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이 앞에 있는 전장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무리 그라고 해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푸른 유성의 용사」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역전의 영웅인 그조차, 이 앞만큼은 각오가 필요하다. 어떤 의미, 마그마 드래곤과 근접전으로 대적했던 것 이상의 각오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결코 소리를 내지 않고, 일련의 동작들을 행하여 마음을 진정시킨다.
머리는 냉정하게, 그러나 어디까지나 투지는 잊지 않도록.
문제없다. 할 수 있다.
이런 걸로는 자랑할 생각은 없지만, 싸우는 것에는 자신있다. 이래뵈도 세계를 구한 적도 몇번이나 되니까.
칭찬인지 욕인지 헷갈리지만, 그의 친우는 "넌 느려터졌지만, 사고가 터진 후의 폭발력만은 차원이 다르니까."라고도 말해주었다. … 지금에 와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욕인 것 같기도 하고.
분명 이 앞에 있는 것은, 유례가 없는 강적이다.
마그마 드래곤은 물론, 저 시그마나 루시퍼(완전체) 이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피해갈 수는 없다. 피해서도 안되고, 피할 생각도 없다(비록 대단히 주저하는 중이긴 해도).
발을 한 걸음 내딛는다.
이 앞은 틀림없는 「용의 소굴」.
그러나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미래를 향해 걸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지 않으면 안되는 길이다.
각오를 굳히자.
인류를 멸망시키려 했던 시그마의 앞에 섰을 때처럼.
레플리로이드를 멸망시키려 했던 루시퍼의 앞에 섰을 때처럼.
'요즘, 머리카락 빠지지 않았어?'라는 말을 듣고 조용히 검을 뽑아들던 제로를 말리기 위해 뛰어들었을 때처럼.
엑스는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귀신이 버티고 있었다.
"그래서… 와 이래 느젓노?"
하야테는 실로 무시무시하게 웃는 얼굴로, 엑스를 향해 물었다.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각오할 시간이 더 필요했어요. 가능하면 24시간 정도.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면, 지금 당장 1분 전으로 돌아가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는 자신을 때려눕힌 후 어딘가에 가둬두고 싶다. 가둘 수 있는 곳이 있을지 의문이지만, 하야테와 계속 마주하고 있자니 1분 전의 자신따윈 가볍게 때려눕힐 수 있을 것 같다. 그 정도로, 지금의 하야테는 무서웠다.
"아니, 여기에는 바다보다 깊고 산보다도 높은 이유가─"
"그니까 그 이유란게 뭐고, 대체."
하야테는 결코,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고 험한 단어를 쓰지도 않았다. 목소리의 톤도 말투도, 어디까지나 평소와 똑같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렇게까지 등골이 오싹한걸까.
… 물론 이유는 알고 있다. 이렇게 보여도 하야테, 무지무지하게 화내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책임감을 느끼고 여기 서있는거지 그러지 않았다면 진작에 뒤돌아서서 도망쳤을 것이다.
자 그럼 이젠 어떻게 할까.
엑스는 지금 굉장히 고민하고 있었다. 지금 그의 머리와 가슴 속에서는 "하야테에게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아."라는 심정과, "하야테를 위험에 빠트리게 할 순 없어."라는 이성 사이에서 맹렬한 줄다리기가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최근 수십년간 처음으로 받아본 순수한 "호의". 그것을 아낌없이 보내주는 소녀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내킬 리 없다. 그 이전에, 엑스 자신이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고(어지간히 삐뚤어지지 않고서야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만은). 그러나 만약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이 사람좋은 소녀는 틀림없이 자신의 일에 끼어들 것이다. 그렇게 되서야 본말전도다.
최선이 안된다면, 차선이다. 엑스는 머리속에서 이야기를 꾸미기 시작했다.
심부름을 하고 돌아오던 중 납치를 당한 소녀를 만났기에 그녀를 구해주었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비록 자신이 도착했을 때 범인들은 이미 모조리 뻗어있는 상태였다고 해도 아리사가 납치를 당했던 건 사실이고, 결과론이지만 그녀를 구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단지 거기서 "마그마 드래곤"이라는 고유명사가 빠졌을 뿐이다. 마그마 드래곤에겐 아리사에게 해를 끼칠 의사가 없었기에 '구했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렴 어때.
즉, 단어 하나가 빠졌을 뿐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닌" 것이다!
하야테가 이유에 대해 묻고나서 여기까지, 0.1초.
질문을 받자마자 '눈깜짝할 사이'에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해냈다. 지난번 "나는 아르카디아로 돌아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0.1초만에 부정적인 대답만 20개 이상 내놓았을 때는 욕을 잔뜩 했지만, 이럴 때만큼은 도움이 됐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엑스는 어디까지나 평소와 다름없는 어조와 음량으로 준비가 끝난 이야기를 시작했다. 물론 아리사의 이름은 거론하지 않았다.
