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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ots of the King ~왕은 몰락의 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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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라이더 키바와 귀축왕 란스의 크로스오버 팬픽션. 2009년 8월경 타입문넷 창작게시판에 게재. 양이 약간 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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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서도… 내 적이 되겠다는거냐, 와타루.>
<틀려, 형… 인간이 어떻다던가 판가이어가 어떻다던가… 그런 게 아니라…>

자안(紫眼)의 소년은 동생의 말을 듣고서 마음 속으로 절규했다.
그 이상 말하면 안돼. 말하지마. 거기까지 말해버리게 되면, 나는… 너를…!

<나는 나로서… 쿠레나이 와타루로서 결정한 길을 걷고 싶은 거야.>

─말해버렸다.
소년의 바램과는 완전히 어긋나버리게.
동생은, 소년의 바램을 깨부쉈다.

<… 나와, 싸우게 된다고 해도, 말이냐.>
<형과 싸우게 된다고 해도.>

그 대화를 끝으로.
형제는 서로에게 검을 겨누고, 휘두르게 된다.

형제는 수없이 싸우고, 수없이 상처입고, 그러고도 다시 싸운다.
이윽고, 이 세상의 모든 인류와 판가이어의 운명을 건 싸움이 벌어진다.

그리고… 그 싸움의 ​끝​에​는​─​─​─​─​─​─​─​─​─​─​─​─​─​─​

 


 

「하얀 뱀의 왕」 사가
판가이어의 황제를 위한 갑옷. 후대에 탄생한 '키바'의 프로토타입.
키바의 갑옷과는 설계 사상이 달라, 뱀의 힘을 가진 갑옷이다. 소유하고 있는 휘슬은 웨이크 업 휘슬 하나 뿐.
타이가가 사가크를 호출하면 사가크가 날아와 벨트를 형성하고, 거기에 쟈코더를 넣었다 빼면 사가크 중앙의 문양이 고속도로 회전하면서 변신한다.
갑옷과 세트인 쟈코더 - 蛇(일본어로 쟈) + 리코더 - 라는 피리 형태의 무기를 지니고 있으며, 이것을 사용해 사가크에게 의사를 전달하고 변신하는 상당히 메카니컬한 일면도 가지고 있다.
15세기 무렵, 13마족이 지구 위에 군림하고 있을 때 만들어졌다. 판가이어가 다른 마족들을 누르고 지상을 차지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갑옷이며, 그 당시의 킹은 사가의 힘을 이용하여 수많은 마족들을 학살하여 판가이어들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그 후, 판가이어 최대의 적인 「레젠드로가」와 만나게 되며, 사가의 힘으로도 이길 수 없었던 레젠드로가의 왕 「아크」를 쓰러트리기 위한 갑옷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바로 「키바 시리즈」의 시작이다.

 


"우,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비명에 가까운 절규와 함께, 타이가는 간신히 눈을 뜬다.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무시무시한 격통이 전신을 휘감았다.
나오던 비명조차도 멈춰버리고, 몸을 끌어안게 만들 정도의 통증. 살아오면서 이 정도로 고통을 느껴본 적이 과연 몇번이나 있던가.
통증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자신의 몸을 살필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상반신에 입고 있던 셔츠나 코트는 전부 벗겨져있었지만, 그 자리를 붕대가 차지하고 있다. 가장 많이 감겨있는 부분은 가슴, 복부, 그리고 등과 어깨다. … 확실히 그 부분을 가장 심하게 공격당했었으니까.
그러고보니 이마에도 붕대가 감겨있다. 이 부분은 어째서─

'… 그런가.'

생각해보면 첫번째 국면에서 자신이 쓰러지게 된 결정타는 '머리'였다. 한끝 차이로 간신히 피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충격은 컸다.
머리의 상처, 그리고 전신 여기저기에 퍼져있는 상처들. 분명히 자신이 의식을 잃기 전에 입었던 것들이다.

다음은 자신이 있는 장소의 확인.
자신이 있는 곳은 색이나 질감으로 확인해보건대 석조 건물의 방 안. 재료인 돌들은 꽤 고급이지만, 이 방 자체는 수수했다. 장식물도 적고, 침대는 2인용이지만 역시 보통의 것. 자신은 그 위에 지금까지 누워있었던 것 같다.
이 이상의 정보는 바깥으로 나가기 전까지는 얻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정작 가장 중요하고도 그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얻을 수 없었다.

─자신은 어째서 살아있는걸까.

분명히 자신은 죽었어야 한다. 죽고 싶진 않았지만, 상황으로 봐서는 분명 '죽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자신은 상처가 심하긴 해도 어떻게든 '살아'있다. 죽었어야할 몸인데, 살아있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겨우 정신을 차린거냐, 꼬마.]
"…… 너는─"

혼란에 빠져있는 타이가의 앞에 검붉은 '물체'가 나타난다.
박쥐의 모양을 하고 있는 그것의 이름은 「키배트 2세」. 판가이어족과 운명을 같이 해온 몬스터족의 수장 중 하나이면서… 「어둠의 키바」의 보관자. 타이가의 기억에 있어, 그는 '마지막으로 남은 타이가의 아군'이었다.

"어떻게 된거지…?"
[우선은, 오른손부터 살펴보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키배트의 말에, 반사적으로 오른손등을 내려다본다.
그곳에는 있어야할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판가이어 왕으로서의 증표, 「킹」의 문장이.

선대 킹인 아버지로부터 자신에게 이어져내려온… 타이가에게 있어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그것이.

"아…!!"
[그 싸움의 끝으로, 너는 모든 걸 잃었다.]

모든 것을 잃었다.
키배트의 그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그가 말한대로, 타이가는 정말로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자신이 덮고 있던 이불을 움켜쥐며, 감정을 다스린다.

"… 그럼, 나는… 나는 어떻게 살아난거야…?"

타이가가 의식을 잃어버리기 직전까지 입었던 상처는 타이가의 재생능력으로조차 감당할 수 없는 것들 뿐이었다.
비숍의 음모에 의해 폭주상태로 부활한 선대의 킹에게 관통당했던 심장.
판가이어가 만들어낸 세계 최강의 검, 잔바트 소드로 인해 투구 채로 베여졌던 이마.
그리고 무엇보다도… 친동생이 날린 '황제의 일격'에 직격당했던 동체.
살아있을 리가 없다. 그 상태에서 살아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것 말이지만, 아무래도 너는─]

키배트의 말은 중간에서 끊어졌다. 지금까지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방안으로 들어온 탓이다.
타이가도 키배트도, '갑작스러운' 난입자에 대해 놀라거나 하진 않았다. 그들은 이미 아까 전부터 기척이 가까워져오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으니까. 타이가의 경우엔 부상도 있고 해서 문 바로 앞에 도착했을 때서야 알아차렸지만.

"일어났다…! 살아있었군요!"

그렇게 말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난입자'에 대해, 타이가는 단 하나의 단어밖에 떠올릴 수 없었다.

'… 천… 사…?'

그런 단어가 붙을만큼, 들어온 난입자─ 소녀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타이가가 '천사'라는 단어를 떠올린 것은 외모때문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소녀의 등에는 정말로 은색으로 빛나는 '날개'가 붙어있었으니까.

"굉장히 심한 상처라서 걱정했는데… 다행이에요."
[당신에게 감사를, 레이디 하우젤. 덕분에 이 꼬마도 죽지 않고 끝났다.]
"아니오… 그렇게 다친 사람을 내버려둘 순 없으니까요."

─잘못봤다.
이 여자는 '천사'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한없이 그 반대에 위치하고 있는 '어떤 것'.
어느 의미로, 판가이어나 레젠드로가 이상의 '어둠'. 그런 것을 이 여자는 가지고 있다.

"아, 아직 움직이면 안되요. 비약을 있는대로 쓰긴 했지만, 그래도 상처가 벌어질 수 있으니까─"

문제는, 그 정도의 '어둠'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에게서는 털끝만큼의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그러기는 커녕 오히려 진짜 '천사'와 같은 호의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굉장히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 하지만, 한가지만은 확실히 알겠다. 자신을 살린 것은 이 여자다.

"당신이 나를 살린거군."
"네, 네에…"

타이가는 눈을 감았다. 키배트 2세가 하우젤이라고 칭한 소녀는 붉어진 얼굴로 우물쭈물하며, 타이가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가 눈을 떴을 때.

"… 미안하지만, 아직 피곤해서 일어나기가 힘들어서 그러는데 조금 더 침대 빌려도 괜찮을까?"
"아, 네! 다 나으실 때까지, 얼마든지 사용하세요!"

… 상당한 과민반응이군.

"그,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편하게 쉬세요."
[이 상태에서는 내가 같이 있어봤자 별 도움은 안되겠지. 당분간은 머리 식히고 있어라. … 바보같은 짓은 하지 말고.]

그 말을 끝으로, 하우젤과 키배트는 방을 나갔다.
둘의 기척이 멀어지고… 마침내 타이가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던 허세를 풀었다.
자신의 손을 들어올려 그것을 내려다본다.
이윽고 자신의 몸을, 그리고 자신에게 감겨져있는 붕대를 바라본다.

… 살아있다.
그렇게 너덜너덜하게 부서졌었는데도 살아있다.
─더이상 살고 싶지 않았었는데도, 살아남았다. 살아남아 버렸다.

"왜 나는… 그때 거기서 죽지 못한거야…!!"

이불을 움켜쥐고, 몸안에서부터 넘쳐흐르는 전율로 인해 몸을 떨었다.
분노, 증오, 슬픔, 무력감, 열등감. 그리고…… 절망.
그 모든 감정이 마음속에서부터 흘러나와 타이가의 정신을 집어삼킨다.

"어째서… 어째서 죽게 내버려두지 않은 거야…! 어째서…!!"

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는 것을 바랬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고, 그때 느낀 감정들을 고스란히 가진 채… 살아있다.
타이가에게 있어, 그것은 이미 절망 이외의 무엇도 아니다.

"나는… 나는…!!"

 


[어떻게 해서도… 어떻게 해서도 내 적이 되겠다는거냐, 와타루…!]

믿고 싶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토록 되찾길 원했던 동생이, 스스로의 의지로 '적'이 되겠다고 말한 것을.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현실은 그의 구상을 배신하고 소망과는 정반대의 광경만을 보여준다.

와타루의 존재를 몰랐더라면, 타이가는 언제까지고 고독한 '왕'으로서 존재했을 것이다.
'왕'의 지위에만 매달려, 판가이어들의 위에 군림하면서도 내면으로는 절망과 괴로움밖에 느끼지 못하는 빈껍데기의 왕으로서.

그러나 타이가는 와타루의 존재를 알았다.
이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피를 나눈 동생.
아버지가 다르다던가, 절반은 인간이라던가 그런 것따윈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타이가는 와타루에게서 희망을 발견했다.
타이가에게 있어, 동생의 존재는 간신히 발견한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장소'.
그래서 그토록 원하고 갈구했다. 와타루와 함께 할 수 있게 되는 순간, 자신은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고통과 어둠으로부터 헤어나와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런데도 와타루는─

[언제까지라도… 어디까지라도 인간의 편에 선다는 건가, 너는…!!]

책망이라기보다는 호소. 호소라기보단 절규에 가까운 타이가의 외침.
하지만 그것을 듣고도 와타루는 망설이지도, 주저하지도 않는 눈으로 타이가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말했다.

[달라, 형. 인간이나 판가이어… 그런 걸 전부 떠나서… 나는, '쿠레나이 와타루'의 의지로서 살아가고 싶은거야.]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타이가가 아는 한, 와타루는 누구보다도 불완전한 존재다. 반은 인간, 반은 판가이어의 하프.
그런 존재를 인간들이 받아들여줄 리 없고, 판가이어가 받아들일 일 또한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자신이 그를 지켜주고 싶었다. 함께 있어주고 싶었다.

단지… 그것 뿐이었는데.
그것이 어디부터 어떻게 비틀려져버린 걸까.

​[​와​타​루​─​─​─​─​─​─​─​!​!​]​

분노에 미쳐날뛰며, 「하얀 뱀의 왕」은 자신의 붉은 검을 휘두른다. 그리고 「금색 달의 왕」은 그것을 받아낸다.
─두 형제의 목숨을 건 사투는, 분명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피가 이어진 동생과의 사투는 타이가의 몸만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상처입혔다. 판가이어의 재생력은 몸의 상처는 낫게 했지만, "동생과 진심으로 서로를 죽이기 위해서 싸운 것"으로 생긴 마음의 상처만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치유되지 않았다.
자신은 판가이어의 킹이다. 그러니까 판가이어에 위협이 되는 자는 누가 됐든 없애지 않으면 안된다. 설령 동생인 와타루라고 해도, 그가 판가이어에게 위협이 되는 힘… 「황금의 키바」를 가지고 있는 이상은 죽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이해하고 있다.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다. 다음에야말로 반드시 쓰러트리고, 반드시 죽인다고 몇번이나 결심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죽이는 것만은 할 수 없었다.
머리로는 죽인다고 생각하고 있어도 죽일 수 없었다.
몇번이나 「황금의 키바」를 압도하고 쓰러트리기 일보직전까지 몰아넣기도 했지만, 최후의 최후에는 끝까지 검을 내리치지 못했다. 언제나 마지막 순간에는 와타루를 놔줘버리고, 허무함만을 느끼며 성으로 돌아왔다.

그 즈음.
타이가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약혼자의 존재였다.

체크메이트 포의 일각, 「퀸」.
'인간과 관계를 가진 판가이어'를 처형을 담당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태어날 때부터 킹의 신부로 정해진 존재.
타이가가 그녀를 만난 것은 불과 반년 정도 전의 일이다. 애초에 킹과 퀸은 맡은 역할이 달라서 한 장소에 모이기 힘들며, 더욱이 타이가는 유년시절을 인간들의 사이에서 보냈기에 성인이 되기 전까진 퀸에 대한 이야기밖에 듣지 못했을 정도다.
물론 그것은 그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해진 일이었지만, 타이가는 개의치 않았다. 퀸과 맺어져 종족을 유지하는 것은 킹의 의무이며, 무엇보다도 처음 만난 퀸에게 호감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 호감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연정'으로 변한 것은 와타루와의 싸움 직후부터였다.
동생과 적으로 돌아선 이후부터, 타이가에게 '아무런 계산없이' 다가오는 존재는 오직 약혼자인 퀸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타이가는 더더욱 그녀에 대한 호감을 품어갔고, 그것이 집착으로 변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만약 그대로 이어졌더라면 이야기는 조금쯤 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타이가의 마음이 닿는 일은 없었다.

퀸이 사랑한 것은 타이가가 아니라, 그의 동생인 와타루였으니까.

타이가에게 보여주었던 미소도 상냥함도 모두, 그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타이가가 와타루의 형이었기 때문에. 판가이어이자 '퀸'인 그녀가, 와타루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이 되어줄 수 있는 존재일지도 몰랐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와타루와 적이 된 타이가는 퀸에게 있어 '방해물'… 아니, '없애야만 할 존재'. 타이가에 대한 태도가 변하지 않았던 것은 단지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알 리 없는 타이가는 단지 기뻐했을 뿐이었다. 드디어 자신의 마음이 통했다고,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렇기에 퀸이 초대한 결혼식장으로 갈 때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기뻐했다. 그 안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거짓된 사랑을 믿고 찾아간 타이가에게 돌아온 것은, 비정한 칼날.

퀸이 휘두른 칼은 그대로 타이가의 가슴에 박히고, 판가이어의 피가 뿜어져나왔다.
그 순간까지도 타이가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슴을 관통한 칼날. 그때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고통. 그리고, 양손에 피를 묻힌 채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퀸.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겨우 이해했을 때,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됐다.

[킹!! 네년이 결국…!!]

그때 결혼식장에 뛰쳐들어온 것이 체크메이트 4의 비숍. 판가이어 중에서도 현자라고 일컬어지는 그는 퀸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근처에 대기해있다가 이변이 생긴 듯 하자 곧바로 들어온 것이다. 설령 자신이 잘못 알고 들어온 것이라고 해도, 그 벌을 받을 각오를 하고서.
비숍은 문답무용으로 검을 들어올려, 퀸을 향해 내려친다.


─그것을 제지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타이가의 검.


[킹?! 어째서?!]

심장을 찔렸다는 것은 판가이어에게 있어서도 결코 경시할 수 없는 부상이다. 인간이나 다른 생물들처럼 '즉사'까지 가진 않지만, 심하게 움직였다간 목숨이 위험하다. 그런 상태에서, 판가이어 최상위급의 한 명인 비숍의 검을 막아냈다.
비숍의 검을 막아낸 타이가는 고개만을 살짝 뒤로 돌려, 자신의 뒤에있는 퀸을 바라본다.

그 눈에, 그 얼굴에.
무엇이 담겨있었는지는 그때 타이가를 보았던 퀸밖에 알 수 없었다. 타이가가 다시 고개를 돌려 비숍을 바라보았을 때는 이미 평소의 타이가로 돌아와있었으니까.
그리고 타이가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 나가라."
[… 킹?]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러니까 나가라."
[무슨 말씀을!! 저 여자는 배신자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감히 킹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잖아!!!!"

 

태어나서 이 정도까지 처절하게 외쳐본 적이 있었던가. 적어도 타이가 자신의 기억에는 없다.
비숍이 타이가의 노성에 압도된 사이, 퀸은 모습을 감추었다. 이미 타이가의 감지에도 걸리지 않을 정도로.
타이가는 검을 늘어뜨린 채, 조용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처음부터… 이야기해줬으면 좋았을걸…"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녀가 바라보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이야기했더라도, 판가이어의 법칙 상 퀸은 킹과 혼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니까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이야기해줬더라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텐데.

 


 

「칠흑의 밤을 지배하는 왕」배트 판가이어 LV 322
타이가의 아버지이자 선대의 킹. 즉, 사가와 다크 키바를 사용하여 판가이어 이외의 모든 마족을 전멸시킨 장본인. 판가이어가 마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전투력은 지극히 압도적이며,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조차 '황금의 키바', '어둠의 키바' 둘을 동시에 상대하여 압도하는 힘을 발휘하였다.
'어둠의 키바'의 본래 착용자이지만, 스스로의 실책으로 인해 키배트 2세가 떠나버려 소유권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곳에서의 킹은 비숍에 의해 부활하였으며, 모든 이성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자신의 아들인 타이가조차 알아보지 못한 상태에서 생사를 건 대결을 벌인 끝에 다시 한번 사망.
그러나 22년 전, 배트 판가이어가 그 당시의 퀸을 죽이려고 했을 때 그의 공격을 받아쳐서 죽여버린 것도 갓난아기 시절의 타이가였으니 결과적으로 본다면 자기 아들의 손에 두번이나 죽은 셈이 된다.

 


퀸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다음에도 자신은 와타루와 싸우고 있었다.
분명히 전투력과 전투센스, 경험에 있어서는 자신이 우세. 하지만 와타루가 판가이어 최강의 검 「잔바트 소드」를 손에 넣은 후부터는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었다.
「왕의 갑옷」인 황금의 키바. 그리고 「왕의 검」인 잔바트 소드. 그 두가지를 손에 넣은 「이레귤러」 쿠레나이 와타루는, 사가를 지닌 타이가마저도 완전히 능가해버리기에 이르렀다.

"하아… 하아…"

타이가가 향하는 곳은 그의 모친이자 와타루의 모친이기도 한 선대의 퀸, 마야가 있는 곳이다.
동생에게 패배하고서 어머니에게 가서 호소한다던가 하는 얼간이같은 짓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마야가 가지고 있는 「어둠의 갑옷」을 얻기 위해서다.
판가이어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탄생한 궁극의 갑주. 세계조차 멸망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절대적인 파멸. 그것을 품고 있는 「어둠의 키바」. 그것을 손에 넣기만 하면 와타루를 쓰러트리는 것은 물론이고 진정으로 이 세상을 지배하는 공포의 왕이 될 수 있다.

"크, 쿨럭…!"

걸음을 멈추고, 바닥에 피를 토한다.
아직 와타루에게 당했던 상처가 채 낫지도 않은 상태. 그럼에도 타이가는 끊임없이 발을 움직였다. 목적은 물론 어둠의 키바를 얻기 위해서, 였지만… 그것과 동일한 수준으로 어머니를 만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했다. 그리운 어머니가 있는 동굴에.


─하지만 그곳에서 타이가를 반겨주는 것은 피로 바닥을 물들인 채 쓰러져있는 어머니의 시신이었다.

"뭐…!!"
[이제 오셨습니까, 킹.]

마야의 시신 앞에 서 있는 것은 비숍이다.
그가 오른손에 쥐고 있는 장검에서는 아직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완고하더군요, 이 여자. 얌전히 어둠의 키바를 내놨으면 이렇게 될 일은 없었을텐데.]

……

[하지만 이제 됐습니다. 이 여자가 죽은 이상, 감추고 있던 어둠의 키바도 모습을 드러낼테니까요.]

……

[그렇게만 된다면 당신은 진정한 "킹"으로서 눈을 뜨게 됩니다. 그 후에는 "킹"을 자처하는 가짜 키바를 없애기만 하면…]

그렇게 말하면서.
마야의 시체를 발로 건드리는 비숍을 본 순간.
타이가는 의식을 잃었다.


그 직후의 일은 타이가의 기억에 없다.
단지 정신을 차렸을 무렵에는 사가를 걸친 자신이 비숍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다음이었다.
비숍의 '파편'들이 거울처럼 깨져나가고, 타이가는 비틀거리면서 마야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의 바로 앞까지 도착했을 때, 타이가의 무릎은 저절로 꺾여 땅바닥에 닿았고, 타이가는 무릎을 꿇은 채 두번다시 일어날 수 없게 된 마야를 내려다보았다.

[어머니…]

멍청했다.
예전에 자신이 마야를 만났을 때 비숍이 미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있는 한 마야를 죽일 수는 없다. 실제로 타이가는 마야의 목숨을 노리던 판가이어 몇명을 그 자리에서 소멸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비숍이라고 해도 마야를 노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심하게 낙관해버렸다. '낙관'이라는 것이 왕으로서 해선 안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결과가 이것.
누구에게 뭐라고 할 것도 없이 이것은 자신의 죄다. 돌이킬 수도 없고, 어떻게 사과할 방법도 없는─

… 아니, 있다.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타이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고대로부터 극히 일부의 판가이어들에게만 전해져내려온 "부활의 법". 그것에는 실로 어마어마한 양의 라이프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체크메이트 4 레벨의 판가이어라고 해도 사용하기란 지극히 어렵다. 그것은 타이가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한다.

어머니를 부활시키기 위해서.
몇백, 몇천, 몇만의 인간을… 아니, 설령 판가이어를 죽이게 된다고 해도 반드시─

"…… 어머니?"

뒤에서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가 타이가의 정신을 현실로 끌어내렸다.
반사적으로 등을 돌렸을 때, 그곳에 서있는 것은…

[와타루…?!]

와타루도 이 장소를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여기에 있다고 해도 이상한 것은 없다.
그리고 타이가는 그제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다시 한번 확실하게 인식했다.

─이곳에 있는 것은 어머니의 시신.
─그 앞에서 피를 머금은 검을 쥐고 주저앉아있는 자신.

뒤늦게 비숍의 '파편'들을 찾았다. 하지만 그것들은 이미 가루가 되어 완전히 없어져버린 다음.
즉, 지금 이 상황은─

"형이…… 어머니를……?"

