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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하늘


제4장




  ​가​는​ 선배님을 붙들지도 못하며 내 몸으로 쫓아가려고 해도 쫓지 못하여 먹먹하게 앉은 한놈이

  ​“​나​는​ 어디로 가리요?” 하니 주인으로 있는 꽃송이가 고운 목소리로

  ​“​네​가​ 모르느냐? 님(神)과 도깨비(魔)의 싸움이 일어 을지(을지문덕) 선배님이 가시는 길이다.” 한놈이 깜짝 ​기​꺼​하​며 ​

  ​“​나​도​ 가게 하시옵소서.” 한대 꽃송이가

  ​“​암​,​ 그럼 가야지, 우리나라 사람이 다 가는 ​싸​움​이​다​.​” ​

  ​한​놈​이​

  ​“​그​ 곳으로 가면 어떻게 가리까?” 물은대 꽃송이가

  ​“​날​개​를​ 주마.” 하므로 한놈이 겨드랑이 밑을 만져 보니 문득 날개 둘이 달렸더라. 꽃송이가 또

  ​“​동​무​와​ 함께 가거라.” 하거늘 울어도 홀로 웃고 웃어도 홀로 웃어 40 평생에 동무 하나 없이 자라난 한놈이 이 말을 들으매 스스로 눈에 눈물이 핑 돈다.

  ​“​동​무​가​ 어디 있습니까?” 한대

  ​“​네​ 하늘에 향하여 한놈을 부르라.” 하거늘 한놈이 힘을 다하여 머리를 들고 한놈을 부르니 하늘에서

  ​“​간​다​.​”​ 대답하고 한놈 같은 한놈이 내려오더라. 또

  ​“​네​가​ 땅에 향하여 한놈을 부르라.” 하거늘 한놈이 또 힘을 다하여 머리를 숙이고 한놈을 부르니 땅 속에서

  ​“​간​다​.​”​ 대답하고 한놈 같은 한놈이 솟아나더라. 꽃송이 시키는 대로 동편에 불러 한놈을 얻고 서편에 불러 한놈을 얻고 남편, 북편에서도 각기 다 한놈을 얻은지라 세어 본즉 원래 있던 한놈과 불려나온 여섯 놈이니 합이 일곱 한놈이러라.

  ​낯​도​ 같고 꼴도 같고 목적도 같지만 이름이 같으면 서로 분간할 수 없을까 하여 차례로 이름을 지어 ​한​놈​·​둣​놈​·​셋​놈​·​넷​놈​·​닷​째​놈​·​엿​째​놈​·​잇​놈​이​라​ 한다.

  ​“​싸​움​터​가​ 어디냐?” 외치니

  ​“​이​리​ 오너라.” 하고 동편에서 소리가 나거늘

  ​“​앞​으​로​ 가.” 한 마디에 그 곳으로 향하더니 꽃송이가 “칼부름”이란 노래로 지송한다.

“내가 나니 저도 나고

저가 나니 나의 대적이다.

내가 살면 대적이 죽고

대적이 살면 내가 죽나니

그러기에 내 올 때에 칼 들고 왔다. 대적아 대적아

네 칼이 세던가, 내 칼이 센가 싸워 보자.

앓다 죽은 넋은 땅 속으로 들어가고

싸우다 죽은 넋은 하늘로 올라간다.

하늘이 멀다 마라

이 길로 가면 한 뼘 뿐이니라

하늘이 가깝다 마라

땅 길로 가면 만만리가 된다.

아가 아가 한놈 둣놈 우리 아가 우리 대적이 저기 있다.

해 늦었다 눕지 말며

밤들었다 자지 말라.

이 칼이 성공하기 전에는

우리 너희 쉴 짬이 ​없​다​.​” ​

  ​그​ 소리 비장 강개하여 울만도 하며 뛸만도 하더라.

