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 후편
되는대로 갔다 보니 어디에 도착해도 이상할 게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예상치 못했던 곳에 도착하게 되면 아무래도 동요하는 법이다.
유키와 요시노, 둘이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며 도착한 건 유명한 테마파크였다. 그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도 없지만, 그 많은 테마파크 중에서 하필이면 여기 들어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유키는 지금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다. 아마 요시노도 마찬가지로 갈아입고 있는 타이밍이겠지.
둘이 도착한 건 흔히 말하는 ‘온천 테마파크’였다.
들어가게 된 경위가 떠올라, 유키는 소리를 죽이며 웃었다.
둘이서 찾아온 건 온천시설은 물론 있지만 그것과 병설된 평범한 유원지도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유키는 분명 유원지 쪽에 들어갈 줄 알았는데, 눈앞까지 왔을 때 요시노가 소매를 붙잡았다.
“저기저기, 저거 봐봐. 온천이래. 들어가고 싶지 않아?”
“에, 그래도.”
유키는 한 순간 망설였다.
이곳의 온천시설의 평판은 들은 적이 있고, 즐겁다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괜찮은 걸까.
“온천은 안에서 갈라지잖아. 모처럼 왔으니 둘이서 같이 즐길 수 있는 쪽이 괜찮지 않아?”
에둘러서 유원지 쪽이 괜찮지 않나 물어봤지만, 요시노에게 그 진의는 닿지 않았다.
“괜찮아, 봐. 수영복 입고 들어갈 수 있는 데가 있는 모양이야.”
“수영복이라니, 안 가져왔는데.”
“그것도 렌탈 가능하대.”
그 외엔 요시노의 생각을 뒤집을만한 의견이 떠오르지 않았다.
뭐어, 유키 입장에선 굳이 말하자면 기쁜 일이니 상관없지만, 과연 요시노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의견을 말한 건지, 아니면 생각에 이르지 못한 건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괜찮겠지만.”
“뭐야. 애매한 반응이네―. 가기 싫으면 가기 싫다고 제대로 말하라고. 남자잖아?”
“가기 싫을 리가 없잖아. 오히려 가고 싶은 편인데……좋아, 그럼 갈까.”
요시노가 좋다는 거니까 유키가 더 이상 반대하는 것도 이상하다 싶어,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둘이 나란히 걷기 시작한 직후, “아”하는 소리를 낸 요시노.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면, 요시노의 얼굴이 아까보다 빨개졌고, 표정도에도 아까보다 여유가 줄어 있었다.
아무래도 간신히 눈치챘다고 할까, 의식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즉, 수영복 차림을, 피부를 유키에게 보인다는 걸.
처음부터 바다나 수영장에 간다거나 온천시설에 간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면 당연히 수영복도 준비했었을 거고, 수영복 차림을 보이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겠지.
하지만 오늘은 기습인 거다.
평소부터 신경 쓰고 있으니까 보여서 부끄러울 만한 체형이 아니라거나, 남자에게 수영복 차림을 보이는 것 정도는 신경 써봐야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나 하는 거라면 요시노가 처음부터 신경 쓰지 않았던 것도 이해가 간다. 사실 유키는 그런 거리란 생각이 들어서, 자신만이 이상하게 의식하고 있는 거라고 느꼈던 거다.
“요시노 양, 역시 유원지로 안 할래? 그러고 보면 새로운 놀이기구의”
유키도 건전한 고등학생 남자니, 요시노의 수영복 차림은 솔직히 말하면 굉장히 보고 싶지만 상대가 싫어하거나 보이고 싶지 않다고 느끼고 있거나 하면 억지로 보고싶다는 생각까진 아니다.
겉보기에도 가냘픈 요시노의 몸을 보면, 쓸데없는 살이 있어서 보이기 싫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만.
“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태연해. 여아일언중천금이야.”
하지만 의견을 전혀 굽히려 하지 않는다.
