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건네진 실타래 - 클로토의 변덕
삐비비빅...삐비비빅...삐비비빅...
책상 위에 올려놓은 패드에서 울리는 알람 소리에, 이라나미 하바네(伊良波 派羽)는 잠에서 깨어났다.
「아아...」
부스스한 눈으로 화면을 확인해보니 취침 스케줄에 빨간색으로 경고표시가 띄워져 있다. 어제까지 미뤄두었던 과제물 작성을 급하게 하느라 늦게 잠들기 위해 몰래 모니터링 기능을 꺼두었는데 용케도 다시 서버 측에서 강제접속한 모양이다.
‘아아, 이번엔 뭐라고 둘러대지...’
패드가 과열이 심해서 폭발 전에 꺼두었다고 할까, 하고 하바네는 냉장고 안의 생수통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삐이이이─
「으악... 오늘 주의항목에 이것도 있었냐...」
패드를 급하게 집어 들어 수신거부로 전환하려 했지만 동시에 패드에 통화표시가 뜨면서 전화음이 울리기 시작한다. 확인해 보니 모르는 사람의 번호이지만, 동시에 주의항목에 표시된 사람이라고 하바네는 짐작했다.
‘안받으면... 안되겠지...’
한숨을 쉬면서 떨리는 손가락으로 통화버튼을 누르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고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야 이 빌어먹을 너 어디의 자식이야!!!』
「죄송함다─ 정말로 죄송함다─」
『생존경고표시까지 띄우고 네놈 사람을 죽일 생각이냐!!』
「아뇨 당치도 않은─ 그저 기기에 문제가 생겨서 주의항목 업로드가 늦어서─ 죄송함다─」
『살인미수죄로 고발해버릴테다!!』
「...히익 죄송함다─!!」
전화 너머의 중년 남자가 고래고래 질러대는 소리에 하바네는 그저 죄송함다 다신 안그러겠슴다 두 마디를 반복해가며 대화상대의 화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남자의 신경질적인 고함과 욕설 등은 장장 30분을 넘도록 이어지다가 제풀에 지쳤는지 겨우 남자의 “다음엔 가만두지 않겠다”라는 별 의미 없는 협박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삐익.
「...휴우.」
살인미수죄로 고소당할 위기를 넘긴 하바네는 한숨을 쉬면서 패드 화면을 톡톡 건드렸다. 보급형 스케줄 어플리의 창이 뜨고 당일 날짜의 스케줄이 화면에 표시된다.
<2031년 10월 22일 금일 필수사항 - 8건, 주의사항 - 14건>
이라는 타이틀 아래, 시간과 장소를 포함하는 행동 리스트가 나타났다. 그 중에 주의항목 첫 번째로 표시되는 것은 “아침 8시 42분 32초경,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통을 꺼내어 식수.”라는 문구. 그 아래로 이어지는 리스트를 쭉 읽어 내려간다.
「...에휴...하여간 그놈의 라케시스가 웬수지...」
물도 맘대로 마시지 못하게 된 시대를 만든 원흉을 원망하며, 하바네는 책과 패드를 가방에 우겨넣고 방을 나섰다.
...
부우웅...
<현재 본 역에 대하여 가드레일 추돌사고 루트가 예보되었으므로 다른 역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9시 47분 學01번 버스 탑승 예정.>
...라는 이유로 버스역 앞을 그냥 지나쳐간 버스와 자신의 패드에 표시된 오늘의 예정을 번갈아보며 망연자실한 하바네의 등 뒤에서 익숙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도 지각을 강요받고 있는 건가요. 하바네로 씨는.」
「누가 하바네로냐...이젠 뭐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어.」
버스역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핸드폰을 열심히 만지작대고 있는 그녀를 보고 하바네는 기막힌 듯이 물었다.
「그보다 자넨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 아닌가...?! 고등학생?」
「아니, 뭐 어차피 저도 비슷한 처지니까요. 오늘은 금지사항에 오전수업이 들어가 버렸으니까.」
「그 거짓말이 참말이냐.」
하바네의 비꼬는 말에 소녀는 겨우 화면을 바라보던 고개를 들어 대답다.