하야테는 조용히, 그것을 끝까지 들었다. 그리고는
"거짓말이네."
─단번에 들통났다.
"뭐…!"
"아니, 엑스 군의 성격으로 봐서 완전 거짓말은 아닐거고. 꽤~나~ 당당했던 걸로 봐서 한 95%는 진짜일까나. 이쯤되면 거짓말이라기 보다 뭔가 중요 단어 몇개를 뺐다는 느낌인데…"
예리하다.
예리해도 너무 예리하다.
어째서?! 어째서?! 표정 관리도 말투 관리도 제대로 했는데?!
혼란에 빠진 엑스를 보며 하야테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이 알아차린 이유를 이야기해주었다.
"표정이랑 말투, 관리를 너무 제대로 했데이. 무슨 이유가 있건간에 엑스 군이라면 이렇게 늦었을 때 사과부터할 거 아이가."
… 그랬다. 되새겨보니 그답지 않게 '너무' 태연했다.
엑스는 침음성을 흘리며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이제 이 일을 어쩔까나.
그런 엑스의 모습을 지켜보던 하야테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용서해줄수밖에 없을까.
'엑스 군이니까, 그런 일에 끼어드는 건 어쩔 수 없을거고. 뭘 숨기고 있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뭐.'
응, 응 하고 하야테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정작 당사자인 엑스는 하야테가 마치 자신의 처벌을 결정한 것 같은 리액션으로 받아들여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었지만.
… 그렇지. 마침 좋은 생각이 났다. 하야테는 (엑스의 입장에선)불길하기 짝이 없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그거는?"
"… 응?"
"사오라 한 거. 가져왔제?"
"… 아아."
사실대로 말하자면 깜빡하고 두고 온 자리에 그냥 놔둬버릴 뻔 했다. 그것을 기억해내고 황급히 돌아가, 그것이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는 얼마나 안도했던가.
… 메이드복과 고딕드레스와 네코미미 디자인의 장신구를 누가 가져갈까 하는 의문은 일단 넘겨두기로 하자.
"그런데, 이건 어디에 쓸 거야?"
"아, 나중에. 좋은 데에."
"… 좋은 데?"
"응. 좋☆은☆데☆"
불필요하게 눈을 반짝이며, 하야테는 웃었다.
물론 이 당시의 엑스가, 지금 하야테에게 건네준 옷들이 자신에게로 되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알 리는 없었다.
IRREGULAR HUNTER - X
7화
마그마 드래곤과 조우하고, 1개월.
그 뒤 이렇다 할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그마 드래곤도 아직까지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의 외형으로 봐서 이곳저곳 돌아다녔다면 금새 걸렸을 터. 그렇지 않다는 건 어딘가에 숨어서 아예 나오지 않고 있던가… 자신처럼, 인간의 모습으로 의태하는 것이 가능하던가. 둘 중의 하나다.
물론 100년 전의 구식 레플리로이드에게 그런 기능이 있을리 만무. 전자라고 생각되지만, 그 푸른 보석이라는 물건이 마그마 드래곤에게 어느 정도나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없는 이상 속단은 금물이다.
아무튼, 마그마 드래곤쪽에서 소동을 일으키지 않는 이상 그쪽에서 나타나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 수 없다.
'이대로 조용히 살아준다면, 그게 가장 좋겠지만…'
마지막에 했던 선언도 그렇고, 그럴 일은 없다고 보는 게 좋을 것이다.
하다못해 하야테나 다른 사람들에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덤볐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엑스는 고개를 돌렸다.
지금 엑스가 있는 곳은 하야테의 집이 아니다. 거기에, 병원도 아니다.
지금 하야테는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 있는 중이며, 그게 끝날 때까지 앞으로 2시간은 걸린다.
그럼 엑스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 역시 먼저 와 있었나."
"아, 왔다!"
고개를 돌린 방향에서 아는 얼굴을 발견하고 중얼거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그쪽 방향에서, 명랑한 소리가 들려왔다.
─1개월 전.
"우선은, 고맙다고 해둘게. 덕분에 살았어."
소녀는 당당했다. 그것도 엄청나게. 좀전까지 사람 소매를 붙들고 그 박력을 뿜어낸 소녀와 동일인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리사의 휴대폰은 납치범들에 의해 부서져버린 상태였지만, 엑스는 그 파편을 회수해 아리사의 눈앞에서 원상복구시키는 일을 해냈다. 아리사가 놀라던가 말던가, 전혀 신경쓰지 않은 채로. 어차피 아리사는 자신과 마그마 드래곤의 싸움이라는… 이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광경과 접한 다음이다. 따로 숨길 필요도 없고, 시간도 촉박하고 해서 그냥 그 자리에서 복구시켰다.
