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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꽃(수필 모음)


바다에 발자국 찍다


바다에 발자국 찍다

 

누구나 그러하듯, 나 또한 첫사랑이 있었고 그 첫사랑과 이어지지 못했다. 이런 것까지 남을 따라갈 필요는 없을 텐데. 하지만 세상사 어디 내 마음대로 흘러갔던가?

 

대학교에 들어와 여자 동기들을 만나게 되었고, 스치듯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다른 여자 동기와 마찬가지였던 그녀가 내 마음에 뛰어든 것은 함께 MT를 다녀오면서였다. 여름밤, 모두가 잠든 가운데 우리 둘만이 깨어 있었고, 우린 답답한 방을 빠져나와 냇가에 나가 함께 노래를 불렀다. 난 필사적으로 아는 노래를 기억해내면서 그녀와의 시간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난 그녀에게 손을 뻗는 순간 그 행복이 깨지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녀에겐 이미 남자친구가 있었으니까.

 

이후의 2년간은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리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의 나날이었다. 내가가는 소모임에 그녀를 초대하고, 함께 성년의 날을 맞이하고, 술자리가 있으면 어김없이 그녀 옆자리에 앉으려 했다. 그때의 난 그녀를 남자친구에게서 뺏어올 의도가 없었다. 그냥, 정말 그냥 함께 있고 싶었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녀가 돌아갈 때면 그 등에 손을 뻗다가도 다시 손을 내리곤 했다.

 

단 한 번, 그녀를 품에 안은 적이 있었다. 군대를 가기 전날 난 다른 약속을 모두 뿌리치고 그녀와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웃으며 나와 함께 다녔고, 내가 머리를 깎는 걸 지켜보았다. 그러다 헤어질 때 그녀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난 그 손을 잡는 대신 그녀를 품에 안았다. 잠시 몸이 굳었던 그녀는 어색하게 손을 들어 내 등을 감싸안았다. 난 그 행동이 오롯이 우정에서 나온 것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그래도 그 잠시의 온기는 내게 군생활을 버틸 힘이 되어주었다. 아마 그녀는 내가 유격훈련 때 그녀의 이름을 외치며 뛰어내렸던 것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군대에 있는 동안 변화가 생겼다. 그 온기는 이제 더 이상 따뜻하지 않았다. 온기가 식은 게 아니었다. 내 마음이 그 온기보다 뜨거워져서였다. 난 비로소 사랑에 굶주렸다. 그것은 성장이었을까. 아니면 욕망이었을까. 어느 쪽이든, 난 더 이상 자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휴가 때 술자리에서 그녀에게 고백했다. 그것은 제대로 된 고백이 아니었다. 일방적이었고, 내 감정에만 충실했다. 그녀는 당혹스러워하며 내 고백을 흘려넘겼다. 그 역시 제대로 된 거절이 아니었다. 내 모든 걸 건 고백이 인정받지조차 못했다는 사실은 당시의 내게 너무 가혹했다. 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후 난 전역한 후 몇 년이 지나도록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

 

한동안 잊고 살던 그녀가 다시 내 인생에 떠오른 것은 사소한 계기였다. 그녀는 내가 초대한 소모임에 지금도 꾸준히 나가고 있었다. 난 한참 고민하다 소모임 사람들에게 그녀의 연락처를 물어 전화했다. 그녀는 내 목소리를 듣고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이전의 일은 까맣게 잊은 것일까, 아니면 그냥 가슴 속에 묻어두기로 한 것일까. 만약 내가 그것을 묻는다면 그녀와의 관계는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몰랐다. 난 여전히 그녀를 좋아했고, 그녀의 곁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싶었다. 그것으로 족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그녀와 어울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 역시 이전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녀와 다시 만났다. 난 결국 사랑과 우정의 한가운데에서 그 균형이 저절로 깨지기만을 기다렸을 뿐이었다. 아마 어떻게 생각하면 그 아슬아슬한 균형을 즐기고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난 그때의 나를 한심하다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고여 있는 건 사랑이 아니란 걸 이때 알았더라면…… 하고 입술을 씹으며 생각할 뿐이다.