다르다.
마야를 죽인 것은 비숍이고, 자신은 그 비숍을 없앴을 뿐이다.

[틀려, 이건……!]
"용서못해…"

와타루의 손을, 그의 키배트가 물어뜯는다.
그것과 함께 와타루의 전신에 판가이어의 글래스가 떠오른다.

"절대로, 용서못해…!!"
[아니야… 아니야!! 내가 아니야!! 와타루, 내 말을─]

"용서못해, ​타​이​가​─​─​─​─​─​─​─​─​─​─​─​─​─​─​!​!​"​

이미 와타루는 타이가의 말같은 건 조금도 듣지 않고 있다.
타이가가 비숍을 가루로 만들어버렸을 때처럼, 지금의 와타루도 어머니를 잃은 분노와 증오, 그리고 비애에 완전히 지배당하고 있다.

─그리고, 타이가가 비숍에게 그랬던 것처럼 와타루도 타이가를 부숴버리기 위해서 움직인다.

그 몸에는 「황금의 키바」를 걸치고, 그 손에는 「마왕의 검」을 들고서.

​[​하​아​아​아​…​…​!​!​]​

키바는 잔바트 소드를 수직으로 내려친다. 기술이고 뭣도 없이 오로지 분노와 힘에만 의지한 참격. … 아니, 참격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타격. 평상시의 타이가라면, 판가이어 최강의 전사 '사가'로서의 타이가라면 문제없이 피할 수 있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타이가는 와타루에게 당한 상처가 다 낫지도 않은 상태. 거기에 조금 전 비숍을 소멸시키면서 힘을 과도하게 사용한 다음이다. 회피하려고 일어서는 순간 몸이 삐그덕거려 다시 무릎을 꿇어버리고, 그 상태에서 자신의 검 쟈코더를 들어올려 잔바트 소드에 부딪힌다.
─그러나 이미 여기저기에 금이 가 있던 쟈코더는 부러지고, 잔바트 소드가 어깨에 꽂힌다.

[우, 아아…!!]
​[​죽​어​─​─​─​─​!​!​]​

어깨에 박힌 잔바트 소드를 힘으로 뽑아내고, 다시 내려친다.
그것이 가슴을 가르고 지나가 바닥에 박히자, 강제로 다시 들어올리면서 이번엔 검면으로 타이가의 얼굴(사가의 가면)을 후려친다.
그 직후 뒤로 날려가는 사가를 쫓아가, 발로 갈라진 가슴을 걷어차, 더욱 뒤로 날려버린다.

[제… 기랄…!!]

사가는 바닥을 손으로 짚으며, 입에서는 피를 토하면서도 간신히 몸을 일으킨다.
이대로라면 승산은 고사하고 키바의 손에 죽게 된다. 어떻게든 벗어나지 않으면─
그렇게 생각하던 시점에서, 키바가 잔바트 소드를 수평으로 눕혀 든다.

본래 와타루는 절반은 인간, 절반은 판가이어인 하프다. 거기다 예전에 레젠드로가와의 싸움에서 한 차례 감염된 적도 있었기에, 레젠드로가의 힘마저도 지니고 있다. '힘'이라고 하는 면에 있어서 와타루는 분명 판가이어 역사상 최상위 레벨.
그러나 그런 와타루조차도, 잔바트 소드를 완전히 제어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와타루를 따르던 세 마리의 암즈 몬스터들은 스스로의 의지와 힘을 담아 "잔바트 배트"를 만들어내, 와타루가 잔바트 소드를 제어할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잔바트 소드 자체의 출력을 보다 높이는 역할도 하고 있다.

키바가 잔바트 배트를 붙잡고, 그대로 검날을 갈아올리는 것과 동시에 잔바트 배트에서부터 흘러나온 진혼곡이 울려퍼진다.
잔바트 소드의 은색 검신이 천천히 붉은 색으로 물들어 빛을 발하며, 주변을 핏빛으로 뒤덮었다.
거기까지 본 사가는 더이상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후퇴를 결정했다. 지금 키바가 준비하고 있는 것은 왕의 검, 잔바트 소드로 행해지는 「처형」. 말하자면 잔바트 소드로 할 수 있는 최강의 일격.

무엇보다도 이 공격은, 상대와 거리가 얼마나 벌어져있느냐 따위는 상관없다. 그저 키바의 시야에 들어있다면, 키바가 검을 휘두르는 방향에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공격할 수 있다.

잔바트 소드를 쥔 손을 뒤로 젖힌 채, 자세를 낮춘다.
거리상으로도 시간상으로도, 이미 회피할 수 없는 곳까지 왔다. 여기서, 사가는 생각을 바꾸고 키바를 향해 몸을 돌린다.
회피하려다간 맞는다. 그렇게 되면 100% 확률로 죽게 된다.
그렇다면 차라리─

마침내 키바는 마황력의 비축이 끝난 잔바트 소드를 휘두른다.
왼쪽에서 오른쪽. 一문자를 그리는 수평 베기. 단지 그것뿐인 행위였지만, 그것이 불러온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어찌되었건 산조차 둘로 쪼개버릴 수 있는 힘을 담고 있는 핏빛의 검광(劍光)이 앞으로 날아갔으니까.
나무를 쪼개고, 바위를 가르고, 대지를 깎으며 왕의 심판이 나아간다.

그 앞을 핏빛의 '문장'이 가로막는다.
키바의 문장이 아니라, 체크메이트 4 킹의 문장. 그것이 검광의 앞을 가로막아, 진행을 막지만그것은 아주 잠깐뿐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광은 문장을 가볍게 찢어발긴 후 계속해서 날아간다.
그 사이, 사가는 마황력을 최대한으로 축적시킨 쟈코더의 자루를 앞으로 내민다.

사가를 상징하는 백색의 마황력과 핏빛의 마황력이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미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진 사가의 힘으로는 키바의 일격을 막아낼 수 없다. 그것은 사가 자신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등을 돌리고 도망치다 베이고 죽는 것보다는 낫다.
백색과 적색이 한데 뒤섞여 소용돌이 치고, 그것은 이 일대를 뒤흔드는 대폭발로 이어졌다.

─그 폭발이 걷히고.
─키바가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사가는 이미 모습을 감춰버린 후였다.

 


[하아… 하아… 후우…]

사가는 어딘지 모를 숲속을 걷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면서도, 나무를 붙잡아 몸을 지탱해나가며 걸음을 옮긴다.
처음부터 키바의 공격을 온전히 막을 수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설프게 막으려고 들었다간 그 방패 채로 동강나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마황력을 방출하여 그 힘을 막지 않고 폭발시키는 쪽으로 유도했다.
자신의 힘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걱정했었지만 다행히도 키바의 검광은 계산대로 폭발했고, 사가 자신은 그 폭발을 역으로 이용해서 탈출할 수 있었다. 일부러 폭발을 피하지 않고 그에 휩쓸려, 단숨에 멀리까지 날아온 것이다.
그 대가로, 얼굴 부분의 페르소나가 깨지고 이마를 크게 베여버렸지만, 그래도 살아있다.

간신히 눈앞의 위기는 모면했다고 해도 아직까지 완전히 위험에서 벗어났다고는 할 수 없다. 움직일 수 있는 동안 조금이라도 멀리 도망치지 않으면 안된다.
자신에게는 아직 해야할 일이 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몸이지만, 아직 어머니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책임과 의무가 남아있다.
그러니까,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죽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생각한 사가의 등에, 흑적색의 '빛'이 작렬한다.

​[​카​아​아​아​아​악​?​!​]​

사가의 몸이 앞으로 튕겨져 날아가고, 그 앞에 있는 나무에 부딪힌다.
그 부딪힌 나무를 꺾어버리며, 그보다 더욱 앞으로 날아간다. 그리고는 그 뒤에 있는 나무와 부딪히고, 그것마저도 꺾어버린 후에야 간신히 사가의 몸이 땅에 떨어졌다. 그 충격으로, 사가크가 떨어져나가고 사가의 갑주가 벗겨진다.
사가에서 타이가로 돌아온 그는, 이미 얼마 남아있지도 않은 피를 계속해서 토해낸다.

"카, 학…!!"

일어서기 위해서, 손으로 땅을 짚는다.
하지만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일어설 수가 없다. 떨리는 팔에 계속해서 힘을 넣어보지만, 경직된 팔은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도 또 한번 피를 토하고, 결국 바닥에 얼굴을 박는다. 토해낸 핏물 속에는 내장의 파편으로 보이는 고깃조각들이 섞여있고, 그나마도 산산조각 나있는 상태였다. 지금까지 축적되왔던 충격들이, 조금 전의 그 '작열'로 인해 한꺼번에 터져나온 탓이다.
타이가는 그 상태에서 간신히 얼굴만을 돌려, 자신을 공격한 존재를 바라본다.

배트 판가이어.
타이가의 아버지이자… 선대의 킹이자 판가이어 역사상 최강의 킹.
와타루의 아버지인 쿠레나이 오토야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전해들은 존재.

─하지만 그 모습은 심상치 않았다.
언제나 반쯤 접혀있는 머리의 날개가 완전히 펼쳐져있으며, 그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살기와 투기의 양도 어마어마했다.

조금 전까지, 타이가를 죽음 일보직전까지 몰아넣었던 와타루가 작아보일 정도의 존재감.

'어디서 이런 괴물이 갑자기─'

──────죽은 판가이어를 되살리는 '부활의 법'. 그 단어가, 타이가의 머리를 스쳤다.
자신이 조금전까지 어머니를 부활시키기 위해 사용하려고 했던 그것. 그것을 쓸 수 있는 존재는 지극히 한정되어있다.
타이가와… 체크메이트 4의 '퀸'. 그리고 '비숍'. 퀸이 선대 킹을 되살릴 이유는 없으니, 아마도 이것은 비숍이 한 짓이겠지.

비숍은 마야를 죽이기 전부터 이 일을 꾸미고 있었다. 선대 킹을 부활 직전의 상태까지 만들어놓고, 만약 자신이 타이가나 와타루에게 죽게 되면 그의 라이프 에너지로 선대 킹이 부활할 수 있도록.
하지만 '부활의 법'으로 부활하게 된 판가이어는 예전의 모습이나 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지금 타이가의 눈앞에 있는 배트 판가이어처럼.

'나는… 어머니를 이렇게 만들려고 했던가…'

물론 타이가가 비숍의 사정같은 걸 알 리가 없다. 단지 느꼈을 뿐이다.
자신의 힘으로는 완전한 부활의 법을 사용할 수 없다. 그런 것으로 어머니를 부활시켜봤자, 죽음의 세계에서 돌아오는 건 눈앞의 '킹'과 같은 괴물에 지나지 않는다.

"후… 후후후후…"

자신이 토해낸 피바다 속에서 타이가는 웃음을 흘렸다.
이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따윈 아무것도 없다. 해야할 일도 없다.
자신의 마음을 침식한 절망 앞에서, 타이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직후, 웃음은 배트 판가이어에 의해 걷어차임으로서 끊겼다.

"크, 아…!!"

머리를 붙잡고 들어올려 나무에 쳐박고, 그렇게 해서 출혈이 일어난 얼굴을 바닥에 내리찍는다. 그것을 다시 들어올리고, 이번엔 주먹으로 복부를 때린다. 안그래도 약해져있던 내장이 더욱 찢어지고, 타이가가 다시 피를 쏟았을 때 그 속에 섞여나왔다.
그 피바다 위에, 다시 얼굴을 쳐박는다. 이미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배트 판가이어는 친아들인 타이가조차 알아보지 못한 채 무자비한 공격을 날렸다.

​[​■​■​■​■​■​■​■​■​■​■​■​■​!​!​!​!​]​

타이가의 목을 붙잡고 높이 들어올린 채, 배트 판가이어는 포효했다.
이미 완전히 무너뜨린 사냥감의 숨통을 빼앗기 직전의 의식. 이것이 끝나면 타이가의 목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가해, 그 목을 부러뜨린다.
그러나 지금의 타이가에게는 그것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없다. 몸은 커녕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살해당하길 기다릴 뿐.

어머니를 지키지 못해 죽게 하고, 친동생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으며 최후에는 이성을 잃은 상태로 부활한 아버지의 손에 죽는다.
설마, 자신의 끝이 이런 것일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한심하군…'

자신의 목을 감싼 배트 판가이어의 손에 힘이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는다.
그리고, 타이가의 목을 쥐고 있는 손이 마침내 그 목을 꺾어───

 


[그렇게 둘까 보냐!!]

 


흑적빛의 작은 '무언가'가 날아와 배트 판가이어의 팔을 때린다.
그 충격으로 타이가를 놓친 배트 판가이어가 뒤로 물러나고, '무언가'는 계속해서 배트 판가이어에게 부딪혀 타이가에게서 떨어뜨린다.
그 틈을 타서 쓰러진 타이가에게 날아와, 그의 옷자락을 '물고' 끌어내기 시작했다.

[정신차려라, 꼬마! 그대로 뻗어버리면 죽는다고!!]
"키…… 배트……?"

키배트족의 키배트 2세. 과거에는 배트 판가이어와 함께 레젠드로가를 쓰러트렸으며… 22년 전 '인간' 쿠레나이 오토야에게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어둠의 키바를 빌려주고 선대 킹을 쓰러트리는데 일조했던 존재.
그 이후에는 갑자기 자취를 감추어버려, 그와 그가 보관하고 있는 어둠의 키바의 행방은 마야밖에 알 수 없게 되었었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이제와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엄청난 일이 벌어졌었군, 빌어먹을…!!]

마야의 죽음은 키배트 2세에게 있어서도 통한의 실수였다. 마야의 부탁을 받고 '인간과 화합을 바라는 판가이어들'의 설득을 하러 갔던 중 벌어진 일이니까. 그때 무리를 해서라도 거절하고 곁에 있었더라면─
─마야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고 통곡하는 건 나중에라도 할 수 있다. 지금은 마야의 아들 중 하나인 타이가를 살리는 쪽이 급하다.
그렇게 판단한 키배트 2세는 생각을 행동에 옮겼다.

[캬브릭!!]

키배트 2세는 타이가의 손등을 물어뜯어 라이프 에너지를 빨아낸다.
그러자, 타이가의 허리에는 봉인의 쇠사슬, 카테나로 이루어진 벨트가 모습을 드러냈고, 키배트 2세는 거기에 스스로 날아가 '장착'된다.
타이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의 전신을 판가이어의 글래스가 뒤덮는다.

─그리고, '어둠'이 나타난다.

조금전까지는 틀림없이 낮이었을 하늘이 칠흑의 어둠으로 물들고 붉은 색의 달이 떠오른다.
그 '어둠'도, 그 '핏빛'도.
남김없이 타이가와 키배트 2세에게 빨려들어간다.

'어둠'과 '핏빛'이 뭉쳐지고, 보옥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머리에는 왕의 정신과 영혼을 보호하는 칠흑의 쌍익(雙翼) 「제논 스타피라이저」.
목에는 저급의 몬스터라면 보는 것만으로 무릎을 꿇게 만드는 악마가 봉인된 「다크니스 쵸커」.
몸에 박혀있는 하늘.물.땅의 마황석들이 가진 힘을 무한대로 증폭시키는 마황력 증폭장치 「킹 브레스」.
우주 공간에서조차 착용자를 보호해내는 흑룡 "가오라 드란"의 피부로 만들어진 「드란 메일」.

판가이어 최강의 존재이자 최고의 위치에 존재하는 「킹」.
그 판가이어의 킹이 가질 수 있는, 최강 최고 최대 최흉의 전투형태.
일찍이 이 땅을 지배하고 있던 13마족의 최정점. '최강'임과 동시에, '무적'의 상징.
그 이외에의 무수한 칭호─일절의 과장조차 더해지지 않은─로 불리고 있는 마왕의 갑옷.

​─​─​─​─​─​─​─​─​─​─​─​─​「​어​둠​의​ 키바(Dark Kiva)」.

본래 어둠의 키바는 장착자를 선별한다. 스스로가 인정한 존재라면 인간이든 판가이어든 가리지 않고 착용'되어' 주지만, 인정하지 않은 존재라면 설령 판가이어라고 해도 그 목숨을 예외없이 ​빼​앗​아​버​린​다​(​실​제​로​ 지금까지 어둠의 키바를 걸치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선대의 킹' 뿐이며, 그 이외의 유일한 장착자인 쿠레나이 오토야조차 지속적으로 라이프 에너지를 빼앗겨 결국 소멸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반대로.
스스로가 인정한 자에게 착용되고, (인간인 쿠레나이 오토야와는 달리)자신을 감당할 수 있는 존재에게 장착될 경우.
결코, 자신의 주인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 상처가─]

나아가기 시작했다.
어둠의 키바가 장착되면서 강제로 일으켜진 타이가는 자신의 두 손을 들어올려 바라본다.
단지 어둠의 키바를 걸쳤을 뿐인데도, 지금까지 타이가를 죽음으로 몰고갔던 상처들이 치료되고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응급처치에 지나지 않으며, 완전히 치료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동안 이 상태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만큼 상처가 깊었으니까.

[안도하고 있을 틈은 없다, 꼬마. '괴물'이 일어나기 시작했어.]

키배트 2세의 말에, 손을 내리고 고개를 돌린다.
그곳에서는 조금 전 키배트 2세에게 부딪혀 날아갔던 배트 판가이어가 일어나고 있다.
이성을 잃어버리고, 본능만으로 움직이며, 22년 전에는 억제되어있던 그 힘의 리미터를 모조리 풀어버린 「최악의 판가이어」. 아마도 그 힘은, 지금의 '어둠의 키바를 걸친 타이가'조차 능가할지 모른다. 아니… 분명히 능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신감은 아니고, 예상이나 예측도 아니다. 이유는 타이가 자신도 알 수 없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배트 판가이어가 포효를 울리며 달려든다. 그 모습에 옛날의 '킹'으로서의 위엄따윈 조금도 남아있지 않고, 단순한 '짐승', 단순한 마물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짐승을 바라보며, 타이가─ '어둠의 키바'는 조용히 손을 들어올린다.
그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의 하늘에, 녹색의 빛으로 이루어진 키바의 문양이 떠오른다.
들어올린 손을 아래로 내리자, 문양은 그대로 떨어져내려 배트 판가이어를 통과하고 그의 발밑으로 내려갔다. 문양이 그를 통과하면서 어마어마한 스파크가 일어났고, 그것은 곧 배트 판가이어를 구속하는 쇠사슬이 된다.

본래라면 어둠의 키바에게 거역하는 모든 존재를 구속할 수 있는 힘인데도, 배트 판가이어는 그것을 어거지로 찢어내며 달려온다.

[다크 키바의 힘조차도, 녀석에겐 발목 붙잡기밖에 안된다는 건가…!]
[… 어차피 저걸로 막을 생각은 없었어.]

문양을 만들고 떨어뜨렸던 손의 검지와 엄지를 부딪히고, 그대로 튕긴다.
그것을 신호로, 배트 판가이어를 묶고 있던 문양이 폭발을 일으킨다.

​[​■​■​■​■​■​■​■​■​■​■​■​■​!​!​!​!​]​

폭발이 배트 판가이어를 휘감고, 그 몸을 뒤로 튕겨버린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어둠의 키바는 배트 판가이어를 향해 달려갔다.
몸을 일으키려는 배트 판가이어의 복부에 발을 꽂아넣고, 그가 주춤하는 사이 얼굴을 주먹으로 갈긴다.
하지만 배트 판가이어는 그다지 타격을 받지 않은 것처럼 곧바로 일어나, 이빨을 드러내며 덤벼왔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정말 단단한 녀석이야…!!]
[약점같은 건?]
[없다. 그때에조차 '어둠의 키바'와 '황금의 키바' 둘이 협공해서 간신히 쓰러트렸어. 솔직히 말하자면, 나로선 이 자리를 피하는 쪽을 권하고 싶은데.]

15세기 무렵, 이 세상은 13종류의 마족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그리고 판가이어를 그 13마족의 정점으로 올려놓은 존재가 바로 눈앞에 있는 배트 판가이어, 선대의 킹.
그는 그 당시 어둠의 키바를 장착하고, 대부분의 마족들을 전멸 일보직전까지 몰아넣었다(일부는 멸종). 기나긴 판가이어의 역사 속에도, 그가 킹으로서 군림하던 때 이상으로 판가이어가 번영했던 적은 없다.
─그랬던 존재가, 지금은 마수로 전락했다.
한때 자신과 똑같이 '킹'이라고 불렸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강력한 존재였을 터인 자가.

그렇게 생각하고 한순간 반응이 느슨해진 사이, 배트 판가이어의 주먹이 다크 키바의 가드 위로 떨어진다.
분명히 방어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팔이 경련을 일으킬 정도의 타격. 사가보다 훨씬 우위에 있는 다크 키바의 힘으로도 이 정도 데미지. 사가였다면 팔이 부러져버렸을지도 모른다.
공격은 펀치만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진다.
주먹, 손톱, 수도(手刀), 팔꿈치, 장타(掌打), 발차기, 무릎. 가끔은 박치기나 물어뜯기같은 공격까지 나왔다. 일절의 형식이나 절도같은 것 없이, 그저 본능에만 의지한 난폭하기 이를 데 없는 연타.
그 힘과 스피드는 이미 다크 키바의 반응속도를 훨씬 뛰어넘었다. 공격 중 몇개는 보이지도 않았고, 피하거나 막는 것보다는 몸에 꽂히는 것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다크 키바에게 치명타가 될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이것도… 「킹」의 말로인가…?'

그렇다면, 자신도 언젠가는 이렇게─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을 억지로 지운다.
이'것'은 죽은 뒤에 강제로 되살려진, 썩어문드러졌어야 할 시체가 움직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과는 다르다. 적어도, 그렇게 믿지 않으면 안된다.

배트 판가이어의 손톱을 피해 뒤로 뛰어오르며, 다크 키바는 앞으로 손을 내뻗는다. 다시 한번 모습을 드러낸 녹색 빛의 문양이 배트 판가이어의 몸을 휘감는다.
그 후, 다크 키바는 벨트에서 휘슬 하나를 꺼내 키배트 2세의 입에 물렸다.

「씰 휘슬」. 몬스터를 봉인하는, 다크 키바가 가진 휘슬 중에서도 특수한 물건이다.
과거, 선대 킹은 이것으로 울펜족, 머맨족, 프랑켄족의 마지막 생존자들을 봉인했었는데, 그 이외에도 판가이어 최대의 적이었던 레젠드로가의 왕 아크를 봉인하는데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지금 씰 휘슬이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그 선대 킹, 배트 판가이어다.

22년 전까지 자신의 적을 봉인하는데 사용해왔던 힘을 이번에는 그 자신이 고스란히 받게 된 선대 킹.
과연 최강의 판가이어답게 씰 휘슬에 굴복하지 않고 그 압력에 버텨낸다. 본래 씰 휘슬의 힘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 상대를 한번 완전히 쓰러트려야 할 필요가 있는데, 체력도 마황력도 거의 고스란히 남아있는 배트 판가이어를 봉인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하지만 그 대신, 씰 휘슬이 발한 봉인의 힘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휘되었다.
배트 판가이어는 아직까지 '키바의 문양'이 걸고 있는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 그 위에 씰 휘슬의 봉인까지도 한꺼번에 받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구속력이 배트 판가이어의 움직임을 억제하며─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된다.

『웨이크 업 2』

처음부터, 그것을 노리고 있었다.
배트 판가이어에게 '회피'의 기회도 '방어'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공격을 한다.

