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쯤 찢겨진 하카마를 걸친채 곰방대를 물고있는 중년의 남성은 쓰러진 소년의 주위를 둘러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죽어가던 늙은 호랑이 유형월을 잡는데만 데리고 온 병력의 반절, 아니 그 이상을 소모했건만 뒤이어 온 미숙한 그의 제자를 잡는데 여남은 병력 대부분을 소모해 버린 것이었다. 남은 인원은 뒷처리 공작에 사용될 인원이었으니 사실상 전멸. 텐쥬와 다이치를 제외한 여섯가문의 대부분을 동원했음에도 결과가 이러하니 씁쓸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괜히 무문을 두려워해왔겠습니까. 만약 죽어가는 호랑이가 아니었다면 결과는 공멸도 아닌 저희쪽의 전멸이었겠지요."
"하기사, 그나저나 정말 무지막지하구만. 아무리 텐쥬와 다이치가 빠졌다지만 팔괘음영가 가주 여섯의 합격을 받고도 셋이나 죽이고, 게다가 제자는 혼자서 남은 병력의 태반을 몰살시킨 후 미즈류(水龍)가의 가주를 반병신으로 만들어 놨으니."
중년인은 사지를 비롯한 전신의 뼈가 조각난채 바닥을 뒹굴고있는 미즈류가의 가주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죽지않고 숨은 붙어있었지만 저쯤되면 죽지않는 쪽이 더 신기할 정도였다. 한동안 미즈류가의 가주를 지켜보던 중년인은 한숨을 내쉬며 옆에 서있던 여인을 향해 말했다.
"그나저나 미안하구만, 나는 그만두고 싶었지만 다른가주들이..."
"어쩔 수 없죠. 이게 그 사람과 저의 운명이란 말이니."
슬픈듯이 말하는 여인을 보며 중년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로 평범한 존재로서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하다못해 30년전에 태어나 만났으면 좋았을것을..."
10년전 대대적인 가주 교체이후 대부분의 가주들은 융통성 없는 과격파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대부분이 전대 권마신창, 여기 쓰러져있는 청년의 사조뻘되는 무문팔극권사에게 상당한 원한이 있는 관계로 결국 두 사람의 관계가 드러나기 무섭게 그 관계는 파국을 맞이했다.
"차라리 그녀석과 함께 도망치지 그랬느냐. 차라리 팔가를 배신하고 그에게 붙지 그랬느냐."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그녀를 보며 말하는 호메이(火鳴)가 가주의 말에 여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떻게 그럴수 있겠어요... 저는 팔괘음영가(八卦陰影家)의 일주(一柱)인 후우카(風花)의 가주. 가주로서 책무를 다해야합니다."
'차라리 가원이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상대하지도. 사랑하는 사람과 대립하지도 않았을건만.'
안타까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후우카가의 가주를 바라보던 호메이가의 가주는 운명과 인연의 지독함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던 중 여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호엔님. 혹시 '그것'이 아직도 있습니까?"
"그것이라니?"
"일전에 호메이가의 가원 일부가 걸린 희귀불치병말입니다."
'그것'이 언급되자 호메이가 가주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후우카의 가주가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채버린 탓이었다.
"설마 그것을 그에게?"
"네, 그 사람에게 '그것'을 주입하겠습니다."
"자네 제정신인가?! 그 병이 어떤 병인지 알면서 그런말을 하는건가?"
"발병하고 한달 이내로 인간의 말초신경부터 돌로 만들며 이윽고 전신을 돌로만들어 죽게만드는 희귀불치병... 생존확률 0.005%의 극악한 생존률을 지닌 통칭 '메두사'. 하지만 그 질병이면 보유만하고 있을 뿐이라도 국가단위로 관리중인 특별 병동에 가게되겠죠."
"그가 살기바라고 있구만...어떻게든."
"그가 설령 저를 원망하더라도. 두번 다시 보게 되지 못할지라도."
