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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 착륙(희곡 모음)


비상 착륙


인물

 

노인

작가

여자

남자

스튜어디스

 

막이 올라가고 배우들이 등장한다. 무대는 비행기 안. 창문이 두 개 있고 의자가 두 개씩 두 쌍이 있다. 거기에 남자와 여자, 노인과 목사가 함께 앉아 있다. 부부는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있고, 작가는 그들을 다소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다. 한편 노인은 만사 무관심한 태도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여름이라 다들 짧은 옷을 입고 있는데 그만 긴 옷을 입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기장 손님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엘에이 국제공항까지 여러분을 모시고 가는 기장입니다.

오늘도 저희 국민항공 017편을 이용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목적지인 엘에이까지는 이륙으로부터 9시간 40분 정도 걸려 도착할 예정입 니다.

항로상의 날씨는 대체로 양호할 것으로 예상되나 기류가 불안정한 지역을 통 과할 때 에는 다소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좌석에 앉아 계실 때에는 여러분의 안전을 위하여 좌석벨트를 매어 주시기 바라며, 아무쪼록 즐거운 여행이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방송이 끝나자 스튜어디스가 걸어나온다.

 

스튜어디스 여러분, 안전교육은 잘 숙지하셨나요? 이제 곧 출발하겠습니다. 안전벨 트 확인하겠습니다.

남자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따분한 교육은 오랜만이야. 눈이 막 감기더라니까.

여자 응. 확실히 그랬어. 어차피 사고 날 일도 없는데, 좀 간략하게 하면 어디가 덧 나나… 비행기는 가장 안전한 교통수단이란 거 알아? 별똥별 맞고 죽을 확률 보다 비행기 사고 날 확률이 더 작대. 후후.

 

옆 좌석의 노인이 그들의 이야기에 끼어든다.

 

노인 그건 아니지. 조심해야 돼. 내 아들이 비행기 사고로 죽었어.

여자 어머! (깜짝 놀란다) 별일이야.

노인 아들이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니까.

여자 (짜증을 낸다) 그래서 그게 어땠다는 거에요? 비행기 안에서 하필이면 비행기 사고를 그렇게 얘기하고 싶으세요?

노인 아니, 그러니까 난 저기…

남자 그만 하시죠, 어르신. (위압감을 주는 목소리로) 저희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 듣기도 안 좋아요.

 

남자가 험악하게 인상을 쓴다. 노인은 더 말하지 않고 창 밖을 바라본다.

 

여자 (속삭인다) 재수없어, 정말. 저 나이가 되면 눈치란 게 없어지나 봐.

남자 저런 노인네 신경써서 좋을 것 없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행기 타보는 거란 말야. 기분 잡치고 싶지 않아.

여자 아, 출발한다.

노인 (그들에게 들리지 않게) 흥. 어차피 죽을 팔자면 안전교육이고 뭐고 필요없지. 이번 비행기는 예감이 좋아. 추락할 수 있을 것 같아.

 

비행기가 이륙하는 소리가 들린다. 모두 창문을 통해 바깥을 바라본다. 이때 작은 흔들림이 발생한다. 승객들의 몸이 약간씩 흔들린다.

 

남자 (못마땅한 듯이) 시작부터 이렇게 흔들려서야, 어디 불안해서 갈 수 있겠나?

스튜어디스 아닙니다, 손님. 원래 이착륙 때는 충격이 조금씩 발생합니다. 하지만 비행하 는 데에는 전혀 지장 없습니다.

남자 당연한 소릴! (여자에게) 여기서 죽으면 여전히 총각귀신이겠지?

여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작가 (작은 목소리로) 요즘 사람들은 죽음이란 걸 너무 쉽게 여기고 있군. 말세야, 말세.

스튜어디스 이륙이 끝났습니다. 하지만 이상기류가 발생할 수 있으니 안전벨트를 가급적 풀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부는 관광책자를 꺼내들고 손으로 짚어가며 살펴보고 있다. 노인은 아까의 사건 때문에 침울하게 앉아 있고, 그런 그에게 작가가 말을 건다.

 

작가 아까 기분나쁘셨죠?

노인 아뇨, 뭘. 늙은이 주책이었지.

