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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리포트를 쓰게 되었습니다


전작과 이어지지 않으므로, 이 작품만 읽으셔도 이해하시는 데 무리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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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리포트를 쓰게 되었습니다 1화


노란색, 갈색, 붉은색 물방울들이 모여 웅덩이가 되었다. 웅덩이는 바람이 불 때마다 자그마한 개천이 되어 길을 따라 흘러갔다. 단 이 강은 졸졸졸 맑은 소리가 아닌, 아기들이 막 빨랫줄에서 걷어낸 이불 홑청에서 노는 것처럼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그 강은 결국 신경질적인 빗자루질에 쫓겨나 누런 마대 자루 안으로 직행하겠지만, 아직 가을은 한창이니 조금 더 유유히 흘러도 될 것이다.

아직 떨어지지 않은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강하게 비췄다. 가을답지 않은 쨍쨍한 빛에, 서둘러 걷고 있던 여자는 눈을 찡그리며 손을 들었다. 목을 살짝 덮는 어두운 금발 아래에는 나이보다 서너 살 어려보이는 동안이 자리잡고 있었다. 뺨에 주근깨처럼 살짝 돋아 있는 몇 개의 여드름도 그녀의 나이를 헷갈리게 하는 데 일조했다. 남자아이처럼 바지를 즐겨 입곤 하다가 오늘은 모처럼 치마를 입었는데, 그 때문인지 평소보다 여자다운 행동을 하고 있었다.

치켜든 손으로 눈을 가리려다 말고, 그녀는 눈을 가늘게 치켜뜨며 햇살을 응시했다. 나뭇잎의 결을 따라 이리저리 깎이고 부서지며 교묘하게 재단된 무지갯빛 육각형들이 일직선으로 그녀에게 와닿고 있었다. 오전 수업이 시작할 시간이 거의 다 되었지만 이 정도의 여유를 순수하게 즐기지 못할 만큼 급한 건 아니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 낙엽 하나가 잡혔다. 팔랑거리며 낙하해 온 그것은 시아의 콧등에 정확히 떨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혀 나뭇잎이 떨어지지 않게 수평을 만들어낸 후 크게 입김을 불었다. 나뭇잎이 확 떠올랐다. 그것을 낚아채 들여다보니 붉은 물이 잘 들어 있었다. 뾰족뾰족 단풍나무 잎. 막 자고 일어나 이리저리 머리가 뻗친 아침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아 그녀는 싱긋 웃었다.

 

“이 몸이 널 책갈피로 선택해 줄게.”

 

시아는 가방에서 제법 두꺼운 책을 꺼냈다. 책 제목은 ‘기사도 문학 작법서’였다. 아무 데나 펼쳐 중간에 끼워넣은 후, 그녀는 본격적으로 달리기를 개시했다.

 

학부제로 운영되는 이곳, 엘드에서 가장 큰 국립대학 세르네는 수업의 질보단 값싼 등록금과 폭넓은 장학금으로 유명하다. 서민을 위한 대학이란 모토이기 때문에 등록금을 아껴 대학을 다니고 싶은 이들이 주로 찾는다. 하지만 그런 이미지 때문에 어중이떠중이 집합소란 오명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최근 학교 측에선 수업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이제껏 학부 위주의 수업을 하던 제도를 일부 수정했다. 자기 과의 수업만 듣는 게 아니라, 다양한 교양 수업들도 들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철학, 음악, 법률 등 몇 안 되는 길 중 하나를 선택해 ‘좁고 깊은 학문의 우물’을 파게 했던 엘드의 대학 중에선 최초의 시도였다. 여론은 신선하다는 이유로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아직 초기인 만큼, 신설한 교양 수업들 중에는 꽤나 괴이한 이름을 달고 있는 것이나, 격한 찬반 토론을 이끌어내는 것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시아가 지금 듣고 있는 수업인 ‘기사도 문학 창작기술’은 종래의 철학적 환상문학과 달리 오직 흥미만을 추구해 기존 문학의 질을 떨어뜨렸다는 비난과, 재미 면을 강화해 대중성을 높이고 종래의 문학과 구별되는 하나의 문화를 이끌어냈다는 평이 엇갈리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시원해진 바깥과 달리, 강의실은 아직도 여름인 것처럼 후끈했다. 장래 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수많은 자들의 열기가 교수의 열성적인 강의와 잘 맞물려 있었다. 시아도 제법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단짝 휴드가 없어 좀 심심하긴 했지만, 칠판에 쓰여진 주제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느라 그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개성 있는 마왕을 창조해내는 방법이라……’