「아뇨. 당연히 뻥이죠. 이카토(イカ東, 촌티나는 동경대생을 비꼬는 말)씨」
「...어 그래.」
소녀의 당당함, 아니 뻔뻔함에 할 말이 없어진 하바네는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숙집 주인의 딸인 안도 유에(安藤 ゆえ). 소위 말하는 노는 고등학생이다. 뭐 그녀의 염색한 머리카락과 피어싱을 보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겠지만.
「애초에 그 라케시스라는 거 정부에서 통제하는 거고, 스케줄도 정부가 만들어서 보내는 거잖아요. 그렇게 정부에서 시키는 대로 딱딱 해서 상이라도 받고 싶어요?」
「아니 뭐 그런 건 아니다만 학생이랑 달리 어른은 문제를 일으키면 그냥 넘어가 주지 않잖냐.」
「하지만 안 걸리면 안 잡혀가겠죠?」
태연히 범죄자의 논리를 설파하고 있는 유에를 보고 요즘 시대 학생들의 도덕성 부재를 느끼며 하바네는 스케줄러를 뒤적거리는 척 하고는 말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 참고로 다음 필수사항까지 2시간 정도밖에 없다.」
「연극 같이 보러 가자던 애가 본가에 내려가 버려서요. 티켓이 한자리 비는데 딱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는데 하바네로 씨가 눈에 띈 거뿐이네요.」
「나는 보결이냐.」
「싫으시면 말구요. 맨날 그렇게 빡빡하게 살던지. 안되면 코우언니랑 보러 가면 되니까.」
삐딱하게 받는 유에의 말에 오지 않는 버스를 원망하며 하바네는 시간끌기 삼아 물었다.
「그래서 그 연극이란 건 어디서 하는데?」
「우에노 공원 근처 신설 공연장.」
학교랑 정반대잖아! 하고 하바네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굳이 안 따라와도 대타 있으니깐 상관없다니까요. 뭐 이제 슬슬 계약기간도 끝나가고 불안하시겠지만?」
이자식이, 하고 빠져나가기 위해 머리를 굴려보는 하바네였으나 여러 가지 의미로 이 건방진 여고생을 피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듯 했다. 결국 체념한 듯 머리를 긁어대는 하바네를 보며 유에는 흡족한 듯 한번 씩 웃고는, 다시 핸드폰을 들어 화면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
「후아아암...」
참지 못하고 길게 하품을 흘리는 하바네의 옆에 앉은 유에가 눈을 흘겼다. 와그작 와그작 가루비(감자칩)를 씹어대는 너도 노매너라고, 하고 하바네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막 헤라클레스가 타나토스를 쓰러뜨리고 알케스티스를 구출하는 장면에 눈길을 옮겼다.
‘슬슬 막바지로구만...조금 더 참을까.’
유에가 끌고 온 이 공연극장은 원래 공원에서 인디밴드나 퍼포먼스 댄서들이 길거리 공연을 하던 것을, 2013년에 어느 부호가 돈을 들여 ‘작은 극장’을 마련해 준 것이라고 한다. 라케시스가 퍼지기 전이라 건축법도 지금보다는 훨씬 느슨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하바네는 지레짐작했다.
참고로 현재 공연되고 있는 작품은 《알케스티스》로, 의상이나 소품이 간소하고 연기가 밋밋한 걸 보니 아직 그렇게 알려진 팀은 아닌 모양이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어느새 아드메토스가 제우스에게 공물을 바치는 에우리피데스 작 스토리에서의 마지막 장면에 도달하고 있었다.
「근데 하바네로씨.」
「음?」
「왜 아드메토스는 제우스 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걸까요. 자기를 도와준 건 아폴론이고, 알케스티스를 구해준 건 헤라클레스인데.」
아, 그러고 보면 어린아이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나. 난데없는 유에의 질문에 하바네는 잠깐 생각해 본 뒤에 대충 적당히 대답하기로 했다.
「일단 제우스는 신들의 왕이잖아?」
「그렇네요. 천하 난봉꾼에 멍청하기 짝이 없지만.」
「...어쨌든 아폴론과 헤라클레스 덕에 아레스는 품삯을 못 받게 됐고 하데스랑 타나토스도 크게 당했으니 원한이 생기지 않을까. 그래서 제우스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두 신의 보복을 피하려고 했던 거라고 생각하는데...」
「뇌물이네.」
「...그렇게 되나.」
뭐가 불만인지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던 유에가 재차 물어왔다.
