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의 왕 제1장. 갑작스런 귀환 (2)
방벽의 보호를 받지 않는 외곽 지역은 모래바람의 기세가 한층 거셌다. 바람은 동으로 불다가도 남으로 진로를 틀어서는 어느 순간 공중으로 치솟았다가 사방으로 폭발하였다. 그 움직임을 읽어내려고 시도하는 것은 무의미하였으니, 바람이란 애초에 불가지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모래바람에 섞인 비릿한 향에 노아는 숨을 쉴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불멸의 사막에서 시작된 바람은 대륙 곳곳으로 휘몰아쳤다. 그 비릿한 냄새를 두고 누군가는 사막에 묻힌 생물들의 시체가 썩으면서 풍기는 죽음의 향기라고 두려워했고, 어떤 이는 모래에 섞인 철과 황 따위의 금속 물질들이 산화되어 나는 냄새에 불과하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시체가 썩었건 쇠가 썩었건, 어쨌든 분명한 것은 인간의 발길이 안 닿는 곳의 향기란 인간이 소화하기에 너무도 역하고, 순수하다는 것이었다.
도시행정복지사업부는 시민들에게 위생관리에 힘쓰고 최대한 야외활동을 자제하라는 내용의 전단지를 도시 곳곳에 뿌렸고, 도시물자가격경제부는 천정부지로 오른 비누 가격을 잡기 위해 미다신까지만 비누를 사용하도록 하는 생필품 계급제한제를 입법하려고 하였다. 이에 분개한 파신 권리단체 파시쥬는 시청사 앞에서 15일간 농성을 펼쳤고, 제안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손을 깨끗이 씻고 다니건 말건, 애초에 그런 것들이 도시의 행정복지사업과 물자가격경제에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 노아는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노신들과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었고, 상관한다고 밥이 나오는 건 아니었다.
가로등 하나 없고 별빛마저 모래폭풍에 가려진 사막에서 방향 감각을 잃기란 한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쉽게 코끼리 궁전을 찾을 수 있는 것은 그 거대한 크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 외관은 궁전이라고 부르기엔 부끄러운 부분이 많았다. 대나무를 일자로 이어붙인 성문은 군데군데 꺾여있었고, 성벽 사이마다 모래들이 잔뜩 끼어 여름만 되면 잡초가 자라기 일쑤였다. 다만 코끼리 궁전이 성난 코끼리 네댓쯤 달려들어도 미동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견고하다는 것은 확실했다.
한편으로 코끼리 궁전은 그 모양새 때문에 많은 이야기를 낳기도 하였다. 반구半球 모양의 본성으로부터 길게 돌출되어 나온 통로는 입구로 이어지는데 높이가 차츰 낮아지도록 설계되었다. 맑은 날 본다면 사막 한 가운데에 마치 거대한 코끼리의 두개골을 박제한 것처럼 보일 것이었다. 그 이름에 걸맞은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노아는 두개골 모양의 건물을 궁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코끼리 궁전에 들어온 코끼리들은 어차피 3년 안에 목이 잘리기 때문이다.
통로로 들어서니 바람 소리가 통로 안에서 메아리쳤다. 통로 끝까지 도달한 노아는 아직 본성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지기인 이말 노신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이었다. 새벽녘조차 비치지 않아 통로 안은 아직 어두웠고, 허락 없이 기름을 쓸 수는 없었기에 노아는 횃불을 붙이는 대신 일출을 기다리기로 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이말이 왼쪽 다리를 절면서 궁전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잘못 맞아서 다리병신이 되었다고, 이말은 노아에게 킬킬거리며 이야기해준 적이 있었다. 통로에 들어서자 이말은 부스러진 잎사귀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지런한 건 정말 못 당하겠군. 어제도 밤늦게까지 작업했을 텐데 안 피곤한가?”
“이젠 습관이 돼서 큰 문제는 없습니다. 성상들은 별 일 없었나요?”
“그 게을러터진 놈들에게 뭔 일이 있겠나? 저리도 호강하며 사는데, 항상 똑같지!”
“그 외 다른 문제는?”
“자네 없어도 여긴 잘 돌아가. 아무 걱정 말라고.”
하지만 이말의 자신만만한 태도와 달리 눈에 들어온 본성 내부는 엉망진창이었다. 욕조 안엔 흙탕물이 흐르고 있었고, 바람에 날려 온 벌레들이 사료에 뒤섞여 왱왱거리고 있었다. 교회 지붕 수리로 며칠 궁전을 비운 것이 화근이었다. 노아는 이말에게 무언의 항의를 눈빛으로 보냈지만, 이말은 노아의 시선은 가볍게 무시하고 흔들의자를 향해 걸어갔다. 부족한 잠을 보충하려는 것 같았다. 노아는 한숨을 내쉬고는 도구함에서 빗자루를 꺼내들었다.
이리저리 쓸고 닦는 사이 어느덧 지붕 중앙에 난 구멍으로 아침 햇살이 내려와 욕조 위에서 넘실거렸다. 노아는 문득 어렸을 때 바다에서 보았던 석양과, 그 아래 서 있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의 기억 속에 남겨진 어머니에 대한 유일한 단서란, 바다 속으로 잠기는 일몰을 등진 채로 자신을 안고 있던 연약한 여인의 그림자뿐이었다. 그래서일까? 노아에게 어머니란 그저 검은 존재였다. '검다'는 것은 '어둡다'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어둠에는 명암이라도 있지만, 검다는 것은 그저 검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떠올리려고 하면 할수록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물에 번진 듯 더욱 흐릿해져만 가서 노아는 가끔, 이 기억들이 사실 상상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기도 하였다. 해를 등지고 서 있던 그 사람은 아버지일지도 몰랐고, 어쩌면 인간이 아닐 수도 있었다. 기억을 더듬는 과정은 언제나 마치 한 조각 편린片鱗을 손에 쥔 채로 결코 완성할 수 없는 퍼즐을 푸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때 치아키와 캐롤이 코끼리 궁전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노아와 함께 코끼리 궁전에서 일하는 노신으로 치아키는 경리였고, 캐롤은 노아와 함께 궁전 운영을 담당했다. 치아키는 어제 노아와 밤늦게까지 교회 지붕을 고치고 오는 길이라 얼굴에 피로가 한가득했다. 하품을 연신 내뱉던 치아키는 노아를 보자마자 그의 앞으로 폴짝거리며 다가와 말을 건넸다.