 

그녀가 생각하는 마왕은 단순했다. 일단 공주를 납치해야 하고, 떠돌이 방랑기사에게 쓰러져야 한다. 왕실 기사에게 쓰러질 거라면, 애당초 공주를 납치할 실력이 안 되지 않는가. 그리고 그 방랑기사는 사실 전설의 검의 소유자로, 저주받은 운명을 거부하기 위해 어린 나이에 집을 나와 떠돌며 실력을 쌓는 중. 잘 생겼지만 얼굴을 가로지르는 기다란 흉터 때문에 일반 처녀라면 어쩐지 꺼려지는 인상. 하지만 착한 공주는 그의 인상보다 내면을 볼 줄 알았기에 첫눈에 그녀에게 사로잡히고…… 어쩐지 생각하다 보니 마왕보다 기사의 이야기가 되어 간다.

하지만 이 교실의 분위기는 시아의 메르헨적 망상이 허용될 정도로 느슨하지 않았다.

 

“방랑기사 따위에게 죽는 마왕은 이제 시대의 흐름에 뒤쳐져 있습니다. 오히려 역발상으로 공주를 납치한 후 공주에게 죽는 마왕은 어떨까요?”

 

“아니, 그럼 그 소설의 남주인공은 대체 누구랍니까?”

 

“당연히 마왕이지요. 마왕은 사실 왕실에서 쫓겨난 사생아로, 은발에 금색 눈동자 때문에 저주받은 존재라 불리는 녀석입니다. 그는 자기의 존재를 다시 한 번 알리기 위해 자신의 여동생을 납치하고, 여동생은 그런 오빠를 몰라보고 기회를 틈타 그의 심장에 칼을 꽂는 거지요. 그리고 그는 죽어가면서 출생의 비밀을……”

 

“출생의 비밀도 글러먹은 소재는 마찬가지 아닌가요?”

 

“아니, 지금 누구보고 글러먹었대?”

 

격한 토론이 사방에서 이어졌다. 과연 기사도 문학 전업작가를 꿈꾸는 습작생들의 모임! 주제를 던진 피셔 교수는 빙글빙글 웃으며 토론을 지켜보다 손뼉을 한번 쳤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대화를 뚝 그치고 그를 돌아보았다. 교수 자신이 성공한 전업작가인 만큼, 학생들은 그의 뒤에 후광이 보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에게 복종했다.

 

“여러분들의 열성적인 토의는 저를 기쁘게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한 가지 빠진 게 있군요.”

 

“그, 그건!?”

 

토론에 소극적으로 임하던 시아까지 귀를 쫑긋 세웠다.

교수는 칠판에 큼직하게 썼다.

 

-독자의 수준-

 

분필을 내려놓자마자 교수는 칠판을 쾅 쳤다. 대기가 떨리고 학생들이 움찔했다. 교수는 격앙해 외쳤다.

 

“왜! 왜 아무도 독자의 수준을 거론하지 않습니까? 왜 다들 설정놀음만 하고, 그 설정을 읽을 독자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 겁니까! 우리는 혼자 쓴 글을 혼자 보는 습작생이 아닙니다! 독자에게 책을 팔아 먹고 살 생각을 하는 작가가 되고자 한단 말입니다!”

 

“……”

 

“우리의 독자가 누구입니까? 순수문학을 사랑하고 비평할 수 있는 사람? 설정 하나하나에 눈독들이며 오류를 파헤치는 사람? 아니죠! 기사도 문학은 로망스입니다. 잠시 현실에서 도피하게 해 주는,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한 시간때우기 용입니다. 현실에 지친 사람들, 공부하다 휴식이 필요한 학생들, 기사의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는 여자 층들이 우리의 독자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런 그들의 눈높이에 맞출 생각을 하지 않고, 혼자만의 설정놀음에 매달리려 합니까?”