「킹스 버스트 엔드」. 대지를 둘로 갈라놓는 「마왕의 심판」.
그것이, 움직이지 못하는 배트 판가이어의 가슴에 꽂힌다.

​[​■​■​■​■​■​■​■​■​■​■​■​■​■​■​■​■​■​■​■​■​■​■​■​■​!​!​!​!​]​

배트 판가이어의 절규는 길게 이어졌다.
배트 판가이어의 암적색 마황력과 다크 키바의 녹색 마황력이 한참동안 서로를 밀어내다가─ 마침내 녹색의 창이 암적색의 방패를 꿰뚫는다.
동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그곳에서부터 암적빛의 마황력과 무지개빛의 라이프 에너지가 끊임없이 새어나온다.

─그런 상태에서조차, 움직였다.

그 몸이 유리처럼 깨져나가며 붕괴되는 중인데도, 멈추지 않고 움직인다.
그 목적은 오로지, 눈앞에 있는 적을… 자신의 아들을 죽이기 위한 것.
오른손을 뻗어온다. 설마 이 지경이 되서까지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다크 키바는 그 움직임을 허용해버린다. … 아니, 설령 알았다고 하더라도 피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다크 키바의 목을 움켜진 그 손에는, 이미 힘이라곤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그런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남아있는 힘따윈 없는데도, 배트 판가이어는 다크 키바의 목을 조르기 위해 손을 올렸다.

하지만, 결국 그것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오른팔이 팔꿈치에서부터 끊어진다. 이미 그 부분의 글래스화가 이루어져, 깨져나간 탓이다.
동체가 끊어지고, 하반신이 부서지는 순간 왼손을 내뻗어 다크 키바의 어깨를 붙잡고 매달린다.
배트 판가이어에게 다크 키바를 공격할 힘은 없다. 그러나ㅡ 그 속에 담겨있는 '광기'와 '증오'는 결코 멈추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결국 배트 판가이어는 라이프 에너지가 모조리 고갈되어 소멸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다크 키바의 목을 물어뜯다가 사라졌다.

[……]
[끝났는가…]

배트 판가이어가 사라지고도, 다크 키바는 한참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아직까지, 그의 손에도 발에도… 아니, 온 몸에 배트 판가이어를, 자신의 아버지를 꿰뚫고 살해한 감촉이 남아있다.
지금까지 판가이어라면 얼마든지 죽여왔는데도, 이 정도로 그 느낌이 남아있는 건 처음이다.

[… 괜찮은거냐, 꼬마.]

키배트 2세의 물음에, 타이가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몸이라면 이미 천천히 나아가고 있다. 어딘가에 숨어서 앞으로 한달 정도 쳐박혀있으면 완치될 것 같다.
하지만, 몸 이외의 부분… 마음에 난 상처는 어떻게도 되지 않는다.
괜찮느냐, 라고 물으면 괜찮지 않다라고 밖에 대답할 수 없다.

[아무튼, 이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지 않으면 안돼. 지금의 네 몸은 상처만 막아둔 것 뿐이다. 어딘가 안전한 장소로 가도록 하지.]
[… 아아.]

이 세상에 안전한 장소따위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다크 키바는 발걸음을 옮겼다. 자기 자신조차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는 길을 따라서.

 


─────감각이 둔해졌다. 그 때문이라고밖엔 할 수 없다.
다량의 출혈, 전신을 뒤덮고 있는 치명상. 무엇보다도 허술해져있는 마음. 그것들 때문에,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감각이 바닥까지 떨어져있었다. 물론 통각까지도.

 

 

─그래서, 자신의 가슴을 뚫고 나온 검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 어?]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본다.
등을 관통하고, 심장을 뚫고, 가슴을 찢어 앞으로 튀어나와있는 검.
비록 핏빛으로 물들어버리긴 했지만, 자신이 그 형태를 잊어버릴 리는 없다.

'황금의 키바'가 가지고 있을, 「잔바트 소드」.

아, 그런가.
배트 판가이어와 죽고 죽이는 동안 따라잡혔던가.
그렇게 이해하는 다크 키바의 머리는 냉정하게 식어있었다. 어떠한 감정도 남아있지 않고, 그저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해냈다.

죽기 직전, 단 한순간 두뇌의 활동이 지극히 빨라지는 현상. 다크 키바─ 타이가에게 있어서는 지금의 현상이 그것이다. 감정이 사고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기에, 감정이 일어나는 것보다도 사고 능력이 먼저 움직인 탓이다.

잔바트 소드가 뽑혀져나가고, 다크 키바는 천천히 무릎을 꿇는다.
간신히 고개를 뒤로 돌리자, 그곳에는 '황금의 키바'가 서 있다.
자신을 향해오는 시선은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있다. 하지만 그것은 열기로 가득찬 것이 아니라, 얼음처럼 냉정하고도 전율스러운 감정. 지금의 키바는 감정에 지배당해 이성을 잃어버린 와중이면서도 사고 능력은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분노에 불타면서도 지금까지 기다렸다. 다크 키바가 배트 판가이어를 쓰러트리고 완전히 무방비가 되는 이 순간을.

그리고 다크 키바는 그 모든 것을 한순간에 이해했다. 머리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저 '느낌'으로.
이 녀석은 자신이 힘이 다 빠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절대 피할 수 없는 순간을 노려서 공격해온 것이라고.
지금의 잔바트 소드를 사용한 공격. 그것은 막혀있던 상처들을 모조리 다시 터트려버렸다. 갑옷의 틈새를 통해 피가 뿜어져나오고, 그것은 순식간에 바닥을 메웠다.

키바는 제어용의 마수인 타츠롯트가 장착된 왼팔을 가슴 앞으로 들어올리고, 타츠롯트의 머리를 조작한다.
타츠롯트의 날개와 날개 사이에 있는 문장들이 어지럽게 회전하다가, 최종적으로는 키바의 박쥐 문양으로 고정된다.
두 팔을 교차시켜 앞으로 뻗었다가 양 옆으로 벌리면서 자세를 낮춘다. 그리고 키바의 발 밑으로, 붉은 빛의 염화가 타오르기 시작한다.

「웨이크 업 피버」

본래부터 황금의 키바에게는 어둠의 키바와 동등한 힘이 잠들어있다. 마황력을 컨트롤하는 보조 마수인 타츠롯트의 존재로 인해 리미터가 채워져 다소 약화되어있긴 하지만, 웨이크 업을 사용하면 그것마저 풀려버린다.

키바의 몸이 위로 떠오른다. 딱히 크게 뛰어오르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그 몸이 '날아올랐을' 뿐이다.
조금 전 다크 키바가 불러냈던 '밤'과 '붉은 달'이 다시 나타난다.
하지만 그것들이 이번에 빨려들어간 것은 다크 키바가 아닌 황금의 키바. 붉은 달을 뒤로 한 채, 키바의 몸이 '금색의 창'으로 변하여 떨어져내린다.

배트 판가이어를 소멸로 이끌었던 다크 키바의 「킹스 버스트 엔드」. 그것과 쌍벽을 이루는 키바의 「엠페러 문 브레이크」.
그것이, 죽음을 눈앞에 둔 친형의 목숨을 완전히 빼앗기 위해서 날아온다.

​[​─​─​─​─​─​─​─​─​─​─​─​─​!​!​]​

키배트 2세가 무언가 소리친다. 하지만 그것이 다크 키바의… 타이가의 귀에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이미 시야도 흐려졌고, 청각도 상당 부분 잃어버린 상태. 그저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황금의 창'만을 망연하게 바라본다.

이번에야말로 죽는다.
'왕의 심판'이 떨어지고 있는데도,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타이가 자신에게 피할 의지가 없다.

 


[왜…]

키바를 바라보는 타이가의 눈에는 초점이 없다.
눈앞이 아니라,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어째서 이렇게 되버린 거야…]

어디부터 잘못된걸까.
어디가, 어떻게. 언제부터.

[나는……]

소중한 동생을 찾고.
사랑하는 약혼자와 결혼하고.
잃어버렸던 어머니를 되찾아서.
지금까지 받아온 모든 고통을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나는… 행복해지고 싶었던 것 뿐인데…]

그것이, 그렇게도 잘못된 것이었던가.

 


킹스 페르소나의 아래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바닥으로 떨어진 눈물은 핏물과 섞여,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타이가의 오열이, 와타루에게 닿는 일은 없고.

 

'왕의 심판'은 용서없이 타이가에게 떨어진다.

 


【 EYE CATCH 】

 


 

「핏빛의 마황」어둠의 키바
판가이어가 만들어낸 최강의 갑옷. 황금의 키바와 동등한 힘을 지니고 있으며, 장착자의 힘을 무한대로 증폭시킬 수 있다.
키배트 2세가 부는 웨이크 업 휘슬의 횟수에 의해, 3종류의 필살기를 발동시킬 수 있다.
역시 탄생된 것은 15세기 무렵. 「최초의 갑옷」인 사가의 힘으로도 이길 수 없었던 레젠드로가의 왕 「아크」를 쓰러트리기 위해서 탄생되었다. 그 당시의 킹은 이 다크 키바의 씰 휘슬로서 아크를 봉인했고, 무수한 동족들의 생명과 맞바꾼 웨이크 업 3 「킹스 월드 엔드」로 대부분의 레젠드로가를 사멸시켜 피투성이의 승리를 이끌어냈다고 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후 킹스 월드 엔드는 그 위험성으로 인해 봉인되었고, 이후 안전성을 높인 '황금의 키바'가 탄생하게 된다.

 


─LP 2년 5월 첫째 주.

[뭐, 그런 이야기다. 엠페러 문 브레이크가 마황석에 꽂히는 순간 두 키바의 마황력이 폭주했고, 그 충격으로 차원의 벽이 깨져 여기로 튕겨왔다… 말도 안되게 확률 낮은 이야기지만, 실제로 일어나버린 이상 그 이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군.]

최대로 전개하면 세계 하나를 멸망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닌 다크 키바.
그리고 그 다크 키바와 동등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황금의 키바.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힘' 두개가 동시에 정면으로 충돌하고 폭주했으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은 없다. … 차원이동이라고 하는 건 확실히 상정 범위 외의 이야기였지만, 심하게 놀랄 것도 아니다.

키배트 2세가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이 세계는 자신들이 있던 세계가 아니다. 하물며 마계조차 아니다.
지금까지 존재한다는 것조차도 몰랐던 전혀 별개의 세계. 굳이 비유하자면 판타지 소설책에서 봤던 '검과 마법'의 세계다. 인간이 있고, 마물이 있고, 몬스터가 있고, 마인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허공에 대륙 하나만 떠있고, 세계의 끝이 존재하는 '평평한 세계'. 지금까지 '둥근 세계'인 지구에서 살아온 타이가에게는 꽤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리고 지금 네가 있는 이곳은 루도라사움 대륙의 서쪽에 있는 마물들의 땅, '마인령'이다.]

마인(魔人 : Dark Lord).
대륙의 생명체가 마왕과의 피의 계약을 통해 강화된 생물.
마인이 되면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 되고, 마왕과 같이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는 절대결계를 지닌 불노불사의(단, 약한 마인의 경우 봉인마법으로 봉인할수도 있음)강력한 존재가 된다(절대결계는 보통 공격으로는 파괴 불가. 리미터가 해제된 용사나 마검 카오스, 성도 닛코우, 엔젤나이트, 혹은 다른 마인이나 마왕이 필요).

"마인이니 용사니… 터무니없는 세계군."
[우리들이 있던 곳도 딱히 다를 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저쪽에서는 타이가 자신도 '마황'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 그렇게 치자면 용사는 '와타루'나 'IXA'일까.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지만.

[그런데… 이제부터 어떻게 할 생각이냐.]
"…… 어떻게, 라는 건?"

생각외로 냉정한 타이가의 목소리에 키배트 2세는 드물게 우물쭈물거리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쪽'에서의 너는 죽은 거나 다름없다. 이곳은 너의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 '저쪽'에 있는 것들과는 관계없는 곳이지. 이곳에는 판가이어도, 레젠드로가도, IXA나 키바도 존재하지 않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지?"

타이가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그 스스로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차가웠다.

"지금까지의 나와는 상관없는 이 세계에서, 모든 걸 잊고 살아가라고 말하는건가?"
[… 그렇다.]

체크메이트 4의 정점이자 모든 판가이어들의 지배자인 「킹」.
그 이름은 지금까지 타이가를 무겁게 짓눌러온 짐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도 키배트 2세의 눈에는 그랬다. 그런 이름에, 그런 직위에 얽매여야 했기 때문에, 타이가는 지금까지 모든 것을 잃어버려야 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라면.
판가이어가 존재하지 않고(어차피 저쪽 세계에서도 ​멸​망​해​버​렸​겠​지​만​)​,​ '킹'으로서가 아니라 '아리카도 타이가'로서 존재할 수 있는 이 세계에서라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 더이상, 스스로의 감정을 속일 필요도 눈을 돌릴 이유도 없어진다.

 


"고작 그런 이유로, 모든 걸 잃어버린 자에게 '살아가라'고 하는 거라고?"

 


이미 타이가의 얼굴에서, '표정'이라고 하는 것은 깨끗이 사라져있었다.

"약혼자에게 배신당하고, 어머니를 지키지 못해 잃어버리고, 이성을 잃어 괴물이 된 아버지를 이 손으로 죽이고, 끝에는 친동생의 손에 살해당한 나에게… 그런 자에게 잘도 '살아가라'고 말하는군."
[꼬마…]
"…… 미안. 걱정해주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 알고 있지만…"

지금은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견뎌내고 당장이라도 부서져버릴 것 같은 머리속을 지탱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키배트 2세의 이야기를 들을 여유도 없다.
그것을 보며 키배트 2세도 내심 너무 성급했다고 혀를 찼다. 어떻게든 위로한다고 꺼낸 이야기였는데, 이런 식이라면 역효과… 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다지 큰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타이가는 일어서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그를 걱정한 어머니 마야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지금까지 수없이 상처받으면서도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 타이가 자신을 위해서라도.

'일단, 당분간은 내버려둘까.'

 


타이가에 대한 소문은 마물들 사이에서 상상 이상으로 빨리 퍼졌다.
아무튼, '그' 하우젤이다. 불길을 조종하는 엔젤나이트의 마인. 사려깊고 얌전한 성격이며, 자신의 일보다는 동료들의 일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상냥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닌 '마인답지 않은 마인'. 게다가 은빛의 머리카락과 순백의 날개를 가져, 확실히 '천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용모를 지니고 있다. 마물들 중에도 인기가 높으며, 같은 마인들 사이에서도 호감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마인 라 하우젤이 정체모를 남자를 데리고 왔다"라고 하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물론 그런 충격을 받은 것은 마물들만이 아니다. 같은 마인들도, 거의 비슷할 정도로 놀랐다.

"…… 그런가요, 하우젤이."

마음 속의 동요를 결코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침착한 태도로 차를 마시고 있는 여인.
지금 이곳에 있는 그녀야말로 리틀 프린세스(쿠루스 미키)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다음 대의 마왕이라고 주목받고 있던, 선대 마왕 가이와 인간 여성의 사이에서 태어난 마인 '호넷'이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가이의 교육에 따라 모든 지식과 기술을 몸에 익혔으며 카리스마도 발군. 마왕의 혈통과 품격을 모두 지닌데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이 세상을 '인간과 마물이 공존하는' 평온한 세계를 만드는 일을 이상으로 하고 움직이고 있는 여인이다.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만, 사실입니다. 이미 목격자가 상당히 많아요."

그 보고를 호넷에게 한 것은 호넷의 심복이며 마인사천왕의 일각인 실키 리틀레즌.
마귀합성술을 특기로 하고 있으며, 그녀의 부대 역시 대부분 그녀가 만든 합성마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본인은 상당히 작은 체구를 하고 있지만, '리틀'이라고 불리는 승마용의 거대 합성 마물을 타고 다니며 전장을 가로지른다.
열혈한이며, 매우 성실한 성격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지나쳐 융통성이 없는 면도 있어, 생각지도 못한 적을 늘리는 경우도 있다.
…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정말이지, 이런 시기에 무슨 일을… 케이브리스의 첩자일지도 모르는데…!"

호넷과 그녀를 위시로 한 일파의 마인들은 선대 마왕 가이의 유언… "질서있는 세계를 만든다"는 것을 이상으로 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그 유언을 듣지 않으려는 마인들도 있으며, 케이브리스는 그 '반대파' 마인들의 수장인 최강 마인의 이름이다.
개전 초기에는 호각이었지만, 지금은 호넷파의 두배가 넘는 마인들이 케이브리스 측에 가세하여, 양 세력의 전력 균형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와있다.

"그런데, 실키. 그 남자는 어떤 분이었나요?"
"… 그게… 저도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에…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실키의 말에 따르면, 하우젤이 데려온 남자는 한달이 지난 지금도 거동이 불편했기 때문에 밖으로 나올 수가 없다고 한다.
하우젤을 시중드는 마물들에 의하면 그 외형은 지극히 인간과 닮아있지만, "심장이 뚫리고 이마가 찢긴 상처를 입고도" 살아났다는 시점에서 이미 아웃. 인간일 확률은 제로에 수렴한다.
24마인 중에는 그런 남자가 없으므로, 필연적으로 '마물'이라는 이야기인데… 호넷파의 마물 중 그 정도로 큰 부상을 입을 만큼 '전쟁'을 치룬 마물은 없으며,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런 부상이라면 죽는다. 그것은 케이브리스파의 마물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다.
결론. 그 남자는 이곳 소속의 마물이 아닐 뿐더러, 자신들이 아는 존재조차 아닐 확률이 높다.

"하우젤은 착하니까. 다친 사람이나 마물같은 거 내버려두지 못하잖아."

실키의 한탄이 섞인 말을 받은 여인의 이름은 마인 사테라.
호넷의 소꿉친구이며, 생명이 없는 것(돌이나 강철)에서부터 가디언을 만들어내는 일을 특기로 하고 있는 '인간'의 마인이다. 바로 옆에 있는 거구의 스톤 가디언의 이름은 '시저'로, 120년에 달하는 세월동안 사테라를 지켜온 올드 가디언이다.

"우리에게 위협이 될만한 녀석을 아무 생각없이 기르고 있을 리는 없잖아."
"… 틀린 이야긴 아니지만, 장담은 할 수 없어. 이게 케이브리스의 책략 중 하나라면─"
"에, 케이브리스한테 책략같은 걸 쓸 수 있는 머리가 있던가?"

실키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케이브리스는 '최강 마인'이라는 이름이 어울릴만큼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지만 그 이외에는 꽝. 특히 '머리'를 쓰는 부분에 있어선 바닥을 긴다.

"… 확실히, 케이브리스 본인에게는 그 정도의 지략이 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그의 밑에는 책사라고 할 수 있는 마인들이 많이 있어."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할만큼 '부지런한 마인'은 없던 걸로 아는데."

평소에는 아방한 주제에 왜 이럴 때만 얄밉게 따박따박 말대꾸를 해오는건지.
게다가 그녀가 하는 말이 전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실키 자신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차마 반론할 수가 없었다.

"…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지금의 우리들에게는 거기까지 신경쓸 여유가 없군요."

한숨과 함께 나온 호넷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녀들은 두배가 넘는 숫자의 마인들이 가담한 케이브리스 일파와 싸우는 중이었으니까.

 


케이브리스는 마인령 남부를 완전하게 제압하여 지배하에 두고 있었다.
마인 사천왕인 켓셀링크, 같은 급인 마인 카미라. 그리고 마인 레이와 마인 카이토를 휘하에 넣어, 상상 이상의 전력을 지닌 케이브리스는 거칠 것없이 호넷 일파가 다스리고 있는 북부를 향해 싸움을 걸었다.

이 시점에서 호넷의 진영에는 호넷을 포함하여 다섯명의 마인이 속해있었다.

가이와 인간 여인의 사이에서 태어나 자란 마인 호넷.
마인사천왕의 한 사람, 마귀합성술의 힘을 지닌 실키 리틀레즌.
화염을 조종하는 힘을 지닌 엔젤나이트의 마인 라 하우젤.
호넷의 소꿉친구이며, 가디언을 만드는 힘을 가진 마인 사테라.
세계 최고속이라고 일컬어지는 호루스의 마인 메가라스.

이것에 비해, 케이브리스의 진영에는 호넷파의 두배를 넘는 수의 마인들이 참가해 있었다.

사천왕의 한 사람이며, 가장 오래되었으며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마인 케이브리스.
사천왕의 한 사람이며, 두번째로 오래된 여성 드래곤의 마인 카미라.
사천왕의 한 사람이며, 품위있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칼라족의 마인 켓셀링크.
전설의 ​충​술​사​(​蟲​術​使​)​이​며​,​ 언제나 공복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인 가르티아.
얼음을 조종하는 힘을 지닌 엔젤나이트의 마인 라 사우젤.
투신 감마의 육체와 최강의 마법력을 지닌 보석 마인 레드아이.
뇌전의 왕이라고 불리며 번개를 지배하는 힘을 가진 마인 레이.
케이브리스의 친우이며 잔혹하고 삐뚤어진 뱀의 마인 메디우사.
지극히 거대하고 강력한 힘을 지닌 오니의 마인 바보라.
꿈을 지배하며 혼에 감응하는 힘을 지닌 소녀 마인 와그 아카.
변신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신사적이고 정정당당한 마네시타 마인 지크.
전설의 권법가이며 인간을 증오하는 강철의 마인 카이토.
천재적인 두뇌를 지닌 기계공학의 마인 파이아르.

본래는 호넷의 진영에도 "노스"와 "아이젤"이라고 하는 마인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우여곡절끝에 한 인간 모험가에게 사망한 상태. 그 때문에 안그래도 빈약한 호넷 진영의 전력은 대폭으로 축소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넷은 여전히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지금은 마인령에서 떠나있는 리틀 프린세스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그녀가 돌아와서 "인간과 마물이 공존하는 세계"를 만들 수 있도록.

─하지만, 대륙 제일의 미모와 지력을 갖고 있는 그녀조차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게 된다.

'인간과의 공존'을 원하면서도, 정작 '다른 이들의 힘을 빌려 케이브리스와 싸운다'는 선택지는 떠올리지 못한 그녀로서는 맹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다. "같은 마인이 아니면 마인에게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은 일부의 인간들 이외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에 가까운 상식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마인이 아니면서 마인을 쓰러트릴 수 있는 자"라는 지극히 희귀한 존재가 느닷없이 마인령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녀가 아닌 누구라도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불꽃을 다루는 엔젤나이트」라 하우젤 LV 89
엔젤나이트의 마인. 삼초신 중 하나인 플래너가 원마왕 질에게 넘겨준 파괴신 라 바스월드의 화신 중 한명. 불꽃을 다루며, 반대로 얼음을 다루는 라 사이젤의 동생.
대단히 남을 신경써주고 얌전한 성격이지만, 사려가 깊은 나머지 주변에 너무 신경을 쓰는 타입이라 지휘관으로서는 그다지 좋지 않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세계에 있어 "아리카도 타이가"와 "키배트 2세", 그리고 "사가크"의 최초 발견자. 다 죽어가는 타이가를 살려낸 것도 그녀다. 성격이 성격인 탓에 치명상 투성이의 타이가를 그냥 놔두지 못하고 성으로 데려와 치료했으며, 그 이후의 재활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덧붙여, 마왕 질에 의해 마인이 됐다는 시점에서 이미 천살 정도는 가볍게 통과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저… 마물들의 음식이라서 입에는 안맞을지도 모르는데…"

하우젤은 머뭇거리면서, 타이가가 식사를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타이가는 식사를 입에 넣고, 몇번 우물거리다가 대답했다.

