘씩 어딘가 모를 곳으로 도망쳐 간다.
"시간이다. 쬐끄만 녀석아"
"알고 있어"
아니나 다를까, 새벽 내내 소리 듣고 달려 온 녀석들은 쫓아내겠다는 둥 불 붙이고 도망가면 상관 없지 않냐는 둥 몇 시간이라도 먼저 시도하라고 재잘거리며 재촉해 오던 자이머가 해가 비치기 무섭게 다시금 재촉해 온다. 틈새 사이로 나와 감옥의 높은 철벽을 바라보자, 새벽 내내 찔끔찔끔 설치한 시포리움 폭약들이 진흙멀록이 감고 다니는 거머리들마냥 중구난방 질서 없이 붙어있는 모습이 보인다.
"발파할 거야. 어느 정도 폭발인지는 모르니까 조심해"
나도 시포리움 폭약이 폭발하는 걸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대량으로 발파하는 건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부싯돌을 내리쳐 연결해둔 심지에 불을 붙이자 뱀이 기어가듯 불꽃이 심지를 뒤쫓는다. 눈 때문에 심지가 타들어가지 않을까봐 리드의 시신 위를 덮고 있던 휘장을 밑에 깔았다.. 미안해요 리드.
치이익-
심지가 첫 번째 폭약에 붙은 꼬리로 차츰 타들어가자, 되찾은 방패를 들고 전차 안으로 들어가 대비를 단단히 한다. 볼티루스의 역병 장치를 파괴할 폭약을 전부 털어넣었으니 설마 모자라지는 않겠지.
잠시 후, 첫 번째 폭음이 울려퍼진다. 그리고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폭음의 행진곡이 끝나자 막고 있던 귀에서 손을 뗀다. 전차 밖으로 나오자 보이는 것은 여기저기 뒤틀리고 찢어진 감옥. 자이머는 호언장담하긴 했지만, 정말로 찢고 나올 수 있는 걸까?
"아~주 좋아... 조금만 기다려라 쬐끄만 녀석아"
자이머가 찢어진 틈에 손을 집어넣고 밀어젖히자 기분 나쁜 철 찢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정말로 찢을 수 있는 거였구나. 손으로 금속 벽을 찢어내는 그 장엄한 광경을 지켜보는데, 어디선가 커다란 고함 소리가 들려온다.
"왠――놈들이냐――!!"
무의식중에 방패를 치켜 들며 뒤를 돌아보지만, 뒤에는 소복히 쌓인 눈밭뿐이다. 주변을 휘휘 둘러봐도 아무도 없다... 어디지?
캉-
순전히 운으로 막았다고 해도 할 말 없을 것이다.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방패에 갑작스레 묵직한 힘이 부딪혀 오자 다리에 힘이 풀린다. 털썩 주저앉아 올려다보자 왜 외침의 주인공을 찾을 수 없었는지 이해가 간다. 그 주인공은 서리고룡을 탄 채 공중에 떠 있었으니까. 서리고룡 위의 건장한 바르굴 전사가 긴 창을 재차 집어드는 것이 보인다. 그 창 끝에 놓인 것은 벽을 뜯어내는 손. 생각보다도 빠르게 입이 기도문을 읊는다.
"어둠을 밝히는 봉화는 빛을 우러르는 마음만으로도 피어오르니, 그 하나 하나가 창이요 검이라"
손을 떠나 날아간 밝은 빛이 서리고룡의 턱을 후려치자 바르굴의 손을 떠난 창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눈밭 위에 떨어진다. 그는 고삐를 감아쥐어 울부짖으며 머리를 흔드는 서리고룡을 진정시키더니, 고개를 돌려 나를 똑바로 쳐다봐온다. 되살아난 시체 주제에 산 사람도 흉내내기 힘들 만큼 눈매에 가득한 분노를 여기서도 느낄 수 있다. 자이머는 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거지?
"그래, 그럼 네가 첫번째다!"
바르굴의 어깨가 팽팽히 부풀어오르며 두 번째 창이 내게 겨눠지는 게 보인다. 아까 방패에 부딪었던 묵직한 공격을 기억한다. 주저앉은 채 방패로 받아내려다간 팔이 성할지 모르겠다. 자세를 고쳐 잡기에는 이미 늦었고...
캉-
결국, 검을 놓고 양 팔로 방패를 받쳐들어 창을 막아냈다. 두 팔이 찡하니 울리는 것이 보통 힘이 아니다. 어쩌면 다음 창은 방패를 꿰뚫어 버릴지도 몰라. 그가 다시금 창을 집어드는데 방패로 다시 받아낼 자신이 없어 망설임 없이 기도문을 읊는다.