"바보같으니... 하지만 이건 생존률 0.005% 이하의 도박일세."
"그래도 0%보단 났겠죠. 게다가 그는 무문팔극권사, 모두가 두려워하는 권마신창입니다. 절대 병같은걸로 죽을리가 없어요."
"하긴, 병같은걸로 죽을 권마신창이었으면 벌써 결착이 났겠지."
쓴웃음을 지으며 곰방대를 무는 호엔은 문득 '그'로 부터 반응이 있음을 느끼고 후우카에게 말했다.
"후우카"
"미안해요 현. 부디 무사하기를."
후우카는 오른손에 모인 압축공기를 작렬시키며 '현'을 다시한번 '기절'시켰다.
3화 헌터
"꿈인가, 500년 만의"
잠에서 깨어난 서현은 흐릿한 꿈의 기억에 왠지모를 그리움과 심한 불쾌감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믿기지 않는 500년 후의 세계에서 처음 맞이하는 아침, 사막과 초원 그리고 도시가 적절하게 어우러진 이 황량하고도 균형잡힌 세계는 아직 실감하고 있지 못하는 서현에게 진실을 가르쳐주겠다는 듯이 변화한 세계에 대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500년인가. 그때의 일이 아직까지도 어제같이 생생하건만..."
연인이었던 사람에 의해서 사부가 죽고 자신조차 알지도 못하는 불치병에 걸려 냉동캡슐에서 냉동수면에 빠지고 500년 후, 서현에게 있어서는 아직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일이건만 꺠어나니 500년이란 시간이 지나있었다. 이 무슨 희극같은 이야기란 말인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삭히며 서현은 침대에서 나와 가볍게 몸을 풀었다. 냉동수면 기술이 좋았던 탓일까? 아니면 무지막지한 단련 때문일까? 서현의 몸은 생각보다도 상태가 좋았다. 물론 몸안에 느껴지는 이물감은 어쩔 수 없었지만 일상생활, 아니 과격한 운동이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뭄풀기를 하면 기본정도는 괜찮을지도."
"여, 일어났네?"
서현이 몸상태를 살피고 있는 동안 한명의 여인이 병실안으로 들어왔다. 어제 자신에게 멋대로 훈계를 한 유나라는 이름의 여인이었다. 서현은 불쾌감을 살짝 드러내며 병실로 들어온 유나를 향해 말했다.
"일찍부터 왔군요."
"왠지 이른아침부터 날 보는게 불쾌하다는 눈빛이지만 넘어가지. 급하게 가야할 곳도 있고."
"가야할곳?"
"출입허가증이랄까, 미싱링크인 너에겐 허가증이나 심분증이 없으니까 신분을 증명할만한게 필요하거든"
"그렇습니까."
"뭐 다행으로 생각하라고 본래라면 하루만에는 불가능하지만 그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 들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여기 있으니까"
"아, 그러세요?"
서현은 반쯤 빈정거리는듯이 유나의 말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다. 어차피 어제 일로 기분이 상해있는 상대에게 맞장구를 쳐줄 이유따윈 서현에겐 없었다. 더구나 죽고 싶어하는 사람을 강제로 살리려난 사람에게는 더더욱.
"어지간히 삐뚤어진 녀석이구나 너."
"단순히 삐진것 뿐입니다."
예상외의 대답에 유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솔직한 녀석이구나 너."
"엄연한 사실이니까요. 거짓말을 할 필요도 못느끼겠고."
"뭐, 어제 분위기가 꽤 험악했으니까 꽁해있는거야 당연하겠고. 밖에 있을테니까 이걸로 갈아입고 나와."
"이건?"
"옷이야. 환자복으로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돈은 없습니다만."
"걱정마, 나도 유카리에게서 얻은거니까. 뭐랬더라, 도박중독증 환자에게서 완전히 다 털어먹고 받아낸 옷 컬렉션중 하나라던가?"