"… 아니, 문제없어. 여기까지 신경써줘서 고마워."

애초에 판가이어에게 필요한 식사는 "라이프 에너지"다. 보통의 식사로 에너지를 얻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을 잡아먹는 것과 비교하면 효율이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졌다.
하지만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고, 무엇보다 그녀가 "인간의 편"에 가담한 마인 중 하나라는 것도 알았기 때문에 잠자코 식사를 계속했다. 마물들의 식사라고는 했지만 판가이어 역시 저쪽 세계에서는 마물과 다름없는 존재. 다행히 맛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런 타이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우젤은 타이가의 대답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타이가로서는 어째서 하우젤이 여기까지 자신에게 신경을 써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잠자코 받아들였다.
살아도 해야할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이 없고, 딱히 죽어도 상관없는 몸이다. 그러니까 그녀가 자신에게 호의를 주길 원한다면 입다물고 받기로 하자.
그런 생각으로, 그저 아무 생각없이 타성적으로 식사를 입에 옮겼다.

식사를 하면서, 하우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이제는 일과에 가깝게 되버렸다. 정작 타이가 본인은 그다지 진지하게 듣지 않았지만.
그렇지만 하우젤이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부터 이야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하우젤에게는 '사이젤'이라고 하는 언니가 있다.
불을 다루는 하우젤과는 대조적으로 얼음을 다루는 엔젤나이트의 마인. 쌍둥이 자매임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은 호넷의 진영에, 다른 한 사람은 그 적인 케이브리스의 진영에 속해있다.
친자매인데도 현실은 적. 이 대목에서 타이가의 흥미가 상승했다.

"그래서… 언니가 속해있다는 케이브리스라는 건, 어떤 자이지?"

타이가의 질문에 하우젤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참동안이나 우물쭈물하다가, 하우젤은 간신히 말을 이었다.

자신의 욕망에 지극히 충실하며, 스스로가 마왕이 되기 위해 리틀 프린세스를 노리는 무뢰한.
리스라는 하급 몬스터 종족 출신의 마인이며, 베이스가 베이스인만큼 상당히 머리가 나쁘다.
하지만 4천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끝없는 수련과 육체개조를 통하여 그 전투력을 '마인 최강'의 경지까지 끌어올렸으며, 지금은 5m가 넘는 거구에 6개의 팔을 가진 "괴물"로 진화했다. 그 힘은 같은 사천왕들은 물론이고 호넷조차도 상대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런 힘이 있기 때문에, 아직 제대로 각성하진 않았다고 해도 마왕의 힘과 지위를 계승한 리틀 프린세스를 노릴 생각을 할 수 있는 거고.
(더군다나 그의 밑에 있는 마인들 중에는 그의 힘에 굴복한 이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지금으로부터 몇개월 전, 마인사천왕 중 한 사람인 카미라와 케이브리스가 격돌한 적이 있다.
케이브리스는 카미라에게 연정을 가지고 끊임없이 구애하고 있었지만 추한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하는 카미라가 그것을 받아들일 리 없었고, 결국 수백년에 걸친 구애가 한칼에 거절당하자 케이브리스는 그대로 폭주를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케이브리스의 압승.

분명히 카미라는 마인 중에서도 손꼽히는 강자다. 그러나 그렇다하더라도 케이브리스 쪽이 훨씬 더 강하다.
게다가 케이브리스의 특성 중 하나로, 폭주하게 되면 평상시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평소의 상태에서조차 '최강의 마인'이라는 호칭을 독점하고 있을 정도인데, 폭주하게 되면 그것조차도 훨씬 웃도는 힘으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파멸의 화신으로 변화한다.
케이브리스 다음으로 오래된 마인이자, 마인사천왕의 일각인 드래곤의 마인 카미라.
하지만 그녀는 폭주한 케이브리스와 마주하고, 몸과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입었다.
이후 카미라를 죽이기 일보직전에 정신을 차린 케이브리스는 카미라에게 눈물을 흘리며 사죄했고, 이후부터 카미라가 무슨 요구를 하든 그것을 들어주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프라이드가 손상될대로 손상된 카미라가 케이브리스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일은 천지가 둘로 쪼개져도 있을 수 없겠지만.

'…… 쓰레기군.'

하우젤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타이가는 케이브리스에 대해서 그런 결론을 내렸다. 그것도 주저없이.
자신의 욕망대로 되지 않으면, 사랑하는 것조차도 부숴버리는건가. 게다가 그 녀석의 경우엔 그렇게 할 수 있는 힘까지 있으니까 더더욱 질이 나쁘다.

거기까지 생각했던 타이가는 눈을 감고 작게 고개를 저었다.

'…… 아니, 나도 마찬가지인가.'

와타루가 자신의 곁으로 와주지 않았을 때, 자신은 와타루를 죽이려고 했다.
결과적으론 죽이지 못했고(라기보단 되려 살해당할 뻔했고), 몇번이나 죽일 기회가 있었을 때도 놔주거나 한 일이 여러번 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이 친동생인 그를 죽이려 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 주제에 얼굴도 보지 못한 케이브리스를 쓰레기로 취급할 자격이 있을까.

"…… 타이가?"
"아, 미안. 신경쓰지마. 그보다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줬으면 좋겠는데."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하우젤은 한눈에 알아차렸다.
지금 타이가는 무리해서 웃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자신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그런 걸 염려해줄 필요는 없는데도, 자신을 대하는 것에 있어서도 극도로 조심하고 있다.
… 정작 하우젤은 타이가가 그녀를 반대로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었지만.

 


"… 나한테도 형제가 있어. 내 경우엔 내 쪽이 형이지만."

무언가 화제가 없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런 소리를 입밖으로 내고 있었다.
하고 많은 말 중에 왜 하필… 말하자마자 곧바로 후회했지만, 타이가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 있던 하우젤이 그 말을 놓칠 리 없었다.

"헤에… 어떤 사람이었나요?"

하우젤의 물음에 새삼스럽게 와타루에 대해 생각해본다.
와타루에 대해서는 전체적으로 '유약하다'는 인상이 강하다. 다소 우유부단한 면도 있고, 유년 시절 처음 만났을 때에는 히키코모리 기질이라거나 대인공포증마저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은 12년이라는 세월을 지나 다시 만났을 때에도 그다지 변하지 않았었다. 「황금의 키바」를 가지고, 체크메이트 포의 한 사람인 루크를 쓰러트렸음에도 예전에 가지고 있던 '연약함'은 거의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때 루크를 쓰러트린 것은 와타루가 아니라 인간 측의 전사, IXA였다).

하지만.
어느 시점을 경계로, 와타루는 급속히 변해갔다. 아니, 성장했다고 해도 좋다.
외모가 변했다던가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그 마음이, 그 몸에서 흘러나오는 느낌이 강인하게 변해갔다.
어쩌면 와타루를 성장시킨 것은 자신과의 싸움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생각은 그다지 틀리지 않기도 했다. 와타루는 타이가와 싸우게 되면서 스스로의 존재(인간과 판가이어의 하프)에 대해 고민하고, 그 정체성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다가 모친인 마야와 재회, 그리고 그때까지의 자신을 밟고 일어서 보다 강하게 되었던 것이다. 최초의 상황을 파고들자면 타이가와의 싸움이 그 원인이 된다.
물론 이런 이야기까지 하우젤에게 할 이유는 없고, 그녀에게는 단순히 인상과 느낌, 그리고 성장에 대한 것까지만 했다.

이 시점에서, 하우젤은 타이가의 말에서 작은 위화감을 찾아냈다.

"… 어쩐지, '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네요."
"어쩔 수 없어. 나와 와타루는 태어나자마자 떨어진 다음 10살 때 한번 만나고… 그 이후 줄곧 만나지 못했다가 얼마 전에야 간신히 만났던 거니까."

혈육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만큼의 공백이, 타이가와 와타루의 사이에 있었으니까.
그리고, 어느 의미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질문이 날아왔다.

"… 그렇다고 해도, 형제니까 사이는 좋았겠죠?"

사이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완전히 서로를 적으로 인식하고 죽이고 죽는 사이였습니다만.
차마 거기까지 말하지는 못하고, 타이가는 그로서는 드물게 대답을 망설였다.
거기서 하우젤은 분위기를 읽었고, 자신이 실수했다고 느꼈다.

"… 혹시, 형제 싸움이라거나…?"
"… 아아, 조금."

확실히 폭넓게 생각하자면 단순한 형제 싸움이다. 최초에는 의견이 틀어졌기에, 최후에는 완벽한 오해로 인해서 일어난, 단지 그 뿐인 형제 싸움.
두 사람이 가진 힘이 힘이기 때문에 그 스케일도 주변에 끼치는 피해도 막대한 것으로 늘어났을 뿐이다.

"안되요, 그러면."

하우젤은 짐짓 화난 얼굴로 타이가에게 말했다.
그 얼굴조차 귀엽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입밖으로 꺼내진 않고 잠자코 하우젤의 말을 들었다.

"두 사람, 분명히 형제죠? 그럼 제대로 화해해두는 게 좋아요. 나중에… 화해하고 싶어져도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니까. 형제끼린 사이좋게 지내야 하잖아요?"

아마도 그것은 본인의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일 것이다.
… 하지만, 자신과 와타루의 관계는 하우젤과 사이젤의 그것보다 훨씬 더 일그러지고 비틀려져있다. 수복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 그래…"

입밖으로 나오는 말은 머리 속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방금 내뱉은 말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는데도.
무엇보다도 지금은 아예 다른 세계로 튕겨져온 것이니까, 물리적으로도 만날 수 없다(하우젤은 타이가가 '차원이동자'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녀로서는 사정을 모르고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하지만.
혹시, 정말로 그런 일이 가능하게 된다면.

"… 그렇군. '형제는 사이좋게'라… 완전히 잊고 있었어."

자신도 처음에는 분명 그렇게 되길 바라고 있었을텐데.
이런저런 상황이 겹치고,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어느샌가 잊혀져버렸다.
설령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더라도, 이제와서 화해한다는 건 틀림없이 무리라고 생각한다. 와타루에게 있어서 자신은 '어머니를 죽인 원수'이고, 자신에게 있어서 와타루는 '모든 것을 빼앗아간 적'이니까. 지금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새삼스럽게 증오가 끓어오른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하우젤이 말하는 것처럼 더이상 싸우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있었다.

"네에. 그러니까 혹시 동생과 다시 만나게 되면 먼저 사과하세요. 무조건."
"……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따지고 보면 먼저 싸움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만든 건 와타루니까.

"이 경우엔 누가 잘못했고 누가 먼저 시작했고 라는 건 상관없어요. 먼저 사과하는 쪽이 이긴다는 이야기도 있으니까."

그거야 어린애들 싸움 이야기지.
하지만 그런 걸 저렇게까지 진지하게 이야기하면 반발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져버린다.

 


─LP 2년 8월 셋째 주.

타이가와 하우젤은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고 한발짝 물러난 생활을 계속해나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함께 있는 시간도 늘어난다.

"… 상처, 빨리 안낫네요."
"상처의 깊이보단 종류가 문제니까."

마황력을 집중시킨 잔바트 소드라거나 엠페러 문 브레이크라거나. 하나같이 판가이어에게는 치명적인 것들 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때 타이가가 입었던 상처는 그 자리에서 죽지 않은 것이 비정상적일 정도다. 상처의 재생이 늦는 것 정도는 어쩔 수 없겠지.

"그런데… 어쩌다가 그런 상처를 입게 된 거였죠?"

참 빨리도 물어보는군.
하우젤에게 주워져서 이 성에 오게 된지 슬슬 3개월 째. 마침내 처음으로 '상처를 입은 이유'에 대해서 질문이 나왔다.

"… 그냥 좀, 시시한 싸움이 있어서."

솔직한 심정으로, 자세한 이야기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친아버지와 친동생에게 공격받고 죽기 일보직전까지 갔다는 이야기를, 이 천사같은 마인에게 했다간 어떤 반응으로 되돌아올지 대강 예상이 되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슬퍼하고, 지금 이상으로 신경써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입다물도록 하자.
다행히도 하우젤은 타이가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뭔가 묘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 정도는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정확히 어느 정도나 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무엇보다 피투성이로 나타난 첫인상도 있고, 일단 하우젤은 타이가에 대해서 "약하다"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 어떤 싸움이었길래 그렇게까지…"

아무리 사람좋은 하우젤이라도 지금까지 천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마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들도 있다.
타이가가 입은 상처. 그것은 단순히 '쓰러트리기 위한' 물건이 아니라, 한없는 '악의'와 '증오'를 품은 공격. 그가 입고 있는 상처의 대부분이 그런 물건들이다. 이런 상처는 보통의 싸움으론 생기지 않는다. 무언가, 대단히 '감정'이 얽히고 얽힌… 지독한 원한 관계라거나.
어쨌건 타이가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시시한 싸움'은 아니었을 것이다.

'말해주지 않는걸까…'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하면, 많이 가까워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거리는 멀게만 느껴졌다.

 


─LP 2년 9월 첫째 주.

치료를 받기 시작한지 4개월. 타이가는 일상 생활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힘도 60~70% 정도 돌아왔을까. 이것이라면 이 성에서 나간다고 해도 그리 큰 문제는 없이 지낼 수 있다.

"나간다고 하더라도, 하우젤에게 빚을 갚고 난 다음이지만."
[… 그것 뿐이냐.]
"…… 뭐?"
['빚을 갚는다', 그것 뿐이냐고 물었다.]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걸까, 이 가짜 박쥐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별로 묻고 싶지 않았지만 묻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분위기에 휩쓸려서 물어버렸다.

"무슨 이야기야."

[그러니까!! 네놈은 저렇게 네놈에게 헌신적인 여성을 앞에 두고 한다는 생각이 "빚 갚으면 나가자"밖에 없는 거냐고 물었다!! 좀더 불타오른다거나 좀더 두근거리는 전개가 있을텐데!! 훨씬 더 따뜻하고 가슴 속이 꽉 차오르며 훈훈한 이야기가 있지 않느냐!! 왜 네놈은 그런 식으로 깃발을 부러뜨리는거냐?! 그러고도 사나이냐?! 남자의 로망도 모르는 놈!! 네놈은 좀더 상냥하고 사려깊게 행동할 필요가 있─]

"……"

더이상 상대할 필요도 의미도 가치도 느끼지 못했기에, 타이가는 몸을 돌렸다.
저 물건이 정녕 선대 킹과 함께 레젠드로가를 물리친 '영웅' 키배트배트 2세란 건가. 역시 이상과 현실은 거리가 멀다.

 


기본적으로 타이가의 행동 루트는 정해져있다. … 루트라고 해봐야, 그가 지금까지 지내온 방과 정원 뿐이지만.
방에서는 휴식을 취하고, 정원에서는 몸을 움직인다. 회복되기 전에는 기껏해야 산책 정도가 한계였지만, 지금은 심하게 움직이지 않는 한 아무렇지도 않았다.
방에서 쉬거나, 키배트 2세와 노닥거리거나, 정원에서 운동하거나, 하우젤과 이야기하거나.
지난 4개월간, 타이가의 생활은 그것들 뿐이었다.

─하지만 이 날을 기점으로, 변화가 찾아오게 된다.

"……"

타이가는 평소와 다른 풍경에 잠깐 굳어졌다.
자신의 산책 코스 여기저기에 돌무더기와 흙더미들이 쌓여있던 탓이다. 그것도 보통의 돌무더기가 아니라, 머리와 팔과 동체와 다리 등으로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는 '인간형'의 돌무더기.
그리고 그것은 모두 한 사람의 소녀가 만들고 있었다.

"복수해줄거야… 꼭 복수해줄거야…"

훌쩍거리면서도 손은 끊임없이 움직여, 흙무더기로 '무언가'를 빚어간다.
가만히 다가가 들여다보니, 그것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인간형'을 하고 있었지만 '인간의 형상'은 아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이족보행의 괴물이라고 해야할까. 그것도 꽤나 그로테스크한 형상의.

"……"
"……"
"……"
"……"
"…… 와앗?! 당신 누구야?!"

지켜보기 시작한지 20분쯤 됐을까, 간신히 타이가의 존재를 눈치챈 소녀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가리며 뒤로 물러났다.

"… 아니, 미안. 항상 산책하던 길인데 뭔가가 잔뜩 만들어져 있어서. … 인형놀이?"
"아냐! 가디언이야!"

타이가의 물음에, 소녀─ 사테라는 날카롭게 반응했다. … 확실히, 가만히 들여다보면 상당히 날카로운 느낌의 '골렘'같이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물론 단순한 흙덩어리를 빚는다고 해서 골렘이 만들어질리는 없지만─

'이 여자…'

하우젤과 같은 '느낌'이 나고 있다.
타이가도 일단 이 성에 살고 있고, 무엇보다 방에서 정원으로 오는 길에도 여러 마물과 마주치기 때문에, '마인'인 하우젤과 다른 보통의 '마물'들에게서 느껴지는 것이 다르다는 것은 확실히 인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소녀는 지금까지 하우젤 이외의 존재에게선 느껴보지 못했던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인이라고 추측하는 것에 그다지 큰 어려움은 없었다.

타이가는 사테라에게서 눈을 돌려, 그녀가 만들고 있는 흙더미를 바라본다. 그러자 타이가를 노려보고 있던 사테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돌려, 다시 가디언 만들기에 전념했다.
그 동안 타이가는 하우젤에게서 들은 정보를 생각해내기 시작했다. 호넷파에 있는 마인 중, '가디언 제조'의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수백에 달하는 가디언 군단을 보유하고 있는 소녀라면…

'사테라라고 했었던가.'

그러고보니 호넷파의 다른 두 마인'노스'와 '아이젤'과 함께 요 몇개월 보이지 않는다고 하우젤이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 사이에 돌아온 모양이다.

"… 당신, 가디언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아? 그런데 왜 그렇게…"
"안돼. 그 아이들론 약해서 안돼. 훨씬 더 강한 가디언이 아니면 그 녀석한테 못 이겨."

지금 이 시점에서 '그 녀석'이 누구인지 타이가가 알 길은 없었다(물론 불과 몇개월 후에 만나게 되지만).
타이가는 허리를 굽혀 사테라가 가디언을 만드는 것을 지켜봤고, 사테라는 계속해서 가디언을 만들어냈다.

─무시하는 척 하고 있어도, 사테라는 쭈뼛거리면서 타이가에게 신경쓰고 있었다.

분명 지금까지 이 성에 살면서 한번도 본 적 없는 인물. 외형은 그야말로 '인간'이었지만, '인간'은 아니다. 하급 마물 중에는 타이가를 인간이라고 생각하여 시비를 거는 얼간이들도 있었지만, 사테라에게는 확실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인간이 아닌 어떤 것'의 느낌이.
본래 '인간'이었다가 마인이 된 케이스인 사테라는, 타이가에게서 "인간이 몬스터를 볼 때 느끼는 것"만큼이나 큰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우젤이 데려왔다던 그 남자일까…'

그것이외에는 짚이는 바가 없기도 했고, 사테라는 그렇게 판단했다.

본래부터 친한 사람이 아닌 이상 붙임성이 있는 편이 아닌 사테라와, 하우젤 이외의 마인과 처음 만나 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라 당혹스러워하고 있는 타이가.
두 사람에게 있어 상당히 거북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을 때.
생각지도 못했던 지원군이 나타났다.

​[​▼​▼​▼​▼​▼​▼​▼​▼​▼​.​]​
"… 사가크?"

고대에서부터 판가이어와 함께 해온 "의지를 가진 골렘" 사가크.
하얀 뱀의 갑주, '사가'의 보관자이며 타이가에게 있어서는 가장 오래된 전우이기도 했다.

"상처는… 이제 괜찮은건가?"
​[​▼​▼​▼​▼​▼​▼​▼​▼​▼​.​]​

그때 배트 판가이어의 일격으로 인해, 사가의 갑주는 파괴되고 사가크도 크게 부상을 당했었다. 치료에 대해서는 키배트 2세가 담당한 모양이지만, 경과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었는데 지금 날아다니는 걸로 봐선 상당히 괜찮아진 모양이다. 무의식 중에 얼굴의 힘이 풀렸다.
그리고 이것은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던 효과인데

"… 그거 뭐야?"

타이가의 주위를 멤돌며 기뻐날뛰는 사가크를 보고, 사테라가 흥미를 가진 것이다.

"이 녀석은 사가크. … 내 친구야."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기에, '친구'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사실 그 이외의 호칭으론 부르고 싶지 않기도 했고.
사테라는 눈을 가늘게 뜨며 사가크를 관찰했다. 그 시선에 사가크가 서서히 거북함을 느끼고 타이가의 뒤에 숨기로 결심했을 무렵.

"'그거', 좀 보여줘."
"… 분해하거나 해 끼치지 않는다는 조건이라면."
​"​…​…​…​…​…​…​…​…​…​…​…​…​…​…​…​…​…​…​ 알았어."

대답하기까지의 공백이 심하게 신경쓰였지만, 타이가는 사가크를 붙잡아 사테라의 손에 건네주었다.
사테라는 손 안에서 발버둥치는 사가크를 움직이지 못하게 두 손으로 붙잡아 고정시키고, 천천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30분 후.

아무런 말도 없이, 어떠한 표정 변화도 없이 그저 사가크를 관찰하기만 하던 사테라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달라… 재료도 다르고 기본 구조도 내 가디언이나 보통 골렘들하곤 완전히… 분명 골렘인데도 시저처럼 '생명'과 '의지'까지 가지고 있어… 게다가 시저한테도 없는 특성도 많이 있고. 도대체 뭘 어떻게…"

한참동안 중얼거리다가, 사테라는 타이가를 돌아보았다.

"이거, 당신이 만들었어?"
"… 아니, 주인은 나지만 만든 사람은 달라."

「나이트」 제미니 판가이어니까.
"그래…"라면서 대단히 아쉬운 표정을 짓는 사테라. 아마도 "어떤 녀석"을 쓰러트리기 위한 가디언에 참고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저기, 그럼─"

─1시간 경과.

'… 어째서 내가 이런…'

타이가는 진흙투성이가 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어째서 이런 꼴이 되었느냐고 하면 대답은 간단하다. 사테라가 가디언을 만드는 작업을 돕고 있기 때문이다.

<저렇게 굉장한 골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가디언 만드는데에도 재능이 있을테니까>

라는 근거없고 확신없으며 터무니도 없는 이유로 인해서.
하지만 사테라의 감은 틀리지 않았다. 분명 타이가는 사가크의 제작자가 아니지만, 대신 다른 재능이 있었던 것이다.
판가이어의 '킹'으로서, 라이프 에너지를 다루는데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뛰어나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외형이 완성된 골렘에게 라이프 에너지를 주입하고, 사테라가 가디언 제조의 비술을 사용하면 그것만으로도 종래의 가디언을 능가하는 물건들이 나오는 것이다.

'게다가…'

만들다보니 그만 진심이 되버렸다고 할까, 본 궤도에 올라버렸다고 할까. 혼신의 '역작'이랍시고 만든 물건들을 보면 한숨만 나온다.
아직 가디언으로 탄생되지 않은 흙인형이 셋. 그것은 영락없이 비숍(스왈로우테일 판가이어), 루크(라이온 판가이어), 그리고 퀸(펄쉘 판가이어)였다.

