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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와 짐승과 마을 이야기


15화



조금, 오래된 이야기를 해볼까요.

 


지금으로부터 약 천년 전.
이 세상에는, 수많은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나라들은 오랜 세월 동안, 서로를 공격하여 피를 흘리며 싸워왔습니다.
처음 싸움을 시작한 이유는 그야말로 시시한 것이었습니다만, 그것이 수백년동안 지속되면서 원래 이유는 잊혀지고, 오직 원한과 증오와 분노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 오래된 원한을 단절시키는 것이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
나라끼리의 전쟁을 멈춘 것은, 거대한 ​「​폭​력​」​이​었​습​니​다​.​


산맥이 움직이고, 땅이 일어나고, 바다가 포효하며, 하늘이 내려오는.
그런,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던 거대하고도 절대적인 「폭력」.
두 나라는 그 폭력을 막기 위해 처음으로 힘을 합치게 되었습니다만, 그들이 자랑하던 강철의 기사들도 마법사들의 마법도, 그들의 앞에 나타난 절대적인 「폭력」의 앞에서는 무의미. 연합의 군대는 불과 이틀만에 괴멸되었고, 수많은 나라들이 하루 안에 모습을 감추게 되었습니다.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인간들조차 이 지경일진대, 「폭력」의 힘은 다른 종족들이라고 해서 피해가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저항할 수도 없는 작은 동식물들은 물론이고, 수는 적어도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고 하는 '인간 이외의 인류'들에게도, 「폭력」은 그 힘을 휘둘렀습니다.
숲의 엘프들은 정령들과 함께 짓밟혔고, 산의 드워프는 자랑하는 초병기들과 함께 무너졌습니다. 초원의 수인들은 도망치지도 못한채 뭉개졌고, 동굴의 오크들은 동굴 채로 생매장. 계곡의 거인족들은 머리 위에서부터 짓눌려졌으며 날개족들은 그 날개를 찢겨져 추락했습니다.
「폭력」은 문자 그대로 이 세상에서 모든 '생명'들을 지워나가기 시작했으며, 산을 깎고 숲을 태우고 호수를 말리며 강을 없앴습니다. 「폭력」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고 생명력마저 빼앗겨버린 사막 뿐.


「폭력」이 움직이기 시작한 후부터, 최후까지 저항했던 드래곤 왕의 목이 꺾여질 때까지 7일.
이 7일 동안의 지옥을, 훗날의 인간들은 「대소멸」이라고 칭했습니다.


그 악몽의 7일이 지나가는 동안, 수많은 종족들이 자존심을 위하여 자신들의 고향을 지키기 위해 저항하다가 사라져갔고, 그 후 이 땅에 살아남은 이들은 고향을 버리고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던, 불과 한줌도 되지 않은 인간들과 본능적으로 「폭력」에게서 도망친 소수의 ​괴​수​들​뿐​이​었​습​니​다​.​


프라이드를 지켰기 때문에, 고향과 함께 멸종한 수많은 생명들.
프라이드를 버렸기 때문에, 목숨을 건지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극히 일부의 생명들.
그 얼마 남지 않은 생명들마저 지우기 위해, 「폭력」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이른바, '기적'이라고 불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전까지 이 세상에 소수만이 존재했을 뿐인, 「이상 진화 재해 생물」. 거기서 한층 더 진화해버린 두 괴수가, 「폭력」의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훗날, 「투신 갓슬레이어」라고 일컬어지게 되는 킹 나이트울프 펜릴.
또 훗날, 「하늘의 황제」로 군림하게 되는 드라고 피닉스 지크프리트.
두 마리의 괴수… 아니, 초수(超獸)는 곧바로 「폭력」에게 달려들어, 새로운 신화로 자리잡게 될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움직이는 산맥을 때려눕히고, 일어나려는 땅을 밟아멈추고, 포효하는 바다를 둘로 쪼개며, 내려오려는 하늘을 다시 쳐올리는 싸움.
백은색의 거대한 늑대 인간과, 아홉장으로 된 불꽃 날개의 드래곤은 일곱 가지의 「폭력」에 맞서서 싸웠습니다.
이 싸움의 중간에 펜릴의 검이 대륙을 둘로 절단하여, 그것이 훗날의 「제국」과 「연방」을 구분하는 국경이 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
결국 「폭력」은 펜릴의 검과 지크프리트의 뇌염(雷炎)에 의해 사그라졌고, 두 초수에 의해 세상은 지켜졌습니다.