「...그럼 모이라이는 어떨까요.」
극이 끝나고 사람들의 작은 박수소리와 함께 커튼이 닫히는 것을 보던 하바네는 패드를 꺼내서 문자를 확인하고는, 대충 둘러대듯이 내뱉었다.
「...글쎄다. 운명의 여신이니까 모든 게 사실 계산대로, 이었을지도.」
그리고 이에 대답한 것은 유에가 아니라 누군가의 외침이었다.
「저 여자 또 왔어! 누가 경비병 씨 좀 불러줘요!」
어느새 커튼이 열려 있고, 무대 앞에 한 청바지를 입은 여성이 서 있었다. 제법 늘씬하게 키가 크고 얼굴이 예쁜 것이 어딘가의 모델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으나, 바로 사람들이 여자를 끌어내리려고 달려드는 것을 보니 게스트 같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뭐야...」
사람들의 손을 피해서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여자와 서로 엉켜서 난장판이 되어가는 무대를 보며 하바네는 자신도 모르게 그 광경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여유롭게 사람들 사이를 이리 저리 돌면서 도망다니는 여자의 모습이 마치 무언가의 춤과도 같이 느껴진다. 그리고 여자에게 이리저리 휘둘려가며 무너지는 사람들이 마치 괴수영화의 괴수가 휘두르는 꼬리에 무너지는 빌딩과도 같아 보였다.
그래, 마치 그 때의 그 도시처럼─
‘어라...?’
무언가 중요한 것을 떠올린 듯한 기분이 드는 하바네였으나, 이윽고 관람석 뒤켠에서 울려퍼지는 고함소리 때문에 바로 현실로 되돌아왔다.
「야! 세이 너 이자식!!」
뭔가 투박해 보이는 옷에 코트를 걸친 한 거구의 남자가 뛰어 들어오며 소리를 지른다.
「얏호─ 클라드─」
따악!
「아펏!」
「뭐가 얏호냐! 이 빌어먹을 새디스트 오카마 자식아! 당장 따라와!」
‘어느새 거기까지 간 거지?’
순식간에 무대 앞에 도달한 남자가 여자를 한손으로(!) 집어들어 끌고나가는 기괴한 장면을 보던 하바네의 눈앞에 손바닥이 휘휘 휘둘러졌다.
「워워. 하바네로 씨. 저도 처음엔 그랬으니 이해는 하지만 정신 차려요.」
「처음엔?」
「에...뭐랄까, 뭐 공연하는 사람들한테는 민폐겠지만 나름 관객들에게는 명물이라고 할까...」
별 희한한 명물도 다 있구만...
「끝났으니 그럼 슬슬 나가볼까.」
「그 전에 잠시.」
「응?」
유에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하바네도 얼결에 따라 일어선다. 그리고 척 하고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킨 객석 한쪽 구석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슬며시 들고는 아는 척을 했다.
「어라, 유에 언니도 와 계셨네요. 오늘 못 갈 것 같다고 하시더니.」
「여어. 오랜만. 그나저나 옆에는 그거냐. 날나리 행세는 상관없지만 원조교제는 위험할텐데?」
누가 이런 녀석이랑 원조교제 같은 걸 하겠냐, 하고 하바네는 툴툴거렸다. 무슨 써클 같은 건가 하고 순간 흠칫했으나 구성원들의 연령대나 복장을 보아하니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한명은 아마도 같은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
또 한명은 좋게 봐줘도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작은 여자아이.
나머지 하나는 아마 하바네보다도 나이가 많아 보이는 청년.
남 여 2대 2인가, 하고 무심코 성별 분포를 따져보던 하바네의 귀에 유에의 말이 들려왔다.
「일단 우리 집에 하숙하는 동경대 샌님 한 마리.」
「오오? 저렇게 생겨먹었는데 도쿄대생이야?」
굉장히 실례인 반응이 돌아오는 것을 보며 하바네는 가까스로 억지웃음을 지어보였다.
「이라나미 하바네입니다.」
「참고로 통칭 하바네로.」
「...그 별명 퍼트리는 것 좀 그만해 줄 수 없겠냐.」
「뭐야, 벌써부터 별명까지 부르는 사이인건가? 유에 성격에 남자 같은 건 쉽게 안 붙을 줄 알았는데 벌써 임자가 있었어?」
「으아니 지, 지금 소라 앞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아저씨가앗!」
의외의 방향으로부터의 공격에 유에가 순간 기묘한 폭주를 하는 걸 보며 하바네는 직감했다. 아마 유에가 자기를 끌고 온 이유는 이 집단이랑 조우시키기 위해서라고.
