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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와 짐승과 마을 이야기


 

─…… 페이탈 프라이멀 입자 반응 체크.
─시각 반응 체크. 이상 없음.
─청각 반응 체크. 이상 없음.
─촉각 반응 체크. 이상 없음.
─신체 손상 체크. 자가 복구율 84%. 행동 가능.
─메모리 데이터에 치명적 데미지 확인. 자가 복구 불가능.
─에너지 잔량 체크. 체크 결과 가동에 영향 없음. … 가동 승인.


─행동 개시.

 



1화



칠흑색의 강철과 슈츠로 전신을 감싸고 있는 인형이 눈을 떴다.
우선은 손가락 끝부터 움직여보았다. 처음에는 다소 뻣뻣하고 힘겨웠지만, 몇번 반복하자 곧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일 수 있었다.
다리와 등, 머리에 닿는 감촉으로 인해 자신이 지금 누워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손을 움직여 바닥을 짚고, 상반신을 일으켰다.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갈색의 커다란 본체와 바늘과도 같은 녹색의 분체들을 가득 달고 있는 '어떤 것'. 데이터 검색 결과, 열대 지방에 분포되는 활엽수의 한 종류라는 것을 확인했다. 같이 첨부되어 있는 자료에 의하면 약 1000년 전, 다른 식물종이 전멸할 당시 함께 멸종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
어째서 자신은 이런 것을 알고 있는걸까. 작은 의문을 품지만 그 해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한번 의문이 생기자, 또다른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리 속에 떠올랐던 탓이다.


이곳은 어디일까. 주변을 둘러보면 대형의 식물들로 가득한 '숲 속'으로 추정된다. 머리 속에서 또다시 떠오른 '자료'에 의하면 숲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1000년 전에 모두 사라져버렸다고 하지만, 그것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정보인지는 알 수 없었다.


조금 전 머리 속에서 무언가가 울렸던 것 같은데 어째서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것일까. 아마도 머리 속에서 '무언가'가 울렸던 것은 자신이 깨어나기 전.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소리가 울리고 나서 자신이 깨어났다. 「자신이 의식을 차리기 전의 자신이 들었던 소리의 내용에 대해 기억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 속에서, 끝끝내 해답을 찾지 못했다.
자신은 지금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그보다 먼저 알아내야할 해답이 있다.


자신은, 누구일까.


처음 보는 '나무'나 '숲'에 대해서도 기억을 꺼낼 수 있는데,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원래는 어디에 있었고, 왜 이런 곳에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이름도 나이도 그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 우선, 움직이자."


그냥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면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곳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이상 그런 낙관적인 판단으로 마냥 죽치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러니까 우선은 이동하기로 했다. 움직이다보면 무언가를 만날지도 모르고, 꼭 그렇지 않더라도 상황에 변화가 생길지 모른다. 조금 태평한 생각을 하자면 걷다보면 무언가 생각날지도 모르고.


─철컹, 철컹, 철컹, 철컹, 철컹, 철컹.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사각.


발을 감싸고 있는 금속이 지면에 부딪히는 소리.
발에 밟히는 풀들이 서로 부딪히며 일으키는 소리.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 밑에서 그런 소리들이 들려왔다.
주변의 나무들에 의해 양분을 빼앗기고 말라죽어버린 작은 풀들. 이런 광경도 원래 있던 곳에선 볼 수 없었다.


"…… 어?"


'원래 있던 곳'.
그 말이 머리에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적어도 자신이 원래 있던 곳이 여기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해졌다.
거기까지 자각한 이후,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걸어도 걸어도 보이는 것은 오로지 나무, 풀, 나무, 나무, 풀, 나무, 풀, 풀. 울창한 숲 속의 풍경 뿐이었다. 귀에 들려오는 것도 여전히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나 풀벌레들이 우는 소리, 그리고 자신의 발소리 뿐이다.
미묘한 변화가 있다고 한다면, 조금전까진 약간이나마 들어왔던 햇빛이 키 큰 나무들에 의해 가로막혀, 길다란 풀들이 자라나지 못한 곳이라는 정도. 아까 전과 비교하면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들어온 모양이다.