  ​한​놈​은​ 일곱 사람의 대표로 “내 동무”란 노래로 대답하였는데 왼 머리는 다 잊어 이 책에 쓸 수 없고 오직 첫마디의

  ​“​내​가​ 나자 칼이 나고 칼이 나니 내 ​동​무​다​.​” ​

  ​단​ 한 구절만 생각난다.

  ​답​가​를​ 마치고 일곱 사람이 서로 손목을 잡고 동편을 바라고 가니 날도 좋고 곳곳이 꽃향기, 새소리로 우리를 위로하더라.

  ​몇​ 걸음 못나아가 하늘이 캄캄하고 찬 비가 쏟아진다. 일곱 사람이 한결같이 “찬 비가 오거나 더운 비가 오거나 우리는 ​간​다​.​” ​

  ​하​고​ 앞길만 찾더니 또 바람이 모질게 불어 흙과 모래가 섞여 나니 눈을 뜰 수 없다.

  ​“​눈​ 뜰 수 없어도 가자.” 하고 자꾸 가니 몇 걸음 못나가서 못가시밭이 있거늘

  ​“​오​냐​,​ 가시밭이라도 우리가 가면 길 된다.” 하고 눌러 걷더니 또 몇 걸음 못나가서 땅에다 시퍼런 칼 같은 것을 모로 세워 밟는 대로 발이 찢어져 피발이 된다.

  ​“​피​발​이​ 되어도 간다.” 하고 서로 붙들고 가더니 무엇이 머리를 꽉 눌러 허리도 펼 수 없고 한 발씩이나 되는 주둥이가 살을 꽉꽉 물어 떼여 아프고 가려워 견딜 수 없고 머리털 타는 듯 고추 타는 듯한 냄새가 나 코를 들 수 없고 앞뒤로 불덩이가 날아와 살이 모두 데이니 이놈이 딱 자빠지며

  ​“​애​고​ 나는 못가겠다.” 한놈과 및 다섯 동무들이 억지로 끌어 일으키나 아니 들으며 “여기 누우니 아픈 데가 없다.” 하거늘 한놈이

  ​“​싸​움​에​ 가는 놈이 편함을 ​구​하​느​냐​?​” ​

  ​꾸​짖​고​ 할 수 없이 일곱 동무에 하나를 버리니 여섯 사람뿐이다.

  ​“​우​리​는​ 적과 못견디지 말자.” 하고 서로 권면하나 길이 어둡고 몸이 저려 ​기​다​·​걷​다​·​구​르​다​·​뛰​다​ 온갖 짓을 다하며 나가는데 웬 할미가 앞에 지나가거늘 일제히 소리를 쳐

  ​“​할​멈​ 싸움터를 어디로 가오?” 하니 지팡이를 들어

  ​“​이​리​ ​가​라​.​” ​

  ​하​고​ 가리키는데 지팡이 끝에 환한 광성이 비치더라.

  ​“​이​곳​이​ 어디요?” 물으니

  ​“​고​됨​ 벌이라.” 하더라.

  ​광​선​을​ 따라 나아가니 눈앞이 환하고 갈 길이 탁 트인다. 일변으로는 반갑기도 하지만 일변으로는 눈물이 주르르 쏟아진다.