요시노는 의외로 고집쟁이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는 걸 떠올렸다.
“저기, 요시노 양?”
“자, 가자, 멋진 온천에!”
고집쟁이 요시노는 자신의 말을 뒤집지 않고 온천으로 돌진해 갔다.
“정말, 이상한 데서 고집 안 부려도 괜찮을텐데.”
하지만 그 덕에 이렇게 요시노랑 둘이서 온천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할 일이다.
시설에서 산 수영복을 입는 유키.
덧붙여서, 렌탈 수영복은 누가 입었던 건지 알 수 없으니 왠지 기분 나쁘다는 게 요시노의 의견이었다.
그런 부분은 역시나 좋은 집안 아가씨답다고 느끼지만, 생각해 보면 유키도 가급적 남이 쓴 걸 쓰고 싶진 않았다. 물론 깨끗하게 세탁, 살균은 되어 있겠지만.
쓸데없는 지출이긴 했지만, 돌아오는 걸 생각하면 싸게 느껴진다. 그도 그럴게, 요시노의 수영복 차림을 뵐 수 있는 거다. 이런 자그만 흑심 정도는 봐줬으면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며 수영복용 바데 풀로 걸음을 옮기는 유키.
안에 들어가 보니 꽤 떠들썩했다. 일본인은 온천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이렇게 실제로 온갖 연배의 사람들을 보면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젊은 남녀의 모습도 많아,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요시노는 언제 올까. 하지만 여자 탈의실 출입구를 계속 보고 있는 것도 변태로 보이겠다 싶어서, 어쩔 수 없이 풀을 바라보고 있는 중인데.
“……기, 기다렸지.”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리다, 유키의 시선이 딱 굳어버린다. 지금까지 풀에 있는 여성들의 수영복 차림을 자연스레 의식하고 있었지만, 요시노의 모습을 본 순간 다른 여자의 모습따윈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요시노가 산 건 극히 평범한 세퍼레이트 비키니. 옅은 하늘색의, 금실이 들어간 보더 무늬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다.
가냘프다, 어쨌든 가냘프다.
가냘프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역시나 가냘프다. 팔도, 다리도, 허리도, 정말 얇고 하얗다.
너무 가냘프면 거꾸로 색기를 느끼지 못할 것 같지만, 요시노는 그 아슬아슬한 라인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수술해서 건강해지고 검도부 등 동아리로 체력도 붙기 시작했으니까, 그만큼 너무 마르진 않은 느낌이 된 거겠지.
“수영복, 귀엽네. 잘 어울려.”
칭찬을 꺼낼 수 있었던 건, 유키 치고는 잘했던 거겠지.
“나――나한테 어울린다니, 당연한 거잖아! 겉치레같은 건 필요 없어.”
“겉치레로 한 말은 아닌데 말야.”
“됐으니까 자, 모처럼 온 거니까 가자.”
요시노가 손을 붙잡아 온다.
단순히 손을 잡고 있는 것뿐인데, 유키는 자신이 굉장히 두근거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요시노는 여러모로 곤란해하고 있었다.
먼저 뭣보다, 수영복이다. 시설 안에서 산 수영복은 가격도 적당하고 사랑스러웠지만, 작은 사이즈를 골랐는데 그런데도 남는 거다. 가슴 부분이. 괜찮으리라고 생각해 시착도 안 했었던 건 역시나 실수였다.
패드도 제대로 들어 있지만, 그래도 미묘하게 느슨한 느낌이 든다. 다행히 풀이라곤 해도 온천이니까, 격하게 헤엄치거나 하면서 놀 일은 없을테니 아무리 그래도 벗겨지지야 않을 것 같지만.
그리고.
‘으와아~, 유키 군, 보고 있어, 보고 있다고~! 분명 유키 군은 이런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모르겠지마안~’
유키의 눈길이 요시노의 가슴, 허리, 종아리 주변을 슬쩍슬쩍 향하는게 느껴진다. 별로 탓할 생각은 없지만, 그런 걸 봐 버리면 역시 유키도 남자라는게 실감된다.