… 그러고보면, 이렇게 흙장난을 쳐본 것도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마지막으로 해봤을 때는 분명… 와타루도 함께였는데.
그때에는 아무것도 몰랐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인간'과 '판가이어'의 차이를 몰랐고, '체크메이트 4'라던가 '킹'의 숙명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키바'에 대해선 존재 자체도 몰랐으며─ 자신과 주변의 인간들이 다르다는 것 또한 알 수 없었다.
18세의 생일이 지나고, 자신이 판가이어로 각성하기 전까지.
자신은 분명, "인간" 아리카도 타이가로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랬기에 가능했다.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와타루와 친구가 되는 것도.

타이가가 그렇게 상념에 잠겨있을 무렵.

─느닷없이, 흙더미가 얼굴에 직격했다.

"……"

지금 내 얼굴에 부딪히고 산산조각나서 떨어지고 있는 이 검고 축축하고 끈적거리고 오돌토돌하며 기분나쁜 물체의 정체는 뭘까.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그것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타이가는 상황을 파악하는 속도가 늦어졌다.
결국 자신의 얼굴에 묻은 게 지금까지 만지고 있던 진흙덩어리이고, 그걸 던진 것은 앞 자리에 앉아서 가디언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사테라는 것을 알아내기까지 약 20초에 달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 무슨 짓이야."
"가디언 만들고 있는데 딴 생각하길래."

가디언 제조작업은 섬세하고 정밀해야 하면서도 신성한(마인 주제에?) 작업이므로 잡념을 품고 임하면 안된다, 는 것이 사테라의 논리. 하지만 진흙덩어리를 던지고 소악마의 미소를 지으며 말해봤자 설득력은 없다.
타이가는 뻔뻔스럽게도 웃는 사테라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다가

─똑같은 방식으로 갚았다.

"웁?! 풉?! 당신, 무슨 짓이야?!"
"아, 미안. 손이 미끄러졌어."

아까 사테라가 지었던 것과 거의 차이가 없는 미소를 지으며 타이가는 대답했다.
그것을 보며 분개한 사테라가 다시 진흙덩어리를 던지지만, 방심하지 않는 타이가는 강하다. 정면으로 날아오는 것을 피하고 오히려 카운터로 던져넣는다.

"……"
"……"
"……"
"…… 진짜 해보자 이거지?"
"…… 이쪽이 할 말이야, 그건."

타이가와 사테라는 분명 웃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얼굴에선 혈관이 잔뜩 튀어나와 '나 화났습니다'라고 확실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형상인 것이다.

곧이어.
'마인과 판가이어의 진흙투척 대결'이라는, 이 세계에서도 저 세계에서도 볼 수 없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마인이 된 이후로 처음이야… 이렇게 놀아본 거…"
"… 우연이군. 이쪽도 오랜만이야, 이런 건."

라기보다, 이렇게 마음놓고 '놀이'에 몰두해본 건 유년 시절에도 몇번 되지 않았다.
사테라와 타이가는 그 '쓸데없는' 일에 체력을 다 쏟고,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인이라고 해도 체력이 그다지 강한 편이 아닌 사테라는 둘째치고, 아직 완치되지 않은 타이가도 상당히 기운을 빼버렸다.
이미, 두 사람 사이에 있던 거북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다음. 먼저 입을 연 것은 사테라였다.

"당신이 그거지? 그… 하우젤이 데려왔다던."
"… 아아."

확실히 그랬지.

"… 응응, 합격! 앞으로 계속 이 성에 있어도 좋아!"
"… 왜 당신한테 허락받지 않으면 안되는거지? 마인 사테라."
"어? 내 이름 어떻게 알고 있어? 내가 말했던가?"
"하우젤에게 자주 듣고 있어. 가디언 제조를 특기로 하는 마인이라고."
"헤에, 그랬구나…"

사테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그래서… 당신의 이름은?"
"타이가. 아리카도 타이가. 아리카도가 성이고 타이가가 이름."
"그럼 '타이가'구나. … 응, 됐어. 기억했다!"

300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왔으면서도, 마치 아이처럼 반응하는 사테라.
그런 그녀를 보며 타이가는 다시 한번 옛날 생각에 잠겼다.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돌아가고 싶은 시절.
─타이가와 와타루가,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에도 관련되지 않은 채 순수하게 지내고 있었던 시절.
─어떤 계산도, 어떤 악의도 없이 서로에게 웃을 수 있었던 시절.

그 시절이 떠오르자.
타이가도, 눈을 감고 '쿡'하고 웃기 시작했다.

뭐, 조금 후 "뭐, 뭐가 그렇게 ​우​스​운​거​야​?​!​"​라​면​서​ 사테라에게 꽤 두들겨졌지만.

 


타이가가 온지 4개월.
하우젤에게는 즐거운 날의 연속이었다.
아무리 지금 호넷 진영의 상황이 어려운 때라고 해도, 타이가와 이야기하고 있을 때만큼은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한눈에 반했다, 라는 말이 정말로 있는 거라면 지금의 자신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타이가를 알게 된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하우젤은 타이가를 볼 때마다 처음 느꼈던 두근거림을 지금도 느끼고 있다. 매일 같이 찾아가고 얼굴을 마주하며 몇시간이고 이야기하는데도, 그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도 타이가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회의가 끝나자마자 곧장 돌아왔다.
그렇지만.

"…… 어?"

그녀가 바라보는 시선의 끝에는.
그녀가 찾고 있던 소년과, 그녀의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소녀가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타이가와 사테라가 만나게 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확실히 다른 마인들과 타이가가 친해졌으면 좋겠다, 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사테라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면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순수한 소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렇게 쉽게 타이가와 친해질 거라고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우젤의 눈을 붙잡고 있는 것은 타이가가 '웃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과 있을 때는 한번도 저렇게 웃어준 적이 없다.
가볍게 웃거나 자신을 배려해주기 위해서 웃음을 보인 적은 있지만, 저렇게 모든 것을 터놓고 웃은 적은 없다.

자신이 없었던 그 짧은 시간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우젤은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럼에도, 그녀의 가슴 속을 채우고 있는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 뭔가, 이상해…"

가슴을 꾸욱하고 눌러도,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하우젤에게 있어서 지극히 생소한 감정이었기에, 그것 역시 하우젤에게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자신의 가슴 안에 있는 이 기분.
이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예전에 사이젤이 케이브리스의 진영에 가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느꼈던 감정과 비슷하지만, 무언가가 다르다. 그때에는 슬프기도 했었고 안타깝기도 했었지만, 지금처럼 괴롭진 않았다.
아마도… 지금까지 느껴본 적이 거의 없었던 감정.
굳이 비유한다면, "외롭다"는 느낌에 가까운 물건.

이것의 정체를 하우젤이 알아차리게 되는 것은, 조금 더 뒤의 일이었다.

 


 

「인형 제조의 마인」사테라 LV 100
인간 마인. GI 859년에 마인화. 호넷과는 소꿉친구이며 가디언 제작기술 소지. 외형은 상당히 어려보이지만, 그녀가 만든 가디언 "시저"의 나이가 120인 걸로 봐서 100은 간단히 넘겼고, 그 이전에 마인화된 연도와 GI 850년에 태어난 호넷의 소꿉친구라는 점에서 이미 200은 가뿐히 넘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체적으로 깐깐하기 짝이 없는 실키를 제외하면 하우젤은 물론 호넷 진영의 마인 대부분과도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 하지만 나이에 비해, 외견처럼 순진한 구석도 있기 때문에 아이젤과 함께 마인 노스에게 속아넘어가 리저스로 갔다가 호되게 당한 적이 있다. 타이가와 만난 건 그 직후의 이야기.
가디언 제조가 주특기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전투력은 하위에 속한다(물론 인간에 비할 바는 아니고, 전투 쪽으론 완전히 포기한 와그같은 마인보다는 당연히 높다).

 


─LP 2년 12월 둘째 주.

[제법이시로구만, 꼬마.]
"… 또 무슨 기분나쁜 소릴 하려는거야."

타이가는 지겹다는 듯이 키배트 2세에게 말했다.
라고는 했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건지는 대강 알고 있다.

[훗훗훗훗훗훗, 이 몸께선 이미 다 들었단 말씀. 설마하니 네가 하우젤 아가씨 말고 다른 마인에게까지 손을 뻗힐 줄은 몰랐]


"그 이상 지껄였다간 뭉개버리겠어."


피어오르고 있다. 피어오르고 있다. 이미 100% 힘을 되찾은 타이가가 그 힘을 해방하자, 그의 그림자가 후방으로 좌악 늘어나고, 그 속에서 칠흑의 뱀들이 수도 없이 피어오른다. 게다가 타이가의 얼굴에도 판가이어 글래스가 떠올라, 지금 그의 감정 상태가 어떤지 확실하게 이야기해주고 있다.
과거, 같은 체크메이트 포의 비숍조차도 '살기'만으로 찍어눌러버린 타이가의 본성 중 하나. 그것이 지금 여기에서 발휘되었다.

물론 그딴 거에는 눈꼽만큼도 신경쓰지 않는 것이 키배트 2세 퀄리티. 타이가의 살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 다 하고 있다.

[괜찮다, 괜찮아. 사랑만 제대로 있다면야 양다리 아니라 문어발이라고 해도 문제없다! 게다가 그 두 아가씨들도 서로 사이가 좋은 모양이니 별 문제가 없]

"닥쳐."

그대로 붙잡아서 있는 힘껏 벽에다 내동댕이치자 겨우 조용해진다.
정말이지 몇번째 이러는건지. 타이가는 한숨을 내쉬고는 그대로 걸음을 옮긴다.

사테라와 처음 만난 이후부터 하우젤의 태도가 부쩍 조심스러워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날 이후부터 하우젤이 찾아올 때마다 언제나 사테라가 딸려왔던 것도 사실이다.
두 사람과 대화하는 시간도 늘어나고, 함께 어디론가 나가는 일이 많아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도대체 어째서 '사귄다'는 이야기가 되는거야…"

새삼스럽지만 아리카도 타이가는 여성과 관계되어본 적이 그다지 없다.
그야 외견만 가지고 보면 훌륭하고, 성격도 친절하고 예의바른 편이었기 때문에 숨은 팬들은 많았던 모양이지만, 그 시점에선 이미 그가 판가이어로서의 각성이 시작됐던 때이기 때문에 인간과는 사고관이 달라져버렸고, '인간들의 애정을 받는' 일에 대해선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된 여성 관계라거나 하는 걸 가져본 기억 자체가 없다.
어째서 이렇게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애정이 담긴 행위더라도 타이가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며 타인들이 그 행위를 어떻게 보던가 말던가 타이가가 그것을 이해하기란 힘들다"라는 결론을 내놓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실로 유감스럽게도.
타이가가 남들의 생각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남들도 타이가의 생각에는 별 관심없다. 그저 눈앞의 광경을 자기식대로 해석할 뿐.
더더욱 타이가에게 있어서 안타까운 일은, 키배트 2세도 그 중 하나라는 것이다.

"두 사람하곤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몇번이나 이야기했을텐데."
[그거야 네놈 생각이고. 두 사람 생각이 어떤지는 모르잖아.]

그렇게 세게 쳐박았는데도 벌써 부활했다. 역시 키배트 일족의 생명력은 불가사의… 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 하아? 무슨 바보같은 소릴 하고 있는거야, 너. 나같은 거하고 엮였다는 오해를 했다간 두 사람한테도 실례잖아."
[……]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이 놈.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망가지면 그 자신감으로 가득 차있던 녀석이 이런 헛소리를 지껄이게 될 수 있는건지 키배트 2세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무렵, 이야기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이 나타났다.

"아, 타이가."
"하우젤…"

하필이면 가장 마주하기 난처한 사람과 마주쳐버렸습니다.
생각해보면 몇개월 전, 사테라와 처음 만났던 날 이후부터 하우젤의 태도가 묘해졌었다. 그 이전보다 찾아오는 횟수도 늘었고, 대화하는 시간도 늘어났다. 거기까지만이라면 아무 문제없겠지만, 문제는 '느닷없는' 스킨쉽까지 늘어났다는 것이다. 손을 잡히는 정도는 상당히 자주 있는 일이고, 아직 다 낫지 않은 것 같다는 핑계로 음식을 떠먹여진다던가. 여하간 여러가지로 거북한 일들이 상당히 많아졌다.

"……"
"……"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는 건 타이가만이 아니라 하우젤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스스로 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끝나고 나서 떠올려보면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얼굴이 화끈해질만한 것들 뿐이니까.
─두 사람의 분위기가 간신히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사테라가 느닷없이 나타난 다음이었다.

"찾았다! 역시 하우젤도 같이 있었어!"

저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며 싱글거리는 사테라. 그녀는 가디언 시저의 손 위에 올라탄 채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 크기만 가지고 따지면 쿠쿨칸과 비슷할까. 아무튼 보통 인간의 두배가 넘는 체구인데도 잘도 이런 복도에서 다니고 있군. 타이가는 시저의 거체를 보며 잠시 현실도피에 잠겼다.

[왔다! 왔다! 왔다!! 이 몸이 그토록 기다리던 삼각관계!! 대혼돈의 시작─]

어느 틈엔가 부활하여 날뛰는 키배트 2세를 붙잡아 다시 한번 내동댕이친다.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파트너를 바닥에 쳐박은 타이가는 씩씩거리며 몇번 더 밟았다. 혹시 또 깨어나 헛소리할지도 모르니까.

'… 하지만.'

이상 사태의 주인공들이 전부 한 자리에 모였다.
이것에 있어서만큼은, 타이가도 불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일은 없었어요.


싸움같은 게 일어나지 않을까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어요.
유혈사태가 나면 어쩌나 고민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어요.
사이가 나빠지면 어떡하나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어요.
간만에 사가로 변신해야할지도 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어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걱정했던 그런 일은 없었어요!

"아, 사테라. 가디언 작업은 어떻게 되가?"
"응! 타이가가 많이 도와줬으니까, 얼마 안 가서 끝날 거 같아."

확실히 사테라와 함께 있으면서 한 일이라곤 그게 대부분이니까. 그렇게 하고도 끝이 안보인다고 하면 그건 그거대로 우울하다.
사테라와 공동 작업으로 만든 가디언들은 죄다 "판가이어"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그 중 가장 강력한 것은 역시 스왈로우테일 가디언(통칭 "비숍")과 라이온 가디언(통칭 "루크"), 그리고 펄쉘 가디언(통칭 "퀸")의 셋이다. 게다가 그 셋의 경우, 타이가가 지니고 있는 체크메이트 포의 능력까지 집어넣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전투력은 원래의 체크메이트 포와 동급(인간형으로 변신할 수는 없지만). 요컨대 마인과도 겨룰 수 있는 물건들이 튀어나와버렸다. 그 덕분에 원 오프 모델들이 되버려서 양산이나 후속기 제작(?)은 할 수 없게 되버렸지만, 사테라는 마인급 전력 셋이 늘어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뻐하고 있다.
여하간, 호넷 진영은 간부급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였으니까. 이 셋을 포함한다고 해도 여덞명으로, 케이브리스 진영의 절반이 간신히 넘어가는 정도다.

"저런 물건들을 만들 수 있으면 역시 타이가는 강한 거 아냐?"
"글쎄. 자, 상상에 맡깁니다 라고 대답하고 싶지만."

무엇보다 이제 싸움따윈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킹으로서의 싸움이든, 사가로서의 싸움이든.

 

어쨌거나 하우젤과 사테라 사이의 분위기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원래부터 친구였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과연 자신이 끼어든 정도로 흔들리진 않는다는 걸까. 정말로 다행이다. 타이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런데, 타이가가 한가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
이 세상에는 '겉으론 아무리 태연하게 보여도 속으론 활활 타오르다못해 타들어가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 것을.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가던 예전의 자신이 그랬음에도, 타이가는 지금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런데 사테라. 갑자기 무슨 일이야? 온다는 이야기도 없이─"
"아, 맞다!"

갑자기 생각났다는 것처럼 사테라는 감탄성을 흘리더니, 곧 전에 없이 진지한 얼굴을 했다. 알고 지낸지 몇개월이 지나긴 했지만, 지금까지 이런 얼굴은 한번도 본 적 없을 정도로.
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낙관하고 있던 타이가도.
타이가에 대한 사테라의 호감이 "어린 소녀가 오빠를 좋아하는" 종류라는 것이라고 판단한 하우젤도.
다음의 단어에, 폭탄이 투하된 듯한 충격을 느껴야 했다.


"저기, 타이가. 사테라의 사도가 되어줘."


​사​도​使​徒​(​E​T​E​R​N​A​L​ DOLLF).
마왕이 피의 계약을 통해 마인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마인 또한 자신에게 종속된 존재인 "사도"를 만들어낼 수 있다.
마인의 숫자가 24명으로 정해져있는 것과는 달리 그 수의 제한은 없지만, 많이 만들수록 그 능력은 약해지며 마인 본인 또한 힘이 줄어든다고 한다… 지만, 아무튼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본래 사테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가디언을 만들어두고 있기 때문에, 사도를 두지 않는 마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 타이가에게 "사도"계약의 제의를 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제의를 들은 타이가보다 하우젤이 먼저 반응했다.

"… 그거, 무슨 이야기야?"
"호넷 님은 몰라도, 실키나 메가라스는 타이가를 의심하고 있는걸. 잘못하면 성에 있을 수 없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사테라의 사도가 되면 그런 걱정할 필요없이 계속 있을 수 있어."

사도가 되면 그 마인에게 거역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결백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는 가장 큰 행위가 된다. 타이가와 떨어지고 싶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만들지 않고 있던 사도를 만들 생각까지 했다.
어린아이같은 사테라다운 생각이지만, 타이가는 난색을 표했다.

아무리 지금은 이 세계에 떨어졌다고 해도, 그는 '판가이어'라는 종족의 '왕'이다. 물론, 자신이 와타루에게 패배한 시점에서 이미 "인간과 공존을 바라는 판가이어" 이외의 판가이어는 전멸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킹'이라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이제와서 킹으로서의 자존심따윈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그것과 이것은 별개의 문제. 이제와서 타인의 하인이 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안되는 걸로 되있잖아, 그런 건."

하지만 이번에도 먼저 대답한 것은 하우젤이다.

"타이가의 의향도 있는데, 그런…"
"… 그러니까 지금 묻고 있는 거잖아. 그런데 왜 하우젤이 대답해?"
"아니, 그건… 그러니까…"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하우젤에게, 사테라는 계속해서 말했다.

"하우젤한테도, 사도는 없었지?"
"… 그게, 왜?"
"타이가를 지금까지 사도로 삼지 않았다는 건 내가 해도 된다는 거잖아. 타이가의 의사가 제일 중요하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지금 묻고 있는건데."

거기까지 말한 시점에서, 사테라는 이미 하우젤을 보고 있지 않았다.
얼굴도 시선도, 타이가에게 완전히 고정시킨 상태. 틀림없이 '대답'을 요구하고 있다.
게다가 하우젤 역시 사테라에게 뒤지지 않을만큼 절박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고.

'이래서는…'

승낙하든 거절하든, 나중에 돌아올 부메랑은 크다.
그렇다고 대답을 미룬다던가 생각을 계속 하면서 시간을 끈다던가 할 분위기도 아니고.

 


────그 직후, 메가라스가 들어온 것은 '운이 좋았다' 이외엔 뭐라고 할 수 없었다.

 


[……]
"……"
"……"
"……"
[…… 무슨 일, 있는건가.]
"아아아아아아!! 메가라스 바보!! 왜 하필 지금 들어오는건데?!"
[아니, 나는─]

사테라는 분노로 가득 차, 얼굴을 새빨갛게 한 채 메가라스를 두들겼다.
반면 상당히 밀리고 있던 기색의 하우젤과 이야기의 당사자인 타이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
하지만 메가라스의 방문은,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심각한 사건의 시작을 알렸다.

 


 

「세계 최고속의 마인」메가라스 LV 98
마왕 아벨(2대째 마왕) 시대에 탄생했으며, 호루스의 마인. 현존하는 마인 중 최고로 빠르다. 말이 거의 없고 다른 사람에게 되도록 간섭하지 않는 편. 그에 반해 외로움을 많이 타는, 괴이하다면 괴이한 녀석.

 


메가라스가 가져온 이야기는 어느 의미로 예상대로였다.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케이브리스 진영이 마침내 정면으로 전쟁을 걸어왔다. 케이브리스 진영의 전력은 거의 그대로인데 이쪽은 노스와 아이젤의 사망, 그리고 사테라의 패주로 인해 크게 다운된 상태다. 아무리 케이브리스라고 해도 이 기회를 놓칠만큼 어리석을 리는 없고, 그 결과 선전포고도 없이 전쟁이 시작됐다. 당연한 이야기로, 하우젤과 사테라는 전장으로 나간 상태다.
… 이미 힘이 완전히 회복된 상태인 타이가도, 가능하면 싸우러 나갈 생각이었지만 사테라와 하우젤 쪽에서 거절했다.

'우리들은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실키나 호넷 님은 타이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니까.'
'괜찮아, 괜찮아. 지금까지도 우리들끼리 어떻게든 해왔는걸. 이번에도 어떻게든 될거야.'

말은 그렇게 하고 있어도, 두 사람에게는 확실히 '불안'의 감정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본래부터 판가이어란 인류의 마음에 파고들어 빈틈을 만든 후 그 라이프 에너지를 빼앗아 살아가는 존재. 그렇기 때문에 타이가 역시 타인의 '마이너스'적인 감정에 대해 파악하는 것이 빠르다(그 능력이 가장 뛰어난 건, 아이러니하게도 하프 판가이어인 와타루지만). … 그 반대쪽에 해당하는 감정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아차리기 힘든 것도 타이가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쪽이 아니니 일단 논외로 쳐두고.
양 진영의 전력의 차이는 실로 압도적. 마인의 숫자 차이는 두배가 넘으며, 휘하의 마물 군단 규모조차 4배에 가깝다. 게다가 마인들 개개인의 역량마저 뒤떨어지고(호넷 진영의 2인자는 실키지만, 그녀보다 레벨이 높은 마인은 케이브리스 진영에 몇명이나 있다), 이길 승산같은 건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제 3자인 타이가조차 그렇게 느끼고 있을 정도니 전쟁을 치루는 당사자들인 그녀들은 그 차이를 훨씬 직접적으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쟈코더를 휘두른다.
핏빛의 섬광이 뱀처럼 움직이며, 목표로 했던 모든 물건들을 베고 가르고 부순다. 떨어져내리던 이파리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둘로 쪼개지고, 그 끝에 있던 바위는 산산히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자신의 힘이 돌아왔다는 것에 대해, 이런 식으로 확인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타이가는 굳이 이런 일을 하고 있다.

"…… 빌어먹을."

어째서 자신은 이런 무의미한 일을 하고 있는걸까.
스스로에게 물어보지만, 대답은 물어볼 필요도 없이 알고 있다.
자신은 초조해하고 있다. 지금 이곳에서 '아무런 의미없는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할 일이 없는' 자기 자신에게.
하우젤과 사테라는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자신이 본 적도 없는 마인들(실키와 호넷)의 눈치를 살펴야할 이유따윈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고 자신이 멋대로 행동하면 두 사람이 곤란해진다─ 같은 이야기도 아니다.

그런데도, 왜 자신은 전장으로 향하지 않고 있을까.

그것을 모르기에, 초조해하고 있었다.

 


[… 생각했던 것보다, 퀸들의 일이 큰 트라우마가 됐던 모양이군.]