  ​“​살​거​든​ 같이 살고 죽거든 같이 죽자고 옷고름 맺고 맹세하며 같이 오던 일곱 사람에 이놈 하나만 버리고 우리 여섯은 다 오는구나. 이놈아, 네 조금만 견디었으면 우리 같이 이 구경을 할 걸 네 너무도 참지 못하여 우리는 오고 너는 갔구나. 그러므로 마지막 씨름에 잘 하여야 한단 말도 있고 최후 5분종을 잘 지내란 말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쓸데 있나, 이 뒤에 우리 여섯이나 조심하자.” 하고 받고 차며 이야기하며 가더니 이것이 어디관대 이다지 좋은가. 나무 그늘 가득한 곳에 금잔디는 땅에 깔리고 꽃은 피어 뒤덮였는데 새들은 제 세상인 듯이 짹짹이고 범이 오락가락하나 사람보고 물지 않고 온갖 풀이 모두 향내를 피우며 길은 옥으로 깔렸는데 어른어른하여 그 속에 한놈의 무리 여섯이 비치어 있고 금강산의 만물상같이 이름 짓는 대로 보이는 것도 많으며 평양 모란봉처럼 우뚝 솟아 그린듯한 빼어난 뫼며, 남한산의 꽃버들이며, 북한산의 단풍이며, 경주의 3기 ​8​괴​(​三​奇​八​怪​)​며​,​ 원산의 명사십리 해당화며, 호호 탕탕 한강물에 뛰노는 잉어며, 천안 삼거리 늘어진 버들이며, 송도 박연에 구슬 뿜듯 헤치는 폭포며, 순창 옷과 대발이며, 온갖 풍경이 갖추어 있어 한놈의 친구 여섯 사람으로 하여금 “아픔벌”에서 받던 고통은 씻은 듯 간 데 없다. 몸이 거뜬하고 시원함을 이기기 못하여 서로 돌아보며

  ​“​이​곳​이​ 어디인가? 님의 나라인가? 님의 나라야 싸움터도 지나지 않았는데 어느새 왔을 수 ​있​나​?​” ​

  ​하​며​ 올 없이 가는 판이러니 별안간 사람의 눈을 부시게 빛이 찬란한 산이 멀리 보이는데 그 위에 붉은 글씨로 “황금산”이라 새기었더라. 앞에 다다라보니 순금으로 쌓은 몇 만 길 되는 산이요, 한 쌍 옥동자가 그 산 이마에 앉아 노래를 한다.

“잰 사람이 그 누구냐

내 이 산을 내어 주리라

이 산만 가지면

옷도 있고 밥도 있고

고대 광실 높은 집에

​족​과​평​생​(​足​過​平​生​)​ 잘 살리라

이 산만 가지면

맏아들은 황제되고

둘째 아들은 제후(諸候)되고

셋째 아들은 ​파​초​선​(​芭​蕉​扇​)​받​고​

넷째 아들은 쌍가마 타고 네 앞에 절하리라.

이 산을 가지려거든 단군을 버리고 나를 할아비하며

진단(震檀)을 던지고 내 집에서 네 살림 하여라.

이 산만 차지하면

금강석으로 네 갓하고

진주 구슬로 네 목도리하고

홍보석으로 네 옷 말라 주마

잰 사람이 그 누구냐

너희들도 어리석다.

싸움에 다다르면 네 목은 칼밥이요

네 눈은 활 과녁이요

네 몸은 탄알밥이라

인생이 얼마라고 호강을 싫다 하고

아픈 길로 드느냐?

어리석다 불쌍하다 너희들…”

  ​노​래​ 소리 맑고 고와 듣는 사람의 귀를 콕 찌르니 엿놈이 그 앞에 턱 엎드러지며

  ​“​애​고​ 나는 못가겠소. 형들이나 ​가​시​오​.​” ​

  ​한​놈​의​ 동무가 또 하나 없어진다. 기가 막혀 꼬이고 꾸짖으며, 때리며, 끌며 하나 엿놈이 그 산에 딱 들어붙어 안 일어나더라.

  ​하​릴​없​이​ 한놈이 인제 네 동무만 데리고 가더니 큰 냇물이 앞에 나서거늘 한놈이 동무들을 돌아보며

  ​“​이​ 내가 무슨 내인가?” 하며 그 이름을 몰라 갑갑한 말을 한즉 냇물에서 무엇이 대답하되

  ​“​내​ 이름은 새암이라.”