남자의 생각하보다 여자는 민감하다. 남자가 자신의 어디를 보고 있는지, 뭘 의식하고 있는지, 대강은 느낄 수 있다.
보인다는 걸 의식하면 더 부끄러워지지만, 그래도 나쁜 기분이 안 드는 건 복잡한 소녀심일까. 싫어하는 이성이 이상한 눈으로 보는 건 싫지만, 유키가 상대일 때는 그렇지는 않고 부끄러움이 먼저 드러난다.
정면에서 눈길을 받는 걸 견딜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요시노는 유키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혼자 먼저 가지 않은 건 뒤에서 보는 것도 역시 부끄러웠기 때문이지만, 수영복 차림으로 손을 잡고 걷는 건 완전히 커플로 밖에 안 보인다는 걸 깨닫고, 손을 잡은 뒤에서야 마음 속으로 혼자 신음했다.
처음엔 서로를 쓸데없이 의식해서 어색했지만, 막상 온천에 들어가고 나니 삐걱거리던 것도 날아가 버린 것 같다.
풀에선 수중 스트레칭이나 보행욕 등 즐기면서 건강도 신경쓸 수 있어서, 체력이 적은 요시노에겐 딱이었다. 거기에 더해 온천도 정말 좋아한다.
지금은 야외의 자쿠지에 몸을 담그고 있다. 물은 부드러운 단물이라 촉감도 좋고, 푸른 정원도 눈이 편안해서 기분이 좋다.
“음―, 생각했던 것보다 즐겁네, 여기!”
“그렇네.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데, 즐길 것도 있고.”
“아까 뭐였더라, ‘사해 풀’이었나? 굉장했지―!”
사해랑 똑같이 소금을 썼다는 풀은, 다른 풀과는 확실히 다르게 지금까지 느낀 적 없는 부유감을 느끼게 해 줘서 정말로 즐거운 느낌이었다. 거기에 더해 체내의 노폐물을 배출시켜 주는 효능도 있다고 하니, 불만도 없다.
자쿠지의 물 흐름에 몸을 맡기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야외니까 바람도 통해 상쾌한 기분이다.
“저기, 유키 군. 다음은 저쪽에 들어가 보자.”
요시노가 가리킨 건 사우나였다.
“그렇게 안 서둘러도 괜찮잖아.”
“그래도, 모처럼 왔으니 이런저런 욕실에 잔뜩 들어가 보고 싶잖아.”
요시노가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 자쿠지에서 나가자, 유키도 가볍게 쓴웃음 지으며 일어났다.
“아, 그래도 요시노 양, 괜찮아?”
유키가 걱정하고 있는 건 아마도 심장 쪽이겠지. 수술 전이었다면 절대로 못 들어갔었겠지만, 지금은 건강해졌으니까 괜찮다.
그렇다곤 해도 요시노도 일말의 불안이 없는 건 아니다. 예전에 역전 경주를 보러 하코네에 갔을 때는 아무리 떼를 써도 레이가 허락해주지 않았으니까, 아직 들어간 경험은 없는 거다.
“응, 무리 안 하고, 더워지면 바로 나갈 거니까.”
“진짜지? 잠깐이니까.”
“예―.”
허락을 받고 잽싸게 사우나 문을 열자, 순식간에 열기가 요시노의 몸을 두드렸다. 안에는 선객 여럿이 앉아 있어서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비어있는 자리에 앉는다. 바로 뒤에 유키도 옆에 앉았다.
“……생각했던 것보단 안 더울지도?”
“그런 식으로 방심하면 위험해.”
유키가 말한 대로 바로 땀이 배어나오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사우나의 온다는 미묘해서, 확실히 덥긴 하지만 바로 뛰어나가고 싶어질 정도는 아니다. 당연하지긴 하지만 참을 수 있는 레벨인 거다.
“요시노 양, 괜찮아?”