타이가의 방 창문.
거기에 걸터앉아, 정원에서 환경파괴 중인 타이가를 내려다보며 키배트 2세가 중얼거린다.

​[​▼​▼​▼​▼​▼​▼​▼​▼​▼​.​]​
[…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사가크의 말(이라곤 해도, 고대 판가이어 언어라 키배트 2세와 타이가 이외엔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겠지만)을 듣고 키배트 2세는 작게 수긍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여인의 배신. 그리고 그 직후에 있었던 어머니의 살해.
본래부터 타이가는 타인을 사랑하는 것도 타인에게 사랑받는 것도 지극히 서툴렀다. 너무나도 올곧고 순수했지만, '판가이어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방법밖엔 알지 못했기에 그런 파국으로 치달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나마 그때는 나은 편이었다. 적어도 스스로 다가가는 법은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지금의 녀석은 타인을… 특히 '여성'을 믿는 것에 공포를 갖고 있다.]
​[​▼​▼​▼​▼​▼​▼​▼​▼​▼​.​]​
[아아. 성가시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말이지.]

아마도 지금까지 함께 해온 자신들 둘 이외에는.

[이런 일엔 직접 나서면 재미없고, 가능하다면 시간을 주고 스스로 일어서도록 하고 싶지만… 그렇게도 안되겠군. 시간이 너무 없어.]

적어도 상대가 그 두 소녀들이 아니었다면 키배트 2세는 그대로 내버려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의 타이가를 향한 호의가 순수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어찌되었건 키배트 2세는 '아름다운 여성'들과 '방황하는 아이'들의 편이었으니까.

[가자, 꼬마. 이대로 두 손놓고 구경만 하고 있을 순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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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엉? '나이는 이쪽이 훨씬 많은데'라니. 하지만 너 어딜 봐도 나보다 작잖냐.]
​[​▼​▼​▼​▼​▼​▼​▼​▼​▼​.​]​
[사소한 문제는 신경쓰지 마라. 그보다, 갈거야.]

 


[상당히 초조한 모양이구나, 꼬마.]
"키배트…"

키배트 2세와 사가크가 내려앉았을 무렵, 이미 정원은 초토화에 가까웠다. … 라고는 해도, 바위나 잎들이 박살났을 뿐 정원의 잔디밭 그 자체에는 아무 피해도 주지 않고 있었지만. 그렇게 날뛰는 와중에도 훌륭하게 컨트롤했다고 칭찬못해줄 것도 없지만, 아까부터 강조했듯이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렇게까지 참지 못하고 날뛸 정도라면 출전하는 게 낫잖나. 너의 힘도 이미 돌아왔고, 나와 사가크도 있다. 이 세계 마인들의 전투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최소한 그 두 사람의 발목을 붙잡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알고 있어, 그런 건…"

판가이어의 왕을 보호해온 하얀 뱀의 왕 「사가」.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닌 핏빛 밤의 마황 「다크 키바」.
어떤 상대가 됐든, 얼마나 적이 많이 있든, 판가이어의 모든 기술이 결집된 그 두가지 힘이 있는 한 그렇게 쉽게 지거나 할 일은 없다.

[… 그렇게도 무서운거냐.]
"…… 뭐?"
[무서운 거냐고 물었다. 그 두 사람이.]

무슨 바보같은 소리를.
그렇게 반론하려고 하는 타이가의 말을 사가크가 가로막는다.

​[​▼​▼​▼​▼​▼​▼​▼​▼​▼​.​ ​▼​▼​▼​▼​▼​▼​▼​▼​▼​▼​▼​▼​▼​▼​.​]​
"사가크…"

사가크가 하려는 말은 알고 있다.
여기에는 자신들 셋 뿐.
그리고 자신은 더이상 '킹'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그때처럼 '억지로' 위엄과 평정을 가장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사가크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뱀 꼬마의 말대로다. 우리들 앞에서까지 숨길 필요는 없어.]
"… 웃기는군. 킹이 아닌 나한텐 아무 가치도 없다는 걸 알면서 그런 이야길…"

쓴 웃음을 지으면서도 타이가는 몸에 들어가있던 힘을 빼냈다.
그러자, 이 주변을 뒤덮고 있던 ​'​살​의​'​'​투​기​'​'​초​조​'​'​불​안​'​이​라​고​ 하는 물건들이 모조리 빠져나갔다.

[너는 그 두 사람을 믿는 것을 무서워하고 있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믿고 사랑했다가 배신당하는' 걸 무서워하고 있지. 아무래도, 퀸과 있었던 일이 너에게는 상상 이상의 트라우마가 됐던 것 같다. 틀린가?]
"… 부정해도 긍정해도, 나한테는 손해만 되는 질문이니까 대답안할래."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훽 돌려버리는 타이가는, 확실히 그 나이대의 소년에게 맞는 수줍음을 품은 얼굴을 하고 있다. 사가크로서도, 실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 확실히 그 동안 판가이어의 '킹'이라고 하는 중압감에 짓눌려 지내고 있었으니까, 타이가 스스로 '킹으로서의 마음가짐이야말로 자신의 본성'이라고 착각하고 있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하는 김에 좀더 말하자면 그 두 사람을 싫어하는 건 아니군. 단지 이쪽에서 어떻게 대해줘야할까 그걸 모르는 것 뿐이고. 그 나이가 되도록 이성에게 접근하는 법조차 모른다는 건 좀 어떨까 생각하지만 자란 환경이 환경이니 어쩔 수 없겠지. 주변에 그런 걸 가르쳐줄 녀석도 없었을테니.]
"… 이쪽이 바보에다 얼간이라는 건 확실히 자각하고 있으니까, 날 매도하는 건 그쯤 해두고 본론으로 들어가줬으면 하는데."
[이런, 매도로 들렸던건가. 난 솔직한 감상을 피력한 것 뿐이다만.]
"그런 걸 숨기지 않고 말하는 시점에서 매도라고 하는 거라고."

잠시 동안 셋의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윽고 키배트 2세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묻겠는데… 너는 그 두 사람을 이대로 둘 생각이냐.]
"……"
[전력의 차이는 압도적. 비록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곤 하지만 정황만으로도 그 정도 파악하는 건 너나 나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그 두 사람이 잘 싸운다고 해도 시간벌이가 고작이고, 최종적으로는 이 진영 자체가 쓰러지게 된다. 너도 느끼고 있는 것처럼.]

얼마 전부터 마물들의 소란스러움이 타이가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걱정과 공포와 불안으로 가득찬, '전쟁 직전'의 민중들과 같은 소란스러움이.
아마 전쟁을 치루고 있는 그들 자신도, 이길 거라는 생각은 할 수 없는거겠지. 여하튼 전력 차이가 차이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물들이 '일방적으로 불리한' 호넷 진영의 밑에 있는 것은 순전히 그녀들이 마인이기 때문이다. 케이브리스 진영과 싸우라는 명령을 거역했다간 그 자리에서 죽게 될 확률도 높은 것이다(그녀들의 인품은 둘째치고, '마인'이라는 존재 자체가 마물들에게는 '자신들의 위에서 군림하는 공포스러운 존재'라고 인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라면 사기가 떨어지는 것도 당연.
마인의 질에서도 밀리고, 병력의 숫자에서도 밀린다. 그럼에도 싸우려고 하는 것은 용감한 것이 아니라 무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 나한테, 도우러 가라는 건가."

 


타이가에게 필요한 것은 '계기'다.
하우젤과 사테라와 도우러 갈, 자신의 등을 떠밀어줄 계기.
누군가가 그에게 가야할 이유만 마련해주면, 그는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누군가가, 그에게 움직일 계기만 만들어준다면.

 


─하지만 그래선 의미가 없다.

 


[별로.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타이가와 사가크가, 키배트 2세를 바라본 것은 거의 동시였다.

[구하러 가고 싶지 않다면, 그걸로 좋다. 하고 싶은대로 해라.]
[▼▼?! ▼▼▼▼▼▼▼?! ▼▼▼▼!!]
[조용히 해라, 뱀 꼬마. 생각이 있어서 하는 이야기니까.]

키배트 2세의 주위를 어지럽게 돌아다니며 난동을 부리는 사가크를, 키배트 2세는 발로 걷어차 날려버리곤 이야기했다.

[꼬마. 네가 이 세계에 온지, 얼마나 지났나.]
"… 7개월, 정도."

키배트 2세의 예상을 넘는 대답에 놀란 채로, 타이가는 멍하니 대답했다.

[그래. 7개월이다. 어느 사이엔가 일곱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갔지만, 고작 일곱 달이 지났을 뿐이다.]

언제나 그랬지만, 키배트 2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건지 알아내는데에는 시간이 꽤 걸린다.
그리고, 무슨 말이 나올지 알아차린 타이가는 키배트 2세에게 멈추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키배트 2세의 입이 열린다.

[사랑했던 약혼자에게 배신당하고, 신뢰했던 부하에게 모친을 살해당하고, 되찾고 싶었던 친동생에게 너 자신의 목숨이 날아가버릴 뻔한 날로부터 이제 겨우 7개월이 지났다. 연인도 가족도 킹의 이름과 지위마저도,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 날로부터. 솔직히 말하자면 지난 7개월동안 단 한번도 자살 시도를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너에게는 충분히 감탄하고 있다.]

키배트 2세는 타이가에게 다가갔다.
지금의 그에게선, 평소의 장난기나 가끔 보이던 엄격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있는 것이라곤 그저… 한없는 '걱정' 뿐.

[그렇기 때문에 너에게 두 사람을 도우러 가라는 말따윈 하지 않겠다. 죽지 않고 버티는 것만으로도 고작인 너에게, 그런 소리를 아무 생각없이 지껄일 정도로 무신경하진 않아.]

도우러 가라는 말은 할 수 없다.
'저쪽'에 있을 때부터 '이쪽'으로 올 때까지.
타이가는 넘칠만큼 싸우고, 넘칠만큼 슬퍼했고, 넘칠만큼 괴로워했으며, 넘칠만큼 절망했다. 그런 타이가에게, 또다른 괴로움이 시작될 것이 분명한 전쟁터로 향하라는 이야기따윈 할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있었다.
키배트 2세는 타이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하고 싶은 말을 전부 쏟아낸다.

 


[어느 쪽을 택하든, 그건 너의 의지다.]


[그러나, 이것만은 말해두겠다.]


[네가 이쪽 세계에 와서 얻은 것들이.]


[그 두 사람과 함께 해온 7개월의 시간이.]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슬픔과 절망'보다 못하다고 생각한다면.]


[혹시 네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너는, 무엇을 해도 좋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아.]


[저쪽 세계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절망에 빠진 채로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네 의지.]


[혹은, 그 모든 것을 한쪽 구석에 제쳐두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면서도 두 사람을 구하러 가는 것도 네 의지.]


[어느 쪽을 택하든, 우리들은 너의 의지에 따르겠다. 언제까지라도, 어디까지라도.]

 


[결정하는 건 너다, 타이가.]

 


타의에 의해서 움직여봤자, 최종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비록 '킹'으로서의 지위도, 따르고 있던 부하들도 남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카도 타이가는 '키배트 2세'와 '사가크'의 '왕'이었다.

왕은 스스로 일어서지 않으면 안된다.
타인에 의해 떠밀려서가 아니라.
상황에 의해 흔들려서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다리로.

일어서서 걷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키배트 2세는 모든 것을 각오했다.
설령 타이가가 어떤 길을 택하든, 자신과 사가크는 그것에 따르기로.

 


"… 아무렇지도 않은 소리로… 굉장한 소릴 지껄이는군."

타이가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너무나도 지치고, 모든 기력을 빼앗겨버린 듯한 힘없는 웃음.

─그렇지만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눈 녹듯이 사라져버린다.


정말이지 귀찮은 보호자들이다.
잔소리는 잔소리대로 심하고, 귀찮게 구는 건 남들의 배는 더하고.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이보다 훌륭한 보호자들이 또 어디에 있을까.

무엇보다도… 그런 소릴 들어버렸는데 이대로 주저앉아버릴 수도 없다.
분명 키배트 2세는 '도우러 가라'는 소린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신, 그보다 더 물러설 수 없는 말을 해버렸다.
들어버린 이상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이 불가능한 말을.


'절망과 슬픔에 잠겨있던 소년'이 없어지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왕」.

"미안하군, 키배트. 사가크. 쓸데없이 걱정을 끼쳐버린 것 같다. 감사의 인사는 나중에 반드시 하도록 하지."
[타이가…!]
"하지만 그 전에… 해야할 일이 있겠지? 사가크, 키배트. 갑주들은?"
[아아, 복구는 이미 예전에 끝났다. 남은 건 네가 입는 것 뿐이야.]
​[​▼​▼​▼​▼​▼​▼​▼​.​]​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는 두 보호자.
그것을 보며 타이가는 웃음을 지었다.

"… 결국, 가장 늦게 일어난 건 나라는 거군. 이 경우엔 변명의 여지도 없지만."

타이가는 사가크와 키배트를 동반한 채, 처음으로 성을 나섰다.
전장의 위치는 들어서 알고 있다. 본래는 그것만으로 찾아가기란 어렵겠지만, 힘이 회복되고 감각이 모두 돌아온 타이가에게는 '방향'만 알면 충분하다.
─이미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짜릿한 살기와 전장의 기운이 흘러넘치고 있었으니까.

"늦은만큼 만회해야 하니까, 지금부터 전속으로 달린다. 둘 다 뒤쳐지지 마."

 


이계의 마황은 일어섰다.
그와 함께하는 종복들도 움직였다.

그가 이 세계에서 일으키는 변화와, 훗날에 있어 '역사'라고 까지 칭해지는 모든 일들.

 

그것들은,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마물합성사」실키 리틀레즌 LV 119
GI 20년에 마인화한 인간의 마인. 마인 4천왕중 한명. 이미지의 주변에 있는건 그녀가 합성한 마물들로 호넷의 충복. 열혈에 성실한 성격. 하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기 때문에, 굳이 만들지 않을 적까지 만들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선대 마왕 가이에게 존경과 함께 '사랑'에 가까운 감정을 품고 있으며, 그 때문에 그가 남긴 유언과 유지를 잇기 위해 호넷 진영에 참가해있다.
실질적으로 호넷 진영의 2인자이지만, 케이브리스 진영엔 그녀보다 레벨 높은 마인만 6명이다(…).

 


하우젤의 화염총, 타워 오브 파이어가 불길을 발한다.
그것은 케이브리스 진영의 마인 바보라에게 직격하지만, 그에게는 거의 데미지를 주지 못했다.
바보라는 20m가 넘는 거대 마인인 동시에 지극히 머리가 나쁜 대신, 케이브리스 이외의 마인으로서는 데미지조차 입히기 힘든 방어력과 내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같은 마인이라고 해도 상대하기 쉽지 않았다(케이브리스 진영에 참가한 이유도 "다른 마인에겐 맞아도 아프지 않지만 케이브리스에게 맞으면 아프기 때문"이라는 것이니까).

반면, 사테라는 가디언 시저와 함께 마인 메디우사를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여자 몬스터 헤비상 출신의 마인인 메디우사는 아름답거나 귀여운 여성을 붙잡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뱀 머리 형태의 성기로 범하고는 죽여버리는 취미를 가진 위험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메디우사는 케이브리스로부터 "내가 범할 예정인 호넷 이외의 마인은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보증까지 받았기에, 예전부터 노리고 있었던 하우젤을 사로잡기 위해서 직접 전장에 나와있었다.

"… 였는데, 상대가 너라니 맥빠지는데."
"으윽, 이 변태가…!"

사테라는 이를 갈지만, 메디우사의 전투력은 사테라는 물론 하우젤보다도 위다.
가디언 시저의 힘으로도 감당하지 못해, 사테라는 뒤로 물러나 하우젤과 합류했다.

"하우젤! 괜찮아?!"
"응… 어떻게든 버티고는 있지만…"

바보라의 거체로 곧장 돌격해오면 하우젤의 힘으로는 막을 방법이 없었다. 바보라가 다른 마인들과는 달리 따로 자신의 부대를 두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이며, 동시에 성벽을 마구 파괴하는 식의 공성전을 특기로 하고 있기도 하다.

"어머나, 하우젤. 여기에 있었네?"

사테라가 하우젤과 합류한 순간, 메디우사도 바보라와 합류했다.
그리고 하우젤을 발견한 메디우사는 만면에 미소─물론 좋은 의미일 리는 없다─를 띄우며 혀로 입술을 핧았다.
그 모습을 본 사테라와 하우젤은 소름이 전신으로 퍼지는 것을 느끼며, 한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런 두 사람과는 달리, 메디우사는 눈앞에 있는 극상의 사냥감들을 보며 희열에 젖어있었다.
이미 전세는 이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진 상태. 자신 혼자라면 사테라와 하우젤 둘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무리가 따르겠지만, 지금 옆에는 바보라가 있다. 멍청해서 써먹을 데라곤 없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메디우사는 이대로 두 사람을 두들기고, 저항할 힘이 없을 때까지 엉망으로 만든 후 자신의 성으로 데려가 범할 생각이었다. 보통 인간의 여자라면 메디우사에게 범해지는 순간 죽어버리겠지만 두 사람은 마인. 인간처럼 쉽게 부서지는 장난감이 아니다.
메디우사는 황홀한 표정을 띄웠고, 그 추악하기 그지없는 상상에 고간에 있는 하얀 뱀이 머리를 치켜세웠다.

"그럼 슬슬…"

메디우사는 바보라에게 명령을 내리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넌 저쪽에 있는 사테라랑 놀아주도록 해. 단, 절대 죽이지는 말고."
​[​아​아​아​아​알​아​아​아​아​아​았​다​아​아​아​아​아​아​아​.​]​

바로 옆에 있어도 머리가 워낙 높은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바보라의 목소리는 상당히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울렸다.
그리고 바보라의 거체가 움직이는 순간, 멈춰있던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순수하게 전투력으로 따진다면 하우젤 쪽이 메디우사보다 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가 사용하는 화염 마법은 마인들 사이에서도 정평이 나있으며, 메디우사 역시 마법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하우젤 정도의 레벨은 아니었다.
하지만 메디우사에게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높은 재생 능력이 있었기에, 하우젤의 공격도 거의 데미지를 주지 못했다. 바보라와는 다른 의미로 하우젤과는 상성이 나쁜 상대였다.

"파이어 레이저!!"

타워 오브 파이어에서부터 발사된 불길의 빛줄기가 메디우사에게 적중된다.
하지만, 메디우사의 몸은 타버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재생되버려, 결과적으로는 어떤 데미지도 받지 않은 상태가 된다.
그리고…

"후우… 하아… 하아…!"

하우젤은 이미 바보라와 일전을 치룬 상태. 덕분에 상당한 마력을 이미 소모해버린 다음이었다. 그 점에 있어선 사테라와 싸우고 온 메디우사도 마찬가지겠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메디우사의 체력과 재생능력은 보통의 마인들보다 훨씬 우위에 있다.

'하지만… 어떻게든, 여기서 막지 않으면─'

여기가 뚫리면 다음은 실키의 성. 그리고 그 다음은 호넷 진영의 본거지가 있는 마왕의 성이다.
숫자가 적은 자신들에게 있어서, 야전보다는 공성전이 유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케이브리스의 진영에 있는 바보라의 존재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굳이 불리한 야전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공성전에서 밀리면 그야말로 모든 것이 끝나버리니까.
게다가…

'성에는… 타이가도 있어…!'

상처가 나은지 얼마 되지도 않은 타이가를 싸움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 사실도 그녀가 싸우는 이유에 포함되어있다.

자신이 언제부터 그 '마물인지 인간인지조차 알 수 없는 소년'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을까.
혹은, 그의 어떤 점이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까지 끌리게 한 것일까.
그런 것에 고민한 적도 있었다.

그가 아직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슬픔에.
그가 내면적으로 가지고 있는 상냥함에.
그가 아주 가끔 보여주는 '소년다운' 미소에.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이 이유일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하우젤에게 있어서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좋아하게 된 이유'나 '좋아하게 된 시간'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을 정도로, 좋아하게 되버렸으니까.
가능하면 그가 가진 슬픔을 극복할 때까지… 혹은 극복하고 난 후에도 곁에 있고 싶었지만, 그것이 가능할지 어떨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타이가가 자신을 받아들여주지 않을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하다못해.
─그를, 자신들의 전쟁에 휘말리게 하고 싶진 않았다.


"싸움 중에 딴 생각을 하면 안되지, 하우젤."


메디우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하우젤의 의식이 현실로 돌아왔다.
정신을 차리고 메디우사를 향해 총을 겨누지만, 그때는 이미 메디우사의 거대한 꼬리가 하우젤을 강타한 다음이었다.

​"​꺄​아​아​아​아​아​악​?​!​"​

그 강렬한 일격을 거의 무방비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직격당한 하우젤.
그녀의 몸은 거세게 튕겨져 날아가 땅에 부딪히고, 튀어올랐다가 다시 날려가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그 직격된 일격은 지금까지 누적된 피로와 상처들과 합쳐져, 하우젤에게서 전투력을 빼앗았다.
그 하얀 날개와 하얀 몸이 핏빛으로 물들고, 하우젤은 바닥에 쓰러진 채 일어서지 못했다.

─그 위로, 다시 한번 메디우사의 꼬리가 떨어진다.

"크, 아악……!!"

공격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한번이 아니라, 두번이 아니라 세번. 그리고도 계속해서.
새디즘이 한껏 섞인 미소를 지으며 공격을 날리는 메디우사. 그러나 하우젤은 그것을 피하는 것조차 하지 못한 채 엉망으로 두들겨지게 된다.
마치 사냥을 즐기는 것처럼 메디우사는 하우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몰아내며 유린. 얼마 지나지 않아 하우젤의 몸은 보는 것도 힘들만큼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바닥에 뒹굴게 된다.
기절하고 싶을만큼 아픈데도, 너무나도 아프기 때문에 오히려 의식을 잃지 못했다.
손 하나 움직이거나 날개를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통증이 전신을 뒤덮어, 움직일 수도 없게 된 상태.

그 상태에서, 메디우사의 뱀에 의해 목이 휘감겨 위로 들어올려진다.
의식을 잃기 직전이면서도 어떻게든 저항하기 위해 팔을 움직이려고 하지만 그것조차도 격통으로 인해 불가능했다.

"우후훗, 그렇게 너덜너덜해진 몸인데도 아직도 저항하려고 드는구나. 이제 그만 적당히 포기하는 게 좋을텐데."

하우젤의 고통으로 찬 표정을 보며, 메디우사는 욕정을 일으킨다.
지금 당장이라도 범하고 싶었지만, 성으로 돌아가서 천천히 천천히 즐길 생각이었기에 간신히 참아냈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괜찮겠지.

하우젤의 턱을 붙잡고 그대로 끌어당겼다. 욕정을 참다못해 강제로 입을 맞추기 위해서다.

"싫어… 싫어어…!"
"그렇게 싫어하면 상처받는데. 뭐, 그래도 할 거지만."

하우젤의 저항을 즐기듯이 메디우사는 그 반응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러다가, 위화감을 눈치챈다.
하우젤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저항하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여자들을 범했을 때와는 저항의 질이 약간 다르다.
무턱대고 저항한다기 보다…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하는 모습'.

"싫어, 타이가…!"
"응? 누구야, 그건?"

하우젤의 입에서 나온 생소한 이름에 메디우사가 반문했다.

 

타이가의 얼굴을 기억했다.
타이가의 목소리를 생각했다.