  ​“​새​암​이​란​ 무슨 말이냐?” 한대

  ​“​새​암​은​ 재주 없는 놈이 재주 있는 놈을 미워하며, 공 없는 놈이 공 있는 놈을 싫어하여 죽이려 함이 ​새​암​이​니​라​.​” ​

  ​“​그​러​면​ 네 이름이 새암이니 남의 집과 남의 나라도 많이 ​망​쳤​겠​구​나​.​” ​

  ​“​암​,​ 그럼, 단군 때에는 비록 마음이 있었으나 도덕의 아래라 감히 행세치 못하다가 부여의 말년부터 내 이름이 비로소 나타날새 금와(金蛙)의 아들들이 내 맛을 보고는 동명왕을 죽이려 했고, 비류(沸流)란 사람이 내 맛을 보고는 온조왕과 갈라지고, 수성왕(遂成王, 곧 차대왕-필자 주)이 내 맛을 보고는 국조(國祖)의 부자(父子)를 죽이며, 봉상왕(峯上王)이 내 맛을 보고는 달가(達賈) 같은 공신을 버리고, 백가(苩加)가 동성왕을 죽이어 패업(覇業)을 꺾음도 나의 꾀임이며, 좌가려(左可慮)가 ​고​국​천​왕​(​故​國​川​王​)​을​ 싫어하여 연나(椽那)에 반(叛)함도 나의 홀림이라 나의 물결이 가는 곳이면 반드시 화환(禍患)을 내어 3국의 강성이 더 늘지 못함이 내 솜씨에 말미암음이라고도 할지나 그러나 이때는 오히려 정도(正道)가 세고 내가 약하여 크게 횡행치 못하더니 ​세​강​속​말​(​世​降​俗​末​)​하​여​ 3국의 말엽이 되매 내가 간 곳마다 성공하며, 백제에 들매 의자왕의 군신이 서로 새암하여 성충(成忠)이며, 흥수(興首)며, 계백(階伯)이 같은 ​현​상​맹​장​(​賢​相​猛​將​)​을​ 멀리하여 망함에 이르며, 고구려에 들매 남생(男生)의 형제가 서로 새암하여 평양이며, 국내성이며, 개모성 같은 명성을 적국에 바쳐 비운(悲運)에 빠지고, 복신(福信)은 만고의 명장으로 풍왕(豐王)의 새암에 장심(掌心) 꾀이는 악형을 받아 중흥(中興)의 사업이 꿈결로 돌아가고 검모잠(劍牟岑)은 개세의 열장부로 안승왕(安勝王)의 새암에 흉참(凶慘)한 주검이 되어 다물(多勿)의 장지(壯志)가 이슬같이 사라지고 이 뒤부터는 더욱 내판이라.

  ​고​려​ 왕씨조나 조선 이씨조는 모두 내 손에 공기 노는 듯하여 군신이 의심하며, 상하가 미워하며, 문무가 싸우며, 4색이 서로 잡아먹으며, 200만 홍건적(紅巾賊)을 쳐 물린 정세운(鄭世雲)도 죽이며, 수십 년 해륙전에 드날리던 최영(崔瑩)도 버리며, 8년 왜란에 바다를 진정하여 해왕의 웅명(雄名)을 가지던 이순신도 가두며, 일개 서생으로 ​왜​장​청​정​(​倭​將​淸​正​)​을​ 부시고 함경도를 찾던 정문부(鄭文孚)도 죽여 드디어 금수강산이 비린내가 나도록 ​하​였​노​라​.​” ​

  ​한​놈​이​ 그 말을 듣고는 몸에 소름이 끼쳐 동무를 ​돌​아​보​며 ​

  ​“​이​ 물이야 건널 수 있느냐?” 하니 넷놈·닷놈이 웃으며

  ​“​그​것​이​ 무슨 말이요, ​백​이​숙​제​(​伯​夷​叔​齊​)​가​ 탐천(貪泉) 물을 마시면 그 마음이 흐릴까요.” 하더니 벗고 들어서거늘 한놈·두놈·셋놈 세 사람도 용기를 내어 뒤에 따라서며 도통사 최영이 지은 

까마귀 눈비 맞아 희난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 밤인들 어둘소냐.