작가 아닙니다. 뭐든 대비하고 보는 게 좋은 거죠. 아무리 비행기가 안전하다지만, 이제까지 사고도 많이 일어났으니까요. 그런데 어르신 아들은 무슨 사고로…?

노인 거 있잖소. 좀 오래된 건데, 괌 추락사고.

작가 아, 그러셨군요. (고개를 숙인다)

노인 살아있다면 지금쯤 당신과 비슷한 나이일 거요. 흠… 보아하니 험한 일은 안

하는 것 같은데. 글이라도 쓰시오?

작가 하하. 예리하시군요. 솜씨는 별로지만 먹고 살려고 쓰고 있습니다.

노인 그럼 책도 내셨겠군. 제목이 뭐요? 이래뵈도 요새 책을 좀 많이 뒤적거렸다 오.

작가 (당황하며) 요즘 낸 건 없습니다. 옛날에 두어 권 내본 적 있었습니다만, 말씀 드려도 모르실 겁니다. 하하.

남자 엄청 안 팔린 모양이군. 그러니 차림새도 저 꼴이지.

작가 ……(얼굴이 확 붉어진다)

노인 저런 상놈 같으니라고.

저딴 말 신경쓰지 마시오.

 

작가는 고개를 숙이고 지갑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들여다본다. 노인은 바깥을 바라본다. 하지만 생각은 어딘가 딴 곳을 향한 듯하다.

한편 여자는 책보기를 그만두고 바깥을 바라보다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여자 오빠, 이 비행기 좀 이상한 것 같아.

남자 (여자에게 눈을 돌리며) 이제 오빠라고 부르지 말랬지? 아까 식도 올렸잖 아. 다시 말해봐.

여자 아이, 참. (쑥스럽게) 자기야~

남자 잘 했어. (흐뭇하게 웃으며) 근데, 뭐가?

여자 아까 출발할 때 창문 밖에 인천공항이 보였어. 그런데 이십분이 지났는데도 경치 가 아까랑 별 차이가 없어. 왜 그럴까?

남자 설마. 기분 탓이겠지. 아니면 너무 높이 떠 있어서 계속 보이는 거 아냐?

여자 그건 아닌 것 같아. 비행기 속도가 얼마나 빠른데. 기분 탓에도 정도가 있지.

남자 그럼 잠깐 비켜 봐. 내가 한번 볼게. (여자가 뒤로 몸을 젖히자 남자가 창문을 바라본다)…어라? 저거 우리나라 아냐? 왜 아직도 이렇게 가깝지?

 

이때 기내 TV에서 방송이 바뀐다.

 

앵커 뉴스속보입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LA공항으로 출발한 국민항공 017편이 랜 딩기어가 접히지 않아 현재 비상착륙을 시도 중에 있습니다. 저희 방송은 지 금부터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017편이 무사히 착륙할 수 있을 때까지 생중계 할 예정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승객들은 잠시 침묵하다가 당황하기 시작한다. 노인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얼굴에 화색이 돈다. 남자가 벌떡 일어서다 안전벨트 때문에 주저앉는다. 급히 벨트를 푼 후 다시 일어나 외친다.

 

남자 말도 안 돼! 우리 비행기잖아!!

여자 이것 좀 봐! 탑승자 명단이 나오고 있어! 김기명, 이홍만, 박철순… 아! 내 이 름이야! 어떡해!

남자 (한참 바라보다) 흥, 비행기 처음 타는 것도 모자라 이런 데 이름까지 나오는 군. (혼잣말로) 이거 회사 녀석들에게 자랑할 수 있겠는데.

여자 어쩐지 좋아보이는데?

남자 조, 좋다니 누가!

 

작가가 어이없다는 듯 그들을 바라본다.

 

기장 승객 여러분, 기장입니다. 먼저 랜딩기어 고장으로 인한 비상착륙 시도를 뒤늦게 말씀드리는 점을 사과드립니다. 본 비행기는 현재 동체착륙을 위해 서해바다에 항공유를 뿌리는 과정을 완료하였고, 이제 인천공항으로 돌아 가 착륙을 시도해보고자 합니다. 실제상황이오니 모두들 침착하게 통제에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스튜어디스가 나와 승객들을 살펴보고 들어간다. 부부는 조금씩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작가는 이미 상당히 불안해하고 있다. 노인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기내 TV를 주시하고 있다.