"믿음이 나의 방패라, 믿음을 잃지 않으면 반석을 딛고 서니 두려워할 것은 오로지 빛을 잊는 것 뿐이라"
이번에 던져진 창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미끄러진다. 그 바르굴은 나를 감싼 반구 형태의 투명한 장막이 창을 받아낸 걸 믿을 수 없었는지 재차 창을 던져온다. 점으로만 보이는 창이 연이어 떨어지자 해를 입히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눈을 질끈 감고 방패를 들어올리고 만다.
"이 비겁한 놈!"
보호의 손길이 감싸주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창이 모두 미끄러진 것을 확인하고 검을 집어들며 일어나자마자 장막이 엷어지더니 대기 중으로 흩어져 간다. 나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킨다. 솔직히 다음 투창을 막을 자신이 없다. 하지만- 그 바르굴은 다음 창을 던질 수 없었다.
"비겁한 건 찔끔찔끔 이쑤시개나 던져대는 너 아니냐 이 쥐방울만한 녀석아!"
나나 그나, 소름끼치는 커다란 쇠 갈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금속 벽이 찢어져 무너져내리는 광경에 할 말을 잃어버렸으니까. 감옥 밖으로 발을 내딛은 자이머는 손을 뻗어 마치 참새라도 잡듯 서리고룡과 바르굴을 움켜쥐었다. 손아귀에서 바스러진 뼛조각들이 밑으로 후드득 떨어진다.
"이 덩치만 큰 밥벌레 자식이!"
...정말 경악스럽게도, 그 바르굴은 저 상황에서도 싸울 마음이 드는지 자이머의 손가락에 창을 내찌른다. 조금 존경스럽기까지 한 그 패기에 자이머는 씩 웃더니, 다른 손으로, 바르굴의 목을 쥐었다. 그리고...
"자유다!!! 이제 폭풍의 왕의 분노를 보여주마!"
설원을 휘몰아치는 목소리와 함께, 뭔가 부서지고 끊어지는 끔찍한 소리가 들린다... 감았던 눈을 뜨니 뽑혀나온 바르굴의 목이 발치를 굴러간다. 찢겨진 근육과 목뼈들 위의 부릅뜬 눈을 바라볼 자신이 없어 고개를 위로 치켜들자, 그 목을 뽑아버린 거인이 흉폭하게 웃으며 저 멀리서 허겁지겁 달려오는 바르굴들을 가리킨다.
"자, 이제 저 녀석들을 전부 부숴주마"
"그 전에 동지들을 찾아야 해"
"흐음? 그래, 동지는 소중하지. 타라"
위에 타라는 듯, 그가 손을 내민다. 울퉁불퉁한 손 위에 어렵게 올라서서 손가락에 바늘마냥 꽂혀 있는 바르굴의 창을 뽑았다. 창을 뽑자 검붉은 피가 약간 흘러나오기에 치유하려는데 갑작스레 바닥이 움직여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윽, 뭐 하는 거야?"
"크하하하! 그런 긁힌 상처에 연연하면 내가 뭐가 되겠나"
"이런 바보같은, 스컬지의 무기는 조심해야 한다고?"
"그래봤자 이쑤시개 아니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가 내려놓는 대로 투구 위에 앉아 투구의 뿔을 꼭 잡았다. 다행히 투구 중앙에 움푹한 부분이 있어 앉을 만하다. 내가 잘 올라갔다는 표시로 그의 투구를 두드리자,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의미 모를 말을 외치며 스컬지 군단에게 성큼성큼 걸어간다. 첫 걸음을 떼자마자 몸이 뒤로 홱 젖혀지며 떨어질 뻔했다.
"네놈들 몸뚱이로 장화나 닦아야겠다!"
...앉을 만 하다는건 절대로 취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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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상대조차 되지 못한다는 건 이런 걸 말하는가보다. 자이머가 성큼성큼 걷는 것만으로도 바르굴들이 으깨지고, 그 장화에 채인 녀석들은 형편없이 널브러지며 허공으로 날아간다. 게다가, 이 정도 덩치가 되면 목소리조차 무기다. 그는 이따금씩 숨을 깊이 들이마쉬고는 포효를 내질렀는데, 그 때마다 스컬지 군단이 귀를 부여잡으며 낙엽처럼 땅에 쓰러진다. 스컬지는 자이머를 대체 무슨 수로 가둬넣은 걸까..?