‘딱히 금지사항에 들어가는 내용은 아니겠...지?’
실례, 하고 패드를 꺼내 두들겨보니 일정들이 대거 변경되어있다. 이건 아무래도 역시 너무 일탈했나...일정 변경으로 인해서 청구될 비용─말이 그냥 비용이지 결국 벌금에 가깝다─을 생각하며 속으로 한숨을 쉬지만, 어차피 유에랑 엮여서 잘 된 적이 없으니 그냥 되는 대로 흘러가기로 한다. 먼저 능글능글해 보이는 남자아이가 먼저 손을 내밀며 말한다.
「이몸의 이름은 사카키 신라(榊 森羅).」
「이름부터 들으면 알겠지만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중증의 중2병 아저씨입니다.」
「시끄럿! 중2병이 아니라 진짜 탐정이야! 세이부문리대학(西武文理大学) 1학년생이다. 동경대생.」
...아무래도 이 남자아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하바네와 그다지 나이 차이는 없는 모양이다. 축복받은 녀석, 하고 하바네는 속으로 조금 불평하며 신라의 손을 잡았다.
「타카하시 카즈키(高橋 一紀)입니다. 도쿄공업대학에서 어플리케이션 구조 관련 공부를 하고 있어요.」
「스즈모리 소라하(鈴森 そらは)입니다. 아직 초등학생에요. 잘 부탁드려요.」
남은 두 사람도 차례로 통성명을 해 왔다. 연구생 1명 대학생 1명 고등학생 1명 초등학생 1명이라니 상당히 나이대가 광범위한데...
「그럼 마유가 일 끝나면 바로 소라네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눠볼까.」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대놓고 이야기하고 다닐 것은 아닌데요...저 잘못하면 정보보안법에 걸려서 잡혀갑니다.」
「그러니까 소라네 집안의 비호를 좀 받아보자 이거지. 형님이 잡혀가면 이 짓도 계속할 수 없다고. 이제 거의 마지막인데.」
「그럼 스즈모리의 벽에 기대지 말고 자기 영감과 추리력으로 어떻게 해 보시지. 사이비 영능탐정.」
「뭐 이 날나리 여고생이! 그리고 난 영능력 있다고 주장한 적 없어!」
집단들 간에 차마 끼어들기 힘든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또 한 사람이 다가왔다. 이제보니 아까의 연극에서 알케스티스를 연기했던 주연배우다.
「뭐야, 다들 모였다는 것은 오빠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는 거네? 너네도 참 징하다.」
「정부의 음모를 파헤치기 위해서 암약하는 정의의 사도들이라고 해다오.」
「사도는 무슨. 그냥 라케시스 덕후들이지. 그래서 이대로 아지트로 가는 건가요...그리고 이 사람은?」
「유에가 데려온 우리들의 새로운 동료.」
「하바네로. 우리 집 하숙생.」
동료가 되겠다고 승인한 적 없는데,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것을 누르며 하바네는 고개를 숙여 인사해 보였다. 하지만ㅡ
「...용케도 또 이런 사람을 찾아냈구나. 전에 코우메씨도 그렇고 진짜 사람 찾는 재능 하나는 끝내준다. 유에 너. 일단 하바네로 씨에게는 유에랑 알게 된 것부터 애도를.」
아니 뭐 굳이 그건 늘 생각해 오던 거지만.
「그런데 괜찮으려나. 그래도 오늘 일이 잘못되면 오빠가 철창신세를 지게 될 수도 있는데. 특별히 주의사항 심하게 어겨서 보호감찰 당하거나 한 적 없죠...?」
「괜찮아. 이런 도쿄대 샌님한테까지 감시설비가 돌아갈 정도로 정부예산에 여유는 없어.」
...하바네의 눈으로 보니 이 집단 은근히 서로를 까는 것이 일상화 된 집단이었다. 설마 유에 녀석이 성격이 저모양이 된 것이...