 

너무 신랄한 그의 말에 몇몇 학생들이 야유를 보냈다. 책상을 두드리며 발을 구르며 괴성을 질러대는 그들을 향해 교수는 냉정하게 말했다.

 

“첫 시간에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전 문학을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 기사도 문학을 쓰는 기술을 가르치려는 겁니다. 글쓰기를 취미나 교양 정도로 하려는 게 아니라, 직업으로 삼게 하기 위함입니다. 잠시라도 방심해 독자의 수준에서 벗어난다면, 당신들은 만족할지 몰라도 책은 팔리지 않습니다. 순수하게 자기 세계를 지어내는 신화문학은 많은 노력과 재능을 요구하기에 그만큼 빨리 저물었지요. 그렇게 신화문학이 기사도 문학으로 대체되면서 신인작가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지만, 그건 그만큼 한 권의 책을 내고 묻히는 자도 많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술집이나 떠돌아다니면서 노래를 부르는 음유시인으로 몰락하고 싶다면 여러분의 생각대로 멋진 글들을 써 보시지요!”

 

피셔 교수의 호통에 야유하던 학생들이 침묵했다. 그 침묵을 향해 교수는 냉정하게 마침표를 찍었다.

 

“그래도 불만이 있다면, 자신이 독자보다 자신에게 맞춰 장문의 리포트로 작성해 오십시오. 그 주장이 이치에 맞다면 그 학생에게 최고 점수를 드리겠습니다. 야유나 일삼는 제군들에게 논리정연하게 주장할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그럼 수업을 마치겠습니다.”

 

더 이상의 반론을 허용하지 않고 교수는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이것도 피셔 교수의 특징이었다. 열이 오르면 그 뒤에 있는 다른 사람의 수업시간까지 잡아먹으려 엄청나게 강의하지만, 열이 식었을 땐 지금처럼 삼십 분 넘게 남은 강의시간 따위 무시하고 나가곤 한다. 하지만 이걸로 이의를 제기하기도 뭐한 게, 학교 측에서 졸업생들의 취직률이 너무 낮은 게 학교의 명성에 흠이 될까 두려워 모처럼 마련한 무료 특강이었기 때문이다. 돈내고 듣는 수업이 아닌 만큼, 항의하는 것은 뒤가 켕기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학교 측에서도 머리를 써서, 무료 수업이긴 하지만 점수를 제대로 받지 못한 학생에겐 특별 수업료를 따로 받겠다고 공언한 바였다. 교수에게 대들고 점수가 무사하길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교수가 나가자 그제서야 투덜거림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그러자 수업을 열심히 듣던 학생들이 발끈해 ‘너희 때문에 교수님이 나간 게 아니냐’며 화를 냈다. 말다툼은 점점 커져, 어느새 두어 명의 학생들이 치고받는 싸움으로까지 발전했다. 키드런트 대륙에서 가장 큰 국가인 엘드의 중심에 위치한 국립대학의 일상풍경……이라고 하면 학교 관계자들은 억울해할 테지만, 엘드에서 몇 년째의 불경기를 타파하고자 이런저런 국책사업을 벌이느라 학교에 오는 지원금이 팍 줄었기 때문에 분위기가 많이 곤두서 있는 것이다.

시아는 강의실에서 싸우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쓰지 않고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어차피 이 수업엔 같이 듣는 친한 학생이 아무도 없어서, 지금의 소동이 우습다고 깔깔거리며 이야기할 상대도 없었다.

그녀는 총총걸음으로, 저만치 걸어가는 교수의 뒤를 따라갔다.

 

“교수님! 피셔 교수님!”

 

“응?”