 

작가 동체 착륙이라니, 참 어이없군요. 어르신은 혹시 아십니까?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라 실감이 나지 않는군요.

노인 알지. 잘 알고말고.

작가 정말이십니까?

노인 정말이네. (창밖을 바라본다) 하늘이 맑구먼. 좋은 날씨야.

작가 (무심코 같은 방향을 본 후)예, 과연 좋은 날씨군요. 그런데 이거랑 무슨 상 관이?

노인 죽기 좋은 날씨란 말야.

작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지금 추락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기장도 충 분히 성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노인 (비웃는다) 아직 경험이 모자라구먼. 당신은 중국집에 음식 시켰는데 오 질 않아서 전화해 본 적 없소? 백이면 백, 지금 출발했다고 말할 거요. 그 래놓고 삼십분 있다 오는 거지. 왜 이렇게 늦었냐고 하면 도로가 막혔다고 할 테고. 아시겠소?

작가 그럼 우리는 다 죽을 목숨들이란 말입니까? 참 나.

노인 죽기가 무섭나 본데, 난 죽을 목숨 이제야 죽는 거니 상관없소.

남자 아니, 할아버지! 아까부터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지금 다들 불안해하는 거 안 보여요? 좀 입다물고 있어요!

노인 나 망녕 안 났네. 그리고 자넨 목소리 좀 낮추게. 내가 더 불안해지는군.

남자 그럼 왜 아까부터 죽느니 어쩌느니 소리를 해대는 거에요? 나이를 그만큼 먹었으면 나잇값을 해야지!

여자 여보, 목소리 낮춰.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남자 저 노인네가 계속 주절거리는 것보단 낫지. 씨팔, 뚜껑 열리려 그러네.

작가 자, 당신이 좀 참으시죠. 안 그래도 다들 불안해하는데 보기 안 좋습니다. 어르신도 이제 그만하시구요. 마음을 좀 평안하게 가지십시오.

노인 (발끈하며) 네놈들이 뭘 안다고! 비행기 사고란 게 그렇게 쉬운 건 줄 알 아? 착륙 한번 잘못하는 날에는 수백 명이 뼈도 못 추리는 거야!

작가 이봐요, 어르신!

남자 아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일어나려고 하자 여자가 뜯어말린다)

노인 (소리친다) 그 때도 마찬가지였어. 스튜어디스는 끝까지 안전할 거라고 말 했고, 우린 그 말을 믿고 빌어먹을 안전수칙이란 걸 끝까지 지켰다고! 그 래서 남은 게 뭐야? 남은……

 

노인이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혼절한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 스튜어디스를 부른다. 스튜어디스가 나와 의자를 젖혀 노인을 눕히고 응급처치를 시도한다.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눈을 돌려 기내 TV를 바라본다. TV에는 여전히 생방송이 흘러나오고 있다. 지상통제본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비행기를 어떻게 착륙시킬지를 설명한다. 성공확률을 몇 %로 보냐는 질문에는 대답을 회피한다. 거듭 질문하자 사람이 많이 타고 있으므로 자칫 괌 참사 못지않은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고 한다.

 

작가 (눈을 질끈 감으며) 맙소사.

여자 오빠… (눈물을 흘린다) 우리, 우리 어떻게 되는 거야? 응?

남자 괜찮아, 우리 여우. 내가 옆에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여자 그, 그렇지. 맞아. 오빠가 있지. (남자의 손을 잡는다)

남자 (흠칫한다) 아니, 웬 손이 이렇게 차가워. 무슨 냉동실 같잖아. (여자의 손 을 자신의 두 손으로 덮는다) 어때, 좀 따뜻해?

여자 그러는 오빠 손도 차갑잖아.

 

남자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여자를 끌어안는다. 여자는 소리를 죽여 훌쩍이며 운다. 한편 스튜어디스는 노인을 다시 자리에 눕힌 후 여자에게 다가온다.

 

스튜어디스 진정하세요. 이러시면 좋지 않습니다. 차가운 음료를 가져다드리겠습 니다.