유나의 말에 서현은 식은땀을 흘리며 자신의 손에 있는 옷을 바라보았다.
"의사가 도박이라니, 의사 맞습니까?"
"직종상 맞긴한데... 나도 그녀석이 의사 맞는지 궁금해, 뭐 의사일 이전에 헌터일을 하긴 했지만서도."
"어제 말하길 야매출신이라던데..."
"확실히 야매긴 야매인데, 헌터 겸업이었거든. 그 이전엔 잘..."
이 병원의 원장이자 의사인 유카리의 정체성에 대한 부분을 고민하며 서현과 유나는 자신들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밥도 안먹고 나가는 겁니까?"
옷을 다 갈아입기 무섭게 끌려나온 서현은 불쾌감이 가득한 투로 말했다. 깨어난 직후인지라 영양제와 죽 이외에는 먹은것이 없는 탓에 무척이나 배가고픈 서현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나는 막무가네로 끌고 가며 말했다.
"아무래도 빨리 처리할 수록 좋으니까. 지금 딱 이시간대면 그녀석이 그곳에 있을 시간이고."
"그녀석이 누구입니까?"
"너에게 증명서를 발급 해줄 녀석"
"위조는 범죄입니다."
"정식이야, 그보다 아까부터 심하게 삐딱한걸."
"밥을 못먹어서입니다."
이런느낌으로 티격태격하던 두사람은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착한곳은 술집, 척보기에도 거친남자들이 많아보이는 술집이었다. 서현은 이곳이 어디냐는 것과 설명을 바라는 중의적인 의미를 담아 유나에게 물었다.
"여기는?"
"보시다 시피 술집, 헌터기구에 소속된 헌터들이 주로들리는 곳이지. 더불어 내가 찾으려는 사람은 아까도 말했듯이 너에게 증명서를, 헌터자격증을 발급해줄 녀석이지. 그녀석이 이 도시의 지부장이거든."
유나의 친절한 설명에 서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그렇군요. 그럼 얼른 찾아서 오세요. 전 그동안 아침이나 먹고있지요."
"응? 나 혼자서 찾아라고? 게다가 너 돈 없잖아."
"어차피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제가 어떻게 찾겠습니까. 그리고 전 지금 무지 배가 고프거든요. 강제로 끌고 나온 사람으로서 아침정도는 사주시겠죠?"
미소와 함께 뭔가 형언하기 힘든 오라를 내뿜는 서현을 보며 유나는 식은 땀을 흘리며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그것은 살기에 가까은 불쾌감... 흔히들 짜증이라 불리는 기운이었다. 찔리는 것이 있는 유나로서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간단한 식사를 시킨 후에 홀로 그를 찾으러 발걸음을 옮겼다.
유나가 사라지기 무섭게 나온 음식에 포크를 뻗는 서현, 나온 음식은 다름아닌 스프를 메인으로한 양식풍의 아침식사로 정확히는 한식과 양식을 적절히 뒤섞은듯한 느낌의 음식이었다. 맛은 의외로 괜찮아서 양식을 딱히 즐기는 편이 아닌 서현으로서도 쐐나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상당히 맛있군요."
"그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지금이야 술집이지만서도 본래는 중방장이었던 몸이어서 말이야. 특히 이 아침식사는 내 자신작이었거든."
"의외로군요. 이 아침식사가 잘 나가지 않습니까?"
"술집으로 업종을 바꾼 이후에는 말이야. 아무래도 술집이 되고나서는 아침밥을 먹는 사람이 꽤 들물어졌거든. 사실 그렇게 술을 퍼마시고도 아침밥을 먹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위대(胃大)한 사람이겠지."
"아하하, 확실히 그렇네요."
서현이 그리말하며 동의하자 마스터는 기쁜듯한 표정을 지으며 무언가를 서현앞에 내놓았다. 서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마스터를 향해 물었다.
"서비스라네, 간만에 내 요리를 칭찬해준 사람에게 주는."