그런데 과연 이들이 말하는 대외비라는 건 무엇을 말하는 걸까. 일단 정부의 음모니 뭐니 하는 딱 들어도 중2병 티가 나는 신라의 말은 차지하고라도, 타카하시 카즈키라는 이 연구생 씨가 언급한 걸리면 감옥행이라는 말은 그다지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대체 이 날나리는 어떤 위험한 일에 손을 대버린 건가, 하고 하바네는 일단 따라가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유에가 문제가 생기면 하바네 자신이 가장 크게 피해를 보게 될 테니까.
그리고 잠시 후,
타다닥 타다닥, 하는 키보드를 두드리는 리드미컬한 소리가 우에노 공원 인근의 한 카페 2층의 구석에서 시작되었다. 6인의 멤버들이 지켜보는 아래 카즈키 씨가 앞서 말했던 위험한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뭔가 복잡해 보이는 서버 설비와 기기설비들을 보아하니 그냥 경제학부생인 자신은 설명을 해도 못 알아들을 것 같다. 모니터의 파라미터가 올라가다가 정지하고, 그때마다 카즈키 씨는 열심히 키보드를 두들기고, 복잡한 육면체들이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다가 사라진다. 이건 마치 영화에서 종종 보이는 첩보요원들이 보안 시스템을 해제하는 장면 같은데...
보안설비...?!
순간 머리에 떠오른 불안한 생각에 하바네는 조심스럽게 유에의 어깨를 툭툭 쳐서 뒤로 불러냈다.
「저거 지금 어디에 접속하는 거야...?」
「아. 그냥 평범한 정부 보안국.」
「뭐라고...?!」
유에의 대답을 들은 하바네는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 창문은 모두 차단되었고, 사람도 소라하의 명의로 빌려서ㅡ멤버들 말대로 진짜 아가씨였다 오오ㅡ전부 1층으로 내려 보냈기 때문에 다행히 보는 사람이라고는 이 수상쩍은 집단의 사람들과 자기뿐이고, 패드와 핸드폰 등의 도청위험이 있는 물건들도 전부 맡겨놓은 상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당당하게 범법행위를 저지르다니 무슨 배짱이야...’
「일단 프로텍트는 전부 풀었다가 닫았고, 물건도 다 빼냈습니다.」
「과연 어플리 프로텍트 연구원!」
「일단 물건은 어플리라서 상관없지만 신라군이 원하는 자료는 기밀문서라 그런지 암호화 상태라 조금 더 걸릴 것 같습니다만 어떻게 할까요?」
「당연히 해석도 바로 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좀 위험하지 않을까.」
「뭐 그렇죠. 아무래도 라케시스 관련이라 뭐 이것저것 예상치 못한 것이 걸려있을 수도 있으니 그럼 제가 가져가서 해석해 오도록 하겠습니다.」
「괜찮겠어? 걸리면 바로 철창행인데 그런 걸 가지고 나가도.」
카즈키의 동생인 타카하시 마유미(高橋 真由美)의 지적에 멤버들이 침묵했다. 역시 아무래도 이런 위험물은 엄중히 보관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러면 제가 맡아가지고 있을까요?」
조용히 듣고 있던 소라하가 말했다. 아무래도 이 중에서 미성년자는 유에와 소라하 둘 뿐이고, 특히 소라하는 스즈모리(鈴森) 가의 비호를 받고 있다. 발각되더라도 어쩌면 무마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가장 안전하다고 할 수 있긴 했다. 하지만 아직 초등학생인 그녀에게 부담을 지우는 일이 그다지 내키지 않는지 다들 말이 없다. 그러자 지켜보던 소라하는
「그러면 일단 카페에 두는 걸로 하죠.」
...라고 멋대로 정해버렸다. 어이!
「그리고 예의 물건부터 받으면 안 될까요? 일단 오늘 모인 이유는 그거 때문이고.」
「그렇네요. 그럼 준비된 단말기에 세팅하겠습니다.」
카즈키 씨가 가져왔던 서류가방에서 작은 핸드폰 단말기를 몇 개 꺼내서, 서버 컴퓨터에 다시 노트북을 연결한 뒤 노트북에 단말기들을 연결한다. 그리고 잠시 후에 단말기를 분리하여 멤버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준다.
