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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와 짐승과 마을 이야기


8화



하늘이 보였다.
기록된 영상이나 사진으로 보는 것이 아닌 '진짜 하늘'이.
언제나 보던 흑보라색의 볼텍스로 가득한 하늘이 아니라, 이제 막 석양이 지고 있는 주황빛의 '진짜 하늘'.


그것이 자신의 심경에 무엇인가 영향을 끼쳤냐고 묻는다면, 전혀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애초에 '심경'이라는 것은 자아를 지니고 있는 고등 지적 생명체에게 존재하는 것. 생명체조차 아닌 자신에게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져야할 것은 임무에 대한 인식과 그 임무를 위해 필요한 능력. 그 뿐이다.


─이번의 임무도 그럴 터였다.

 


거대한 강철덩어리가 움직였다.
얼핏봐도 신장 3m 이상. 지금으로부터 약 천년 전의 시대에 존재했던 기사들이 사용한 풀 플레이트 아머와 같은 모습. 말그대로, ​'​철​덩​어​리​'​라​고​밖​엔​ 표현할 수 없었다.
이것은 기억에 있다. 「타입G」의 골리앗. 시리즈 중에서는 초기형에 해당하지만 높은 파워와 방어력, 그리고 기동성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거구에 비해 결코 느리지 않은 스피드로 움직이며, 주먹을 휘두른다. 아래에서 위로 스윙. 단순한 동작이었지만, 그 안에 실린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한번의 동작만으로 일어난 충격파가 주변의 모든 것을 쓸어버린다. 그것이 무기가 됐든 갑옷이 됐든 사이보그 솔져의 잔해가 됐든.


하지만 맞지 않는다. 아무리 주먹을 날리고 발을 휘둘러도 맞지 않는다.
아무리 강력한 위력을 담고 있는 공격이라도, 맞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비록 그 자체만으로도 암석을 때려부술 수 있는 막강한 충격파를 동반하고 있다고 해도, 상대는 그 충격파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공중에서부터 푸른 빛의 반월들이 폭우처럼 쏟아진다. 골리앗은 몸을 굽히고 바닥에 손을 집어넣어, 지금까지 발판이 되고 있던 금속판을 뜯어내 방패처럼 위로 들어올렸다.
본래는 스페이스 셔틀용으로 개발되었던만큼 그 강도는 발군. 그런 장갑판조차 진흙처럼 잘라버리며, 반월들은 골리앗의 몸에 부딪혔다.
아니, '부딪혔다'는 표현은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골리앗의 갑옷마저도 닿자마자 잘려나갔으니까.
신체의 내구력이라면 시리즈에서 제일이라고 칭해도 좋을 골리앗이 산산조각나 흩어졌다.

 


불꽃이 흩어진다.
전신을 붉은 장갑으로 감싸고 있고, 거기에 더해 불꽃까지 두르고 있는 안드로이드가 불을 뿜어낸다. 비록 이쪽은 인간 사이즈지만, 몸에서 일으킨 불꽃을 마음대로 조종하여 강렬한 화염폭풍을 일으켜 눈앞의 적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쪽도 기억에 있다. 「타입F」의 파이로스. 넘버로는 초기지만, 후기형들보다도 늦게 조정이 끝난 상급 시리즈.


3천도에 달하는 화염을 만들어내고 자유자재로 제어하는만큼 그 공격력은 시리즈 중에서도 최상위. 지금 그가 일으키고 있는 불꽃의 회오리 역시 그의 특기 중 하나로, 지금까지 무수한 연방의 적들을 불태우고 녹이고 제거해온 힘이다.


─그 화염폭풍의 제어권을, 빼앗겼다.
그의 조종에 따라야할 불꽃이 그의 손에서 벗어나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멋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파이로스가 상대하고 있는 '적'의 조종에 따르고 있는 거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크게 차이가 없다.


불꽃을 빼앗긴다. 빼앗긴 불꽃이 공중에서 입을 만들어내 킬킬거린다. 그 후에는 마치 수백마리의 뱀이 움직이는 것처럼 갈라져, 파이로스를 둘러싼다.
불의 뱀들이 혀를 날름거리다가 일제히 달려든다. 정면에서, 뒤에서, 오른쪽에서, 왼쪽에서, 위에서, 아래에서, 대각선에서. 전후좌우 360도의 모든 각도에서 한꺼번에 덤벼, 파이로스를 물어뜯는다.
본래부터 내열성이 지극히 높은 파이로스의 갑옷은 자신이 만든 불꽃이라고 해도 타격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다르다.
파이로스가 만든 불꽃은 이미, 파이로스가 만들어냈을 때보다 월등히 온도가 올라가있었다. 바로 컨트롤을 빼앗은 적에 의해서.
그 불꽃의 뱀들이 파이로스를 물어뜯어 구멍을 낸다. 그리고는 파이로스를 중심에 놓고 엄청난 기세로 회전하여, 불꽃의 '돔'을 만들어냈다.


