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및 문화 콘텐츠 사이트 삼천세계

눈의 꽃(수필 모음)


눈의 꽃


2009년 12월, 겨울의 초입에서 난 여전히 내 인생의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거리에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빛이 흘러넘쳤고, 축제가 끝나자 흰 눈이 생크림처럼 바닥에 깔렸다. 난 그것을 즐기는 대신 빛을 피해, 눈을 피해 독서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내 존재의의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좋게 말해 자발적 실업자, 까놓고 얘기하면 그냥 백수일 뿐인 내가 현실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경계선.

독서실은 노량진에 있었다. 집 근처의 독서실은 중고생들이 많아 시끄러웠다. 하지만 그보단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함께 있는 편이 더욱 편했다. 내가 공부하고 있는 공무원 시험은 입구는 넓지만 출구는 갈수록 좁아지는 깔때기 같은 형태이다. 그렇기에 이곳에 있는 모두는 표면적으론 동지, 잠재적으론 적이었다. 그 아슬아슬한 균형감이 잊고 싶은 현실을 끊임없이 일깨워주었다. 그 느낌마저 잃어버린다면 더이상 난 갈 곳이 없을 것 같았다. 집과 노량진을 끊임없이 왕복하는 변함없는 일상이 오히려 내가 살아있다는 존재감을 지켜주었다.

누군가를 사귀는 것도 생각해 보았다. 사귀는 것 자체가 어려운 건 아니다. 노량진은 외로운, 혹은 외롭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니까. 그렇지만 난 이곳에 있는 동안 누구와도 사귀고 싶지 않았다. 내가 온전히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을 사귀게 되었을 때, 마음을 놓고 소위 '이 바닥'의 괴로움을 줄줄 토로할 것이 싫었다. 몇 년간 공부하면서 무소식은 결코 희소식이 아니라는 것, 아픔은 나누면 두 배가 될 뿐이란 걸 몸으로 체득하고 있었으므로. 그래서 내 안에 고여가는 새까만 말들은 언제고 터지기만을 기다리는 댐처럼 위태롭게 출렁거렸다. 가끔 한 잔 술을 마시며 다 털어버렸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곤 했지만, 내 안의 내용물은 건재했다. 아니, 이젠 아예 몸 안 구석구석에 끈적하게 엉겨붙어 내 일부가 되어버렸다. 난 삼 년 묵은 변비처럼 그것을 뱃속에 담고 노량진을 왕복하며 합격만 한다면 다 괜찮아질 거야, 란 되뇌임을 수없이 반복했다.

독서실에 있는 사이 눈이 꽤 내렸다. 집에 가기 위해 나와보니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었는데, 발자국이 제법 깊게 패일 만큼 쌓여 있었다. 눈길은 다른 사람들의 발자국들로 엉망이었지만 내가 밟을 눈 정도는 남아있었다. 신발 아래에서 뽀드득거리는 소리를 즐기며 노량진역으로 향했다. 노량진역은 플랫폼의 중간까지 지붕이 덮여있고 그 뒤로는 개방된 구조이다. 플랫폼의 맨 뒤까지 가야 내리자마자 갈아타는 곳으로 갈 수 있다. 눈을 피해 지붕 아래 모여있는 사람들을 지나쳐 늘 타던 곳으로 가자 아무도 밟지 않은 흰 바닥이 보였다. 그것도 제법 넓었다. 발자국을 몇 개 찍으며 놀다가 문득 뭔가 그리고 싶어졌다. 누군가 내 모습을 본다면 절대 하지 않았겠지만 사람들은 저 멀리에 있었고 그나마도 이쪽에 시선을 두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저 멀리서 열차가 다가오고 있었기에 난 짧은 궁리 끝에 하나를 선택했다. 조심조심 한 줄로 발자국을 낸 후 그 주변을 둥글게 돌았다. 그냥 발로 선을 찍 긋는 것보단 그게 참신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발자국 찍기가 완성될 즈음 열차가 멈췄기에 난 작업을 멈추고 안전선으로 향했다. 열차에 올라타며 내가 그린 그림을 흘끔 바라보니 그것은 마치 실에 매달린 풍선 같았다. 내가 그리고 싶은 게 저것이었나, 생각하니 웃음이 픽 새어나왔다. 아무 의미도 찾을 수 없는, 풍선 비스무리는 곧 내 시야를 벗어나 사라졌다. 어차피 내일이면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지워질 테니 사진이라도 찍어둘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새벽에 난 늘 내리던 장소가 아니라 어제 내가 탔던 그곳에 내리기로 했다. 내 그림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특별히 무슨 기대를 한 것은 아니고 그냥 유물 관람이라도 가는 기분이었다. 내가 그것을 그린 시간은 아직 막차가 올 시간은 아니었기에 그곳을 발견하고 발자국을 새긴 사람은 분명 더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림이 온전히 남아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단지 난 내 그림이 어떤 식으로 망쳐져 있을까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창가로 가려는 시선을 억누르다 문이 열리자 난 밖으로 나왔다. 눈밭 위에는 발자국들이 어지러이 퍼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내가 그렸던 그림이,

동그라미 밖에는 삐뚤빼뚤한 잎,

동그라미 안에는 스마일 마크,

직선 아래에는 둥근 이파리 두 장,

눈의 꽃으로 피어 있었다.

결말부터 말하자면, 저녁에 가 보니 그림은 뭉개져 있었다. 그림이 잠시나마 살아남았던 건 인위적이라기보단 우연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 그림을 보았다고 내 일상이 바뀌거나 내 안의 검은 덩어리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난 여전히 무거운 몸을 끌고 독서실로 가 혼자 공부하고 있다. 다만 조금 덜 외로워진 건 확실하다. 사람이 소통하는 방식은 내가 알고 있는 게 다가 아니라는, 그것을 깨달았을 때의 미묘한 감동은 한동안 나를 지탱해 줄 소중한 감정이 될 것이라 믿고 싶다. 그리고 내 안에 아직 피울 꽃이 있음을 확인시켜 준 그 사람에게 정말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해가 바뀌고 큰 눈이 내렸다. 사람들에게 밟히고 밟혀 팥앙금같은 색으로 변한 눈밭을 보니 문득 국화빵이 먹고 싶어졌다. 국화빵을 사들고 역 안에 들어가 내 지정자리로 갔다. 먼저 왔다 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즐비했다. 나 혼자만의 장소가 아니니 실망할 필요는 없다. 그곳에서 느긋하게 열차를 기다리며 국화빵을 입 안에 넣었다. 달콤하고 따뜻한 맛이었다. 뱃속에 들어간 빵 위에 찍힌 꽃무늬를 떠올리며, 난 나를 목적지로 데려다 줄 열차의 도착을 기다린다.
고시생 시절에 쓴 수필입니다.
어두컴컴했지만 완전히 좌절하진 않았던, 그때의 소중한 기억이지요.

댓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