하지만 모든 종류의 동물과 식물이 멸종하고, 어느 정도의 수를 갖추고 살아남은 것은 오직 인간 뿐. 「폭력」에 의해 생명을 빼앗겨버린 대지는 더이상 작물을 키우지 못했고, 그런 상황에 내던져진 인간들은 필사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살아남은 인간들이 수를 늘리고, 그 와중에 초능력자들이 태어나고, 인공 식품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하고, 「제국」을 건설하고, 사람들을 규합했습니다.
그 후 제국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절단되어 생겨난 동쪽으로 넘어갔고, 그곳에서「연방」을 만들어 제국과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폭력」이 나타나기 이전의.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난장판'과 다를 바 없이.


“죽어라 싸워서 구해놓은 보람도 없는 놈들같으니.”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갓슬레이어 펜릴은 그 한마디만을 남긴 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혼자 남게 된 지크프리트는 천년에 달하는 세월동안 세계의 하늘을 돌아다니며 인간들에게 조언을 하거나 시련을 내리거나 하면서 그들을 올바른 길로 돌리기 위해 노력했었습니다만, 결국 제국과 연방이 페이탈 프라이멀 입자마저 이용한 실험을 시작하자 한탄하며 어디론가 떠나버렸습니다.


두 마리의 초수가 사라져도, 인간들이 하는 일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서로 싸우고, 여전히 서로 공격하고, 여전히 공격당하고.
상대를 쓰러트리기 위해, 더욱더 힘을 원하고.


더욱더, 지금보다 더욱더 큰 힘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이 땅의 영역 중 가장 잔혹하고, 가장 무자비하며, 가장 험난한 땅인 「설원」 지역.
평균 영하 60도의 냉기로 감싸여져있는 이 땅은 그 어떤 '인류'족도 살 수 없는 극한의 지옥이다. 아무런 방비 없이 들어왔다간 거인족조차 얼어죽어버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단번에 날려가버리는 풍속 30m/s 이상의 강풍은 날개족의 접근마저 거부했다. 그 강풍에 실려 날아오는 눈조차 얼어서 만들어진 얼음 조각들은 이미 산탄총과 마찬가지.
여기에 시도 때도 없이 몰아치는 눈보라와 우박, 그리고 기후의 급격한 변화는, 지금까지 이곳을 지나려했던 수많은 마을의 모험가들을 매장시켰다.


─그러나, 이 땅에도 살아남은 존재들은 있다.
추위를 견뎌내고, 강풍을 견뎌내고, 얼음의 산탄을 막아내며, 기후의 변화에마저 적응해낸.
그런 강인하고 끈질긴 적응력을 지닌 생물만이 간신히 살아가는 것이 허락된 잔인한 세계인 것이다.


여기에, 두 종류의 맹수들이 있다.
하나는 이 설원에서 가장 넓은 서식 범위를 가지고 있는 백은빛 모피의 맹수왕, 「혼타이거」.
다른 하나는, 이 설원 전체를 통틀어서도 특히 거대한 몸집을 지닌 종족인 「아이보리베어」.
이 둘은 지금 먹이를 둘러싸고 대치하고 있었는데, 디어타이거가 잡은 또다른 맹수인 「빅팽 세일」을 아이보리베어가 빼앗기 위해 싸움을 걸어온 것이다.
혼타이거의 머리에 있는 커다란 뿔과, 아이보리베어의 어깨에 돌출되어 나온 상아와 같은 외골격이 금방이라도 서로를 찌를 듯이 빛을 발했다.

 


​─​■​■​■​■​■​■​■​■​!​!​

 


마치 이 설원 전체를 뒤흔드는 듯한 길고, 거대한 포효.
그것이 들리자마자, 혼타이거도 아이보리베어도 먹이를 두고 몸을 돌려 전속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 설원의 땅에서 사는 맹수라면, 이 소리를 모를 리 없다.


이 설원의 땅을 지배하는 '주인'.
저 사납고 야만적이며 겁이 없고 지능이 낮은 맹수들조차, 본능적으로 공포와 외경을 품고 있는 '첫번째 주인'.


극한지옥의 왕, 스노우 드래곤 브류나크.