남자 (스튜어디스를 노려보며)아가씨도 저 방송 봤지? 왜 저 사람이 대답을 제 대로 못하는 걸까? 응? 우리 정말 살 수 있긴 한 거야?

스튜어디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저희 통제에 잘 따라주시면 충분히 안전합니다.

남자 뻔한 대답이구만. 알았으니 얼른 음료수나 갖다 주쇼.

 

스튜어디스가 나간다.

 

앵커 현재 인천공항은 부지런히 017편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 항 관계자 중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어 쉽지만은 않을 전망입니 다. 아까 통제본부에서 밝혔던 것처럼 실력과 운 모두가 따라줘야 할 것입 니다.

 

남자는 뉴스를 보다 핸드폰을 꺼내든다. 여자가 깜짝 놀라며 말린다.

 

여자 비행기에서 핸드폰 쓰면 안돼! 얼른 꺼!

남자 지금 그런 거 따질 때야? 너도 얼른 전화기 꺼내. 혹시 알아? 이따 정말… (여자가 놀란 눈으로 남자를 쳐다본다) 에이, 아무튼! 난 전화할 거야!

 

남자는 전화번호를 누른 후 전화기를 거칠게 귀에 갖다댄다. 잘 안되는지 다시 버튼을 눌러대고 귀에 가져가는 행동을 수차례 하다 욕을 내뱉으며 다시 집어넣는다. 여자는 그 모습을 보지 않고,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흐느낀다. 작가는 아까부터 수첩을 꺼내 무언가를 끄적대고 있다. 스튜어디스가 쥬스를 들고 나타나 이들에게 권하지만, 아무도 마시려 하지 않는다. 그때 노인이 눈을 뜨고 일어난다.

 

노인 아가씨.

스튜어디스 깨어나셨군요. 몸은 좀 어떠십니까?

노인 괜찮은 것 같소. 그보다 나도 뭘 좀 마셨으면 하는데. 이 비행기에 분명 면세가 되는 양주가 있겠지? 혹시 시바스 리갈 있으면 그걸 좀 주시오.

스튜어디스 (얼굴을 찡그리며) 기내에서 음주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노인 그러지 말고 봐 주구려. 술주정부리는 일은 없을 테니. 내 속이 타들어가서 그래요. 워낙 상황이 상황이라. 부탁하오.

스튜어디스 …알겠습니다. 기장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승객님을 믿을 테니 절대 과음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잠시 후 스튜어디스가 술을 가져온다. 노인은 뚜껑을 열고 병째 들어 두어 모금 마시고 입을 뗀다. 취하진 않은 듯하다.

 

노인 커어, 좋군. 그때도 술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소주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지. (부부에게 간다) 자, 이거 한 모금씩 들구려. 둘 다 얼굴색이 안 좋 아 보이는데. 내가 사는 거니까, 돈 걱정은 말고.

 

여자는 잠깐 망설이다 술을 마신다. 금방 입을 떼고 기침을 심하게 하자, 노인이 등을 쳐 준다. 이어 남자에게 술병을 내밀자 그는 망설임없이 반 병 가까이를 단숨에 마신다.

 

노인 주량이 꽤 세군. 내 아들 젊었을 적에도 이랬지.

남자 아까 우리 다 죽을 거라고 말했었죠? 대체 그런 말을 하는 주제에 왜 이렇 게 태평한 겁니까? (손을 들어 사방을 가리킨다) 다들 곧 죽는다고 이 난 리들인데, 유서라도 쓰지 않고.

노인 유서라면 있네. 난 비행기를 탈 때면 언제나 유서를 품 안에 넣고 다니거 든. (쿨룩거리며 웃는다) 어차피 사고가 일어나면 이것도 홀랑 타버리겠지 만, 그래도 마음의 위안은 되는 편이지.

여자 (기막혀한다) 세상에! 왜 그러시는 거에요?

노인 예전에 죽을 목숨이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당연하지 않은가.

작가 (끄적이던 것을 중단하고) 혹시 괌 사고에…? 거기 아드님과 아내 분만 타 고 있었던 게 아니었던 겁니까?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윗옷을 벗는다. 가슴에서부터 배, 팔에 이르기까지 화상자국이 선명히 새겨져 있다. 등에는 뭔가가 박힌 듯한 긴 흉터가 새겨져 있다. 사람들이 경악한다.