"하지만 전 돈이..."
"주는거라 말했네. 감사의 표시야"
"그럼 잘 먹겠습니다."
서현이 즐거운 표정으로 마스터에게 건네받은 요리를 옆에두고 다시 밥먹는데 집중하려는 순간, 요란한 소리가 나며 한 사람이 테이블 위로 미끄러졌다. 물론 너무나도 당연하게 테이블 위에 있던것은 모조리 비산했으며 그것은 서현이 먹고 있던 요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
허무하게 날려지는 아침밥을 보며 서현은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렸다. 그리고 침음성이 흐르기 무섭게 바닥에 떨어져 꺠지는 아침밥을 담고 있던 식기와 바닥에 널브러진 아침밥을 보며 서현은 주먹을 불끈쥐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날려진 상대를 향해 다가가는 거친 남자의 전형을 보여주는듯한 남자를.
"헹, 꼴 좋군. 상대도 볼줄 모르고 덤비니 그런거다!"
쓰러진 상대를 지긋이 밟아주며 말하는 남자를 향해 서현은 조용히 일어나 다른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만큼 조용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60cm 남짓한 거리가 되어서야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존재감을 눈치챈 남자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생글거리며 웃고있는 서현의 모습을.
"뭐... 뭐야 넌."
남자는 뒤에서 생글거리고 있는 서현을 보며 당황했다. 자신이 이토록 쉽게 뒤를 잡힐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설령 방심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말이다.
"아침밥."
"뭐?"
갑작스럽게 내뱉는 서현의 뜬금없는 말에 남자는 당황하며 반문했다. 그 반문에 서현은 다시 한번 못을 박듯 말했다.
"그러니까 아침밥이야."
"무슨말을 하는거야!"
알 수 없는 말에 짜증을 내는 남자. 하지만 남자가 짜증을 내기 무섭게 서현은 더 큰 짜증을 내며 몸을 비틀었다.
"죽어-"
남자의 명치를 향해 찔러들어가는 관수, 그 관수는 마치 남자를 꿰뚫는듯 충격을 관통시킨다. 그리고 관수가 접혀지며 검지와 중지가 반으로 접혀져 명치에 두번째 타격인 권골을 먹인다.
그 직후 찰나 시간동안 두 손가락이 접혀지며 들어가는 타돌. 보통이라면 이 세번째의 권격에 날아갈 것이나 그래서야 제대로된 타격이 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첨가되는 네번째 공격인 발등밟기의 천압.
발등을 강하게 밟아 누르며 날아가는걸 막는다. 물론 상대의 발등을 부수는 선택지도 가능하지만 서현을 그러지 않은채 그대로 팔을 접으며 팔꿈치로 명치를 가격했다.
정주가 명치에 작렬하기 무섭게 남자의 발등에서 한발구르기와 함께 팔 자체가 미끄러지듯 빠지며 어깨가 명치에 작렬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금강고를 먹인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으리라.
이제 마지막 왼손으로 붕권을 날리면 연환칠천격의 완성이었지만 이쯤에서 봐줄까하고 있는 서현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들려온 목소리에 이윽고 연환칠천격은 완성되고 말았다.
"찾았다!"
갑자기 치솟는 짜증과 함께 내딛는 왼발. 그리고 한껏 힘이 실린 서현의 붕권. 결국 남자는 서현이 날린 연환칠천격의 희생양이되어 벽에 처박히고 말았다. 유나는 그 광경을 보기 무섭게 남자에게로 달려갔다.
"무슨짓을 한거야!"
"무슨짓을 한거냐해도 말이죠, 전 제 아침식사를 방해한 녀석에게 철저히 훈계를 내려준것 뿐입니다. 마침 당신과 아는 사이인듯해서 당신에 대한 분풀이를 겸해서 말이죠."
"심해!!"