 

교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 도는 모습은 마치 화가 앞에라도 선 양 예술적으로 느껴졌다. 본바탕이 제법 잘생기고 훤칠한 키를 가지고 있는데다, 강의할 때만 아니면 신사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인기 소설가의 모습은 시아에게 침을 삼키게 했다. 사실 시아가 이 수업을 듣는 것도 글쓰기를 배우려 한다기보다는 여성 팬들을 다수 거느린 유명한 소설가가 어떤 인종인지 궁금해서였다. 유감스럽게도 시아의 취향은 좀 더 근육있는 동년배의 남자였기에 그의 매력에 빠지는 일은 없었지만, 그가 호남형이라는 건 부인하기 힘들었다.

 

“뭔가?”

 

“질문드릴 게 있어서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그런가. 따라오게.”

 

강의실에서 한 층 올라가자 교수실이 나왔다. 경제학의 피욘 교수, 고고학의 브릭 교수 등의 방을 지나자 그의 임시 교수실이 나왔다. 하지만 그는 들어가는 대신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이 학교에는 신기한 물건이 있던데. 반영구 램프라고 했던가? 그거 상용화되지 않은 물건 같은데, 어떻게 만든 건가?”

 

피셔 교수가 지적한 것은 복도에 드문드문 설치된 램프였다. 기존에 저녁이 되면 촛불로 밝히던 것을, 어느 날 갑자기 상아탑에서 마법사들이 우르르 오더니 반영구 램프랍시고 설치해 준 물건이었다. 반영구라는 이름에 걸맞게 낮에도 밤에도 마냥 불이 켜져 있는 신기한 물건이라, 지금도 인근에서 구경꾼이 심심찮게 오고 있었다. 다만, 환한 낮에도 불이 켜져 있는 게 낭비인 것 같다고, 구경한 사람들 모두 마음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거​…​…​상​아​탑​에​서​ 만들어줬다고 하던데요. 원리는 잘 모르겠구요.”

 

“학교가 돈이 많군 그래. 저거 하나하나가 내 한 달 고료 정도는 되겠는데 말이야.”

 

“하아. 이런 데 돈 쓰지 말고, 학생들한테 더 써줬으면 해요.”

 

사실 학교가 돈을 쓴 건 아니었다. 과거 고고학과의 브릭 교수가 선점했던 유물 하나를 양도받기 위해 상아탑에서 뒷돈 형식으로 대준 게 반영구 램프였다. 그 내막을 아는 이는 학교 내에서도 몇 명 되지 않았기에, 다들 이놈의 대학이 또 쓸데없는 걸 질렀구나, 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시아가 방에 들어가자 교수가 의자를 권했다. 그녀가 앉자 교수는 책상을 돌아 맞은편에 앉았다. 그사이 시아는 책상을 휘릭 흝어보았다. 철학서부터 통속소설, 피셔 교수 자신의 책, 신화문학 등 잡다한 책들이 책상 가장자리에 층층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책상 가운데에는 몇 종류의 소식지 - 영세 출판업자들이 직접 발로 뛰며 가십거리를 모아 매주 펴내는 종이묶음이었다 - 들이 있었는데, 각각 밑줄이 쳐진 부분이 있었다. ‘치유의 성녀, 타락’ 이나 ‘돈맛을 안 성녀의 다음 행보는?’ ‘성녀는 과대포장일 뿐’같은 자극적인 제목들이 언뜻 보였다. 무슨 내용일지 짐작가지 않아 조금 더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교수가 그것을 치우고 그 위에 팔꿈치를 올려놓는 통에 놓쳐 버렸다.

피셔 교수는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뭘 질문하러 왔나? 열성적인 학생이라 기쁘군.”

 

“아……저…… 화내지 마시고 들어주세요.”

 

시아는 의아해하는 교수를 눈앞에 두고 침을 꼴깍 삼켰다. 저래보여도 화가 나면 무서워진다는 걸 알기 때문에 마음의 대비를 해야 했다.

 

“저……이 수업의 중간고사 점수가 너무 형편없었는데, 만회할 방법이 없을까요?”

 

피셔 교수의 얼굴이 웃는 채 경직되었다.