그 돔 속의 공기가 가열되어, 한도 끝도 없이 온도가 올라간다.
아무리 파이로스가 불꽃에 오래 견딜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장 장갑의 이야기. 방금 뚫린 구멍으로 인해 몸 속 내부에까지 열기가 들어간 이상, AI가 타버릴 것이라는 건 뻔한 이야기다.


그렇게 수십분이 흐르고.
몸 속에서부터 녹아내린 파이로스는 바닥에 쓰러졌다.

 


푸른 색의 빛이 바람을 가른다.
등의 양쪽에 붙어있는 >형의 부스터와 <형의 부스터가 청백색의 빛을 분사한다. 앞의 둘이 '파워 제일'과 '공격력 제일'이라면, 이쪽은 '스피드 제일'. 잔상조차 따라가지 못하는 스피드로 적을 중앙에 놓고 그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다.
「타입M」의 마하. 그 이름처럼 음속을 넘어서는 스피드로 움직일 수 있으며, 쌍검을 사용하는 뛰어난 검술사이기도 하다.


원진을 그리며 움직인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두 검을 움직여 진공파를 만들어 날린다. 목표는 그 원진의 한가운데에 있는 적. 진공파만 날리는 것이 아니라, 그 스피드를 이용하여 직접 다가가 검을 휘둘러 베어가르기도 한다. 한번이 아니고 몇번이나.


그 모든 공격들이 통하지 않는다.
진공파들은 적의 방어를 뚫지 못해 흩어져버리고, 검은 튕겨져나온다. 그로 인해 여기저기에 이빨이 빠져버렸다.
적의 방어력은 견고. 그 수준은 골리앗의 장갑을 훨씬 능가한다. 분명 마하의 스피드는 두말할 것없이 최고위지만, 그만큼 장갑이 얇고 파워가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본래부터 암살용으로 개발되었기에 움직임에 방해가 되는 장갑을 최대한 제거한 결과였다.


아무리 진공파를 날리고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쓰러트려야할 적에게는 어떠한 타격도 줄 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이 적을 이곳에 붙들어두고 있는 것 뿐.


하지만 그것도 곧 끝을 맞이했다.
지금까지 마하의 공격을 받아내고만 있던 적이 방어를 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마하는 최대로 가속하여 달려들었다.
마하의 검이 적의 목에 닿은 것은, 적이 손을 약간 움직였을 정도의 시간. 단 0.1초라도 더 있다면, 적의 목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의 검이 더 움직이기 전에.


적에게서 뿜어져나온 칠흑의 '빛'이, 마하를 깨끗이 지워없앴다.

 


그들만이 아니다. 「타입B」도 「타입H」도 「타입J」도 「타입Y」도.
한 사람, 두 사람. 저 '붉고 푸르고 검은' 적들에게 파괴당해갔다.


남아있는 것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하얀' 적과 싸우고 있는 자신 뿐.
오직 자신만이, '하얀' 적과 대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이번 임무를 위해서 파견된, 자신을 포함한 26명의 '시리즈'. 하지만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스물 다섯은 모두 파괴됐다.


'하얀' 적이 팔을 휘두른다. 그 팔에서부터 뻗어나온 녹색의 빛이 하늘을 꿰뚫고, 자신을 향해 떨어져내린다.
오른팔의 검은 철을 들어올려 그 녹색의 빛 기둥을 받아낸다. 검은 철에 튕겨진 녹색 빛은 옆으로 흘러내려 바닥을 쪼갰다.
그 틈을 타 돌진. 조금 전 공격을 막아낸 검은 철을 앞세워 달렸다.


검은 철을 휘두르자, '하얀' 적은 두 팔을 교차시켜 그것을 막아낸다. 검은 철과 '하얀' 적의 두 팔이 부딪히고, 적을 밀어낸다.
─하지만 '하얀' 적은 단지 밀려나기만 할 뿐, 이제까지의 다른 적들처럼 분쇄되지도 날려가지도 않았다.
밀려나기를 수미터. 결국 '하얀' 적은 돌진을 막아냈고,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기 위한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검은 철의 끝에 생겨난 칼날과 '하얀' 적의 손톱이 부딪힌다.
어느 쪽도 물러나지 않고, 불꽃이 튀어오른다. '하얀' 적의 손톱에서 뿜어져나온 백색의 빛과 검은 철에서 뿜어져나오는 흑색의 빛이 서로를 집어삼켜가며 크기를 키워간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칠흑의 사신과 하얀 호랑이. 두 괴물이 서로를 베고, 서로를 물어뜯는다.


그리고 얼마 후 사신의 낫과 호랑이의 발톱이 동시에 깨져나간다.
백색과 흑색이 섞여 주변을 차단했을 때,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으로 몸을 날리며 무기를 휘두른다.


검은 철의 광검은 호랑이의 목을 가르고, 하얀 적의 손톱은 사신의 머리를 가른다.
호랑이는 목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지고, 사신은 헬멧이 부서진 채 갑판 밖으로 날려가 추락했다.


아래로, 아래로.


─까마득한 아래 쪽에 있는 수해樹海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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