너무나도 솔직한 서현의 말에 유나가 외쳤다. 사실 자신이 아침부터 좀 제멋대로 하긴 했지만 이런식으로 삐딱선을 탈줄은 몰랐던 유나였다. 한소리 할까하던 유나는 고개를 저은 후 쓰러진 남자의 상태를 살폈다. 명색이 헌터인지라 중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깨어나는데 시간이 좀 걸릴듯 싶었다.
"그나저나 생긴거에 비해 많이 약하네요. 아무리 기습이었다 하더라도 말이죠."
"약하지 않아. 그저 네 공격이 무지막지했을 뿐이지. 찰나지간에 철산고와 붕권을 연속으로 먹이다니, 게다가 위력이 줄지 않도록 잘등까지 밟고 말이야. 그나저나 엄청난 위력이네, 단 두방으로 이녀석을 이렇게 만들..."
"본게 그것뿐인가요?"
"그럼 뭐가 더 있는거야? 확실히 철산고와 붕권의 연속기는 깔끔하고 그 위력도 상당하지만서... 아차차 기술평 할때가 아니잖아 빨리 깨워야 하는데."
순간 어떤 방법으로 쓰러진 이를 깨울지 고민하는 유나, 가장 편한방법은 패서 깨우는 방법이지만 잠든것도 아니고 유나정도의 힘이면 까딱 잘못했다가는 골로 보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다음 방법으로는 병원에 데려가서 깨운다는 방법이 있었지만 이녀석의 경우 유카리에게 까불다가 호된 경험을 한데다가 병원에 가서 깨울경우 필연적으로 시간이 소요되기 마련이었다. 그렇다면 가장 빠른 방법은...
"서현"
"왜 그러시죠?"
"기절한사람 깨우는 방법 알고있지? 무가 사람들은 그런부분에 대해서 잘 알고있다고 하던데."
"무가는 아니지만 무술가인 이상 몇가지는 알고 있죠."
"찾던 사람이니까 당장깨워줘."
"제가 왜 그래야하죠?"
"안그럼 네가 한 식사의 계산을 하지 않을거니까. 너 분명 떙전한푼도 없지 아마?"
"치사하군요. 먹을것으로 협박하다니..."
유나의 말에 서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순간 그냥 무시하고 가버릴까라는 생각을 한 서현이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서현은 자신이 인정한 사람이 자신의 실수로 인해서 피해를 보는일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렇기 때문에 못마땅해 하면서도 양 손가락에 손을 집중해 급소를 몇군데 가격했다.
"컥-"
기묘한 소리를 내며 남자가 눈에서 떴다. 꺠어날때 약간의 울혈을 내뱉은듯 했으나 그런걸 신경써줄만큼 좋은 상태가 아닌 서현이었다. 서현이 기절한 녀석을 깨우기 무섭게 유나는 살짝 뺨을 치며 일어나는 것을 재촉했다. 서현은 역효과라고 말할까 하다가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여 말하지 않았다. 그론 인해 깨어나고 있던 남자가 완전히 깨어나게 된 것은 10분이 더 지난 후였다.
"그러니까, 나보고 이녀석 헌터 등록 좀 해달라는거지?"
"응."
"장난해? 너라면 자신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녀석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하고 싶겠냐?!"
남자의 말에 유나는 역시라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유나로서도 자신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녀석의 부탁같은건 들어줄 생각을 하기 힘들것이다. 더구나 자신의 구역에서 수치를 준 녀석이라면 더더욱-
"어쩌자고 그런짓을 한거야!"
"상대가 시비를 걸었으면 곧장 되갚아 주라는게 사문의 규칙이라서요."
무문팔극권에 그런 규칙은 없었으나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서현이었다. 하지만 꼭 거짓인것만은 아닌 것이 역대 무문팔극권사 및 권마신창들 대부분이 자신에게 시비를 건 존재들에 대해서 용서가 없었다. 당했으면 철저히 갚는다. 그것이 무문팔극권사들이었다.