 

노인 (옷을 입으며)아들이 효도관광을 시켜준다고 해서 할멈과 함께 가다가 사고가 났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해. 순진하게 승무원들 말만 믿고 웅크리고 있다가, 기체가 두 조각 난 다음에야 상황을 알게 됐다네. 엄청난 폭우가 내렸지만 불 길은 그보다 더 끔찍했어. 아들은 즉사하고, 할멈은 내 손을 붙잡고 수도 없 이 아프다고 말하다 죽었지. 눈을 쓸어 감겨 주면서, 할멈이 자기 허리가 두 동강 난 걸 모르고 죽은 걸 다행스럽게 생각해야 했지. 할멈의 손이 펴지지 않아서 그대로 잡고 질질 끌며 밖으로 기어나와 쓰러졌는데, 아슬아슬하게 구 조대가 구했다고 하더군. 하지만 그건 헛수고였어. (남은 술을 마신다) 나 도 거기서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네. 할멈은 몸이 동강났지만, 난 마음이 동강 났어… 그날 이후 이 허물같은 몸을 하고 다니면서 내가 살아있다고 실감한 날은 단 하루도 없었지……

 

노인이 끝내 고개를 숙이고 흐느낀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대로 주저앉아 눈물을 흘린다. 사람들은 할 말을 찾지 못한다.

 

작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군요. 그동안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노인 (고개를 숙인 채) 여러분에게는 미안하지만, 난 이제 정말 죽고 싶소. 난 10 년 동안 매일같이 지옥을 느꼈다오. 그곳은 꼭 죽어야만 가는 곳은 아니오. 사람이란 살아가야 살 수 있는 동물인데, 내 인생은 항상 그 날에 고정되어 벗어날 수 없었소이다. 어떻게 해도 그 날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죽어서 라도 잊어버리고 싶소.

 

노인의 말에 모두 숙연해진다. 그때 여자가 노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여자 할아버지 말씀은 잘 알겠어요. 하지만 할아버지의 소원이 실현된다면, 우리 모두는 함께 죽는 거겠죠?

노인 나 혼자만 죽어도 상관없지만, 이 비행기가 사고나면 한두 사람 다치는 걸 로는 끝나지 않을 테니.

여자 그렇다면 전 할아버지의 말을 찬성할 수 없어요. (소리친다) 할아버지가 당 한 일은 정말 끔찍했을 거예요. 하지만 왜 그걸 되풀이하고 싶으신 거죠? 아직 비행기 사고가 날 거라고 정해진 것도 아니잖아요! 그저 승무원이랑 저 방송의 말만 듣고 지레짐작해서 확신하신 거잖아요!

노인 아직도 모르는군! 사고는 확실히 일어날 거야! 왜 현실을 외면하려 하지? 그 때도 언덕에 동체착륙을 시도하다가……

여자 (악을 지르다시피) 그때랑 지금이랑 뭐가 똑같은데요! 그건 벌써 10년 전 일이잖아요. 이제 그 날을 그만 떠올리세요. 비행기는 무사히 착륙할 수 있 고, 우린 살 수 있어요! 살아야 한다구요! (울먹인다) 저랑 이 사람은 방금 결혼했어요! 그렇게 힘들게 연애하고, 집안 식구들하고 싸우고… 겨우 결혼 해서 지금 신혼 여행을 가는 건데, 여기서 죽는다는 건, 말도 안 돼요!

남자 (여자를 끌어안으며)자자, 진정해. 뚝. 그만 울고. 우리가 죽긴 왜 죽어? (귓 가에 대고) 오늘 밤에 나랑 그거 한번 해야 하지 않겠어?

여자 (얼굴이 빨개져 남자를 밀쳐내려 한다) 오, 오빠! 다 듣는 데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남자 난 호텔 방에서 제대로 하는 게 소원이었단 말야. 그동안 그 더러운 여관 방에서 하느라 너한테도 미안했고. 지난번엔 임신한 줄 알고 둘 다 난리였 던 적도 있었잖아. (여자가 앙탈을 부리려 하자 아예 끌어안는다)

여자 오빠, 놔… 창피하단 말야…

남자 이젠 아무 때나 마음껏 이것 저것 할 수 있고, 임신해도 상관없어. 그러니 까 지금 그런 재수없는 생각을 할 이유는 전혀 없는 거야. 알았지?