그것만으로도, 어떻게든 움직일 수 있게 된다.

"당신같은 것에게… 절대로 지지 않아… 질 수 없어…!"

이곳에서 지고 물러나게 되면, 지키지 못하게 된다.
두번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공포에 비하면 이 정도 통증따윈─

"파이어 레이저!!"

들어올린 화염의 총, 타워 오브 파이어에서부터 열선이 발사되어, 메디우사에게 적중된다.

"키아아악?!"

더이상 하우젤이 저항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 방심 상태에 있던 메디우사는 피하지도 방어하지도 못한 채 복부를 꿰뚫리고는 하우젤을 놓치고 물러났다.
─하지만 그것 뿐.
마지막 남은 힘을 모두 쥐어짜낸 하우젤의 공격에조차, 메디우사는 금방 재생해낸다.
오히려… 메디우사의 분노와 가학심을 불러일으켰다.

"너… ​하​우​제​에​에​에​엘​!​!​"​

적당히 가지고 놀 생각이었지만, 마음이 변했다.
두번다시 이런 저항을 하지 못하도록 부숴버린 후, 미래영원 자신의 성에 가둬두기로.

하우젤은 광란하는 메디우사를 앞에 두고 오히려 침착해졌다.
자신이 무엇때문에 싸우는지, 무엇을 해야하는지 되새긴 지금, 전신을 뒤덮은 통증조차 장애물이 되지 못한다.

"타이가… 나는… 당신을…"

정말로,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

 


"그렇게 부를 필요없어, 하우젤."

 


하우젤의 의식이 깨어난다.
이곳에서 들을 리 없는 목소리.
동시에, 너무나도 듣고 싶었던 목소리.

─그것이 들려온 것은, 눈앞에서 쇄도해오고 있던 메디우사가 튕겨져 날아가는 것과 동시였다.

 


"나는, 너의 곁에 있다."

 


지금까지 함께 있던 시간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까이에.

 


타이가는 사가크가 메디우사를 날려버리는 것과 동시에 하우젤을 구해냈다.
적을 날려버린 직후임에도, 이미 타이가의 시선은 메디우사에게서 완전히 떠나, 하우젤에게 고정된 상태였다.
평소의 깨끗함은 사라지고, 상처와 진흙, 피투성이가 된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아름다움이 퇴색되는 일은 없었지만, 그것이 구제가 되진 않는다.

───가능하면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뱀'의 모습이 되면서까지 달렸는데도 늦었던건가.

"타이가… 어떻게, 여기에…?"
"도우러 왔다. 그걸론 안되는건가?"

예전이었으면 결코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이야기가 너무나도 쉽게 나왔다.
잠시 멍해져있던 하우젤은 정신을 차리고 타이가에게 말했다.

"나보다도, 사테라를…!"
"괜찮아. 벌써 구해왔으니까."

타이가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가 부리고 있는 거대 뱀형의 몬스터 「쿠쿨칸」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막, 그 거체로 바보라를 밀어내고 사테라와 시저를 구해온 것이다.
사테라는 쿠쿨칸에 의해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타이가를 발견했다.

"타이가?! 그럼 이것도 타이가의 골렘이었어?!"
"뭐, 그런 셈이지만… 그 이야기는 나중이다."

타이가는 하우젤과 사테라에게서 고개를 돌려, '적'에게 시선을 향했다.

"키배트. 두 사람을."
[아아. 안심해라. 확실하게 지킬테니까, 마음껏 날뛰라고. 꽤나 쌓였겠지?]

키배트 2세가 하우젤과 사테라의 앞에 내려앉는다.
그것을 기척으로 확인한 타이가는 사가크를 불러들이며 앞으로 걸어나간다.

"네놈…!! 잘도 방해했겠다!! 도대체 뭐야, 너는?!"
"네놈에게 말할 이름따윈 없다."

지금부터 쓰러질 적에겐 더더욱 필요없는 일이기도 하고.

​"​키​아​아​아​아​아​아​아​아​악​!​!​"​

메디우사는 절반 정도 뱀의 형상이 된 채 타이가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시도는 무의미. 타이가의 발밑에서부터 시작되어, 그의 전면에 펼쳐진 칠흑의 '그림자'로부터 튀어나온 수많은 뱀들이 메디우사를 휘감아, 허공에 고정시켜버린 탓이다.

"뭐, 야… 이건?!"

그제서야 메디우사는 눈치챘다.
상대의 본질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뱀'.
그러나 그 농도도 강력함도, 자신보다 훨씬 우위다. '뱀'이라는 종족 최상위 몬스터인 '헤비상' 출신의 마인 메디우사보다도.

그러다가 기억해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한, 호넷 진영의 마인 중에 이런 녀석은 없다.

이 세상에 마인이 아니면서 마인에 대적할 수 있는 존재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가장 가까운 예로 '성도 닛코'와 '마검 카오스'가 있으며, 그 이외에도 지옥의 악마나 천계의 엔젤나이트. 그리고 과거의 일이지만 기계장치로 이루어진 거인 "투신"이라는 존재도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그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이 녀석은, 도대체…?

 


분명히 자신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몰락한 마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더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살아야할 이유 또한 없다고 여겼다.
자신에게는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다. 그랬을 터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들을 지키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능하자면 그녀들이 꿈을 이루는 걸 돕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자신에게는 이루어야할 목적도 이루고 싶은 꿈도 없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지만.


─'그녀들의 꿈을 지키고 싶다'라는 것 자체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었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간신히 깨달았다.


"욕망에 눈이 멀어 손 대선 안될 것에 손 대버린 어리석은 마인이여."


지금이라면 와타루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면,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13마족 중 하나, 판가이어 킹으로서의 판결을 내린다."


하우젤과 사테라. 두 사람을 지킨다.
그것은, '판가이어'로서 가지고 태어난 숙명도 아니고, '킹'으로서 주어진 의무도 아닌.
'타이가'로서의 자신이 스스로 정한, 자기 자신의 '삶의 목적'이라고.


"죽어라."


킹의 문장이 사라지고, 킹으로서의 자격이 사라졌어도.
여기에 있는 이 소년 타이가는, 지금 이 순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왕​(​K​I​N​G​)​'​이​었​다​.​

머나먼 옛날부터 일족과 함께 해온 기계의 종복이 날아와, 왕의 앞에 내려선다.
이윽고 그것은 한 마리의 뱀이 되어 왕의 몸에 장착되고, 왕은 들고 있던 검장(劍杖)을 뱀의 머리에 꽂아, 스스로의 의지를 전달한다.
그러자 뱀의 몸에서부터 '거울'과 같은 빛을 발하는 금속이 흘러나와 왕의 전신을 뒤덮고, 어느 순간 산산히 깨져나간다.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은, 뱀의 힘을 품고 왕을 수호하는 백은의 갑주.
─'King of Vampire'의 근원.
─'운명'이라는 이름을 지닌, 시작의 갑옷.

─'하얀 뱀의 왕' 사가(Saga).

 


그 뒤에 일어난 일은, 말하자면 일방적인 도륙에 지나지 않았다.
사가와 메디우사의 거리는 20m 이상. 보통으로 생각한다면 양쪽의 공격이 닿을 거리가 아니다.
하지만, 사가가 쟈코더를 휘두르는 순간 쟈코더의 검날은 핏빛의 채찍으로 바뀌어 메디우사를 두들겼다.

"키아아악?!"

가장 먼저 채찍은 메디우사의 동체를 때린다. 그리고 탄력으로 튕겨져나온 채찍이 지면에 부딪히고, 그 반동으로 다시 메디우사를 때린다.
물론 공격이 그것만으로 그칠 이유따윈 없다. 손을 움직이고, 팔을 휘두르는 만큼 채찍의 궤도와 방향이 무한대로 변하고, 한도 끝도 없이 메디우사의 전신을 때리고 두들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찍의 속도는 가속되가기만 한다. 판가이어의 힘과 사가의 힘이 합쳐진 괴력으로 채찍을 휘두르고, 그것을 땅에도 내리찍어 그 반동으로 계속해서 가속. 공격 횟수도 공격 속도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간다.

─더더욱 메디우사를 꼼짝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그 채찍에 실린 힘.

메디우사의 초재생력으로도 현상 유지가 고작이고, 도저히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어째서, 마인도 아닌 녀석에게… 이런 ​힘​이​이​이​이​이​이​이​익​?​!​"​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상황에 절규하던 도중, 메디우사의 입에 채찍이 부딪혔다. 턱과 안면의 살이 터져나가고, 메디우사의 몸이 날려간다.
압도적, 지극히 압도적. 망설임이 없는 지금, 사가가 발휘하고 있는 힘은 마인사천왕에 필적하는 것이었다.

[피날레다, 마인.]

그리고 그것에도 끝이 다가왔다.
사가에게 존재하는 단 하나의 휘슬. 그것이 사가의 손에 의해 벨트에서 뽑혀져, 사가크의 입에 물려졌다.
사가크는 자신의 입에 물려진 휘슬을 불었고, 사가는 쟈코더를 다시 한번 사가크의 머리에 꽂았다가 뽑아낸다.
다시 뽑아냈을 때의 쟈코더는, 사가크의 머리와 붉은 빛의 선으로 이어진 상태. 사가 그 검을 자신의 가슴 앞까지 가져오고 위로 세워올리자─

─밤이 찾아왔다.

"ㅁ…?!"
"조금 전까지… 낮이었는데?!"

입이 부서져서 말을 할 수 없는 메디우사도, 사가의 뒤에 있는 두 마인도. 동시에 경악을 표출한다.
조금 전까지 태양이 있던 하늘에 떠있는 것은 핏빛의 달. 그리고 푸른 색이었을 하늘은 칠흑색으로 물들어있다.
사가크의 머리에 있는 뱀의 문양이 끊임없이 회전하며 붉은 빛을 발했고, 그 빛들은 쟈코더와 이어진 '선'을 통해 남김없이 올라가 검에 깃든다.

위험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자신은 엄청나게 위험하다.
수십년 전 케이브리스의 막강한 힘에 공포를 느꼈을 때나, 수천년 전 마검 카오스와 대치했을 때 느꼈던 공포와도 다른…
… 좀더, 근원적이고 본능적인 공포. '죽임을 당한다'던가 '고통을 받는다'는, 그런 종류의 공포와는 다르다.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저 '존재 자체'에 대한 공포.
덧붙여, 메디우사는 이 공포의 정체를 알고 있다. 3년 전까지만 해도 언제나 느끼고 있었으니까.

위험해.
위험해.
위험해.
위험해.
위험해. 위험해. 위험해. 위험해. 위험해. 위험해. 위험해. 위험해. 위험해. 위험해. 위험해. 위험해. 위험해.

이건 위험해.
이 녀석의 이 힘.
이건, 이건 마치…!!

사가가 들고 있던 쟈코더를 휘둘러, 하늘을 향해 내뻗는다.
검에 모여있던 붉은 빛이 하늘로 올라가, 칠흑의 밤하늘에 왕의 문양을 그렸다.

박쥐가 날개를 펼쳐 날아오르려는 듯한 붉은 빛의 문양.

거기까지 본 메디우사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지금 저 '하얀 뱀'에게서 느껴지는 것.
그것은 지금 이 땅에 있을 리가 없는 존재에게서만 느꼈던 것.
그런 것과 정면으로 대치하고도 싸울 수 있을만큼, 메디우사는 용감하지도 무모하지도 않았다.

─지금의 사가에게서 등을 돌린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무모한 것이었지만.

메디우사가 몸을 뒤로 돌린 후, 발을 앞으로 내미는 순간.
사가가 내지른 붉은 검에서 나온 핏빛 섬광이 그 목을 뒤에서 꿰뚫는다.
초재생력을 지닌 메디우사가 아니더라도, 이 공격은 상대를 곧바로 죽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대로 죽는 게 나은 일일지도 모르지만.

왕의 "처형"은 지금부터였다.
사가는 그 상태에서 높이 뛰어올라, 그 문양을 통과하고는 지면에 내려선다.
검에서부터 뻗어져, 메디우사의 목을 꿰뚫고 있던 붉은 빛줄기는 문양에 걸쳐져 더욱 늘어난다.
지면에 내려선 사가는 메디우사에게서 등을 돌린 채 검을 잡아당긴다. 그 순간 빛줄기에 목이 꿰여져있던 마인의 몸이 들려진다.

─마치, 교수대에 매달린 사형수처럼.

아니, 실제로도 사형수다. 이곳은 왕의 처형 집행장이니까.
사형수는 목을 꿰뚫은 붉은 빛줄기를 붙잡고 바둥거린다. 그러나 절대적인 왕의 힘으로 만들어진 이 빛이, 그 정도 발악에 풀릴 리가 없다.
왕은 검의 폼멜에 손가락을 겹치고, 그대로 내리긋는다.
그것과 함께 붉은 빛줄기는 도르래처럼 말려올라가며 회수되어, 왕의 검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지금껏 꿰뚫려있던 사형수의 몸은 산산히 터져서 흩어진다.
남은 것은 성당의 글래스와도 같은 파편들 뿐.

그것이, 마인 메디우사의 최후였다.

 


"굉장해…"

사테라는 멍하니 사가의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말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하우젤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메디우사를 일방적으로 쓰러트렸다던가, 지금 느껴지는 힘이라던가도 굉장하지만…

'뭔가… 굉장히 익숙한 느낌이 들었었는데.'

기억이 날 듯 말 듯하면서도 나지 않는다. 혹시 조금 전의 그 느낌을 다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이미 사가는 아까 개방했던 힘을 회수한 다음이라 "압도적인 힘"이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녀의 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하늘에서부터 거대한 뱀이 떨어져내린 순간, 그녀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쿠쿨칸?!]

사가가 내뱉은 것은 바보라를 상대하게 했던 사역 몬스터의 이름이다.
하지만 그 몬스터는 지금, 엉망진창으로 박살난 채 자신의 앞에 내던져졌다.
그 거인이 이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었던가. 그렇게 생각하고, 쟈코더를 들어올린다.

─그 순간.

─이 세계에 온 이래.

─최대. 최강의 충격이 사가를 덮쳤다.

[?!?!?!]

그 짧은 시간에조차 사가는 반사적으로 쟈코더를 두 손으로 붙잡고 역수로 들어올려 가드에 들어갔다. 하지만 지금 날아온 이 '공격'은 그 가드 채로 사가의 몸을 튕겨냈다. 2m에 달하는 사가의 몸을, 너무나도 가볍게.

10m, 20m, 30m. 그러고도 더욱 날려가며, 몇번이나 지면에 충돌하기를 반복했다.
단 일격에 수십미터를 날려가 땅바닥을 굴렀지만, 사가는 금새 자세를 바로잡고 일어났다.

공격을 막아내는데 사용했던 팔의 경련이 아직도 계속 되고 있다.
고작 한번의 공격. 그것도 갑주와 방어 위에 받은 공격임에도 이 정도의 데미지. 단순히 파워만 가지고 논하자면 라이온 판가이어 루크를 훨씬 능가한다.
─굳이 비유하자면, 캐슬드란에 걷어차였을 때와 비슷할까.

사가는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팔에서 시선을 돌려, 새로 나타난 적을 바라본다.

그곳에 서있는 것은 '괴물' 이외의 어떤 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존재.
외명을 말하면, 배트 판가이어 쪽이 차라리 낫다.

5m가 넘는 거체. 그 몸에 붙어있는 6개의 팔.
짐승형의 얼굴에는 뿔인지 이빨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네개.
그 장대한 몸을 감싸고 있는 갑옷과 붉은 색의 망토에서도, 심상치 않은 '힘'이 느껴지고 있었다.

보는 순간 납득했다.
자신을 공격하고, 산이나 벽처럼 우뚝 서있는 이 녀석이 누구인지.
아아, 과연─

[네가, 케이브리스인가.]

 


"네놈이냐… 메디우사를 이런 꼴로 만든 건."

케이브리스는 오랜만에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메디우사는 단순한 '휘하의 마인'이 아니다.
케이브리스도 메디우사도, 마인 중에선 최저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성정의 소유자들. 하지만 그런 둘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죽이 잘 맞았고, 연령과 힘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케이브리스에게 있어서, 연모의 대상인 카미라와는 다른 의미로 좋아하는 존재. 그것이 메디우사다.

"너, 곱게 죽을 생각은 하지 마라."
[죽을 생각도, 패배할 생각도 없다. 이제 두번 다시는.]

케이브리스의 포효가 대지를 뒤흔든다.
사가는 자세를 낮춘 채, 쟈코더를 들어올린다.

─두 강자가 부딪히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아, 아아아…!"

하우젤은 신음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언제나 명랑하고 말이 많은 사테라조차 굳어있다.
메디우사를 쓰러트렸는데, 그 뒤에 나타난 것은 다름아닌 '최강의 마인' 케이브리스.
분명히 말하건대, 케이브리스는 메디우사와 격이 다르다. 4500년 이상을 살아온 최고(最古)의 마인이며, 그 긴 시간동안 끊임없이 수련해오고 신체를 개조하여 스스로의 한계를 높여온 괴물. 리틀 프린세스가 각성하지 않는 이상, 그 힘은 지금 이 지상에서 최강이라고 해도 그다지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타이가… 타이가!!"

무리다. 아무리 타이가가 강하다고 해도, 설령 메디우사를 쓰러트린 '그것'을 사용한다고 해도.
─저 괴물에게만큼은─

 


[슬슬 내 차례로군.]

 


하우젤이 뭐라고 외치려는 순간, 키배트 2세가 움직였다.

"키배트… 씨…?""가짜 박쥐…?"
[뭐, 걱정하지 마라, 아가씨들. 확실히 저 녀석의 힘은 예상밖이지만… 우리들의 상상을 넘어설 정도는 아니거든.]

거기까지 말한 후, 키배트는 날개를 펄럭여 타이가에게 날아갔다.

[지금부턴 나도 도와주마, 꼬마.]
"… 저런 녀석은 사가의 힘만으로도 충분하다. 물러나있어."
[그럴까. 확실히 사가의 힘으로 '절대로 쓰러트리지 못할 상대'라는 건 아니지만, 승률은 상당히 떨어진다만.]

아마도 50 대 50. 잘하면 40대 60까지 떨어질지 모르겠다. 저 마인의 힘은 '황금의 키바'에 필적한다.

[가장 쉬운 길을 두고 일부러 돌아가려 하지 마라, 꼬마. 지금의 너에게는 지켜야할 것이 생겼잖나.]
"…… 확실히."

사가는 그의 말에 수긍하고, 쟈코더를 내렸다. 그것을 본 케이브리스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뭐냐, '뱀'. 설마 도망칠 생각인건가?"
[그럴리가. 단지 갑주를 바꾸고 싶을 뿐이야."

케이브리스의 말에 대답하며, 사가에서 타이가로 돌아온다.
사가의 갑주가 글래스로 바뀌어 다시 사가크에게 빨려들어가고, 사가크는 타이가의 몸에서 떨어졌다.

[너와 힘을 합치는 건 이번이 두번째인가. 앞의 상대도 이번의 상대도 보통 물건들은 아니지만.]
"그렇군. … 그렇지만, '보통이 아닌 상대'니까 키바를 사용할 가치가 있는 거겠지?"
[그 말대로다.]

타이가는 키배트 2세를 붙잡고, 그의 이빨로 자신의 손등을 찌른다.

[캬브릭!!]

이빨에 뚫린 손등에서부터 흘러나온 라이프 에너지가 키배트 2세에게로 흘러들어가고, 키배트 2세는 그것을 기폭제로하여 불러낸다.
500년 전부터 그가 보관하고 있는 무적의 갑옷을.

타이가의 허리에는 봉인의 쇠사슬 「카테나」로 이루어진 벨트가 모습을 드러냈고, 키배트 2세는 거기에 스스로 날아가 '장착'된다.
그것과 동시에, 그의 전신을 판가이어의 글래스가 뒤덮는다.

「사가」가 펼쳐놓은 칠흑의 밤. 그리고 핏빛의 달.
그 둘의 힘이 남김없이 타이가와 키배트 2세에게 빨려들어간다.

'어둠'과 '핏빛'이 뭉쳐지고, 보옥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머리에는 왕의 정신과 영혼을 보호하는 칠흑의 쌍익(雙翼) 「제논 스타피라이저」.
목에는 저급의 몬스터라면 보는 것만으로 무릎을 꿇게 만드는 악마가 봉인된 「다크니스 쵸커」.
몸에 박혀있는 하늘.물.땅의 마황석들이 가진 힘을 무한대로 증폭시키는 마황력 증폭장치 「킹 브레스」.
우주 공간에서조차 착용자를 보호해내는 흑룡 "가오라 드란"의 피부로 만들어진 「드란 메일」.

판가이어 최강의 존재이자 최고의 위치에 존재하는 「킹」.
그 판가이어의 킹이 가질 수 있는, 최강 최고 최대 최흉의 전투형태.
일찍이 이 땅을 지배하고 있던 13마족의 최정점. '최강'임과 동시에, '무적'의 상징.
그 이외에의 무수한 칭호─일절의 과장조차 더해지지 않은─로 불리고 있는 마왕의 갑옷.

​─​─​─​─​─​─​─​─​─​─​─​─​「​어​둠​의​ 키바(Dark Kiva)」.

 


'저쪽 세계'에서 배트 판가이어를 무너뜨린 그것이 다시 한번 모습을 드러냈다.
전혀 다른 세계에서, 전혀 다른 시간대에서.

─하지만, 그것을 본 마인들은 예상 이상으로 경악했다.

 


"뭐, 뭐, 뭐, 뭐……!!"

케이브리스는 절규했다.
눈앞의 '뱀'이 '박쥐'로 모습을 바꾸는 순간 그 몸에서 터져나온 녹색의 불꽃.
거기서부터 느껴진 힘은, 분명히─

 


"마왕님……?"

누가 말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말은 여기에 있는 마인 전부의 심정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 세계의 어둠을 지배하는 절대자 ​'​마​왕​(​V​a​m​p​i​r​e​ of blood pool)'. 그 마왕이 가지는 어둠의 힘.
그것과 동류의 힘이, 저 '검은 것'에게서 느껴지고 있다.
비록 마왕이 가지는 '절대 지배력'같은 건 느껴지지 않지만, 종류는 같다.

아까 사가가 마황력을 뿜어냈을 때 잠깐 느껴졌던 것도 이것과 같은 힘.
그때는 잠깐 동안이었기에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지금에서야 확실히 알았다.

그가 마왕일 리는 없다. 그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마왕의 힘과 같은 종류의 힘이 그에게서 느껴지고 있다.

"우리들……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된 걸까……?"

 


​"​■​■​■​■​■​■​■​■​■​■​■​■​■​■​■​!​!​!​!​"​

메디우사가 그랬던 것처럼, 케이브리스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에 절규하며 광란했다.
단, 메디우사와는 달리 케이브리스는 도망치지 않고 덤벼들었다는 차이가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다크 키바의 발 밑에 녹색의 불길이 깔린다.
그 불길은 이윽고 '키바의 문양'과 같은 형태로 변하여, 다크 키바의 손짓을 따라 지면을 타고 달린다.
불길은 케이브리스에게 도달하자마자 지면에서 일어나 케이브리스의 등 뒤에서 달라붙는다.

​"​■​■​■​■​■​■​■​■​■​?​!​?​!​"​

왕의 문양에 붙잡힌 케이브리스는 그것을 풀기 위해 발악했지만, 그럴수록 불길은 그의 몸을 태워갈 뿐이었다.
그것을 보며, 다크 키바는 케이브리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가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케이브리스의 몸이 문양에서 떨어져 엄청난 기세로 다크 키바를 향해 날아왔다.