"헹, 기습을 해놓고선 말도 잘하는군."
"그정도도 못 피해놓고선 한 지역의 책임자라... 헌터기구란 곳도 알만하군."
"해볼텐가?"
"마음대로, 마음껏!"
한껏 살기를 피우며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그와 서현을 보며 유나는 잠시 귓머리를 긁적인 후 강하게 한발을 내딛었다. 그러자 요란한 굉음과 함께 가게가 흔들리며 서현과 그가 형성하고 있던 흉흉하기짝이 없던 공간이 일순간에 사라져버렸다. 서현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으며 유나를 바라보았다. 처음 봤을때 부터 강자라고 느끼긴 했지만 살의의 공간을 단번에 날려버릴 만큼의 실력자인줄은 생각도 못한 탓이었다.
"그쯤 해두라고. 시간 없잖아 너."
"상관없어요."
"내가 상관있어."
유나는 서현에게 그렇게 말한 후 고개를 돌려 사내에게도 말했다.
"란스 너도 이쯤해두라고, 싸우기만해서 올라온 자리가 아니잖아."
"칫."
"마뜩잖은 표정을 짓는 란스였으나 대놓고 반항하기에는 상대가 좋지 않았다. 400만명에 달하는 헌터중 겨우 수백명뿐인 S랭크의 헌터중 한명인 유나의 말을 무시하기는 여러므로 무리가 있는 탓이었다. 만약 그녀가 대놓고 힘을 휘두른다면 아무리 지부장인 자신이라도 감당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쨌건 부탁한다고 란스, 급하니까 빨리되는걸로."
"그 말 의미 알고 있는거야?"
"내가 저녀석의 후견인이 되어야 한다는것정도?"
"후견인 정도가 아니라 저녀석이 헌터기구에 반하거나 극악한 범죄행위에 가담했을 경우 네가 책임을 다 져야한다는거야!!"
란스의 말에 유나는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유나도 이러한 제도가 있다는 것만 들은터라 그러한 책임이 뒤따르는 줄은 모르고 있었다. 사실 헌터기구로서도 당연한 것이 신원이 불분명한 사람을 신원확인절차없이 통과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테러나 중요범죄행위라도 일으키고 사라졌을 경우 그 행위에 대해서 대신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다. 어떠한 식으로든 말이다.
"으음... 뭐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쉽게 결정해도 되는 일인가요?"
서현의 물음에 유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보통은 고민을 하겠지만 말이야. 시간도 없는데다가 넌 그럴만한 사람이 아니잖아?"
"본지 아직 하루도 안된 사람에게 뭘 보고 그러한 믿음을 보내는 건지. 터무니 없는 호인이군요."
사실 그렇긴 하지만서도 서현은 너무나도 쉽게 자신에게 믿음을 보내는 유나가 걱정스러웠다.
'하긴,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닌가? 나도 상당한 호인이군요.'
"하아, 정말로 할거야?"
"한다니까. 내가 책임질게."
그 책임이 얼마의 무게를 가질지 아는지 모르는지 호언장담을 하는 유나를 보며 란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해주기야 하겠지만서도. 후회하지 말라고 유나."
"내가 23년간 살아오면서 후회한건 딱 한번뿐이야"
유나는 아픈 기억을 떠올렸는지 씁쓸한 미소를 띄우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시험은 어떻게 치르는거야?"
"뭐 특별전형이니 간단하게 치뤄져. 각종 등록외에는 맨마지막 단계인 기본적인 전투력 측정정도만 해. 말그대로 특별 그 자체지. 남들은 신분증명을 비롯해 각종 시험 및 훈련까지 거치는데 말이지."
란스의 비꼼에 서현은 은은히 살기를 일으켰으나 유나가 인상을 찌푸리자 서현은 재빨리 살기를 거두었다. 본래 이정도로 오는대로 받아주는 타입은 아니었으나 아침에 꾼 악몽때문인지 신경이 꽤나 날카로워져 있었다. 알게모르게 지끈거리는 머리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서현은 날카로워진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호흡을 길게했다.