잠깐의 침묵 후에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호오. 제게 그런 걸 말한다는 건, 개인적인 가르침을 달라는 이야기일까요, 아니면 점수를 올려달라는 말일까요? 어느 쪽이라도 바람직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입​니​다​만​?​”​

 

딱딱하게 웃는 얼굴로, 그는 또박또박 말했다. 화가 나자 오히려 손아래에게 존대를 시작하는 게 오히려 더 무서웠다.

시아는 떨리기 시작한 무릎을 꽉 붙이고 용기를 내 말했다.

 

“제 중간고사 리포트는 분명 최선을 다한 물건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최하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으면 기말고사를 치를 의욕이 사라진다구요. 거기다 교수님은 평가란에 ‘뭐하러 이런 글을 썼습니까’란 한 줄만 남겼죠. 그렇다면……”

 

“아, 기억납니다. 시아 학생이었죠?”

 

“네.”

 

“그 말대로입니다. 전 더 할 말이 없어요. 그건 자신만을 만족시키는 글이었어요. 제 수업은 남을 즐겁게 하고, 그 대가를 받기 위한 글을 쓰는 수업입니다. 그런데 시아 학생은 누구를 생각하고, 무엇을 바라고 글을 쓴 건가요?”

 

“아…… 그런 건 생각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음 가는 대로, 제가 평소부터 상상해오던 걸 쓴 거라구요. 그런 게 교수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잘 팔리는 글은 아니겠지만, 그렇게 최저점을 맞을 만큼 형편없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시아 학생은 제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군요.”

 

그는 탄식하고 서랍을 열더니 바로 그녀의 글을 꺼냈다. 뒤적이지도 않는 걸 보니 그녀의 글은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아두었던 모양이다. 시아의 예상과 달리, 피셔 교수는 그 글을 대충 흝어보고 던져놓거나 한 게 아니었다.

 

“전 개인의 상상력을 중시합니다. 기사도 문학이 인기있는 건 작가들의 다양한 상상력 때문이니까요. 상상력이라는 점만으로 따지자면 시아 학생의 글은 나쁘지 않아요. 하지만 이 글은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동화만도 못해요. 글에 목적도 없고, 목표대상도 없다 보니 이야기가 중구난방으로 흘러가도 작가 스스로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적어도 보는 사람이라도 의식해 준다면, 시아 학생의 이야기는 제대로 된 방향성을 가질 수 있었겠지요.”

 

“제가 보고 있어요! 그럼 안 되는 건가요?”

 

말하기가 무섭게 시아는 아차 했다. 피셔 교수는 굳은 얼굴을 부들부들 떨더니 결국 폭소했다.

 

“크, 파하핫! 그야 당연하지요! 자기가 자기 글을 보지 않으면 어떻게 글을 쓴다고! 큭, 큭큭…… 그래도 시아 학생은 최소한도의 의식은 갖추고 있긴 하군요. 자기 글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 그마저도 못한다면 작가란 직업은 불가능합니다. 독자와 타협하면서도 최소한 자기가 보았을 때 부끄럽지 않은 글을 만들어내는 것이 작가의 기본이니까요.”

 

“……당연한 말 해서 죄송하네요.”

 

“아아, 덕분에 웃었으니 저도 그냥 지나갈 수 없겠군요. 시아 양의 수고에 ​보​답​해​야​겠​습​니​다​.​”​

 

교수는 매력적인 윙크를 날리더니 노트 한 권을 그녀에게 건넸다. 펼쳐보니 백지였다. 어딜 봐도 특별할 게 없는 평범한 노트였다. 어린애도 아닌데 이런 노트 하나를 상으로 줄 리는 없었다. 아니나다를까, 교수는 그것을 괜히 준 게 아니었다.

 

“시아 학생에게 과제. 지금부터 기말고사 때까지, 그 노트를 들고 돌아다니게나.”

 

‘갑자기 반말? 기분 좋아졌단 건가?’