"잠깐! 조, 조금만 천천힉..!"
몸이 정신없이 흔들리는 통에 제대로 말하기조차 힘들다. 악쓰듯이 내지른 소리를 들었는지 흔들림이 조금 덜해진다.
"흔들리나? 내가 좀 흥분했군. 걱정 마라!"
아 네, 뭘 걱정하지 말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고맙군요. 같은 말로 한껏 비꼬아 주고 싶지만 매달리다시피 뿔을 붙잡고 있는 상황이라 그것도 여의치가 않다. 하지만, 몇 걸음 안 되어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릴 만한 풍경이 보인다.
"자이머, 가만히 갇혀 있었으면 편안한 죽음을 맞았을 텐데 굳이 마다하고 벌주를 마시는구나"
이리저리 흔들리는 통에 잔뜩 시달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신경이 잔뜩 곤두설 만큼 음산하고 소름끼치는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독을 마시는 것 같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보자, 투명한 보랏빛 장막 안에 창백한 피부와 생기를 잃어버린 눈, 그리고 귀족적인 복장의 누군가가 보인다. 신도레이와 묘하게 닮은 저 자는 샨레인이리라. 이 곳에 있을 샨레인이라면..
"나바리우스?"
"호오, 나를 아나? 아~ 은빛십자군이었나. 알겠다. 네가 그를 풀어주었구나. 맞나? 상관없다. 그를 죽였다가 재조립하는 일이 조금 빨라졌을 뿐이니. 너도 저기 십자군 나부랭이와 같이 영광스런 실험에 동참하면 되겠군"
투구 위에 덤처럼 앉아 있는 나를 용케도 알아본 모양이다. 그가 냉소하며 가리키는 곳에는 몇 개의 역병 수조들이 늘어서 있는데, 그 중 하나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게르크?"
그 시원스레 벗겨진 대머리와 불뚝 튀어나온 인중, 늘어진 코의 드워프는 틀림없는 게르크다. 그렇다면 저 쪽의 나무판 위에 여기저기 토막난 채로 매달려 있는 것은 부르이리라. 속에서 뭔가 뒤집히듯이 올라오려는 것을 겨우 억눌렀다. 목이 타들어가는 듯한 느낌... 부르르 떨리는 입술을 짓물어 진정시키고는 힘들게 입을 연다. 입을 열자 뭔가 찝찔한 액체가 입으로 흘러들어온다. 말을 꺼내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자이머"
"듣고 있다"
"소원이 생겼어"
"말해 보아라"
"다.. 부숴버려"
별다른 대답도 없이 자이머의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한껏 뒤로 젖혀진 그의 오른손에 바르굴이 한 마리 버둥거리고 있는 것을 보인다. 뭘 하려는 건지 알아채고는 눈을 꾹 감은 채 두 다리까지 사용해서 그의 뿔에 매달린다.
휘이이이이이잉-
돌멩이라도 되는 마냥 나바리우스에게 똑바로 날아간 바르굴이 문자 그대로 산산조각나 흩어진다. 흑마법의 장벽처럼 보이는 뭔가를 휘감고 있는 그는 무사했지만 그를 위시하던 수행원들은 그 여파에 나가떨어지거나 주저앉아, 자이머가 홀로 남은 나바리우스를 장막 째로 들어올릴 때까지도 일어나지 못한다.
"애쓰지 마라. 네 명을 재촉할 뿐이니까"
"으하하하! 쥐방울만한 녀석이 입만 살았구나! 뭉개주마!"
나바리우스를 장막 째로 짓이기려는 듯 자이머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손가락에는 힘줄과 핏줄이 돋아나 겉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나바리우스를 짓누르는 어마어마한 힘이 짐작된다. 그를 휘감은 장막이 점점 더 진해지며 요동쳤지만, 자이머의 악력에는 미치지 못하는지 천천히 일그러진다. 이제는 호리병처럼 일그러져 터져나갈 것만 같이 위태위태해진 장막 속에서, 한 줄기 붉은 액체가 뱀처럼 기어나와 아까 창에 찔린 상처로 스며든다. 걱정되어 자이머의 투구를 툭툭 두드려 보지만 장막과 힘겨루기 중인 그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 같다.
쿵-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다. 뿔에 심하게 부딪혀 어지러운 머리를 느릿느릿 흔들며 내려다보자, 자이머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가슴에 손을 얹고 신음을 억누르는 게 보인다.