 

남자가 여자에게 키스한다. 여자는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남자에게 키스한다. 작가는 그걸 보더니 수첩에 다시 무언가를 적는다. 노인은 애매한 표정으로 부부를 바라본다.

 

남자 (입술을 떼며) 사랑해. 정말로. (쑥스럽게 웃는다) 우리 사귈 때도 몇 번밖 에 안 해본 말이었지? 오늘부터 매일 해 줄게.

여자 (기쁘게 웃는다) 그래. 매일, 매일, 죽을 때까지… (흠칫한다) 아니, 앞으로 백년 동안 매일 해 줘.

 

부부는 그렇게 한참 끌어안고 있다. 둘 모두 아직 떨리는 것이 보이지만, 한결 진정된 표정이다. 기내방송은 이제 공항 주변을 선회하는 비행기의 모습을 비춰주며, 잠시 후 착륙을 시도할 것이라고 말한다. 부부와 작가, 노인 모두 자리로 돌아간다. 스튜어디스가 이들에게 온다.

 

스튜어디스 이제 곧 착륙할 예정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고, 침착하게 안전수칙을 지켜 주십시오. 먼저 앞 의자에 두 손을 지탱시키고, 이마를 손 위에 대어주십시 오. 다리는 최대한 몸에 밀착시키고…

 

스튜어디스의 설명은 계속된다.

작가는 스튜어디스가 시키는 대로 따라하며 노인을 본다. 노인은 고집스럽게 꼿꼿하게 앉아 있다. 작가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노인에게 말을 건다.

 

작가 어르신. 어르신은 지옥을 믿으십니까?

노인 믿는다고 말하지 않았소? 난 지금껏 지옥 속에서 살아왔다오.

작가 좋습니다. 제가 이야기 하나 해드리지요.

현명한 스승과 제자가 있었는데, 어느날 제자는 천국과 지옥이란 게 정말 있 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갑자기 악마같은 얼굴로 변해 제자의 목 을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제자가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자, 스승은 ‘이것이 지옥이다’라고 하며 목을 풀어주었습니다. 제자가 겨우 한숨을 돌리자 스승 은 찬 물을 떠와 그의 입을 적셔준 후 ‘이것이 천국이다’라고 했습니다.

노인 으음…

작가 제가 처음으로 출간한 소설집에 들어있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지은 건 아니 지만요. 그때는 참 들떠서,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베스트셀러 따 위 수십 권도 넘게 쓸 줄 알았지만… 지금은 이 모양 이 꼴입니다. (사진을 꺼내 노인에게 보여준다) 이쁘지요? 제 딸입니다.

노인 아무래도 엄마보단 아빠 쪽을 닮은 것 같군.

작가 이 아이는 지금 미국에 있습니다. 지금쯤 많이 자랐겠군요. 9년만에 만나는 거니까요.

노인 저런.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군. 무슨 일이라도 있었소?

작가 (사진을 만지작거리다) 저와 아내는 이혼했습니다. 양육권도 그때 빼앗겼구 요. 아내는 딸과 함께 친척도 없는 미국으로 건너가 버렸습니다. 딸애가 제 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해서 내린 결정일지도 모르지요. 아내는 나와 딸애가 만나는 걸 용납하지 않았고, 그래서 전 9년동안 혼자 지내야 했습니다.

노인 그래도 세월이 약인가 보구먼. 지금 가는 건 결국 딸과 만나러 가는 거잖 소. 아내가 허락해준 거요?

작가 허락이라구요? (허탈하게) 이제 아내는 허락해주고 싶어도 못하게 되 었습니다. 닷새 전 교통사고로 죽었으니까요.

(사진을 집어넣으며) 이런 자리가 아니었다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 전 죽고 싶었습니다. 주목받는 신인이란 위치는 금새 3류 작가로 추락 했습니다. 간간히 에세이나 기고해 먹고 살았고, 그 때문에 아내와도 헤어 지게 된 거죠. 아내에겐 미련이 없었지만, 딸애만은 여전히 그리웠어요.