 

시아가 반응할 틈도 없이 그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자네의 글을 읽어줄 만한 독자를 찾아내 인터뷰를 할 것. 인터뷰 대상이 특이한 사람일수록 내가 줄 점수는 올라가겠지? 물론 몇 사람이든, 수십 명이든 관계없다네. 그렇게 인터뷰를 한 후, 그들을 독자로 가정하고 글을 쓸 것. 이 조건을 완벽히 수행해낸다면, 이걸로 기말 시험을 대체하는 동시에 중간 성적까지 없던 걸로 해 주지. 어떤가?”

 

“흐흥~ 교수님, 지금 한 말 무르기 없기입니다?”

 

중간성적이 최악의 점수인 만큼, 그것을 무효화시키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시아의 안에선 오기란 게 무럭무럭 솟아나고 있었다. 자기가 뭔데 남이 정성들여 쓴 글을 맘대로 평가하는 거야? 란 생각이 그녀의 뇌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교수니까 당연히 학생의 글을 평가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타당한 반론을 생각해낼 여유 따윈 없었다.

교수는 그녀의 자신만만함을 보더니 상당히 도발성이 짙은 웃음을 선보였다.

 

“물론. 나도 매우 기대하지 않을 수 없군. 최.하.점을 받은 학생이 어떤 식으로 점수를 만회할 수 있는지 말이야. 그리고 혹시 착각하면 안 되는 게, 지금의 과제를 해 온다고 해도 무조건 점수를 줄 순 없지. 어디까지나 내 마음에 들어야 하는 거야. 알겠나?”

 

“그거야 잘 알지요. 마지막에 웃는 게 누구일지 저도 기대되네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이 이상 열이 오르면 안 될 것 같아, 시아는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는 얼른 돌아서 문을 나섰다. 그래도 예의없게 문을 쾅 닫는 짓은 하지 않았다.

문이 살며시 닫히는 것과 동시에,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을 인식하자마자 시아는 얼굴을 가리고 화장실로 돌진했다. 복도에 지나가던 몇몇 사람이 멧돼지처럼 돌진하는 그녀를 피해 가장자리로 물러났다. 그 중 하나가 그녀를 알아보고 불러세우려 했다.

 

“시아? 무슨 일인데 그렇게……”

 

“급하니 실례할게, 휴드야!”

 

그녀는 낯익은 목소리를 무시하며 화장실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거울 앞으로 돌진해 손을 치우자 새빨갛게 된 얼굴과 목이 거울 한가득 들어왔다. 옆에 비치된 수조에서 물을 떠 세면대에 담고 맹렬히 세수했지만 한번 빨개진 얼굴과 목은 쉬 가라앉지 않았다. 안 그래도 옷 위로 드러나는 부분이 쉽게 빨개지는 체질인데, 야속하게도 얼굴에 서너 개 남아있는 여드름이 열을 받을 때마다 분화 직전의 화산처럼 솟아나 더욱 민망했다. 목이야 어깨 바로 위까지 기른 머리카락으로 살짝 덮으면 되지만, 이 여드름은 대체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

난감해하며 손수건으로 뺨을 적시던 시아의 귀에 복도 패거리들의 음성이 들려왔다.

 

“교수님…… 시아가 교수님 방에서 후다닥 뛰쳐나가던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설마 교수님이 시아에게 나쁜 짓이라도 한 건 아니겠지요?”

 

“나쁜 짓이라. 그러고보니 나쁜 짓을 하나 하긴 했군.”

 

“교수님, 당신!”

 

“어허, 진정하게, 학생. 보아하니 친구인 것 같군. 그녀가 나오면 전해 주겠나? 그렇게 화장실을 가고 싶었을 텐데 시간을 오래 끌어서 미안하네, 라고 말일세.”

 

“…………”

 

교수의 터무니없는 중상모략보다, 뒤따르는 휴드의 침묵이 시아에겐 더 뼈아팠다.

돈키호테 완역본을 읽어보시면 '기사도 문학'이란 게 뭔지 처절하게 느끼실 수 있습니다.
현대의 양판소 범람 못지않게 그때도 기사도 문학이 어마어마했다지요;
그런 배경을 미리 알고 보시면 1화를 더욱 재밌게 보실 수 있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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