“잘 잤어요? 역시 부지런한 노아! 난 도저히 못 일어나겠던데.”
배시시 웃는 그녀에게 마주 미소를 지으며 노아는 답했다.
“학교 그만둔 지 얼마 안 돼서 아직은 힘들 겁니다. 익숙해지면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그럴까요? 근데 학교 핑계로 힘들다는 얘기는 사양이에요. 그딴 재미없는 데 다니느니 여기서 일하는 게 훨씬 편하거든요?
노아는 치아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따라온 캐롤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캐롤은 노아를 한번 슥 쳐다보고는 가볍게 그 앞을 지나쳐버렸다. 머쓱한 표정으로 캐롤의 뒤통수만 쳐다보는 노아에게 치아키가 황급히 말을 꺼냈다.
“그, 그나저나! 어제 준다는 약은 가져왔어요?”
“아! 물론 가져왔죠. 다린 좀 어때요?”
그렇게 말하며 노아는 품에서 도찰제를 하나 꺼냈다. 어제 지붕을 수리하다가 치아키가 디디고 있던 발판이 부러졌던 것이다. 노아가 황급히 발목을 낚아채서 목숨은 부지했지만 허벅지를 지붕난간에 호되게 부딪혀 어젯밤에는 노아의 등에 업혀 천막까지 갔었다. 어제 생각이 났는지 치아키는 양볼을 앵두같이 붉히며 답했다.
“...괜찮아요! 진짜로, 정말 괜찮으니까 걱정 말아요!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 걸요. 헤헤.”
당찬 대사와 달리 몸을 비비 꼬며 부끄러워하는 치아키의 모습이 노아는 귀엽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정말 괜찮은지 걱정이 되어 노아는 그녀의 다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도 이 약 꼼꼼히 발라요. 어제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하니까요. 멍은 좀 가라앉았어요?”
“음, 잠시만요.”
그리고 치아키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튜닉을 허벅지까지 걷어 올렸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하얀 속살에 노아는 고개를 옆으로 홱 돌리고는 허둥지둥 대답했다.
“...굳이 확인시켜 줄 것까진 없어요!”
치아키는 노아가 갑자기 뭘 보나 싶어 노아처럼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가 이내 칭얼거리며 말했다.
“아이 참! 곁눈질하지 말고 제대로 봐줘야 괜찮은지 아닌지 알 거 아니에요. 아니면 한 번 만져보던지.”
노아는 얼른 이 부끄러움은 물론 남자란 생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아가씨로부터 도망쳐야겠다고 마음먹고는 뒤로 몸을 날릴 채비를 하였다. 하지만 그 순간 등 뒤에서 스르륵스르륵, 첨벙첨벙하는, 마치 캐롤이 옷가지는 죄다 벗어던지고 욕조에서 목욕이라도 하는 것만 같은 소리가 들려왔기에 사이드스텝으로 통로까지 빠져나갔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덧 치아키도 욕조에 들어가 캐롤과 까르르거리며 목욕을 하고 있었다. 노아는 두 여자와 자신의 정신 건강 모두를 위해서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치아키와 캐롤은 둘 다 올해 초부터 코끼리 궁전에서 일을 시작한 노신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친한 것 같은데 성격은 이상하게 딴판이었다. 항상 말을 먼저 건네는 것은 이제 막 스무 살에 접어든 치아키였다. 이말의 딸이기도 한 그녀는 체구가 작은 아버지와 달리 상당히 훤칠한 편이었다. 거기다 서글서글한 눈망울에 얼굴도 귀여운 것은 물론, 사교성도 좋아 뭇 청년들이 너도나도 좋다고 난리였다. 그러나 그 사교성이 아버지와는 통하지 않은 것인지 매번 다툼이 끊이지 않다가 결국 한 달 전, 치아키는 캐롤이 사는 천막으로 가출했다고 한다.
반면 캐롤 같은 경우, 노아는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너무나도 어색하고 힘들었다. 노아는 처음 캐롤과 만났을 때 자신과 같은 흑발에 황인종이라는 것을 알고는 괜스레 동질감을 느끼며 친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캐롤에게 말을 걸어봤자 그녀의 반응은 '예, 아뇨, 그렇지 않아요, 괜찮아요, 그런가요, 그렇군요'가 전부였다.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인가 싶었지만 치아키에게 물어보니 정말 착하고 재밌는 언니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것이었다. 생각해보컨대 노아는 캐롤이 자길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결론이 뻔하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노아 입장에서도 캐롤보다는 자신에게 친근감 있게 다가오는 치아키나 이말하고만 말을 트며 지내면 될 일이었다. 무엇보다 노아는 스스로가 쓸데없는 고민 따윈 바쁘게 일하면서 잊어버리는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다. 노아는 일이나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당차게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같이 씻자고 손짓하는 치아키의 환한 미소와 그 속살을 보고는 미소로 답하며 다시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