자신의 영역을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다른 '주인'들과 달리, 브류나크는 자신의 영지에서 결코 움직이지 않았다.
설원 지역 한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빙산의 집합체. "악마의 턱"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단 하나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맹수도 살고 있지 않았다.
물론 그 하나란 브류나크를 뜻한다. 아무리 겁이 없는 맹수라고 해도, 설원의 '주인'이 살고 있는 이 근처에서 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빙산과 빙산이 겹쳐져 만들어진 동굴. 그 속에서, 눈의 용은 포효하고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울부짖고 있었을까. 브류나크는 포효를 멈추고, 얼음 동굴의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은 앞을 보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욱더 먼 곳을 보고있기도 했다.
저 멀리, 저 먼 곳을.


지금 이 땅에서 가장 시끄러운, '산'의 주인 다크 우드가 있는 곳을.


[… 결국 너희들의 말대로다. 펜릴, 지크.]


브류나크는 얼음이 섞인 숨을 토해내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은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드래곤'과는 그 형태가 조금 달랐다.
날개를 달고 있을 뿐 완벽한 파충류의 형태를 하고 있는 보통의 드래곤과는 달리, '앞발과 뒷발'이 아닌 '팔과 다리'라고 불러야할 정도로 인간형에 가까운 모습. 그리고 무엇보다도, 드래곤이라면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들이 그에게는 여러가지 붙어있었다.


─카랑, 카랑, 카랑, 카랑, 카랑, 카랑, 카랑, 카랑, 카랑.


금속과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브류나크는 두 발로 걸어 동굴 입구까지 나아갔다.
바깥에는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지만, 브류나크가 손을 휘젓자 그와 입구의 주변만을 눈보라가 피해가기 시작했다.
브류나크는 그 상태로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개인 적이 없는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
그 속에서 그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우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언젠가, 힘을 원하는 인간들이 이곳까지 올지도 모른다.”


우려섞인 친구들의 말에, 자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때를 위해서 자신이 이곳에 있는 거라고.


그리고, 그때 친구들이 했던 이야기대로.
마침내 이 땅에, '인간'이 찾아왔다.
… 물론 그냥 '인간'이라고 부르기엔 좀 많이 동떨어진 녀석들이지만.


브류나크는 이미 알고 있었다.
기계가 속해있던 연방의 A넘버즈와, 제국의 사성수가 이 땅의 초입 부분에서 전투를 치른 것.
그 싸움 끝에 A넘버즈가 전멸하고, 단 하나만이 살아남아 땅으로 떨어졌다는 것.
그 싸움에서 승리한 사성수도, 심각한 부상으로 '조정' 중에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에 의해 자신과 다크 우드를 제외한 모든 주인들이 쓰러졌다는 것까지.


이 동굴에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브류나크는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힘 중 하나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오직 친구들에게 부탁받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여기까지 올 거라고는. 인간이란 도대체 어디까지 가늠하기 힘든 생물인건가.]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인간'이란, 작고 연약하고 겁과 욕망이 많았지만 한번 달리기 시작하면 멈출줄 모르는 생물이었다.
과거, 인간들이 마력을 지니고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던 시절에도 그랬다.
수많은 인류족 중 가장 약했지만 가장 번성했으며, 그리고 지금 또다시 힘을 키워 이곳까지 도달한 종족.


[허나, 이곳까지 찾아온 인간들이여. 너희들이 얼마나 힘을 원하면서 여기까지 찾아왔는지는 내가 알 바 아니지만, 이곳의 힘을 그렇게 쉽게 가져갈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마라.]


그들은 여기에 있는 '힘'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아니, 설령 어떤 것인지 알고 찾아온 것이라고 해도, 넘겨줄 생각따윈 없지만.


지금까지 5체의 주인들을 쓰러트리고.
이번에 다크 우드마저 무너뜨려, 6개의 '열쇠'를 가지게 된다고 해도 그들이 원하는 '힘'은 얻을 수 없다.
'열쇠'는 7개가 전부 모여야 의미가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금속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에 필요한 마지막 일곱번째 열쇠는 브류나크가 지니고 있다.
결국 그들은 어떻게 하든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브류나크와 대면하지 않으면 안된다.


['괴수의 힘을 가진 인간들'. 아니면 '마음을 원하게 된 기계'. 나로선 어느 쪽이 도착하든 흥미롭지만.]


브류나크는 지금 막 다크 우드의 영역에 도착한 세 사람을 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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