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철 1화 서장
"...쯤이면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좌석벨트를 매시고...현지 시각은 오후 4시 50분 입니다.....We will be landing at..."
물 적신 솜처럼 조용하니 늘어져 있던 KAL KE082편의 기내에 스튜어디스의 착륙 안내 방송이 울려퍼지자, 주익 옆의 한 좌석에서 담요처럼 덮힌 남색 코트가 들썩였다. 영어로, 중국어로 이어지는 안내방송에 코트를 엎어 놓고 잠을 청하던 청년은 결국 투덜거리며 귀마개와 안대를 풀어냈다. 곤히 자던 중에 일어나서인지 짜증이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휘휘 둘러본 그는 손에 든 귀마개와 안대를 느릿느릿 좌석 앞의 행낭에 쑤셔넣었다. 이어서 착륙 안내 도움말을 재생하는 행낭 위의 스크린을 꺼 버린 그는 늘어져라 기지개를 폈다. 두어 차례 목과 허리를 돌리며 굳은 몸을 푸는 동안 갈색 머리칼이 이리저리 흔들리자 청년은 귀찮은 듯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짙은 암록색 눈동자와 잘 어울리는 갈색 머리칼은 길이는 적당히 깔끔했지만 다소 덥수룩하게 뭉쳐 정갈함과 제멋대로의 중간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손님 여러분, 서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비행기가 완전히 멈춘 후....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For your safety. Please remain..."
이윽고 다소 거친 진동과 함께 비행기가 활주로에 착륙하는지 KAL기의 주익 너머로 회색 아스콘과 마른 잔디가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도착 안내 방송이 나지막히 흘러나오는 가운데, 승객들이 착륙에 흥분했는지 뉴욕에서 인천까지의 긴 비행으로 고단히 늘어져 있던 기내가 담소를 나누는 작은 목소리들로 활기차게 끓어올랐다. 기체가 완전히 정지하자 청년은 가장 먼저 일어나 선반을 열고 푸른 슈트케이스를 꺼내고는 자리에 그대로 다리를 꼰 채 앉아 기내에 비치된 신문을 펼쳐들었다. 그는 잠시 후 대부분의 승객이 내려 한산해지자 읽던 신문을 코트 주머니에 대강 접어넣고 옆 좌석에 눕혀둔 슈트케이스를 들어올렸다.
비행기에서 내려 맞이한 것은 긴 출입국 심사 대기줄이었다. 청년은 그 끄트머리에 서서 아까 접어넣었던 신문을 펼쳐들었다. 그는 한글에 익숙한 것인지 간혹가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주로 굵직굵직한 사건들 위주로 신문을 뒤적거리며 이따금씩 코트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줄을 그었다. 한동안 신문에 시선을 파묻은 채 앞 사람의 움직임에 맞춰 조금씩 움직이던 그가 뒷사람의 눈치에 신문을 접자, 덩그라니 빈 출입국 심사대에서 심사원이 그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본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조그맣게 뒷사람에게 사과하고는 슈트케이스를 들어올리며 심사대로 다가가 증빙자료를 내밀었다.
"Hello..."
"날씨 좋군요. 예, 론델 스틸워커 본인입니다"
"..네? 아, 아아. 그렇습니까. 흠흠, 한국어에 능숙하시네요"
"한국에 친구가 있거든요. 비자는 면제 맞습니까?"
"예....예. 맞습니다. 즐거운 여행 되시기 바랍니다"
출입국 심사원에게도 한국어가 유창한 서구계 청년은 생소한 것인지 직원은 당황한 채 체류기간을 묻는 것도 잊은 채 말을 더듬는다. 청년은 씩 웃고는 증빙서류들을 다시금 슈트케이스에 집어넣고 심사대에서 멀어지며 씁쓸하게 웃었다.
"미국 여권이 좋긴 좋군.. GMT+9:00 인가? 서둘러야겠는걸"
청년이 아이폰을 꺼내자, 미리 로밍을 맞춰 두었는지 한국 표준시각에 맞춘 시계가 표시된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각은 다섯 시 사십오 분. 청년은 따로 찾을 화물은 없는 것인지 들고 있던 슈트케이스만 가지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출입국 게이트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팻말에 이름을 써 들고 저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청년은 거기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지나쳤다. 그는 면세점과 대기실을 지나 4C 여객터미널로 방향을 잡았다. 한동안 단조롭게 걷던 그는 터미널 입구에서 아는 사람이라도 발견했는지 눈을 찡긋이며 오른손을 들어올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반가움을 표하는 그에게, 출입구 한켠에 몸을 기댄 채 엷은 베이지색 코트로는 추위를 몰아내기엔 부족했는지 양 팔로 몸을 얼싸안은 화사한 금발 머리의 아가씨가 고개를 살짝 흔들어 답했다. 흔들리는 단발 블론드 사이에 선명하게 자리잡은 붉은 머리띠가 인상적인 그녀는 가만히 푸른 눈동자를 깜박였다.
"여어~! 앨리스!"
"6분이나 늦잖아. 저녁도 못 먹고 기다리는 사람을 생각해줘"
"아아 미안. 생각보다 공항이 커서 말이야... 잘 지냈어?"
"너만 안 왔으면 계속 잘 지냈을 걸.. 어쨌든 잘 왔어 이언"
가볍게 의례적인 포옹을 한 검은 코트의 청년, 이언은 싱긋 웃으며 대수롭잖다는 듯 금발 아가씨, 앨리스에게 넌지시 물었다.
"아, 내 짐은?"
"차에 두고 왔어. 늦장 부리다간 정말로 늦어버릴테니 서두르는 편이 좋을 거야. 한국의 협회 에이전트는 늦은 시간에 불청객이 찾아오는 걸 정말 싫어하거든"
"에이, 몇분이나 늦었다고.."
이언은 툴툴거리며 앨리스를 따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녀는 이언에게 실외주차장에 세워둔 연두색 2007년형 폭스바겐 뉴 비틀의 문을 열어주고는 반대편으로 차에 올라 운전대를 잡았다. 차에 오르자마자 좌석부터 죽 기울인 이언은 마침 생각났다는 듯 슈트케이스를 뒤적거리더니 주홍색으로 포장된 유리병을 하나 꺼냈다.
"아, 파이어플라이 마시고 싶다고 했었지? 제일 좋아하는 레몬진저로 사왔다"
"어...기억하고 있었어?"
"물론. 여기"
"....나 참, 지금 주면 어쩌자는 거야. 운전 네가 할거야?"
"내가 하지 뭐"
"한국 면허는?"
"그야...없네"
"아직도 국제면허 안 딴거야?"
"아하하, 알다시피 이것저것 바빠서.."
"벨트나 매"
앨리스는 다소 놀랐다는 듯 눈을 살짝 치켜떴지만, 작은 입술에서 뱉어내는 건 핀잔이었다. 속 편하게 대답하며 아이패드로 눈을 돌리는 이언을 보고 얕은 한숨을 쉰 그녀는 열쇠를 돌려 시동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