이 시점에서 그는 한가지 고민을 해야했다.
이대로 계속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걸음을 돌려서 다른 길을 찾아야할 것인가.


하지만 그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자신은 이 숲 속에 있었다. 그렇다면 분명 무언가의 목적을 가지고 들어온 것일테고, 그걸 생각하면 무작정 숲밖으로 나가는 것보다는 이 안에서 해매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멈추었던 걸음을 계속해서 움직였다.


처음 장소에서 출발한지 그럭저럭 2시간이 흘렀다.
아직까지 특별히 뭔가 생각나는 것은 없었고, 숲의 끝도 보이지 않았다.
꽤 오래 걸었어도 피로나 근육통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지만, 솔직히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즈음.


사각사각사각사각.
우키키키우키키키!
사각사각사각사각.
우키우키키키우키!


주위의 나무들이 흔들리면서 나뭇잎들이 소리를 낸다. 그리고 그 소음 사이에서, 또다른 기괴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틀림없이 무언가가 나무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꽤 많은 숫자가.


'나무의 흔들리는 정도와 소리의 크기, 그리고 소리의 간격으로 봤을 때 개체의 크기는 약 ​1​0​0​~​1​2​0​C​m​,​ 40Kg 이하의 소형. 총 개체 수는 추정 30에 플러스 마이너스 2. 이동의 형태와 아까부터 나오는 소리를 감안하면 아마도 영장류. 그 중에서도 이 정도 스피드로 계속 움직일 수 있는 종류는─'


주변이 소란스러워진지 10초. 단지 그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이미 대부분의 상황 파악이 끝났다. 스스로도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현실. 그렇다면 사용하는데 인색하게 굴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다.
나무와 나무를 타고 돌아다니는 검은 그림자들을 눈으로 쫓는다. 그리고, 그 중 몇몇이 자신의 주변으로 다가오는 것도 확인했다.


머리 위에서 하나. 오른쪽 대각선 위에서 둘, 왼쪽 대각선 아래에서 둘.
총 다섯 마리의 '원숭이'가 그를 향해 달려들때까지 걸린 시간은 약 0.3초 이하.


─하지만, 그 다섯 마리를 한손으로 모조리 쳐내버릴 때까지 걸린 시간은 그보다 짧았다.


​"​우​키​키​키​키​키​키​키​!​!​"​


키드 데빌. 육식성이고 침팬지와 비슷한 크기의 영장류이지만, 그 흉폭함도 전투력도 보통의 원숭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란 눈은 밤에도 맹금류 수준의 시력을 자랑하며, 상어처럼 그 이빨이 모조리 송곳니처럼 뾰족한 것들로 이루어져있다. 가느다란 팔다리에 어울리지 않게, 사람의 팔 정도는 가볍게 부러뜨릴 수 있을 정도의 완력과 높은 민첩성을 함께 가진 '맹수'다.
그럼에도, 그는 별로 어렵지 않게 막아냈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기이할 정도로, 자신의 몸은 빨리 반응했다. 마치, 꽤 예전부터 이런 일들을 익숙하게 해왔던 것처럼.


'… 그럼 나는 '싸우는' 일을 하고 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약간 우울해졌다.
3마리의 공격이 실패하자, 다른 키드 데빌들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땅에 떨어진 세 마리는 양손 양발을 전부 땅에 붙인 낮은 자세로 으르렁거리고 있다.


땅바닥에 다섯, 나무 위에 스물 여섯. 최종적으로 확인한 숫자는 모두 서른 하나.
역량적인 문제는 없다. 하려고 한다면 1분 이내에 정리할 수 있다.
감정적인 거부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쨌거나 먼저 공격한 건 저쪽이니까.
오직 한가지 이유가, 그로 하여금 키드 데빌들을 함부로 죽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키드 데빌도 역시, 다른 동식물과 마찬가지로 멸종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어쩌면 이 녀석들이 이 세상 마지막의 키드 데빌일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그의 반격을 막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데이터에 의하면, 키드 데빌의 본래 서식지는 늪지대가 딸린 열대 우림. 이런 '보통의 숲'에는 없는 것이 정상이다. 그것도 한두마리라면 모를까, 암수컷이 섞인 이 정도 무리.
자신의 머리 속에 있는 데이터가 잘못됐던가, 아니면─


'서식지를 바꿔야할만큼 큰일이 있었다던가.'