그리고는 경찰에 연결, 납치범들을 인계. 여기서 경찰들에게 이야기하기로, 납치범들끼리 의견충돌이 있어 서로 싸웠고 그 결과 알아서 전멸. 묶여있던 그녀를 우연히 지나가던 소년(엑스)이 구했다… 라는 시나리오다.
피해자인 아리사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고, 또한 기절한 납치범들의 몸에는 서로를 쏜 것처럼 보이는 탄환이 박혀있었기에(사실은 마그마 드래곤을 쐈다가 튕겨져나온 걸 맞은 것 뿐이지만) 경찰들은 납득했고, 그 이후 이런저런 사정청취를 한 후 풀려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약 2시간.
까놓고 말해서 지금의 엑스에게 아리사의 이야기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지금 엑스의 머리 속을 점령하고 있는 생각은 오직 한 가지.
'하야테한테, 뭐라고 변명하지?'
나올 때는 오후 5시. 지금 시각은 저녁 7시. 더할 나위없는 타임 오버다.
화났으면 어떡하지? 화났을까? 화났겠지? 아니, 하야테니까 사정을 제대로 이야기하면 용서해줄 거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면 무조건 용서를 빌고… 그러고보니 심부름한 거 어쨌지?
"솔직히 혼자서도 괜찮았을거라고 생각하지만 일단─"
'공원인가? 아냐. 오늘은 거기 가지도 않았어.'
"…… 저기."
'역시 백화점 앞을 지나올 때일까. … 아니, 그때까진 들고 있었어.'
"……"
'고딕 패션점 때도 있었고… 메이드점 때도 있었는데…'
"…… 야."
"… 역시 반응 체크 때구나. 그때 내가 있던 장소가─"
"야!!"
느닷없이 귀 옆에서 일갈.
그 직후, 까앙하는 소리가 아래 쪽에서 들려왔다.
뭔가해서 고개를 돌려보니, 예의 그 소녀가 발끝으로 자신의 정강이를 걷어찬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사람이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 도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 게… 하고… 있…"
어흥, 하고 기세좋게 소리치던 소녀의 목소리를 갈수록 작아졌고, 점차 표정도 일그러져갔다.
그리고는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몸을 숙이더니, 두 작은 손으로 발끝을 붙잡고─ 그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미세하게 떨고 있는 것 같기도(특히 발 근처가).
'… 있는 힘껏 차니까 그렇지.'
그것을 본 엑스는 작게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아무리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엑스는 인간이 아니다. 앞뒤 복잡한 말들 생략하고 간단히 말하자면 문자 그대로 '철덩어리'. 또래 아이들하곤 비교도 안될만큼 날카롭다곤 해도 결국 아리사의 발차기 정돈 '무시'해버려도 상관없다. 무언가가 부딪혔다는 '느낌'은 있지만, 통증을 느낄 정도는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 아리사의 행위는 발로 있는 힘껏 전봇대를 걷어찬 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은 짓이라는 이야기.
한참동안 주저앉은 채 부들부들 떨던 아리사는 어거지로 고개를 들어올린다. 엑스를 찼던 발은 여전히 손으로 주므르고 있었지만.
"… 괜찮은거야?
"… 사과안할거야. 난 잘못한 거 없는걸."
"아니, 나보단 네가 더 아픈 것 같으니까 딱히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무엇보다, 사과를 받을 생각도 없다.
"그리고 감사 인사라면 됐어. 딱히 내가 오지 않았어도 문제는 없었을 것 같던데."
마그마 드래곤에게 그녀를 해칠 의사같은 건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라면 자신이 아니라 마그마 드래곤에게 해야한다.
그런 의미를 담아서 이야기했지만, 아리사는 한숨을 푸욱하고 내쉬었다.
"아니, 나도 그건 알지만 말야… 그 녀석 사라져버렸잖아. 인사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고. 그러니까 너한테 대신 하는건데."
"…… 눈앞에서 열심히 치고받는 거 봐놓고?"
감사 인사를 대신 받을 정도로 친한 사이는 절대로 아니다. 100년 전, 그것도 시그마 사태가 일어나기 전이라면 상관없었을 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나중에 만날거잖아?"
"그건─"
"만났을 때 전해주면 되잖아."
분명 마그마 드래곤과는 다시 만나긴 만나겠지만, 그때는 서로 죽이기 위해서일 것이다. 한번으로 끝날지 어떨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번처럼 비교적 평화롭게 끝나는 건 무리다.