“아직 막 들어온 참이잖아.”
“그래도, 더워지면 무리하지 말아 줘. 바로 나갈 테니까.”
“걱정꾸러기구나~, 유키 군은.”
웃어 보인다.
땀은 점점 솟아나와서, 몸을 타고 흘러 떨어진다.
조금씩 심장 고동이 빨라지는게 느껴진다.
수술 뒤로 1년 이상이 지나, 체육도 검도부 활동도 해내면서 길들었을 터인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하니, 순간 갑자기 불안이 솟구쳐 오른다.
한때 느꼈던 괴로움이나 공포는 설령 몸이 나았다 해도 마음속에 달라붙어 있어, 요시노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하지만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드러날 건 없잖아.
요시노는 슬며시 가슴을 억누른다.
“……요시노 양, 괜찮……아니, 이제 나가자.”
옆에 있던 유키도 요시노의 변화를 느낀 모양이었다.
아무리 요시노라 해도 반론할 기력이 없어서, 힘 없이 일어나려 한다.
“미안, 유키 군.”
“괜찮으니까, 설 수 있어?”
자리서 일어났지만 현기증인지, 아니면 사우나의 열이 오른 건지, 발걸음이 불안정했다. 휘청이던 몸을 유키가 잡아 주었다.
사우나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걱정됐는지 문을 열어준 모양이라, 유키는“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하면서 요시노를 데리고 사우나 밖으로 나간다.
바깥 공기가 몸을 감싸안아, 열이 올랐던 몸을 식혀준다. 아직 뜨거운 건 마찬가지지만 스윽 열이 빠져나가는게 느껴지고, 호흡도 충분히 편해진다.
“요시노 양, 물이 있으니까.”
사우나의 옆에는 꼭 있는 물을 보면서도, 손을 뻗을 힘이 아직 솟아오르지 않는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테니까.”
확실히 뜨거운 건 뜨겁지만, 말하자면 마음의 문제 쪽이 컸으니까 마음이 가라앉으면 몸 쪽도 바로 괜찮아질 거다.
“미안, 요시노 양. 조금 실례할게.”
“응?”
다음 순간 이마에 차가운 물건이 닿았다. 뒤이어서 뺨에도 같은 감촉이 느껴졌다. 얼굴의 열을 앗아 가는 것 같아서, 정말 기분이 좋았다. 차갑고, 부드럽고, 그러면서 따뜻하다.
“응―――……에?”
잠시 뒤에 머리의 열이 충분히 빠졌을 때, 늦게서야 요시노는 현실로 돌아왔다.
요시노의 몸을 식혀줬던 ‘그거’는, 놀랍게도 유키의 손이었다. 물을 퍼올려서, 요시노에게 너무 자극을 주지 않도록 해서 식혀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그 뿐만이 아니다. 축 늘어졌던 요시노는 유키에게 안겨 있었다고 할까, 유키의 팔에 달라붙어서 몸을 맡기고 있었다.
수영복 차림으로 피부를 맞대고 있었던 거다.
“아, 요시노 양, 괜찮아?”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자, 유키와 눈길이 마주쳤다.
직후.
“으아, 아, 앗, 우냐…….”
“에, 앗, 요시노 양, 아직 뜨거워?!”
모처럼 열이 내려갔었는데, 단숨에 열이 되 솟아나 버렸다.
사우나를 나선 뒤, 요시노의 몸을 신경써서 유키는 밖으로 나가자고 말했지만, 요시노는 몸은 괜찮아 졌다고 대답하곤 어떻게든 욕탕에 들어가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고 갔다. 솔직히 바로 나가서 유키와 얼굴을 마주보는 건 너무 부끄럽다.
“절대로 무리 안 할 거고, 사우나에는 이제 안 들어갈 테니까. 응?”
“아니, 그래도.”
“그래도도 뭐도 없어. 그럼, 한시간 뒤에 로비에서.”
