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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페이지 미스터리


어둠 속의 목소리


어둠 속의 목소리

 

남편이 퇴근하자마자 명숙은 역정을 냈다.

“이번 추석 땐 시댁만 가자고 했잖아요! 그런데 무슨 놈의 친정이예요? 내가 어머니랑 사이 안 좋은 거 알면서, 회사에서 그런 식으로 전화해도 돼요?”

“당신과 어머님 사이야 알지. 하지만 부모자식이잖아. 내가 잘 중재해 줄 테니, 한번 가보자고. 결혼 후 한번도 가지 않았잖아?”

“어머니가 우리 결혼 그렇게 극성맞게 반대했던 걸 알면서, 당신 참 속도 좋네요, 난 그때 어머니랑 의절 선언했으니 알아서 하세요. 전 절대 안 내려갈 테니까.”

세상의 수많은 또래 여성과 달리, 명숙은 시댁보다 친정을 더 싫어했다. 3년 전 결혼할 당시 어머니가 철진에 대해 악담을 하는 걸 참지 못해 크게 말싸움한 이래, 둘이 제대로 만나 이야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실 어머니가 했다는 악담은 철진에 대한 사소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이는 철진이 장모를 찾아가 직접 해명해 풀린 바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때의 기억을 지금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기에 철진이 아무리 설득해도 시댁으로 가긴커녕 전화 한 통 걸지 않았다.

철진은 한숨을 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명숙은 남편의 드넓은 오지랖을 한탄하며 tv를 켰다. 5분 가량 멍하니 뉴스를 보고 있는데 집에 전화가 걸렸다.

“여보세요.”

그녀가 전화를 받자 수화기 안에서 기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지금 당신의 어머니는 내가 데리고 있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명숙은 간신히 가라앉혔던 짜증을 확 일으켜 세웠다.

“야! 이거 미친 새끼 아냐” 어디다 대고 장난전화질이야!“

​“​o​o​o​o​o​o​-​o​o​o​o​o​o​o​.​”​

명숙은 순간 헛숨을 들이켰다. 그건 어머니의 주민등록번호였다. 이어서 목소리는 어머니의 이름과 주소, 외양 등을 줄줄 늘어놓았다. 이 정도면 보통의 사기 수준을 넘었다 할 만했다.

“당신 누구야! 정말 엄마를 납치한 거야?”

“확인할 시간을 주지. 잠시 후에 다시 걸겠다. 그리고 경찰에 전화하면 용서하지 않겠다.”

목소리는 자기 할 말을 마치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명숙은 급히 친정에 전화를 걸었다. 아무도 받지 않았다. 전화벨이 스무 번 넘게 울린 후에야 그녀는 단념하고, 이번엔 어머니의 핸드폰으로 전화했다. 단축키를 지워버린 터라, 떨리는 손으로 몇 번이나 틀려 가며 간신히 번호를 찍었다. 그러자 벨이 채 세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가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어, 엄마! 엄마! 으허엉!”

“아니, 얘가 왜 이래? 무슨 일 있어? 김 서방하고 싸우기라도 했어?”

긴장이 탁 풀린 명숙이 목놓아 통곡하는 소리는 방에 있던 철진에게도 생생하게 들려왔다. 울음은 점차 잦아들더니 조곤조곤한 이야기로 바뀌어 갔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몰라도, 아내의 가슴 속에 쌓여있던 응어리들이 조금씩 녹고 있다는 걸 그는 알 수 있었다. 자존심으로 버티던 아내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계기였던 것이다.

철진은 아내의 의료보험증을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고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인터넷 중고 시장에 접속해 전자제품란을 찾아가 게시글을 작성했다.

-딱 한 번 사용한 최신 음성변조기입니다. 가족, 동료끼리 재미있게 놀거나 분위기를 바꾸고 싶을 때 추천합니다.

이렇게만 쓰면 게시글이 밋밋한 것 같아, 그는 한 줄 더 추가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악용하지 말고, 아는 사람이라도 신중하게 사용합시다.

행여라도 아내가 전화를 끊자마자 경찰에 신고할까봐 철진은 가슴이 콩닥거렸다.

다시 보니 철진은 결국 아내에게 실토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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