"여기에 들어가라."
어느새 검은 반구형 방에 도착한 란스는 그곳의 문을 열고 서현을 향해 말했다.
"여기는?"
"전투능력 시험장이다. 어느정도 수준의 전투능력이 있는지 시험하는 곳이지."
"흐음. 시험관은?"
"따로없다랄까... 들어가보면 곧바로 알 수 있지."
"그런가? 뭐 아무래도 좋지만"
서현은 그렇게 말한 후 노곤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현에게 있어서는 그저 귀찮은 일일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럼 나는 잠시 대장간이나 가볼까."
"그새 검을 박살낸건가?"
"어쩔 수 없는걸. 어지간한 합금강으로는 내 전력을 버틸 수 없으니까."
"힘조절 좀하라고 합금강이야 매물이 많지만 연금강은 제련할만한 사람도 별로 없을뿐더러 매물도 거의 없단 말이야. 그러니까 연금강 살돈이 모자라지."
"큭..."
란스의 말에 유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확실히 유나가 검을 사는데 드는돈은 티거의 탄약값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그것은 티가가 나서는일이 유나가 나서는일에 비해서 적다는 점도 있었지만 실상은 유나에게 있어서 검이란 소모품에 가까웠던 탓이었다. 왠만한 중상위급 헌터가 일반적으로쓰는 합금강. 그 중에서도 상급에 해당하는 다중합금강조차도 그녀의 전력에는 버티지 못했다. 1번 휘둘러서 버티면 다행일까?
저기 북쪽에 위치한 연금술사의 나라 레지너스에서 생산된다는 연금강이나 극히 소량만 생산된다는 특수합금강이라면 또 모를까 어지간한 합금강으로는 그녀의 전력, 아니 한번의 의뢰만으로 너덜너덜해져 폐기처분행이 되었다.
덕분에 그녀에게 있어서 칼은 소모품, 그 이상도 그이하도 되지 못했다.
"정말인지 S급 헌터는 얼마나 괴물인거야."
"어이, 내가 아무리 사람 좋더라도 괴물소리들으면 마음 상한다고."
사실 그런말에 마음 상할일도 없는 유나였지만말이다. 단지 그런말로 마음상하기에는 그녀는 '괴물'이란 말이 너무나도 많이 들었다..
"애초에 S급 헌터면 거의 비인외도(非人外道)니까 여러므로 인간에서 벗어난 녀석들이 많다고."
"하기사 무후(武后)도 권후(拳后)도 야천의 날개도(夜天之翼), 암천묵린(暗釧墨鱗)도. 저격수(the sniper) 솔직히 말해서 보통인간에서 벗어나있었지."
"뭐, 달인이라던가 무가 사람들도 꽤 벗어나있지만서도."
"너희만 할까."
란스는 담배에 불을 피우며 그렇게 말했다.
"일단 늘 가던곳에는 얘기해 놨어. 좀 혼나겠지만서도 확실한 물건을 만들어 주겠지."
"끄응, 그 영감님인가... 확실하긴 하지만서도."
이미 그 영감님에게 수십번이고 혼난 유나는 껄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란스는 그러한 유나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본 후 시험을 진행시키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여기인가?"
반구형 공간에 들어가기 무섭게 한개의 인영이 서현을 반겼다.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인영에서 로봇임을 확신한 서현은 숨을 고른 후 자세를 잡았다. 서현이 자세를 잡기 무섭게 로봇도 자세를 잡았다. 로봇이 잡은 자세는 딱히 유파가 없는듯한 기본적인 킥복싱자세, 하지만 달인급의 실력자의 자세를 분석해서 구현한듯 빈틈은 상당히 적었다.
"이정도로 잘 구현된 자동인형은 기신가 이래로 간만이군."