하바네가 얼결에 받아든 단말기를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별로 특이한 점도 없고, 그다지 위험한 프로그램이 깔려있는ㅡ정부 쪽의 관리프로그램이 없긴 하지만 그런 건 불법이다 뿐이지 어둠의 루트를 통하면 상당히 구하기 쉽다ㅡ기색도 없다. 뭐지...하고 하바네는 다시금 유에에게 물었다.
「이거 뭐냐...그리고 왜 나한테까지...?」
「그냥 믿을만한 공범자를 늘려두고 싶어서일 뿐이에요. 그리고 그 물건은ㅡ」
유에는 단말기를 조작하여 어플리 화면을 띄워서는 하바네에게 내밀었다, 그 화면에 조용히 떠올라 있는 문자는, 하바네도 익히 알고 있는 어느 신화의 여신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었다.
Lachesis.
...
「후우우...」
하바네는 천장을 응시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부에서 라케시스를 유용하여 사람들의 생활을 조종하고 있다...라.’
1999년도 영화에 나오는 모 슈퍼컴퓨터도 아니고, 인간의 생활을 단순한 어플리 하나로 조종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서 하바네는 회의적이다. 라케시스 파동도 자신이 아주 어릴 때 일어났던 일이기 때문에 지금 중년들이 말하는 당시의 영향력도 그저 부풀리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Lachesis.
하얗게 빛을 내는 화면 한가운데에 떠 있는 문자열을 보며 하바네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지금 실물이 내 손에 있단 말이지...」
운명은 정해져 있지 않다, 라고 하바네는 언제나 속으로 생각해왔다. 평소에 금지사항이나 필수사항 같은 것을 지키는 것은 그저 관료로서의 진로를 지키기 위한 자기 관리에 지나지 않을 뿐, 사실 그렇게 진지하게 자기의 행동으로 인하여 누군가의 운명이 확정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들 그저 어중간히 노력해서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운명이라는 애매한 무언가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분명히 누군가는 운명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다고 믿었고, 그 때문에 라케시스라는 존재가 나타나는 것으로 인하여 사회가 지금과 같이 변화했으며, 유에가 지금 만나는 그들과 같은 사람들도 생겨났다.
‘한 번 보는 정도로 걸리진 않겠지...’
화면을 눌러서 라케시스를 실행시킨다. 하얗게 빛나던 화면이 검게 반전하고, 흰 글자로 메뉴가 나타난다. 어릴 때 인터넷에서 보던 대로의 메뉴가 떠올라 있다. 그 중에 맨 위의 <Predictor>를 누른다. 화면에 오늘의 날짜가 떠오르고, 밑에 시간과 사건의 개요를 나타낸 표가 주르륵 표시된다.
「헤에...?」
미래 예측에 관한 내용 뿐 아니라 과거에 있었던 일의 내용도 적혀있다. 아침에 금지사항 위반 직전까지 간 내용을 비롯해서 유에에게 끌려가게 된 내용까지. 그리고 파랗게 밑줄이 쳐진 글을 누르니 상세한 내용이 팝업창으로 나타난다.
<아침 9시 23분에 탑승한 승객의 인원 수 32명. 동행 명단─>
「...」
하바네의 손이 잠시 멈춘다. 팝업창을 누르면 누를수록 나오는 정보를 볼수록 뭔가 오싹한 기분이 든다. 아무리 정부 내의 시스템에서 꺼내 온 프로그램이라지만, 여기까지 사람의 정보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24시간 감시하지 않으면 불가능하잖아...아무리 프라이버시가 크게 제한되는 현대사회라고 해도, 이것은 공개되고 있는 것보다 더 심각한데...
‘정부에서 국민들에게 관리규모를 속이고 있는 건가...? 아니면...’
정말 이 라케시스라는 것이 정말 알려진 대로의 예언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
설마 그런 말도 안 되는 물건일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만약 이것이 정말로 소문대로의 물건이라면 이것을 본 사람이 예측된 것과 다른 행동을 해버리면 어떻게 되지...? 운명을 바꿔버리게 되는 건가...? 그렇다면 이런 것을 가지고 있는 정부에서는 이걸 가지고 뭘 하고 있는 거지...? 정말로 국익을 위해서 이런 알 수 없는 물건이 사용되고 있는 건가...?
갑자기 복잡하게 생각이 엉킨다. 실제로 라케시스가 자기가 생각하는 단순한 계측 프로그램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진실 그대로를 게시하는 프로그램이라면...