요시노는 반론을 듣지 않겠다는 듯 바로 몸을 돌려, 탈의실쪽을 향했다. 뒤에서 유키가 뭔가 말하고 싶은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는게 느껴졌지만, 무시하고 걷는다. 솔직히 별로 여유가 없다. 안겨붙었던 유키의 팔의, 가슴팍의 감촉이 다시 떠올라서, 오버히트 할 것만 같다.
거기에 더해, 예상 밖의 사태가 추가로 터졌다.
“어라아, 요시노 양 아니니?”
“에?”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자.
“엣, 이츠에 양, 미치요 양?!”
낯익은 급우들이 수영복을 입고선 탈의실 쪽에서 나왔던 거다.
“헤에, 우연이네. 요시노 양, 혼자? 아니면 유미 양 등이랑 같이 왔으려나?”
“아, 그런 건…….”
이라고 말하려다가 당황하며 뒤를 돌아보자, 마침 유키는 남자 탈의실 쪽으로 모습을 숨긴 뒤였다.
“그, 그래, 혼자 왔어, 응.”
고개를 열심히 끄덕인다.
설마 이런 곳에서 아는 사람과 만나다니, 예상도 못했다.
“헤에, 조금 의외네. 혼자 올 정도로 좋아하는 거니?”
“그야 당연하지. 온천이라고 하면 시마즈 요시노라고 할 정도로.”
당연히, 이츠에도 미치요도 조금 수상쩍게 느끼는 것 같았다. 그것도 그럴게, 여성들은 주로 모여서 움직이는 법이라, 어딘가에 놀러 갈 때 혼자서 갈 때는 별로 없다.
“그래. 그럼, 괜찮으면 우리랑 같이 안 놀래?”
순수한 호의로 미치요가 같이 놀자고 말했지만, 요시노 입장에선 받아들일 순 없었다.
“아, 고마워, 그래도 나, 현기증이 좀 나서 막 나가려던 참이니까.”
“어머 그래? 유감이네.”
유감스러운 듯한 표정을 짓는 미치요와는 달리, 이츠에는 더더욱 수상쩍다는 듯 요시노를 보고 있다.
“요시노 양, 혹시나……다른 남성 분이랑 같이 온 거야?”
“엣.”
“어머, 그랬던 거니? 아, 그럼 혹시나 우리는 방해였으려나.”
이츠에의 말에 고개를 휙휙 젓는다.
“아냐 아냐,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애초에, 애인을 데려 온 거면 거꾸로 둘한테 자랑하고 있었을 거라고.”
“허둥지둥 거리는게 왠지 수상쩍은데.”
“싫다 참, 그러면 같이 있었을 거잖니. 수영복 존이고. 그럼, 저는 먼저 실례하겠사와요, 오호호.”
이상한 웃음을 남기고, 요시노는 서두르는 모습을 최대한 감추며 탈의실로 돌아갔다.
수영복을 벗고 머리칼을 말리려고 하지만 요시노의 긴 머리칼은 그리 쉽게 마르지 않고, 게다가 요시노가 아무리 서두른대도 유키는 한동안 나오지 않으리란 걸 깨달아 홀로 우왕좌왕한다.
어떻게든 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은 뒤 로비에 나왔지만, 약속한 시간까진 아직 30분은 남았다. 그렇다고 해서 요시노가 남자 목욕탕에 들어갈 수도 없다. 밖에 나올 땐 로비를 지날 수 밖에 없어서, 숨을 수 있을만한 곳도 없다.
확률은 한없이 낮겠지만, 유키와 이치에 일행이 동시에 나올 수도 있단 걸 생각하면 제 정신이 아니다.
나중이 돼서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건물 밖에 나와서 상황을 봤으면 됐었겠다 싶지만, 이때의 요시노는 그런 생각을 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혼자서 안절부절 못하며 로비에서 남녀 양쪽 탈의실의 입구를 바라보며, 안달복달 할 수 밖에 없었다.