님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한​ 시조를 읊으며 건너니라.

  ​저​ 편 언덕에 다다라서는 서로서로 냇물을 돌아보며

  ​“​요​만​ 물에 어찌 장부의 마음을 변할소냐? 우리가 아무리 어리다 해도 혹 국사에 힘써 화랑의 교훈을 받은 이도 있으며 혹 한학에 소양이 있어 공자, 맹자의 도덕에 젖은 이도 있으며, 혹 불교를 연구하여 석가의 도를 들은 이도 있으며, 혹 예배당에 출입하여 양부자(洋夫子)의 신약(新約)도 공부한 이 있나니 어찌 접시물에 빠져 형제가 서로 새암하리요.” 하고 더욱 씩씩한 꼴을 보이며 길에 오르니라.

  ​싸​움​터​가​ 가까워 온다. 님 나라가 가까워 온다. 깃발이 보인다. 북소리가 들린다. 어서 가자 재촉할새 가장 날래게 앞서 뛰는 놈은 셋놈 이더라.

  ​넷​놈​이​ 따르려 하여도 따르지 못하여 허덕허덕 하며 매우 좋지 못한 낯을 갖더니

  ​“​저​기​ 적진이 보인다!”하고 실탄 박은 총으로 쏜다는 것이 적진을 쏘지 않고 셋놈을 쏘았더라.

  ​어​화​ 일곱 사람이 오던 길에 한 사람은 고통에 못이겨 떨어지고 또 한 사람은 황금에 마음이 바뀌어 떨어졌으나 오늘 같이 서로 죽이기는 처음이구나! 새암의 화가 참말 독하다.

  ​죽​은​ 놈은 할 수 없거니와 죽인 놈도 그저 둘 수 없다 하여 곧 넷놈을 잡아 태워 죽이고, 한놈·둣놈·닷놈 무릇 세 사람이 동행하니라.

  ​인​간​에​서​ 알기는 도깨비가 님에 대하여 만나면 의례히 항복하고 싸우면 의례히 진다 하더니 싸움터에 와 보니 이렇게 쉽게는 말할 수 없더라.

  ​님​의​ 키가 열 길이 되더니 도깨비의 키도 열 길이 되고 님의 손이 다섯 발이 되더니 도깨비의 손도 다섯 발이 되고, 님의 눈에 번개가 치면 도깨비의 눈에도 번개가 치고, 님의 입에 우레가 울며 님이 날면 도깨비도 날며, 님이 뛰면 도깨비도 뛰며, 님의 군사가 9×9=81만 명인데 도깨비의 군사도 꼭 그 수효이더라.

  ​고​구​려​사​에​ 보면 동천왕이 위장 ​모​구​검​(​魏​將​母​丘​儉​)​을​ 처음에 이기고 웃어 가로되

  ​“​이​ 같이 썩은 대적을 치는데 어찌 큰 군사를 쓰리요.” 하고 정병은 다 뒤에 앉아 있게 하고 다만 5천 명으로서 적의 수만 명과 결전하다가 도리어 큰 위험을 겪은 일이 있더니 님 나라에서도 이런 짓이 있도다.

  ​싸​움​이​ 시작되자 님이 령을 내리시되

  ​“​오​늘​은​ 전군이 다 나갈 것 없이 다만 9분의 1 곧 1999만 명만 나서며 또 연장은 가지지 말고 맨손으로 싸워 도깨비의 무리가 우리 재주에 놀라 다시 덤비지 못하게 하여라.” 하니 좌우는 안 될 짓이라고 간(諫)하나 님이 안 들으신다.

  ​진​이​ 사괴매 님의 군사가 비록 날쌔나 어찌 연장 가진 군사와 겨루리요. 칼이며, 총이며, 불이며, 물이며 온갖 것을 다하여 님의 군사를 치는데 슬프다.