「아니...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니잖아. 자신은 문과생이지만, 최소한의 교양으로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대한 개념정도는 알고 있다. 또한 인간의 뇌나 심리구조에 대한 불확정 요소는 아직도 다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그런데 거기서 바로 그러한 계측불가능 요소를 배제하고 라플라스의 악마 같은 물건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물건일지도 모르는 것이 이 단말기 안에 있다.
운명은 자신의 힘으로 개척해나가는 것이라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가능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그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믿어왔다. 라케시스를 기반으로 설계된 세계라고 해도 자신이 원하는 위치까지 올라서기 위한 길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그 때문에 국가에서 보내오는 의무사항에 대해서도 불만 없이 살아왔다.
그런데...
‘아니아니, 하지만 그건 이 물건이 실제로 그런 물건인 경우의 이야기고...’
단순히 이 프로그램의 예측을 위한 감시로 인하여 생기는 프라이버시 문제에 대한 항의 정도만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하고 하바네는 가능한 희망적인 결론을 마지막으로 생각을 접었다.
순간 똑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스시 배달왔습니다.」
응...? 하고 하바네는 순간 당황했다. 배달 스시같은 걸 시킬 정도로 자금에 여유는 없고, 무엇보다 이런 걸 시킨 기억은 없다. 순간 진동으로 해둔 패드가 울리기 시작했다.
「뭐야...」
삑.
<오늘은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격려의 의미로 작은 선물을 보냅니다.>
뭐야, 그 아가씨 짓인가. 라고해도 저녁에 스시배달이라니 뭔가 어린애치고 센스가...아니 뭐 본인은 나름 서민적이라고 생각하고 보낸 건가...?
「...양도 만만찮네... 남은 거 보관할 공간도 없는데...뭐, 그럼 사양않고...」
문을 열어서 배달부가 주는 배달상자를 받아서 포장을 뜯어서 반상에 늘어놓고는 스시를 꺼내서 하나 집어먹는다. 스시 전문집이라거나 스시 맛 같은 건 잘 모르니 비싼 건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평소에 해먹는 밥보다는 훨씬 나으니 대만족. 부잣집 아가씨 감사합니다.
식사를 막 마쳤을 즈음, 갑자기 우우웅, 하고 라케시스가 든 단말기가 진동했다. 멤버 중 누가 단말기로 문자라도 보낸 건가하고 단말기를 확인하니 라케시스 어플리에서 <Data Updated>이는 공지가 올라와 있다.
「뭐지 이건...?」
눌러보니 <Predictor>의 오늘 시간대에 스시 배달에 관한 내용이 나타나 있고, 내일 시간대의 글 중에 몇 가지가 변해 있다.
「뭐...!」
스시를 먹어치우는 데 걸린 시간은 채 30분도 되지 않고, 그 동안에 누군가 왔던 사람이라고 해봐야 스시집의 배달부 한명 뿐이다. 게다가 배달부가 스시를 급하게 먹다가 뭉개버린 것과 남긴 개수까지 파악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뭐...어쨌든 그건 차지하고...」
내일 일정에서 바뀐 부분 중에서 눈에 뜨이는 것이 있었다.
<오후 2시 31분, 강의 수강 중 보안부 요원 난입, 해당 요원 10여명에 의하여 연행.>
...이건 뭐야...
급하게 방안 여기저기를 뒤져봐도 감시카메라 비슷한 물건도 보이지 않고, 패드는 음성정보밖에 전송할 수 없다.
‘역시 카즈키 씨가 어플리를 빼낸 게 덜미가 잡힌 건가. 그런데 그렇다면 어째서 바로 들이닥쳐서 잡아가질 않고 오후 2시냐. 게다가 이 라케시스에 왜 이런 게 뜨는 거지.’
강의 수강이라는 밑줄 친 단어를 누르니 해당 수업에 대한 정보가 나오고, 난입이라는 단어를 누르니 요원들의 잠복위치와 난입과정까지 표시된다. 이건 그야말로 보고 도망가라는 거나 다름없잖아.
‘대체 이 어플리의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믿어야 하는 거지.’
침대에 누워서 고민을 거듭하던 하바네는 일단 결정을 내렸다.
내일 하루 정도, 처음으로 꾀병이라는 걸 부려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