굉장히 긴 시간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로 시계를 보면 2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 즈음에 유키가 남자 탈의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유키의 모습을 본 요시노는, 바로 유키 쪽으로 뛰어갔다.
“어머, 요시노 양 꽤나 빨랐네. 나도 빨리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혹시나 몸 상태가?”
“그런 건 됐으니까, 빨리 나가자!”
유키의 팔을 안다시피 해서 출구쪽으로 끌어당긴다.
“요시노 양, 무슨 일이야? 그렇게 안 서둘러도 되잖아. 잠깐 주스라도 마시고”
“그런거, 밖에서도 괜찮으니까, 일단 지금은 여기서 탈출하는게 최우선 사항이야.”
“탈출이라니.”
아직 말을 더 하려는 유키를 끌어당겨, 밖으로 나간다.
봄의 해질녘, 기분 좋은 바람이 산뜻하게 몸을 스친다.
“자, 달리자!”
“에엣, 모처럼 목욕 막 마친 참인데, 땀 날 거라고?”
“괜찮으니까, 청춘 대시야!”
요시노는 유키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자, 영문은 모르는 채로 유키도 따라 달렸다.
“요시노 양은, 가끔 잘 모르겠어.”
“괜잖잖아, 차암.”
달린다고 해도 요시노는 걸음이 늦으니까 그리 빠른 속도가 아니다. 유키는 요시노의 걸음에 맞춰 옆에서 달린다.
“그러고 보면 유키 군은, 연약해 보이는데 손가락은 의외로 단단하네.”
그건 처음에 손을 잡았을 때부터 생각했던 거였다.
의문은 유키의 대답으로 바로 풀렸다.
“아아, 나, 중학교 때 야구부였으니까, 그 흔적일지도.”
“헤에―, 혹시나 에이스에 4번이었다거나?”
“음~, 뭐어, 투수였었어.”
“오오, 대단해. 나, 고교야구 진짜 좋아해!”
빙긋 웃는다.
중학교 때는 야구부였고, 투수였다는 건 과거형. 실제로 고등학생인 지금은 야구부에 들어가지 않고 학생회 활동을 맡고 있다.
단순히 야구를 중학교로 끝마친 건지, 아니면 그만둘 수 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던 건지는 요시노가 알 수 없다.
그래서, 그 부분은 건드리지 않는다.
“뭐야―, 좀 더 빨리 만났다면, ‘나를 고시엔에 데려가 줘’라고 부탁했을 텐데.”
“그렇네. 그랬으면 나, 요시노 양을 고시엔에 데려가고 싶었을 거야. 그걸 위해서라면 어떤 고생이든 노력이든 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문득, 유키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 같았다.
저질렀다. 이 정도도 안되는 거였나 싶었지만, 표정으론 내지 않는다. 요시노가 뭔가를 말한다고 해서 어떻게 되는 건 아니니까.
“그럼, 고시엔이 안 된다면 어디에 데려가 줄래?”
“……지금 요시노 양이 가고싶다고 생각하는 곳, 이려나.”
“헤헤―, 그럼 파르페 먹으러 가자! 말해 두겠지만, 여자만 가득한 사랑스런 가게니까, 싫다고 말해도 무조건 갈 거니까.”
“으아―, 진짜?! 그건 좀 힘들지도.”
“아하하핫, 이제와서 물리는 건 안되니까.”
땋지 않은 요시노의 긴 머리가 바람을 받아 나부낀다.
둘의 그림자는 지금도 역시 이어져 있다.
맞잡은 손은, 파르페 가게에 도착할 때 까지 떨어지지 않았다.
덤
다음 날.
유미가 등교한 뒤, 이미 등교해 있던 츠타코와 마미가 얼굴을 마주보고 무슨 이야긴가를 하고 있었다.
자기 자리에 가방을 둔 뒤, 유미는 둘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둘 다 무슨 일이니?”
고개를 갸웃거리자, 둘의 얼굴이 유미를 향한다.