그렇지만.
"… 그렇게 전해주면 되는거지?"
엑스는 그렇게 대답했다. 결국 이것을 거절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으니까.
대답을 들은 아리사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말해줄 거라고 생각했어. 이러니 저러니해도 너, 꽤 좋은 녀석 같았고."
"… 뭐?"
"너도 그 녀석도 나 때문에 제대로 못싸웠잖아."
"알아차리고 있었어?"
"얕보지 말아줬음 좋겠는데. 이래뵈도 격투기나 액션영화나 애니메도 많이 보니까. 그런 시츄에이션엔 민감하단 말씀."
왠지 모르지만, 아리사는 가슴을 펴고 매우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적어도, 그 정도의 보는 눈은 있다. 엑스는 혹시 모를 유탄을 대비해 아리사를 자신의 사정거리 안에 두고 있었고, 마그마 드래곤 역시 엑스가 아리사의 근처에 있을 때는 공격을 날리지 않았으니까.
그녀만이 아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있던 납치범들조차, 두 사람의 싸움으로 인한 상처는 없었다. 그렇기에 "두 발로 걷는 용머리 로봇이 나타났다"는 납치범들의 말이 깨끗이 무시될 수 있었던 거고(천정이 무너진 것에 대해선, '워낙 노후된 건물이니까'라고 둘러댔다).
이상의 이유로, 아리사는 엑스가 나쁜 녀석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짜는 어떤거야?"
주무르던 발에서 손을 떼고, 아리사는 몸을 일으켰다.
슬슬 조금 전의 데미지도 없어졌는지, 아리사의 얼굴에서 통증의 기미는 사라져있었다.
"둘다 보통 사람은 아닌 거 확실하고. 결국 뭐였던건데? … 그야 뭐, 그렇게 싸우는 걸 보고도 친구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 글쎄."
엑스는 잠깐 고민했다. 그녀에게 사실을 말할 것인가 적당히 얼버무릴 것인가.
이미 레플리로이드끼리의 싸움에 말려들어버린 이상, 그녀 역시 일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다. 진실을 숨기는 짓은 왠만하면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좀전의 기백으로 봐서… 거짓말했다가 들키면 무사하지 못할지도.'
하야테와는 다른 의미로 무서웠다.
뭐라고 할까, 하야테를 머리 두개 달린 여우라고 표현한다면 아까의 아리사는 포효하는 호랑이. 한순간이지만 엑스조차 주눅들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결국 엑스는 요점은 빼버리고 이야기하기로 했다. 뒷탈 무섭고, 지금도 무섭고.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기계로 된 존재라는 것.
그리고 그 마그마 드래곤 역시, 근본적으론 같지만 다른 존재인 「레플리로이드」라는 것.
여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아리사가 손을 들어 의문점을 말했다.
"어, 그거 이상하네. 같은 기술로 만들어졌다면 동료잖아. 어째서 싸우는 거야?"
그것까지 자세히 설명하자면 100년 전에 있었던 레플리로이드 대전에 대한 것까지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부분은 대충 넘기기로 했다.
"원래는 같은 조직의 동료였지만… 그 조직이 둘로 갈라져버렸거든."
"흐응… 사상이나 이념 문제로 갈라선건가. 꽤 흔한 이야기네."
근본적인 원흉은 시그마지만. 엑스는 속으로 그렇게 덧붙였다.
… 생각해보면, 자신에게 닥쳐온 모든 불행은 그 녀석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새삼 떠올려도, 괜히 "레플리로이드만의 세상"이니 뭐니하면서 쿠데타를 일으키는 바람에 그 해결과 뒤처리까지 전부 자신이 했어야했지 않은가.
그것만이 아니다. 친우와 함께 죽을 고생을 해가면서 겨우겨우 쓰러트렸더니, 알고보니 그 정체는 실체가 없는 바이러스. 아무리 바디를 부수고 파괴해도 새로운 몸을 얻는 순간 다시 나타나서 세계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엑스가 소속되어있는 조직인 "이레귤러 헌터". 그 이레귤러 헌터가 저지른 삽질 중에서도 특대급이자 최강급이라고 일컬어지는 대실책인 "레플리포스 사태" 또한, 따지고 보면 시그마의 수작.
아아, 그랬다. 전부 저 녀석 탓이다. 이것도 저것도 그것도 전부 시그마의 잘못이다. 그 자식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과 제로가 발에 불이 나도록 돌아다녀도 전쟁이 끝나지 않고, 인간과 레플리로이드 사이의 불신이 사라지지 않은 것도 그 자식 탓이며, 에너지 고갈 문제가 드러난 것도 아르카디아의 자연이 황폐해진 것도 지구가 둥글어서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에 회부된 것도 콜롬버스가 발견한 대륙이 인도가 아니라 아메리카였다는 것도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도 니트로글리세린이 굳기 시작한 것도 이런 것도 저런 것도 하나부터 열끝까지 전부다 그 놈 탓임이 틀림없다.