노인 ……

작가 아내는 여전히 딸애를 만나게 해 주지 않았지만, 어렵게 살고 있다는 소식 을 어떻게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보험을 잔뜩 들어놓고 죽을 준비를 했 습니다. 보험금은 아내의 손에 들어가게 처리해 두었구요. 이제 죽기만 하 면 되는데, 딸애 얼굴이 눈에 자꾸 들어오는 겁니다. 어떻게 컸는지 알 수 없어 9년전의 모습으로 날 찾아오는데, 그것도 꼭 죽을 각오를 할 때마다 보이는 거에요. 가스 밸브를 열 때나 자동차 배기가스에 호스를 꽂을 때, 육교 위에서 서성일 때… (눈물을 흘린다) 그래서 차마, 차마 죽을 수 없었 어요. (목이 메어 한참 말을 하지 못한다) 딸애를 다시 한 번 보기 전까진. 그 애를 보지 않으면 제가 죽는 의미까지 사라질 것 같았으니까요.

노인 …그래서 이 비행기를 타게 되었군.

작가 예. 이걸 끊고 며칠 후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수소문 끝에 딸이 있는 곳을 알아냈습니다. 일단 그리로 가서 딸과 만나볼 생각입니 다. 9년만에 만나는 거라 제 얼굴을 잊어버렸을 수도 있고, 어쩌면 절 미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어렵게 살았다지만, 저와 같이 살더라도 그건 마찬가지일 겁니다.

노인 그래도 만나고 싶은 거겠지?

작가 예. 꼭 만나고 싶습니다. 아이가 어떻게 자랐든,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 없습니다. 전 그 아이를 만나야 합니다. 어떻게 변했는지, 여전히 밤에 깊은 잠을 자지 못하는지, 당근을 먹지 못하는지, 초콜렛을 좋아하는지… 그런 것 들을 하나하나 확인해보고, 느껴보고 싶습니다. (단호하게) 그래서, 전 절대 여기서 죽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어르신도 죽는다는 말은 그만하십시 오.

노인 (한참 말이 없다가) …당신은 내 기분을 모르오. 그런 일 따윈 겪어 본 적도, 상상한 적도 없잖소. 게다가 아까부터 유서까지 계속 썼으면서. 당신도 결국 국 마음 한구석으로는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던 거요.

작가 이것 말입니까? (수첩을 꺼낸다) 이건 유서가 아닙니다. 전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정리해서 적고 있었습니다. 어르신 얘기, 저 부부들 얘기… 좋은 소 재가 될 것 같군요.

노인 뭐요? 왜 멋대로 남의 이야기를 적는 거요?

작가 어차피 어르신은 죽을 결심을 하고 계신데,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지만 전 살아남고 싶습니다. 살아서 꼭 이걸 쓸 겁니다. 책으로 나오면 한 권 보내드 리지요. 어디 사시나요? 아니, 어느 묘지에 묻히고 싶으신지 알아야겠군요.

노인 허튼 소리! 이 양반이…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을 놓고! (실언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작가 (간곡하게) 이제 그만 그 기억을 떨쳐내십시오.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야잖 습니까?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하면 어르신은 다시 추락을 생각하며 다른 비행 기를 타실 겁니까? 그건 돈낭비에 시간낭비에 인생낭비입니다.

전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모두가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항 공사에 불평을 터뜨리면서 여기서 내리는 그런 글을요. 저 부부는 호텔로 가 실컷 정을 나누고, 전 딸아이를 끌어안고, 어르신은… 잘 모르겠군요. 뭐 희망 하고 계신 거 있으십니까?

노인 (한참 말문이 막혀 있다가) 그래도 난, 아들과 할멈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소.