“어제 일 말인데.”
어제라고 하는 건, 릴리안·하나데라 임원의 합동 데이트 이야기다. 유키와 요시노만은 참여자들의 책락으로 떼놓았지만, 다른 멤버들은 첫 예정대로 놀러 갔었다. 남자와 함께인 것도 꽤 자극적이어서 재미있었다.
“사실은 어제 돌아가는 길에, 요시노 양과 만났어.”
말을 꺼낸 건 츠타코.
“아, 어땠어?”
“그게, 들어봐. 요시노 양, 처음에는 땋은 머리였잖아.”
둘의 예상대로, 다른 멤버들은 처음엔 두 사람의 모습을 몰래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저녁에 만났을 때는 머리를 풀고 있었던 거야. 마치 목욕이라도 한 것처럼.”
“응 응.”
“그래서, 실제로 뭔지 모를 좋은 향기가 났어. 요시노 양의 몸에서. 응 응, 그리고 피부도 번들거리고 혈색도 평소보다 좋아서.”
“이건, 무슨 일이라고 생각해?”
말이 돌아와봐야 유미도 곤란하지만, 그러고 보면……하고 어제 일을 떠올려 냈다.
“……그러고 보면, 어제, 돌아온 유키도 피부가 굉장히 번들번들했고, 혈색도 좋았어. 듣고 나서 생각해 보면, 좋은 향기도 났었네. 아마 샴푸―”
“그, 그건 역시.”
“역시……그 외에 다른 생각은 안 들지?”
츠타코와 마미가 빨개진 얼굴로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에, 에, 뭐, 뭐야?”
유미 혼자서 당황하고 있자,
“그러니까, 요시노 양과 유키 군이……라는 거잖아?”
“꺄아아악, 추, 충격.”
셋이서 떠드는 중에.
“무슨 일이니, 굉장히 떠들썩한데.”
“평안하세요, 여러분 모두 아침부터 즐거우신 것 같네요.”
이츠에와 미치요가 교실에 들어온 뒤,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셋이 신경쓰여서 가까이 다가왔다.
“아, 미안해, 요시노 양이.”
“잠깐, 츠타코 양, 안된다니까.”
자칫 츠타코의 입이 미끄러질 뻔 한 순간을, 마미가 막는다. 급우라고 해도 가볍게 할만한 이야기가 아니다.
“어머, 그러고 보면 요시노 양은”
“안돼, 이츠에 양.”
그러자 왠지, 두 사람 쪽도 뭔가를 말하려다 그만뒀다.
혹시나 요시노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게 있나 싶었는데, 다음 순간.
“평안하세요――어, 무슨 일이야, 다같이 모여서.”
당사자가 자리에 나타났다.
평소랑 마찬가지로 머리를 땋은 요시노가 다섯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 요시노를, 잽싸게 일어난 츠타코와 마미가 좌우에서 어깨를 잡는듯한 자세로 억눌렀다.
실로 훌륭한 콤비네이션.
“요시노 양, 오늘 방과후는 여자끼리 이야기하는 시간이니까.”
“괜찮아, 기사같은 건 관계 없는, 완전 오프 더 레코드로. 친구로서의 이야기니까.”
“에, 잠깐, 둘 다 뭐야. 무슨 일이야, 유미 양?”
요시노 양이 곤란하다는 듯한 눈길을 향해왔지만, 그건 유미도 마찬가지다. 그도 그럴게, 사실이라고 하면 요시노의 상대가 친동생인 유키인 거다. 유미도 그런 화제에 흥미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남동생 이야기가 되면 너무 생생해서 듣고 있기 힘든 기분이 든다.
“비밀은 다 풀렸어요, 언니.”
“솔직히 말하는 편이 편해질 거예요.”
“뭐, 뭐, 뭔데 대체―――――?!”
2학년 3학기가 다 끝나가려는 날, 화창한 봄날과는 어울리지 않는 요시노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