물론 그런 걸 신경쓰지 않고 몰살시킨다고 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쪽은 최후의 방법이다.


한발짝.
앞으로 움직였다.


그 순간 사방에서 키드 데빌들이 달려들어, 그의 몸을 뒤덮었다.
어깨에 달라붙어 이빨로 물어뜯고, 목을 손톱으로 할퀴고, 팔을 꼬리로 휘감고, 발목을 두 손으로 감싸 짓이기려 한다.
어지간한 맹수라고 하더라도 단번에 사냥당할만큼 위협적인 공격들.


그런 공격조차,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냈다.
이빨은 검은 갑옷에 튕겨졌고, 목 피부조차 손톱의 공격을 견뎌낸다. 꼬리에 휘감긴 팔은 문제없이 움직였고, 붙잡힌 발은 전혀 거리낌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의 전신을 감싸고 있는 검은 금속의 파트 아머. 그 사이사이를 메우고 있는 검은 슈츠.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인공적으로 합성된 피부. 그것들이 키드 데빌들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원숭이들을 달고 걷기 시작한지 불과 2분. 자신들의 공격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걷기만 하는 인형(人形)에게, 키드 데빌들은 서서히 공포라는 감정을 품기 시작했다. 비록 크기는 훨씬 작았지만, 자신들의 어떤 공격에도 상처를 입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그 녀석'과 똑같았으니까.
자신들을 원래 살던 곳에서 쫓아낸 그 '괴물'과.


점차 전의가 꺾여가고, 키드 데빌들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그의 몸에서 원숭이들이 떨어져나갔다. 먹을 수도 없고, 쓰러트릴 수도 없는 상대를 계속해서 공격하는 것만큼 무의미하고 무모한 일도 드물다. 상대가 싸울 기미를 보이지 않을 때 잽싸게 빠지는 쪽이 현명하다고 판단한 결과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이 인형'이 걷고 있는 방향은 '그 녀석'이 있는 방향이다. 키드 데빌들로서는 절대로 가고 싶지 않은 곳을 향하고 있으니 떨어질 수밖에.


'체내의 아드레날린양이 심상치 않았어… 분비 패턴으로 볼 때 그들이 갖고 있던 감정은 '공포'. 그 안에는 나에 대한 것도 있었지만 그쪽은 소량.'


키드 데빌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했던 것은 자신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지금 걸어가고 있는 곳 반대방향으로 도망쳤다.


"… 이 앞에 있다는 거군. 그들을 여기까지 오게 만든 '무언가'가."


어쩌면 그것은 자신이 이런 곳에 있는 이유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키드 데빌들이 도망쳐왔을 정도이니만큼 다소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그 정돈 감수해야겠지.
그는 망설임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돌아가진 않았다. 그렇게 결심하고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하늘에서 물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느닷없이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 탓이다.
땅이 물에 젖어서 질퍽거리고, 수분이 스며들어 몸도 무거워졌다. 체력적으로는 이대로 움직이는 걸 계속해도 상관없지만, 과연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하니 걷고 싶은 마음이 점차 꺾여간다. 게다가 지금 자신의 몸을 감싸주고 있는 이 금속 아머들이 녹슬어버릴지도 모르고.


'우선 비가 그칠 때까지만이라도 있을 곳을 찾지 않으면…'


10분 정도 전에 동굴의 입구로 보이는 장소를 지나쳤던 것을 기억해내고, 발걸음을 180도 뒤로 돌린다.
비 때문에 안그래도 나빴던 지형이 더욱 나빠져서 올 때보다 시간이 더 걸렸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아까 봤던 동굴까지 돌아가는데 성공했다.


"……?"