작가 그럼 가십시오. 비행기에서 내려서, 집에서 잘 쉬다가 가시면 됩니다. 아드님이 나 부인 분께서 꼭 비행기를 타고 오라고 꿈에 나오기라도 했습니까? 만약 그 랬다면, 책에 그 이야기도 넣겠습니다. 그랬습니까? (노인을 본다. 노인은 대답 하지 않는다) 안 그랬나 보군요. (수첩을 집어넣고 노인의 손을 잡는다)

어르신은 아내되시는 분과 아들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이 비행기가 추락하면 제 딸은 이 세상에 의지할 곳 없는 외톨이가 됩니다. 그리고 평생 비행기를 볼 때마다 절 떠올릴지도 모릅니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집니다… (간곡하게) 제 발, 어르신. 우리는 모두 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이기적으로 보이십니까? 어르신이 이기적이라는 생각은 왜 하지 못하십니까?

우리 모두에겐 잃어선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요, 어르신이 모든 걸 잃 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건 아닙니다. 그 끔찍함을 겪지 않기 위해, 우리는 지금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니까요. 우리에게 그런 사실을 일깨워주신 것 때문 에라도 어르신은 사셔야 합니다.

 

작가가 반 강제로 노인을 잡아 누른다. 노인은 가볍게 저항하지만 힘이 빠진 듯하다. 작가는 어렵지 않게 그를 누른다. 모두는 몸을 웅크리고 충격에 대비한다.

비행기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더니 ‘쾅’하는 소리와 함께 굉장히 큰 충격이 가해진다. 모두 몸을 들썩거린다. 타이어가 마찰하며 긁히는 소리 때문에 모두는 본능적으로 귀를 틀어막는다. 충격은 두 번, 세 번 계속되지만 점차 약해지다 사라진다.

진동이 멈춘다.

 

노인 어떻게 된 거지?

작가 살았습니다! 무사히 착륙했어요!

노인 말도 안 돼!

작가 믿지 못하겠다면 저걸 보십시오.

 

노인은 기내 TV를 본다. TV에는 항공기가 무사히 착륙하는 과정이 되풀이해서 재생되고 있다. 질리지도 않고 계속 바라보는 옆에는 부부가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남자 착륙했어! 살았다구! (여자를 본다) 울긴 왜 울어, 이 바보야.

여자 하지만 오빠도 지금 울고 있잖아? (손을 들어 남자의 눈물을 닦아 준다)

남자 아냐. 이건 그냥 눈에 땀이 차서…

여자 후후. 알았어, 여보. 근데 땀이 너무 많이 나네. 더운 걸까? (서로 눈물을 닦아 준다)

스튜어디스 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소지품을 챙기시고, 질서정연하게 나가주십시오.

남자 이제 그만 나가자.

여자 응. 여보, (남자에게 가볍게 키스한다) 사랑해.

남자 나도. (여자를 꽉 끌어안는다) 둘 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노인을 바라 보며) 할아버지! 그런 재수없는 소릴 해대서 정말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구 요! 그런 소리 하려거든 이제 비행기를 타지 마요!

 

두 사람은 짐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간다. 작가와 노인은 떠나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작가 이제 모두 끝났습니다. 우리는 살았고, 어르신도 살았습니다. 모두 털끝 하 나 다치지 않았습니다.

노인 그런… 건가…(비틀거리며 일어난다) 이제 난… 난… (두 손으로 얼 굴을 감싸고 주저앉는다. 크게 소리내어 운다)

작가 당신의 지옥은 이제 끝났습니다. (노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건 제가 보증합니다. 이제 지난 10년의 몫까지 합쳐서 열심히 사셔야지요.

노인 모르겠네. 모르겠어… 아직도, 난 모르겠어. (흐느낀다)

작가 그걸 이제부터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일단 나가보시지요. 저기 문이 열렸습니다.

 

작가가 스튜어디스를 손짓해 부른다. 그녀는 울고 있는 노인을 부축해 천천히 입구로 향한다. 작가는 노인의 몇 안 되는 짐을 정리해 주다 노인의 자리에 떨어진 봉투를 발견한다. 봉투를 열고 편지로 보이는 종이를 꺼내 흝어본다. 잠시 후, 작가는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후 성큼성큼 밖으로 나간다. 사람들의 와글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졌다가 멀어져 간다. 막이 내린다.

 

-끝-

 

 

 

가독성이 좀 떨어지려나요... 이건 어쩔 수 없습니다 ㅠ
잠시 동안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생각하다 나온 작품입니다. 배우의 찰진 연기가 요구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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