 

그녀의 혼인 소식을 들은 건 결혼식이 불과 한 달 남은 때였다. 하지만 날 당황하게 만든 건 결혼 소식이 아니었다. 그녀의 남편이 될 사람은 옛 연인이 아니었다. 거진 십 년을 사귀었던 그와 헤어진 후,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 기간은 내가 그녀와 다시 어울렸던 때와 얼추 비슷했다. 그 사실이 날 끝없이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예전 연인과의 이별 후에도 날 염두에 두지 않았고, 난 이별에 아파하는 그녀에게 전혀 다가서지 못했다. 그 두 가지가 겹쳐, 내 인생에서 딱 한 번 있었던 기회를 날려버린 것이다. 그녀를 알게 된 후 두 번째로, 난 골방에 처박혀 눈물을 흘렸다.

 

몇 주 후, 그녀는 소모임 전체를 초대했다. 청첩장을 받으러 오라는 메시지. 남편 될 사람도 그때 소개해준다고 했다. 결국 끝까지 난 남자로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때 내 고백을 그녀가 조용히 묻기로 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느 쪽이건 무슨 상관일까. 본심을 말하자면 정말 가고 싶지 않은 자리였다. 하지만 내가 가지 않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그녀는 결혼하고, 난 남겨진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어디로도 갈 수 없었다. 언제까지고 고여 있어 봤자, 숙성되는 게 아니라 그저 썩기만 할 뿐이란 걸 난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난 바다로 갔다.

 

보름달 둥실 뜬 밤바다는 적막했다. 달빛이 바다에 출렁이며 눈부신 빛의 길을 해안까지 뿌리고 있었다. 거친 파도가 흰 포말을 게워내는 해변을 따라, 난 그저 걷고 또 걸었다. 모래가 신발 안에 가득 들어와 난 신발을 내팽개쳤다. 양말까지 벗고 맨발로 파도에 뛰어들었다. 바닷물에 젖은 모래는 내 몸무게를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발가락 모양까지 선명한 발자국을 새기며 난 뛰기 시작했다. 아아아 소리를 지르면서 계속 뛰었다. 내 소리는 파도 소리와 함께 날아갔고, 흩날리는 모래는 물에 잠기며 저 먼 곳으로 떠내려갔다. 한참을 뛰다 뒤를 돌아보니 어디에도 내 발자국은 없었다. 해안을 따라 뛰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깊숙하게 모래바닥에 찍어댔던 발자국은 놀랍도록 연약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사랑의 흔적 또한 남김없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걸. 다만, 난 내 눈으로 이를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바보는 눈으로 보지 않고선 끝내 납득할 수 없으니까.

 

이젠 더 이상 해안선을 따라 달려가선 안된다. 선택의 순간이 오면 난 뒤로 물러서거나 바다로 뛰어들어야 한다. 뒤로 물러서면 메마른 발자국을 오래오래 남길 수 있었다. 반대로, 앞을 향해 나아가면 바다에 빠질 것이다. 발자국도 무엇도 남지 않겠지만, 저 빛의 길을 걸을 수 있다. 만약 그 끝에 있는 달을 붙잡지 못하더라도, 빛의 길을 걸은 시간은 분명 지워지지 않고 내 인생에 새겨질 것이다.

 

난 전화기를 꺼냈다. 몇 번이고 문자를 썼다가 지웠다. 어느 것이 정답일까 고민하다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머리가 떠올리지 못한다면, 가슴이 시키는 대로 말하면 그만이었다. 잠시 신호대기음이 울리다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란 무덤덤한 목소리는, 마치 금관악기를 울리는 한 줄기 숨처럼 내 속에서 진동했다. 난 그 울림으로 심장이 다시 두근두근 뛰는 걸 느끼며 결혼 축하해,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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