그 자식만 아니었어도 그 자식만 아니었어도 그 자식만 아니었어도그 자식만 아니었어도그 자식만 아니었어도 그자식만아니었어도그자식만아니었어도그자식만아니었어도그자식만아니었어도그자식만아니었어도오!!
"… 지금 뭔가 터무니없는 생각하지 않았어?"
"별 거 아냐. 그냥 내 삶이 어디부터 꼬인걸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오직 한 녀석에게로 귀결된다는 걸 깨달은 것 뿐이니까."
지금의 자신이라면, 이 세상의 모든 나쁜 일의 원인을 그 녀석에게 몰아넣어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의 분노를, 엑스는 가지고 있었다. 이 앞에서는 100년 간의 마모따윈 아무것도 아니다. 어째서 지금까지 잊고 있었을까.
상당히 엇나간 생각을 하던 엑스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쨌든 죽어없어진 녀석에 대한 분노를 계속 불태워봤자 에너지 낭비니까.
"다른 질문 없으면, 이만 가볼게. 오늘 일은… 잊어버리는 게 좋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다고 해도 어차피 믿어주지 않겠지만. 요 1주일동안 이 세계에서 살아오면서, 오히려 이런 이야기들을 금방 믿어버리는 하야테 쪽이 별종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물론 하야테도 아리사도 강렬한 '체험'을 동반한 다음이긴 했지만).
"어, 볼일이라도 있어?"
"… 응. 상당히 급한 걸로."
그런 이상한 물건들, 길바닥에 있다고 해서 주워갈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걱정된다.
"그런 이유니까, 잘 지내."
"아, 잠깐만!"
그대로 몸을 돌리려는 엑스를 붙잡으면서 아리사가 외쳤다.
"… 아직, 볼일 남았어?"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소녀, 아리사 버닝스는 맹렬한 기세로 두뇌를 회전시켰다.
이대로 보내면, 두번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이 흥미진진한 것들로 꽉꽉 들어차있는 것 같은 녀석을.
아리사는 다시금 회상해보았다. 눈앞에 있는 이 소년과, 그 염화의 드래곤이 보여주었던 '이 세상의 것'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싸움을.
빠르고, 강하다. 그런 단어들로는 표현조차 할 수 없는… 마치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한 장면들의 연속.
그런 것을 바로 코앞에서 봐놓고도 놔줄 수 있을만큼 아리사는 현실에 절망하지 않았다. 굳이 지금의 기분을 표현하자면 "이만큼 재밌을 것 같은 녀석들이 멀쩡히 돌아다니다니, 충분히 즐겁고 살만하잖아 이 세상!"이라는 느낌이다. 9살 주제에.
"그렇지! 전화번호 있으면 알려줘! 혹시 그 녀석 보게 되면 연락해줄테니까!"
이거라면 문제없다. 당장 헤어지더라도 만날 구실이 생기는 거니까.
사는 곳까지 알아내는 건 무리더라도, 이 정도라면─
"괜찮아. 녀석이 다시 나타나서 난동을 피우면 센서에 걸릴테니까."
숨어있는 녀석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만,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 이레귤러를 찾는 것은 쉽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리사는 눈에 띄게 낙담했다.
"그, 그렇지! 나중에 우리 집에 초대할게! 오늘 인사도 할 겸─"
"여러번 말하는 거지만, 나한테는 감사 인사 하지 않아도 돼."
"에, 어 그러면… 오늘처럼 납치당하면 연락해야…"
"나한테 할 시간 있으면 경찰한테 먼저 연락해."
적당히 좀 해, 이 플래그 브레이커 자식.
입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집어삼키고, 아리사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닥치고 내놔, 전화번호."
정확히 5초 후.
엑스는, 정신을 차리고보니 아리사를 향해 두 손으로 공손히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바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 농담 아냐. 조금 전엔 진짜로 무서웠어, 이 아이. 조금 전의 아리사를 떠올리고는 오싹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반면 조금전과의 고전이 거짓말처럼 느껴질만큼, 너무나도 쉽게 번호를 얻어낸 아리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도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 속에는, "처음부터 이럴걸."이라는 무시무시한 생각이 담겨있었다. 그래, 어울리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사정'씩이나 한다는 건. 진작에 성질대로 강경하게 나갔어야 했는데.
"… 이제 가봐도 되는거야?"