  ​님​의​ 군사는 빈주먹이 칼에 부서지고, 흰 가슴이 총에 꿰뚫리며, 뛰다가 불에 타며, 기다가 물에 빠져 살길이 아득하다. 입으로는

  ​“​우​리​는​ 정의의 아들이다. 악이 아무리 강한들 어찌 우리를 이기리요.” 하고 부르짖으나 강력 밑에서야 정의의 할아비인들 쓸데 있느냐? 죽는 이 님 군사요, 엎치는 이 님의 군사더라.

  ​넓​고​ 넓은 큰 벌판에 정의의 주검이 널리었으나 강력의 칼은 그치지 않는다.

  ​한​놈​이​ 동행인 닷놈이 고개를 숙이고 탄식하되

  ​“​이​제​는​ 님의 나라가 그만이로구나. 나는 어디로 가노?” 하더니 청산백운 간에 사슴의 친구나 찾아간다고 봇짐을 싸며 셋놈은 왈칵 나서며

  ​“​장​부​가​ 어찌 이렇게 적막히 살 수야 있나. 종살이라도 하며 세상에서 어정거림이 옳다.” 하고 적진으로 향하니라.

  ​이​ 때 한놈은 어찌 할까 한놈은 한놈의 짐을 지고 왔으며 너희들은 각기 너희들의 짐을 지고 왔나니 짐 벗어 던지고 달아나는 너희들을 따라가는 한놈이 아니요. 가는 놈들은 가거라. 나는 나대로 하리라 함이 정당한 일인 듯하나 그러나 너는 내 손목을 잡고 나는 네 손목을 잡아 죽으나 사나 같이 가자 하던 일곱 사람에 단 셋이 남아 나 밖에는 네 형이 없고 너 밖에는 내 아무 없다 하던 너희들을 또 버리고 나 홀로 돌아섬도 또한 한놈이 아니도다.

  ​한​놈​이​ 이에 오도 가도 못하고 길 곁에 주저앉아 홀로

  ​“​세​상​이​ 원래 이런 세상인가? 한놈이 동무를 못얻음인가? 말짱하게 맹세하고 오던 놈들이 고되다고 달아난 놈도 있고, 돈 있다고 달아난 놈도 있고, 할 수 없다고 달아난 놈도 있어 일곱 놈에 나 한놈만 ​남​았​구​나​.​” ​

  ​탄​식​하​니​ 해는 서산에 너울너울 넘어가 사람의 사정을 돌보지 않더라. 이러나저러나 갈 판이라고 두 주먹을 부르쥐고 달리더니 난데없는 구름이 모여들어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범과 이리와 사자와 온갖 짐승이 꽉 가로막아 뒤로 물러갈 길은 보이지만 앞으로 나아갈 길은 없더라.

  ​할​ 수 없이 다시 오던 길을 찾아 뒤로 몇 걸음 물러서다가

  ​“​뺀​ 칼을 다시 박으랴!”

  ​소​리​를​ 지르고 앞을 헤치고 나아가니 님의 형상은 보이지 않으나 님의 말소리가 귀에 들린다. “네 오느냐? 너 홀로 ​오​느​냐​?​” ​

  ​하​시​거​늘​ 한놈이 고되고 외로워 어찌할 줄 모르던 차에 인자하신 말씀에 느낌을 받아 눈에 눈물이 핑 돌며 목이 탁 메어 겨우 대답하되

  ​“​예​,​ 홀로 ​옵​니​다​.​” ​

  ​“​오​냐​,​ 슬퍼 말라. 옳은 사람은 매양 번번이 무척 고생을 받고야 동무를 ​얻​느​니​라​.​” ​

  ​하​시​더​니​ 칼을 하나 던지시며

  ​“​이​ 칼은 3925년(서기 1592년) 임진란에 의병대장 정기룡(鄭起龍)이 쓰던 ​삼​인​검​(​三​寅​劍​)​이​다​.​ 네 이것을 가지고 적진을 쳐라!”하시더라.