몸을 숙여서 간신히 들어올 수 있었던 입구에 비해, 안쪽은 꽤 넓었다.
대충 재어도 수미터 이상. 이 정도라면 누워서 이리저리 뒹굴면서 쉬어도 아무 문제없다.
그러나 지금 그가 놀란 것은 동굴의 넓이 때문이 아니다.


천천히 고개를 아래쪽으로 내렸다.
커다란 천덩어리가 하나 바닥에 깔려있다. 표면 여기저기에 풀조각이 비어져나온 걸로 봐서, 안에는 마른 풀로 꽉꽉 채워놓아서 상당히 푹신할 것 같다는 것은 지금 이 상황에서 별로 중요한 게 아니고.
어딜 어떻게 보나 이것은 '인공물'이다. 그것도 그다지 오래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근처에 '지성'을 가진 무언가가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무언가'가 이 근처의 들짐승들에게 잡아먹히거나 하지 않았다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선은 좀 쉬자. 그렇게 생각하고 바닥에 깔려있는 매트 비슷한 것에 주저앉았다.


'… 그나저나…'


앉은 채로 오른손을 들어올려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대충 감을 잡았다. 제대로된 인간이라면 팔 다리에 이런 쇳덩어리를 달고 있진 않을테니까. 게다가 아까 키드 데빌들의 공격은 인간이라면 갑옷을 입었다고 해도 1분 이내에 산산히 해체당했을 정도의 물건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에겐 데미지가 없는 것이다.
전신의 갑옷과 슈츠. 눈 부분에 장착되어있는 바이저 형태의 고글. 인간이라면 귀가 있어야할 자리에 붙어있는 이어 센서. 그리고 몸 여기저기에서 확인된 각종 기계장치까지. 머리카락과 다소의 피부같은 생체가 섞여있다곤 하나, 그걸 가지고 자신을 인간이라고 판단하진 않는다.


'어딘가의 개조인간이던가, 아니면 안드로이드인가… 현재로선 그 확률이 제일 높군.'


사이보그, 혹은 안드로이드.
이만큼 '금속'과 '기계장치'로 몸이 도배되어 있는 사물은 그 이외에 없다.
거기까진 스스로 알아냈지만, 그럼에도 불안하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사이보그든 안드로이드든 누군가 자신을 만든 사람(혹은 조직)이 있을테고, 만든 목적도 있을텐데 그것이 아무리 해도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앉아있는 것조차 힘겨웠다. 보통의 기억상실증 환자가,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변함없이 초조해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아무리 조급해한다고, 기억이 돌아오진 않는다. 몇번 심호흡을 해서 초조함을 가라앉힌다.
우선은 여기서 쉬다가 비가 그치면 움직이고, 여기가 어디인지부터 확실히 파악한 다음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기로 했다.


결정을 마친 그는 몸을 완전히 매트에 눕힌 후 힘을 빼,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과 몇초도 쉬지 못하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


고개를 돌려 입구를 바라본다.
매트에 눕기 직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던 입구에, '무언가'가 있었다.


늑대.
식육목 개과에 속하는 포유류. 다른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1000년 전 「대소멸」 당시 멸종된 종족.
형태로 봤을 때는 그 종족과 가장 흡사하게 생겼다. 하지만 이'것'을 늑대로 분류하기엔 약간의 거부감이 들었다.
어두운 색의 동굴 속에서도 눈에 확 띄는 은빛 털은 논외로 치자. 문제로 삼고 싶은 건 네 발로 걷고 있는 자세인데도 어깨 높이가 1m 이상인 그 덩치다.


그 커다란 은빛 늑대는 비에 젖은 채 입구에 서서,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빨을 드러내지도, 으르렁거리지도 않고, 그저 조용히 그 푸른 눈으로.


보통의 늑대, 그것도 고작해야 1마리라면 조금 전의 키드 데빌 무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약한 존재다. 같은 숫자라면 키드 데빌 쪽이 압승이라고 할 정도니까.
그렇지만 단언할 수 있다. 눈앞에 있는 이 늑대는 아까의 키드 데빌 서른마리보다 훨씬 경계해야할 상대다.