"아, 근데 잠깐. 이 번호로 전화 걸면 진짜로 너한테 가는거야?"
"이 상황에서 가짜 번호를 알려줄만큼 용기가 넘치진 않아서."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 사신을 향해서 총을 겨눌 용기는 있어도 눈앞의 소녀에게 거짓말할 용기는 없다.
"… 뭐 좋아. 믿어줄게."
"어째서 내가 네 믿음을 사기 위해 노력해야하는 건진 전혀 모르겠지만."
"아, 그거 하나하나 되게 시끄럽네. 남자애잖아. 사소한 거에 일일이 신경쓰지마."
적어도 너에게 듣고 싶은 이야긴 아냐, 타이거.
다행히도 엑스의 AI는 아무리 울컥하는 기분에 휩싸여 해서 될 말과 해선 안될 말을 구분할 정도의 분별력이 있었다. 지금 머리 속을 스친 말을 실제로 바깥으로 끄집어냈더라면 어떤 꼴을 당했을까. 상상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고 싶다.
"그러고보니까 아까부터 계속 가려고 하던데, 뭔가 급한 일이라도 있어?"
"… 아아. 굉장히 급한 일이 있어서."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 너, 이름 뭐야?"
아리사의 질문을 들은 엑스는 잠깐 멈칫했다.
아주 잠깐동안 주저했지만─ 결국 엑스는 입을 열었다.
"엑스."
"… 엑스? 알파벳 끝에서 세번째? 이상한 이름이네."
하지만 곧 '뭐, 그럴수도 있겠지'라고 순순히 납득한 소녀는 손을 내밀었다.
"나는 아리사. 아리사 버닝스. 그럼, 나중에 또 봐."
그리고, 이야기는 처음으로 돌아간다.
그 당시엔 반강제였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다. 물론 그때의 무서웠던 하야테를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해져서, 자다가 일어나 경기 일으킬 지경이지만 그것도 다 지나간 이야기.
그날 이후, 엑스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아리사는 엑스를 자주 불러냈다.
단순히 '그냥 생각나서'라거나 '마땅히 의논할 대상이 없어서'라는 등의 시시한 이유일 때도 있었고, 우미나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상한 일'들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서일 때도 있었다. 아리사에게서 듣고 나서 안 거지만, 이 우미나리도 예상 이상으로 '소문'이 많은 곳이었다.
예를 들자면, 괴물 고양이가 나타나거나 거대 식물이 느닷없이 땅에서 튀어나온다던가.
예를 들자면, 하늘을 날아다니는 빛들끼리 이리저리 부딪히며 돌아다녔다던가.
예를 들자면, 이 도시 어딘가에 '흡혈귀'라고 일컬어지는 환상의 존재가 살고 있다던가.
예를 들자면, 발사된 총알만큼 빨리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던가.
예를 들자면, 검은 날개를 가진 천사를 본 적이 있다던가.
예를 들자면, 예를 들자면, 예를 들자면─
하나하나 꼽아보자면 헤아리는 것 자체가 귀찮아질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전화로 이야기하면 될 것을 어째서 일일이 불러내서 이야기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아리사가 말하길, "긴 이야기를 휴대폰으로 하면 전화비가 뼈 아플만큼 많이 나온다"라고. 가계부를 스스로 써내는 하야테의 고초를 바로 옆에서 지켜봐왔기 때문에 그 의미는 잘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리사에겐 미안하게도 솔직히 말해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아리사의 화술은 나쁘지 않았기에 이야기는 재미있었고, 그 소재 자체도 나름대로 흥미로운 것들이긴 했다. 어쨌든 엑스에게 있어서 '오컬트'라는 건 생소한 과목이니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아리사가 들려준 수많은 이야기 중 마그마 드래곤과 관련지을 수 있을 만한 이야기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다지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이곳으로 온 것이다. 이번에도 지금까지와 별로 다를 건 없겠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날은, 아주 조금 평소와 달랐다.
장소는 하야테와 처음 만났던 공원. 찾아오기 쉽다는 이유로 아리사는 이곳을 약속 장소로 애용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엑스는 아리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확실히 '평소'와 똑같다.
다른 것은, 아리사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
아리사와 함께 있는 것은 아리사나 하야테와 동년배로 보이는 소녀였다.
"… 옆에 있는 아이는?"
"으응. 이쪽은 츠키무라 스즈카. 친구야. 스즈카, 이 녀석에 엑스."
"에, 또… 츠키무라 스즈카입니다. 아리사가 언제나 귀찮게 하고 있다고…"
스즈카라고 소개된 소녀는 엑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걸까, 아리사는 곧 불평하기 시작했다.
"귀찮게 하는 거 아니라니까. 이 녀석, 여기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니까 소개해주고 있던 것 뿐이라고."