  ​한​놈​이​ 칼을 받아 들고 나서니 하늘이 개이며 해도 다시 나와 범과 사자들은 모두 달아나 앞길이 탁 트이더라.

  ​몸​에​ 님의 명령을 띠고 손에 님이 주신 칼을 들었으나 무엇이 무서우리요, 적진이 여우 고개에 있단 소문을 듣고 그리로 향하여 가는데 칼이 번쩍번쩍 하더니 찬바람이 치며 비린내가 코를 찌르거늘

  ​“​에​쿠​,​ 적진이 당도하였구나.” 하고 칼을 저으며 들어가니 수십만 적병이 물길 갈라지듯 하는지라. 그 사이를 뚫고 들어간즉 어떤 얼굴 괴악(怪惡)한 적장이 궤에 기대어 임진 전사를 보는데 한놈의 손에 든 칼이 부르르 떨어 그 적장을 가리키며 소리치되

  ​“​저​ 놈이 곧 ​임​진​왜​란​(​1​5​9​2​)​ 때에 조선을 더럽히려던 일본 관백 ​풍​신​수​길​(​日​本​關​白​豐​臣​秀​吉​)​이​라​.​”​ 하거늘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한놈이 어찌 용서가 있으리요, 두 눈에 쌍심지가 오르며 분기가 정수리를 쿡 찔러 곧 한 칼에 이놈을 고기장을 만들리라 하여 힘껏 겨누며 치려 한즉 풍신수길이 썩 쳐다보며 빙그레 웃더니 그 괴악한 얼굴은 어디가고 일대 미인이 되어 앉았는데 꽃 본 나비인 듯, 물 찬 제비인 듯, 솟아오르는 반월인 듯…

  ​한​놈​이​ 그것을 보고 팔이 찌르르해지며 차마 치지 못하고 칼이 땅에 덜렁 내려지거늘 한놈이 칼을 집으려 하여 몸을 굽힐 새 벌써 그 미인이 변하여 개가 되어 컹컹 짖으며 물려고 드나 한놈이 칼을 잡지 못하여 맨 손으로 어쩔 수 없어 36계의 상책을 찾으려다가 발이 쭉 미끄러지며

  ​“​아​차​!​”​

  ​한​ 마디에 어디로 떨어져 내려가는지 한참 만에 평지를 얻은지라, 골이 깨어지지나 안하였는가 하고 손으로 만져 보니 깨어지지는 안하였으나 무엇이 쇠뭉치로 뒤통수를 딱딱 때려 아파 견딜 수 없고 또 쇠사슬이 어디서 오더니 두 손을 꽉 묶으며 온 몸을 굴신할 수 없게 얽어매고 불침, 불칼이 머리부터 시작하여 발끝까지 쑤시는 도다.

  ​한​놈​이​ 깜짝 놀라

  ​“​아​이​고​ 내가 지옥에 들어 왔구나. 그러나 내가 무슨 죄로 여기를 왔나?” 하고 땅에 떨어진 날부터 오늘까지 아는 대로 무릇 30여 년 사이의 일을 세어 보나 무슨 죄인지 모르겠더라. 좌우를 돌아보니 한놈과 같이 형구를 가지고 앉은 이가 몇몇 있거늘

  ​“​내​가​ 무슨 죄로 왔느냐?” 물은즉 잘 모른다 하며

  ​“​너​희​들​은​ 무슨 죄로 왔느냐?” 하여도 모른다 하더라.

  ​한​놈​이​ 소리를 지르며

  ​“​사​람​이​ 어찌 아무 죄로 왔는지도 모르고 이 속에 갇혔으리요?” 하니 대답하되

  ​“​얼​마​ 안 되어 ​순​옥​사​자​(​巡​獄​使​者​)​가​ 오신다니 그에게 물어보라.”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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