기계와 늑대는 그렇게 잠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고,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고.
상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기 위해서.

 


결국 먼저 움직인 것은 기계 쪽이었다.

 

늑대를 보다가 한숨을 푸욱하고 내쉬어 버리고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버린 것이다.
기계를 바라보는 늑대의 눈이 커졌다. 분노라거나 그런 게 아니라, 단순히 놀란 것 같다.


하지만 기계가 그런 행동을 택한 것에도 이유는 있다.
자신은 늑대와 싸우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대치하다가 적의를 불러일으켜 버리는 쪽이 오히려 곤란하다. 그렇다면 아예, 이쪽에서는 적대할 의사가 없다고 행동으로 보이는 쪽이 낫다고 생각했다.
물론 보통 인간이 같은 짓을 했다면 단번에 늑대에게 물어뜯겨 절명했겠지만, 기계는 인간이 아니다. 설령 늑대가 어떤 힘을 갖고 있다고 해도 일격에 자신을 파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일격에 파괴되지 않는 이상은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으니까.
자신이 적의를 보이지 않는 것으로 해결되면 좋고, 저쪽에서 적의를 보이며 덤비면 그땐 그때 가서 대처하면 된다. 기계의 힘과 속도라면 그렇게 해도 늦지 않는다. 그 생각의 결과로, 늑대에게서 눈을 돌렸다.


몸을 옆으로 틀어서 자리를 옮긴다. 그것만으로 지금까지 기계가 혼자 차지하고 있던 매트의 절반 정도가 비었다.
그리고는 매트의 비어있는 곳을 손으로 가볍게 팡팡 두드렸다.


늑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쪽을 보다가, 고개를 아래로 내리고 깊은 호흡을 토해냈다. … 어쩐지 한숨을 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까.
어쨌든 그 후 늑대는 몸을 몇차례 부르르 떨면서 흔들어, 몸에 붙어있는 물방울들을 털어냈다. 그리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매트 쪽으로 다가와, 기계의 반대쪽으로 돌아간다.


─털썩.


이윽고 늑대는 매트 위에 몸을 던져 누웠다. 기계 쪽에는 등을 보인 채로.
마치 "있던가 없던가 신경 안 써"라는 듯한 태도. 적의를 보내지 않는 건 고맙지만, 야생 동물이 여기까지 '인간형의 존재'를 경계하지 않는 것도 생각해볼 문제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문득 깨달았다.


'누군가'가 손질해놓은 흔적이 있는 동굴과, 역시 '누군가'가 만들어다 가져다놓았을 이 매트. 그리고 그런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고 있는 늑대. 이상한 점을 꼽자면 한도 끝도 없다. 설마하니 사람에게 길들여진 적이 있는 늑대인가 했지만, 늑대라는 동물의 본성으로 미루어볼 때 그럴 확률은 낮다.


……
……
…… 아무렴 어때.
자기 앞가림도 힘든 이 상황에서, 생판 모르는 늑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고찰까지 할만큼 사고의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계는 다시 몸을 매트에 눕혔다. 단, 늑대에게 닿지 않도록 매트의 한쪽 구석 자리만을 차지하고. 아무리 큰 매트라고 해도, 사람 사이즈의 기계와 커다란 늑대가 함께 눕기엔 비좁아보였다. 실제로 늑대는 중앙과 우측을 혼자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기계에게 돌아오는 자리는 왼쪽 끄트머리 뿐. 그러나 불법침입자는 자신이니까 이것은 감수하는 수밖에 없다.


늑대가 자신에게 등을 돌린 것처럼 기계도 늑대에게서 등을 돌려, 우측을 바라보는 형태로 누웠다. 한순간 기계인 자신이 잠들 수 있을까 하고 걱정했지만, 머리 속에서 타이머 첨부의 휴면 기능 항목이 떠오른다.


지금부터 아무 일이 없다면 정확히 3시간 후에 깨어나도록, 외부에서 충격이 전해질 경우엔 그 이전이라도 일어날 수 있도록 조절한 후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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