"아리사… 이 사람 아무리 봐도 우리보다 연상인데 그렇게 부르는 건─"
"괜찮아. 여기엔 이런 거 저런 거 사정이 좀 있는데… 그건 다음 기회에."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기만 하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엑스는 상당히 속이 쓰렸다. 하야테에 이어 아리사. 민간인이 레플리로이드 사건에 휘말린 것만도 골치아픈데 잘못하면 하나 더 늘어나게 생겼으니까.
─라고 생각하자마자, 아리사가 주먹으로 복부를 쳤다.
"?!"
당연히 고통은 없지만, 꽤 놀랐다.
"이~러~언 미소녀 둘을 앞에 놓고 뭐야 그 표정은!!"
스스로를 그렇게 당당하게 '미소녀'라고 자칭하는 신경줄에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지만 일단 그건 그거고, 이것은 다른 문제다.
어째서 스즈카를 데리고 온 건지 묻기 위해 입을 열려는 찰나.
<미안. 요새 너랑 만나고 있는 걸 스즈카한테 들켜버리는 바람에.>
<… 그래서 데리고 온 거야?>
<응. 의심받을 바엔 한번 보여주는 게 낫겠다 싶어서. 괜찮아. 중요한 말은 안했으니까.>
생각해보면 두 사람이 만나기 시작한 것도 슬슬 한달 째.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건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게다가 스즈카가 아리사의 친구라고 하면, 가족보다도 빨리 알아차릴 확률이 높다.
"… 저기, 아리사? 그 쯤 해두는게… 아무리 그래도 예의가 아니잖아."
"응?"
스즈카는 머뭇거리면서도 확실하게 말했다.
─그랬다. 엑스와 아리사 당사자들이야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 형태가 문제. 아리사보다 엑스가 훨씬 크기에 귀 높이를 맞춰야 하는데, 거기서 아리사가 택한 방법은 "다리를 걸어 쓰러뜨리고 헤드 락"이었다. 겉모습만 보면 9세의 소녀가 14~15세의 소년을 붙잡고 머리를 조르고 있는 형국. 당연히 보기 좋을 리 없다.
자신들의 모습을 눈치챈 아리사가 겸연쩍게 웃으며 헤드락을 풀고, 엑스는 담담하게 일어나 머리를 정돈한다.
"뭐어뭐어… 아무튼, 오늘 불러낸 건 스즈카한테 소개해주려는 게 첫번째. 좀더 정확하게 이야기해서 소개시켜주고 싶은 사람은 한명 더 있지만, 걔는 요새 바쁘다고 혼자 일찍 가버리거든. 그래서 걔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스즈카 먼저."
들켰다는 친구가 두 사람이었나.
의외로 아리사도 요령이 없구나, 생각하던 중 문득 한가지 걸리는 단어가 생각났다.
"지금 그게 첫번째라는 건… 두번째는?"
"어라, 당연한 거잖아?"
아리사는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라는 듯한 얼굴로.
실로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말했다.
"우리들의 에스코트를 위해서지. 오늘 쇼핑가로 놀러가기로 했거든."
[……]
마그마 드래곤은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비할 바없이 호전적인 전사이긴 했지만 그다지 사악하다거나 잔혹한 것은 아니다. 최소한도로 눈앞에서 죽어가는 생물을 발견하면 발걸음을 멈추고 한번 들여다보긴 할 정도의 정신은 제대로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경우 사고를 거창하게 치는 바람에 이레귤러가 된거지 심성이 뒤틀려서 이레귤러가 된 건 아니니까.
하기야, 그것과는 별개로.
─자신이 지금까지 숨어 지내던 은거지에 다 죽어가는 고양이가 발견된다면 누구라도 신경쓰겠지만.
외상이 없는 걸로 봐서 심각한 부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흡의 강도와 맥박의 횟수가 현저할 정도로 낮다. 바로 그것이, 마그마 드래곤을 고민하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이것이 보통의 고양이라면 한번 으르렁거리는 것으로 쫓아내면 그만이다. 하지만 '죽어가는 고양이', 그것도 스스로 일어날 힘도 없는 녀석이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적어도, 이대로 들고 나가서 길가에 내다놨는데 죽어버린다던가 하면 느낌이 나쁘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사람이 걸어오는 걸 본 고양이가 겁을 먹고 멋대로 달아나다가 차에 치여 죽는 광경을 목격했을 때와 비슷하다.