"명을 재촉할 뿐이라니까... 리치 왕을 섬길 준비나 해라"
다시 땅에 내려선 나바리우스는 비웃으며 장막을 다시 구형으로 회복시키더니 손을 들어 자이머를 가리킨다. 그의 손으로부터 피보라를 닮은 검붉은 안개가 피어나더니, 날벌레 떼 마냥 뭉실거리며 손을 벗어나 자이머에게 날아오른다.
"자이머? 일어나! 일어나라고!"
투구를 툭툭 치다가, 힘껏 두드리고, 아예 발로 차 보지만 자이머는 신음을 흘릴 뿐 일어서질 못한다. 이미 자이머의 무릎까지 피어오른 안개에 발만 동동 구르다가, 이를 악물고 나바리우스를 바라보자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지금 뛰어내려 주문을 방해한다면...
..불가능하다. 오늘은 보호의 손길로 이미 한번 가호받았는지라 뛰어내릴 수단이 남아 있질 않다. 가호가 없어도 그냥 뛰어내릴 수는 있지만 그래서야 나바리우스의 주문을 막을 여력이 없다. 이번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처지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어째서, 누군가 떠나려 할 때마다 이렇게 무력할까?
"빛이 나를 불렀고 빛이 나를 구하였으니 나는 빛에 속하리라. 빛을 걸음으로써 어떤 어둠 밝힐 수 있음을 믿고 어떤 역경도 태울 수 있음을 믿으리라. 오늘 이곳에 혼을 살라 한 줌 봉화를 피우고, 몸을 눕혀 광휘의 탑의 초석을 쌓으니..."
나도 모르게 올리던 기도와 함께 환한 빛이 차오르더니, 이내 터져나오며 눈을 가린다. 몸을 휘감은 채 명멸하는 빛의 파도를, 성스러운 빛의 축복을 영문을 모른 채 바라보았다. 빛으로부터 노스랜드의 추위마저도 잊게 만드는 열기가 범람한다. 수없이 많은 빛의 속삭임. 마음과 몸에 활기를 불어넣는 그 속삭임들로부터 해야 할 일을 깨달아, 그 열기를 폭풍의 왕에게 전한다.
"성스러운 빛이여, 임하소서"
태양이라도 피어난 듯 맹렬하게 치솟는 눈부신 빛과 함께, 모든 것이 희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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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나이프가 빵에 꽂히듯 간단하게 철골이 땅에 차례차례 꽂힌다. 그 철골들 위에 은빛십자군의 휘장을 하나 하나 걸어나간다.
"게르크"
햇빛도 제대로 비치지 않는 탓에 제대로 말리지도 못한 휘장이 축 늘어진다. 휘장 세탁이나 할 상황은 아니지만, 역병 수조에 푹 젖었던 탓에 별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마지막에 빛을 찾았으니 편히 쉬기를.
"부르"
반쯤 찢어지고 피가 말라붙어 인장을 가린 휘장이 엉성하게 걸려 바람에 나부낀다. 시신을 수습하기도 힘들었다... 그의 혼은 잠들 수나 있을지.
"리드"
리드의 휘장은 이미 써 버렸기에, 내가 입고 있던 휘장을 벗어 건다. 입버릇대로 전차와 함께 묻히지는 못했군요 리드.
챙-
검을 뽑아 꼿꼿이 세우고 떠나 버린 동지들을 애도한다. 이 일대를 샅샅이 뒤졌지만 다르가스와 맥켈라르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다. 흔적도 남기지 못해 기억의 저편에서만 떠올릴 수 있는 사람들이 또 둘이나 늘어간다...
짧은 침묵이 끝나고 검을 거두며 눈을 감자, 커다랗지만 나직한 소리가 사이에 탑 하나쯤 쌓아도 될 정도로 위쪽에서 들려온다.
"썩어빠진 놈들을 싹 쓸어버렸으니 이 녀석들도 편히 쉬겠지"
"...아니, 리치 왕을 쓰러트릴 때까진"
골짜기를 타고내려오는 북풍처럼 커다란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헤어질 때가 되었기 때문일까, 왠지 한숨 소리에 아쉬움이 섞인 것 같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그럼 잘 있어라, 쬐끄만.. 친구여. 더 좋은 상황에서 다시 만나자!"
"운이 좋으면. 당신도 스컬지 무기 조심하고"
공성 전차가 성문이라도 들이받는 듯 지축을 울리는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 간다. 심장까지 울려오는 그 발소리를 들으며, 결국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를 입에 담았다.
"고마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