그 케이브리스를, 마황력을 주입시킨 주먹으로 때린다.
날아온 것과 거의 비슷한 기세로 날려간 케이브리스는 다시 문양에 의해 구속되고, 몸을 태워진다.
다시 한번 케이브리스를 향해 손을 들어 끌어당긴다.
다시 한번 문양에서 떨어진 케이브리스가 다크 키바에게로 날아온다.
그것을, 이번엔 돌려차기로 걷어차 다시 문양을 향해 쳐날린다.

케이브리스의 거체가 튕겨졌다 날아오고, 두들겨져 다시 튕겨지는 것을 반복했다.

​"​■​■​■​■​■​■​■​■​■​■​■​■​■​■​■​!​!​!​!​"​

그것이 몇번이나 반복되자, 케이브리스는 마침내 문양을 깨트리고 자신의 발로 일어선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왕의 심판'이 그를 벌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유감이군. 냉정하게 덤볐더라면 좋은 승부가 됐을텐데.]

다크 키바는 벨트에 있는 휘슬 중 하나를 꺼내고, 벨트에 있는 키배트의 입에 물렸다.
키배트는 그것을 있는 힘껏 불면서 소리높여 외친다.

『웨이크 업 1』

[우… ​오​오​오​오​오​오​오​오​오​!​!​]​

다크 키바의 두 팔에 녹색의 마황염이 타오른다.
두 손을 가슴의 앞에 모으자, 마황염은 한데 뭉쳐져 구체의 형상을 하여 점차 커져간다.
그것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을 때는 이미 다크 키바 본인보다도 훨씬 커진 상태.
두 팔을 아래로 내려, 케이브리스를 향해 내뻗는 순간 부풀어오른 마황염은 케이브리스를 향해 날아갔다.
다크 키바에게로 전속력으로 돌진해오던 케이브리스는 피하지도 못한 채 마황염을 직격으로 받게 되고, 곧 그 구체 안에 빨려들어가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하​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앗​!​!​]​

남아있는 마황염 전부를, 오른주먹에 집중시키고 케이브리스를 향해 달려나간다.
그리고─ 초고층의 빌딩조차 일격에 분쇄하는 펀치를, 마황염의 구체에 꽂는다.

그 후에 나온 것은 섬광. 폭음. 그리고 비명 뿐이었다.

 


【 EYE CATCH 】

 


[도망쳤나…]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터프했던 모양이다. 다크니스 헬 크래시를 직격으로 맞고도 살아서 도망칠 거라고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기색은 미약하게나마 감지되었다. 지금부터라도 추격하려고 하면 추격할 수 있는 거리.
가능하면 이 자리에서 끝내버리고 싶었지만…

[추격은 그만두도록 하지.]
[… 아아. 그럴 생각이야."

키배트 2세가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다크 키바의 무장이 해제된다.
확실히 지금 추격한다면 따라잡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엔 사테라와 하우젤의 부상이 문제가 된다. 사가크 하나에게 맡기긴 불안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의 기척으로 보건대 케이브리스 진영의 다른 마인들도 모여들고 있었다. 케이브리스 하나 뿐이라면 몰라도 그 녀석들까지 전부 상대하는 건 사양하고 싶다.

"일단은 돌아갈까. 체력 소모도 꽤 심했고… 두 사람도 걱정되고."
[후자 쪽이 본심이겠지?]
"시끄러워."

타이가는 키배트의 야유를 한 귀로 흘리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타이가도 키배트 2세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판단은 옳은 것이었다.
엉망진창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한 것처럼 보인 케이브리스였지만, 그는 분명 아직도 여력을 남기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 전처럼 단지 이성을 잃어 달려들기만할 뿐인 것과는 다른, 진정한 의미에서의 '폭주'. 그것이 시작되고 나서가 케이브리스의 '전력발휘'인 것이다.
만약 그대로 추격했더라면, 반대로 폭주한 케이브리스에게 대반격을 맛보게 되고, 타이가 자신은 살아도 하우젤과 사테라를 잃게 됐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호넷 진영과 케이브리스 진영의 1차 격돌은 느닷없는 끝을 맞이했다.
─양측 진영 중 누구도 생각지 못한 '난입자'에 의해서.

 

 

「마인공주」호넷 LV 210
마왕 가이와 인간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하프. GI 850년에 태어나 GI 860년에 마인화. 검술, 마법, 성마법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으며 보통의 마인들은 물론이고 케이브리스 이외의 마인사천왕조차 능가하는 힘을 발휘한다. 본래는 차기 마왕이 되기 위해 교육받았기 때문에 그 능력은 명실상부 마인 톱클래스.

 


"먼저, 하우젤과 사테라를 구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를."

타이가는 그렇게 말해며 고개를 숙이는 호넷에게 적잖이 놀랐다.
태어나면서부터 마왕이 되기 위해 교육받은 '마인공주'라고 하길래 꽤 시건방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타이가 쪽이 그녀보다 130살 이상 연하라는 사실은 무시하기로 하자)

"당신 덕분에 저희들은 무모한 전쟁에서 동료를 잃지 않고 끝낼 수 있었습니다."
"당신들을 위해서 한 게 아니니까, 감사받을 이유는 없는데."
"예,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두 사람을 위해서 싸운 것 뿐이겠지요."

… 이 여자.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그럼에도, 당신 덕분에 구해졌다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두 사람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번에도 호넷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답해주지 않으셔도 상관없는 질문입니다만…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쪽에 넘어왔을 때부터 질릴만큼 들었던 질문이다. 하우젤이나 사테라는 물론이고 마물들에게조차도.

"대충 예상하고 있을텐데. 당신이라면."
"가설이라면 몇가지 세워두고 있습니다. 그걸 확인받고 싶을 뿐이에요."

타이가는 호넷을 똑바로 바라보고, 호넷 역시 눈을 피하지 않는다.
잠시 후, 타이가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당신의 그 가설에, '다른 세계의 존재'라고 하는 것도 들어있는 거겠지?"
"물론. 실제로 이번의 마왕… 리틀 프린세스는 다른 세계에서 오신 분이니까요."

그 세계가 타이가의 세계와 같은 세계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리틀 프린세스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다른 세계라는 건 어지간히 강인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곳인가 보군요. 저에겐 무리일지도 모르겠어요."
"… 리틀 프린세스를 만나본 적은 없으니까 모르겠지만, 도매급으로 취급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아마 나나 리틀 프린세스는 그쪽 세계에서도 '매우 드문 존재'겠지."

적어도 자신의 세계에서 자신과 견줄 수 있는 건 그야말로 하나나 둘 정도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고, 모든 걸 잃어버린 채 몰락한 왕. 그 이외엔 뭐라고 해줄 말이 없는데."
"왕, 인가요…"

호넷은 타이가의 말에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놀라긴 했지만 그다지 상상을 벗어난 대답도 아닌 탓이다. 어쨌든 이 정도의 남자가 누군가의 밑에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이런 종류의 사람은 남들의 위에 군림하거나, 남들과 완전히 떨어져있거나 둘 중의 하나다. 그리고 타이가의 경우엔 전자.

"놀라지 않는건가?"
"충분히 놀랐습니다. 쉽게 납득한 것 뿐이죠. … 솔직히, 당신이 누군가를 모시는 사람이라고 했으면 훨씬 더 놀랐을 것 같지만요."

거기까지 말한 호넷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본론'으로 들어간다.
사실은 이 주제로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당신은 그 두 사람을 위해서 싸웠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을 저희들의 아군이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그 두 사람이 이 진영에서 싸우는 동안에는. 그리고 필요한 일이라면 당신의 지시에도 따르겠어."

이 말에는 호넷조차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정도의 남자가, 자존심을 굽히고 '지시'에 따르겠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그 두 사람… 호넷의 친우들인 하우젤과 사테라를 위해서.

"그 정도로 소중하게 생각해주는거군요, 그 둘을."
"……"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리 두 사람에 대한 감정이 호의라는 걸 자각했다고 해도, 그걸 입밖으로 꺼낼만큼 달관하진 않았으니까.
… 생각해보면 그 전쟁터에선 어지간히도 뜨거워져 있었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번에는 타이가가 호넷에게 말을 걸었다.

"하우젤과 사테라에게 들었어. 당신은 '인간계에 간섭하지 않는다'라는 걸 이상으로 하고 있다고."
"… 예. 확실히 그렇습니다만, 그것이 왜?"
"케이브리스 진영을 쓰러트리고, 인간계에 간섭하지 않는 마인령을 만든다. 뭘 위해서지?"

그것은 정해져있다.
오랜 옛날부터의, 선대 마왕이었던 아버지 가이의 이상이었던 것을 이루기 위해서.

"인간과 마물이 공존하는 세상…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너무나도 진지하고, 너무나도 결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타이가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
"아, 미안. 별로 비웃으려던 건 아니었어. 단지 어디의 누군가가 생각나서 말야."

살짝 기분이 나빠진 듯한 호넷에게 그렇게 말하며, 타이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랬다. 오랜만에 생각나버렸다.
아주 오래 전, '판가이어로서의 자신'을 자각했을 무렵.
양부의 앞에서 "인간과 판가이어가 공존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밝혔던 바로 다음 날.
바로 그, 누구보다도 믿었던 양부에 의해 독살당할 뻔했던 타이가 자신이.

"묻겠는데, 그 '공존'이라는 건 어떻게 하면 이루어지는거지?"
"그건─"
"문자를 그대로 풀이한다면, 지금처럼 마인령과 인간계가 분리된 이 상황도 '공존'인 거라고 생각하지만, 당신이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겠지?"

타이가의 말대로, 호넷 진영이 이상으로 내거는 것은 이 상황의 유지가 아니다.
마인령에 완전한 평화를 가져와, 인간계에는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는다. 선대 마왕 가이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되면 마물과 인류는 서로 싸우는 일 없이 각자의 영역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럼 그 '평온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선 뭘 하면 되는거지? 케이브리스를 포함한 그쪽 진영의 녀석들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인간계에 간섭하려드는 녀석들을 배제하고, 인간계에서도 이쪽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장벽이라도 쌓아올리면 되는 건가?"
"……"

확실히 그 방법이 최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이가의 말을 긍정하려고 하면, 무언가가 걸려온다.

─이 남자는 지금, 자신에게 어떤 대답을 바라고 있는걸까.

"그렇게 해서 평화를 쌓아올리면… 그걸로 되는걸까? 그 이후엔?"
"…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가요?"
"짐작하고 있지 않아? 당신이라면."

좀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치곤 방식도 그 이후의 일도 생각해두지 않은 것 같아서 말야."
"……!"
"리틀 프린세스가 돌아오기만 하면 어떻게든 자신들을 이끌어준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당장이라도 이 진영 해산하고 항복하는 게 좋아."

한순간, 호넷에게서 격노의 기색이 느껴졌다.
과연 마인공주라고 해야할까. 잠깐 동안 분노를 표출했을 뿐인데도 굉장한 패기가 드러났었다.
─하지만 그때 잠깐 싸웠던 케이브리스와 비교하면, 아무래도 떨어졌다.
사가나 다크 키바를 걸칠 것도 없이, '뱀'의 모습을 해서 싸운다고 해도 대적이 가능할 정도로.

하지만 타이가가 놀란 것은 그쪽 부근이 아니다. 그런 패기를 드러냈음에도 호넷은 순간적으로 감정을 추스려, 평상심을 되찾았다.
… 개인적으론 재미없지만, 과연 한 세력의 리더라고 할까. 호넷은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확실하게 갖추고 있었다.
잠시 동안 눈을 감고 있던 호넷은 다시 입을 열었다.

"… 그럼,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어떤 것이라고?"
"글쎄, 딱히 생각해본 적 없는걸."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도 상관없습니다."

가볍게 도발할 작정으로 적당히 대답했지만, 호넷은 걸려들지 않았다.
라고 하기보다, 그녀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 자신에겐 없는 무언가가 타이가에겐 있다고.
… 놀리는 건 여기까지로 해둘까.

"단순히 전쟁을 없애는 거라면 힘으로 억압하는 쪽이 제일 빠르겠지. 하지만, 그런 걸 언제까지나 유지할 수는 없어. 계속 억누르면 언젠간 ​폭​발​해​버​릴​테​니​까​.​"​

그리고 아마 그때의 혼돈은 지금과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과 마물과의 공존'이라고 해봤자, 지금은 마인령… 그것도 이 진영만 외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아. 무엇보다도 이 진영에 소속되어있는 자들 중에서도 진심으로 그걸 이상으로 삼고 믿는 자는 얼마 되지 않을텐데? 하급의 마물들일수록 특히."
"… 그 말대로입니다."

케이브리스에 비하면 훨씬 너그러운 호넷의 진영조차, 그 휘하 마물들은 마인들에 대한 공포로 움직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마도 진실로 그녀들의 이상을 이해하고 있는 이는 거의 없겠지.

"평화는 한쪽만 외쳐서 가능한 게 아냐. 케이브리스 진영은 차치하고, 인간들 측에도 아군을 만들지 않으면 안되겠지."
"하지만, 그들이 이쪽의 주장을 들을 거라고 생각하긴 어렵습니다. 이미 수천년에 달하는 세월을 피로 ​물​들​여​왔​으​니​까​요​.​"​

어딘지 모르게 힘이 빠진 듯한 호넷의 말에 타이가는 코웃음을 쳤다.

"'인간과 마물의 공존'이라고 하는 대사업이잖아? 당연히 쉬울 리가 없지."

공존처럼 뜬구름잡는 소리로 끝나기 쉬운 이야기는 한쪽만이 소리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 측에서도, 마물 측에서도.
진심으로 그것을 바라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하기보다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 그것이 '인마의 공존'이다.

"첫째는 인간 측의 아군. 그리고 그 다음은 역시 시간일까."
"시간… 그렇군요."
"아아. 당신이 말한 것처럼, 인간과 마물 사이의 골은 일이년 사이에 생긴 게 아닐테니까. 그걸 메우기 위해선 단기간으론 무리겠지. 조급해하는 건 절대 금물이고, 결과가 빨리 나오길 바라지 않는 것. 그게 두번째 조건이겠군."
"아군과 시간……"

호넷은 타이가가 말한 것을 되새기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역시 '포기하지 않는 것'이겠지."

분명히 이 진영이 걸어야할 길은 대단히 어렵고, 실패할지도 모르는 길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설령 실패한다고 해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얼마나 도움이 될진 모르지만…"

타이가는 호넷에게서 등을 돌리고, 호넷의 방에서 나가며 마지막으로 말을 남겼다.

 

"당신이 걸으려는 것과 같은 길을 걷다가 좌절하고 돌아온 녀석이 하는 말이니까, 새겨둬서 나쁠 건 없을 거라고 생각해."

 

그 말을 듣고, 놀란 호넷이 타이가를 붙잡기 위해 고개를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땐 이미 타이가의 모습은 사라진 다음이었다.

 


'… 쓸데없는 소리까지 해버렸군.'

멀고도 험난한 이상을 바라보며 나아가려는 호넷과 예전의 자신을 겹쳐본 탓이다. 틀림없이.
… 이 세계에 오기 전까지의 자신이라면, 저런 이상가를 제일 경멸했을테지만─

'상관없을까.'

따지고 보면 와타루도 인간과 판가이어의 공존을 바라던 이상가였고. 그쪽은 좀더 근성있었지만.
그리고 호넷의 방에서 나오자마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하우젤과 사테라가 반겼다.

"타이가, 호넷 님하고 이야기 끝났어?"
"대강은. 기다리고 있었어?"
"응!"

금방 달라붙는 사테라와는 달리, 하우젤은 걱정섞인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어떻게 됐죠? 설마 성에서 나가게 되는 건─"
"괜찮아. 그런 일은 없으니까. 그리고… 나가라고 한다고 얌전히 나갈 내가 아니고."

이 두 사람을 지키기로 한 이상, 호넷이 아니라 누가 방해한다고 해도 자신은 이곳에 있는다. 그렇게 결심했으니까.
하우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겨우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타이가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웃어보였다.
얼마만에 짓는건지 모를, 진짜 웃음.

"안심해줘. 설령 뭐가 뭐라고 하든…"

 

나는, 이곳에서.
앞으로도 계속 당신들의 곁에 있을테니까.

 


─Side : 호넷

그가 마지막으로 했던 이야기는 무슨 의미였을까.
과연 내가 제대로 들었는지, 그것조차도 의심했었지만 틀림없다. 그는 분명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내가 걸으려는 것과 같은 길을 걷다가 좌절하고 돌아왔다, 고.

─그는 인간이 아니다.
더군다나, 스스로를 '왕'이라고 칭한 자.
만약 그걸 그대로 믿는다고 하면…
그는 자신의 종족과 다른 종족을 공존시키려고 했다가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 사람의 앞에서, '인마의 공존'같은 이상을 이야기했다. 그의 말대로, 제대로된 방법이나 그 이후의 일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과연 그의 눈에는 얼마나 가소로워 보였을까. 그것이 호넷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보통이라면 이런 이야기를 믿을 수 있을 리 없지만, 호넷은 그 이야기를 믿었다. 믿기로 했다.
지금까지 마물들 사이에서 살아오며, 수많은 형태의 눈을 가진 자들을 만나온 호넷으로서도 처음 보는 눈.

─분명히 그건 지옥의 밑바닥까지 보고 절망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돌아온 자의 증거.
그걸 보고도 믿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

그리고 아마도 짐작컨데, 그를 지옥 밑바닥에서부터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 그 두 사람일 것이다(정확히는 하우젤 쪽이 먼저겠지만).
…… 그만두도록 하자. 어찌되었건 지금 그는 자신들의 진영에서 싸운다고 했다. 이제와서, "자신이 두 사람보다 먼저 그를 만났더라면"이라는 생각을 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정말로 터무니없는 사람에게 빠져버린 것 같네…"

남의 이야기를 할 처지는 못되지만.
어찌되었든, 이걸로 마인령의 운명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게 되버렸다.

 


─이세계의 마황이 이 땅에 강림했다.
─그것으로 인해, 마인령이 격동하고.
─나아가서는, 이 세계의 운명을 결정짓는 톱니바퀴가 가속된다.

 


─그것이 좋은 방향인지 나쁜 방향인지, 지금으로선 알 방법이 없었지만.

 





─FIN
 

 

「이세계의 마황」아리카도 타이가 LV 217(이미지 출처는 '천공의 알카미레스' 시노미야 타쿠야)
스네이크 판가이어. 판가이어의 왕인 동시에 지상을 유린제패한 13마족의 정점. '운명의 갑주' 사가와 '마황의 갑주' 다크 키바의 소유자.
비숍이라는 방파제가 있었다곤 해도 지극히 짧은 기간만에 판가이어들의 위에 올라섰으며, 그 이후부터 같은 판가이어조차 무자비하게 학살하며 철권 통치를 휘둘렀다. 비숍의 말에 따르자면 선대 킹조차 능가하는 '역대 최강의 킹'. 실제로 그는 갓난 아기 시절, 자신과 함께 모친인 선대 퀸을 죽이려고 했던 선대 킹의 마황력을 되받아쳐 반대로 살해해버린 전적이 있다. 이미 그때부터 '부친 살해'의 죄를 짊어지고 있었던 셈.
그 이후 '인간은 판가이어의 먹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오다가 이복동생인 하프 판가이어 '쿠레나이 와타루'를 만났다. 킹이 된 이후 줄곧 혼자라는 생각에 고독 속을 해매고 있던 타이가는 갑자기 생긴 동생의 존재에 대단히 기뻐했고, 그를 자신의 곁에 두기 위해 설득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대파국. 마지막까지 인간의 편에 선 동생과 대립하게 된 타이가는 몇번이나 와타루를 죽이려고 했지만 끝끝내 죽이지 못했고, 그러는 동안 어느 사이엔가 자신을 능가해버린 동생에 의해 패배. 그 직후 킹으로서의 자격조차 잃어버려 그 지위를 박탈당하게 된다. 여기에 덧붙여, 그의 약혼자였던 현대의 퀸은 타이가가 아닌 와타루를 사랑하게 되어 타이가를 배반, 결혼식 도중 그를 습격하고는 행방을 감추게 된다(물론 타이가는 이것조차 용서해버렸지만).
이후 '킹'의 이름을 되찾기 위해 다크 키바의 힘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타이가는 은거해있던 어머니(선대 퀸)를 찾아가게 되지만, 이미 그때 어머니는 비숍에 의해 살해당한 직후. 광란 상태에 빠진 타이가는 비숍을 갈기갈기 찢어 살해했지만 그 현장에 와타루가 나타나 '어머니를 죽인 것은 타이가'라고 오해하면서 결정적으로 이야기가 꼬였다. 결국 타이가는 와타루에 의해 죽기 일보직전까지 몰린 상태에서 간신히 도주. 그러다가 비숍의 계획으로 인해 부활한 '선대 킹'(배트 판가이어)에 의해 공격받고, 뒤늦게 소동을 알아차리고 돌아온 키배트 2세에게 다크 키바를 받아 걸치고 킹과 교전, 격전 끝에 그를 쓰러트린다.
하지만 목숨을 건졌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그 소동을 알아차리고 추격해온 와타루에 의해 공격받고 '심판'까지 받게 된다. 본래라면 여기서 살해당했어야 하지만,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두 가지 힘─ '황금의 키바'와 '어둠의 키바'가 정면으로 충돌한 여파로 타이가는 다른 세계로 튕겨져 날아가게 되고, 그것을 기점으로 '이세계 마황'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뭐,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고 해도 문제는 산더미처럼 있다. 설령 와타루의 오해가 풀린다고 해도 이번엔 타이가 쪽에서 와타루를 봐줄 생각이 없어졌기 때문에, 돌아가든 안돌아가든 이 형제의 앞날에 빛은 없다.
판가이어체의 모습은 확실하게 드러난 적이 없지만, 원작에서 광란에 빠졌을 때 '뱀'의 형상을 한 오오라가 그림자에 깔린 것으로 보아 뱀의 힘을 가진 판가이어(스네이크 판가이어)로 추측된다.
(사가의 힘이 반영된 것이란 설도 있으나, "걸치지도 않은 갑주"의 힘이 멋대로 발휘된다는 건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에)
덧붙여 청소 스킬은 없지만 요리 스킬은 상당한 편. 고등학생 시절 판가이어로서의 자신을 자각하기 시작했을 무렵, 양아버지의 앞에서 "인간과 판가이어가 공존하는 세계를 만들고 싶다"라는 꿈을 피력한 바로 다음 날 양아버지에게 독살당할 뻔한 이래로 남이 주는 음식은 먹을 수 없게 됐기 때문. 그 이래로 남이 만든 음식을 먹은 것은 이 세계에서 하우젤의 경우가 처음. 글 중에선 표현되지 않았으나 그나마도 초기에는 그때의 기억으로 인해 몸이 받아들이지 않아 몇번이나 토해냈으며, 한달쯤 지난 후에야 간신히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단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이지만 방식이 틀렸던 탓에 몰락해버린 왕.

 

아무리 뭐라해도 이 정도 행복해지는 건 괜찮겠지.

 

라는 생각으로 나온 글입니다. 대신 원작보다 몰락시켰지만, 그러지 않으면 수지타산이 안맞으니까요.
전부터 느꼈던건데, 타이가 이야기가 되면 어째 글이 길어지는군요. 뭐, 상관없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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