마그마 드래곤은 작게 한숨을 쉬고, 데이터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의료 머신, 아직 작동할까…]
"…… 지쳤다…"
여자아이와 쇼핑. 지금까지 하야테와 몇번 하면서, 그 어려움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터무니없는 착각이었다. 사람 수가 두배라고 해서 특별히 더 힘들진 않겠거니, 생각했지만 크나큰 오산. 대단히 활동적인 아리사는 그야말로 '끌고 다닌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 그나마 스즈카 쪽은 얌전했기에 다행이었지만, 아리사를 억제하는데 도움이 됐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몸도 마음도 완전히 지쳐버린 날. 적어도 오늘만큼은 마그마 드래곤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은 아무 트러블없이 보내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현관을 열고 집으로 들어왔다.
하야테는 아직 병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이시다로부터 받은 연락에 의하면 뭐라더라, 오늘따라 정밀 검사 기계가 고장나버리는 바람에 검사가 늦어졌다던가 뭐라던가.
검사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앞으로 1시간. 지금부터 30분 정도는 여유가 있다.
"… 응?"
소파에 앉아서 완전히 몸을 눕히려던 찰나, 엑스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착각이었을까. 아니, 다르다. 금방 사라져버리긴 했지만 지금 그 느낌은─
"… 하야테의 방."
소파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아주 잠깐 동안 발생되었던 '신호'. 너무나도 금방 사라져버렸기에, 무엇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작은 신호.
한순간 이레귤러 체크라고 생각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이레귤러가 근처에 있다면 센서 이전에 엑스가 알아차렸을 것이고, 지금쯤이면 머리 속에서 회로가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을테니까.
이레귤러 이외에, 그의 회로에 감지될만한 것이 이 세계에 있었던가.
엑스는 하야테의 방문 앞에 서서, 방의 안쪽을 스캔했다.
─물론 이레귤러는 없고, 텅 비어있는 방 안의 모습만이 머리 속으로 들어왔다.
이레귤러의 위험은 없다.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스캔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방의 풍경은 자신이 나가기 전에 청소했을 때와 다를 바 없었다. 침대도 그대로고, 바닥이나 천정도 문제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아까 엑스의 회로에 걸렸던 건 뭐였을까.
의아함을 느끼며 엑스는 몸을 돌리다가, 딱 한가지 '평소와 다른 점'을 발견했다.
─아까는 보지 못했던 책이, 하야테의 책상 위에 놓여져있었다.
흑빛의 껍데기에, 금색으로 그려진 문양.
성분을 알 수 없는 사슬로 네 방향으로 묶여져있는 기이한 모양의 책.
하야테가 말하길, '철이 들기 전부터 같이 있었던 책'이며, 그때에는 단순히 '모양이 예뻐서 가지고 있었을 뿐'이지만 지금은 소중한 보물이 됐다고 했던 책이다.
'이게 왜 여기에…'
책장 중 비어있는 곳에 다시 꽂아넣기 위해, 엑스는 책을 집어들었다.
<이물(異物) 접근.>
<이물 쪽에서 접촉 시도. 오염 우려 있음.>
<통제 프로그램 판단 - 접촉 거부.>
<강제 배제 개시.>
"우왓?!"
책을 잡자마자, 강렬한 스파크와 함께 통증이 올라온다.
반사적으로 책을 놓쳐버렸고, 검은 책은 책상 위로 떨어졌다.
엑스는 빠르게 뒤로 물러난 후 오른손을 버스터로 바꾸고 책을 향해 겨눈다.
─1초, 2초, 3초… 10초, 20초, 30초.
이윽고 5분 정도가 지나고 나서도 아무 일 없자, 엑스는 천천히… 그러나 경계는 풀지 않은 채 책을 향해 접근했다.
다시 한번 손을 뻗어 책을 건드려본다. 이번에는 왼손으로.
이번에도 어김없이, 책은 스파크를 터트리며 엑스의 손을 튕겨냈다. 하지만 결코 그 이상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이건 대체…?"
만약 이것이 다른 물건이라면 주저없이 버스터로 날려버리거나 태워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하야테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책이라는 것이 엑스로 하여금 '파괴한다'라는 선택지를 고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게다가 분명─ 하야테가 자신에게 저 책을 보여주기 위해 손으로 들었을 때는 지금같은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즉, 이 책이 거부하고 있는 것은 자신 뿐.
'…… 우선은, 지켜볼까.'
이 책은 자신이 건드렸기에 반응했을 뿐이고 그 이외의 경우에는 조용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렇다면 자신이 건드리지 않으면 더이상의 일은 일어나지 않을 터.
우선은 상황 관찰부터. 엑스는 그렇게 결정했다.
그러나.
'… 그렇지만…'
아까의 그것.
엑스가 책을 두번 건드렸을 때.
마치, '책'이 말을 했던 것 같은 느낌은 착각이었을까.
───to be contin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