서현은 500년전에 싸운 기신가(器身家)와의 싸움을 떠올리며 서현은 그리움이 뒤섞인 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 웃음을 지은 순간, 로봇은 무척이나 깔끔한 몸놀림을 보이며 서현을 향해 돌진했다. 로봇이 서현에게 건 것은 맹렬하기 짝이없는 로켓태클. 단순하지만 피하기 의외로 힘들며 제대로 걸리면 걸린 대상을 단숨에 골로 보낼 수 있는 기술중 하나였다. 아마 왠만한 사람들은 이 기술에 여지 없이 당하리라. 왠만한 사람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서현은 그 '왠만한'에 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무문팔극권 투법(投法) 투뢰(投雷)"
로봇의 태클을 거의 드러눕듯이 피한 서현은 곧장 양손을 잡고 오른발을 로봇의 목부분에 댄후 왼발을 강하게 차며 맹렬히 회전했다. 관성을 더한 서현은 이내 땅바닥에 매다 꽂기 직전 왼발을 떼며 전 체중을 로봇의 목 부분에 실었다. 그리고 매다 꽂기.
쾅-
요란한 굉음과 함께 로봇의 상반신이 완전히 박살났다. 갑작스럽게 걸린 G급의 가속도와 그 가속도에 의해 가중된 70kg에 달하는 체중이 내보인 결과였다.
서현은 로봇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유유히 반구형 공간에서 나왔다.
"지부장님..."
떨리는 목소리로 지부장인 란스 믹테어를 보는 행정요원 조훈은 지금 보이는 광경이 믿기지 않았다. 이제 막 20세 남짓한 청년이 신형 M-203 라이플로도 박살내기 힘든 헌터테스트용 테스터먼트 통칭 시험로봇의 상반신을 아무런 무기도 없이 완전히 박살내 버린 탓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조훈의 반응에 란스는 덤덤하게 말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야. 실제로 유명 문파(門派)나 무가(武家) 사람들이라면 종종 시험로봇을 박살내기도 해 다만 저런식으로 처참하게 박살낼 수 있는 사람은 꽤나 드물지만 말이야."
"어느정도로?"
"A랭크 헌터정도랄까..."
"지부장님과 같은 랭크 아닙니까?!"
2000만에 달하는 헌터인구중 상위 0.5% A급 헌터, A급 헌터면 그야말로 사회적으로 보증된 존재라고 봐도 무방했다. A급 헌터만 되어도 각도시의 유지라던가 정부의 사람들이 고용하기 위해 여러가지로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저 소년이 그러한 전투능력을 지니고 있다니. 조훈은 믿을 수가 없었다.
"뭐 저 한수가지고 확신은 힘들겠지만서도 적어도 근접전에서 내가 상대하는건 힘들지도 모르겠어."
란스 믹테어는 헌터기구의 한성지부장 답게 지휘능력도 지휘능력이지만 개인전투능력도 상당했다. 물론 란스 믹테어는 총기를 주로사용하지만서도 근접전투능력만해도 일반적인 B랭크 헌터 1~2명은 정도는 상대할 수 있었다. 설령 그것이 막싸움일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란스가 자신이 불리하다고 못을 박은 것이다. 그정도면 최소 근접특화의 B랭크 헌터란 말이나 진배 없었다.
"그럼 지부장님, 저 서현이란 청년의 등급은?"
"내키지는 않지만 C... 아니 B랭크로 하는게 났겠군. 저게 다가 아닐 가능성이 높으니까 말이야. 게다가 후견인이 S랭크인 파검희인 이상 C랭크라고 해도 잠재적인 취급등급은 A랭크가 되겠지."
'내 살기를 그냥 받아넘길정도면 C랭크일리는 없겠지만.'
그 말을 삼킨 란스는 못마땅함에 한숨을 내쉬면서도 헌터자격증이나 다름없는 HMD(헌터 멀티 디바이스)를 등록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