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la 4화
일단 키리노 녀석을 달래는게 급선무다. 나는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은뒤, 키리노 녀석의 방문앞에 갔다.
똑똑
"어이 키리노, 할말이 있는데"
"…"
몇초간의 정적 뒤에, 아무말 없이 키리노가 문을 열었다.
"들어간다?"
"맘대로 하지?"
이 가슴속 한편이 징하게 아려오는 그리운 짜증을 느끼며, 나는 키리노의 방에 들어가 이제는 내 전용이 되버린 고양이모양 방석을 깔고 바닥에 앉았다. 언제나처럼 키리노는 침대위.
"할 말 있으면 빨리 해줄래? 피곤하거든"
그러면서 키리노는 하품까지 크게 하고, 그 눈에 약간 남아있는 물기를 훔쳐냈다.
"너 오늘 어디서 뭐했냐?"
"친구랑 쇼핑했는데 왜?"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왜 그런걸 묻는데?' 란 오오라를 몸으로 뿜는 키리노.
"음… 진짜?"
"너 오늘 진짜 한층 더 기분나빠"
부글부글. 정말 이 여동생은 어떻게 사람이 짜증나는 부분을 정확히 핀포인트로 찔러댈까. 내 여동생만 이러는거 아니지?
"아니 오늘 지나가다가 널 본걸 같아서"
잘못본건가? 이녀석 방금 움찔했던거 같은데.
하지만 키리노는 바로 고양이같은 눈을 하고 나에게 말했다.
"헤에… 날 어디서 봤는데?"
"아키하바라"
너 임마,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면 빵점이라고. 알고있냐?
내가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키리노는 그 얼굴을 나에게 약간 더 가까이 하며 말했다.
"누구랑?"
"아 그…
아니 잠깐만, 지금 왜 내가 추궁받는 범인의 느낌을 받아야 하지? 질문을 하던건 원래 나였는데 말이야…
뭔가 묘한 박력에 식은땀을 흘렸지만, 뭐 어느정도 생각해둔 질문이라, 저번처럼 갑자기 엄청 당황해서 바이브레이션을 걸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아카기 녀석이랑 놀았어"
"아 그래?"
내 자연스러운 대답에 나도 어느정도 감탄하고 있었더니, 키리노는 얼굴을 다시 원래위치로 돌리며 무표정으로 말했다.
"어이, 그래서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 끈질기네 진짜!"
키리노는 버럭하며 신경질적으로 짜증을 냈다. 생리하냐? 아니 잠깐… 그거라면 진짜 모든게 설명되는거 같은데…
"친구랑 아키하바라 근처도 돌아다녔으니까 봤을 수도 있겠지 자자 됬어? 알았으면 빨리 돌아가 짜증나니까"
"예이예이 짜증나는 오래비는 돌아갑니다"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반쯤 연 찰나, 무의식적으로 말을 걸었다.
"키리노"
"…왜"
부르기는 했는데, 정작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애초에 난 왜 키리노를 부른거지?
음… '너 오늘 생리하냐?' 라고 해볼까. 아니 아무래도 그건 무리다. 진짜 생리라도 하는거면 짜증지수도 배 이상이고 수치심에 그 배가 된 짜증지수가 더 배가 될게 틀림없다.
나를 멀뚱히 쳐다보는 키리노를 보고, 뭐 대충 머리에서 떠오르는 대로 아무래도 좋을 말을 했다.
"혹시나 부탁할 일 있으면 괜찮으니까 와라. 오래비의 인생상담. 아직은 여유롭다고"
눈을 크게뜨고 몇초간 나를 지켜보던 키리노를 두고, 나는 천천히 문을 닫았다.
왠지 문을 닫기 전에, 키리노가 나를 보고 '멍청이' 라고 하는 말을 들은것 같았다.
**
일단은 내 방에 돌아와서 상황정리에 들어갔다.
아야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키리노는 우리를 보지 못했다.
아야세는 키리노를 봤다.
나와 쿠로네코는 키리노를 보지 못했다.
…뭔가 중간에 논리문제가 되버린것 같지만, 그건 중요한게 아니니까 그냥 넘기도록 하자.
하여튼 상황을 종합해보자면, 쇼핑하던 키리노를 우연히 아야세가 목격했다. 단지 그거뿐.
내가 예상한 최악의 상황은, 최악의 자의식과잉으로 끝난듯 하다. 머리가 아파온다 우우…
"하아…"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지금으로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 그것은, 커뮤니티의 붕괴다.
우리 남매는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키리노와 나의 오타쿠 친구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겉으로는 차가운척 하지만 이것저것 중요한 조언을 해주는 쿠로네코. 사기안 전파녀라 대부분의 조언은 의미를 알 수가 없지만.
발군의 행동력과 카리스마. 진행욕심도 있어 항상 우리의 중심이 되고, 여러 연줄로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사오리. 하지만 그 속은 얼굴을 보이는것도 부끄러워하는 엄청난 겁쟁이다.
둘다 우리 남매의 소중한 친구들이지만, 아무래도 인연의 시작은 사오리 때문에 시작된거였다.
'오타쿠 소녀 모여라'의 사이트를 만들어서 운영한것도,
오프모임에서 고립된 키리노와 쿠로네코를 챙겨준것도,
아무 상관 없는 나까지 끌어들여 즐겁게 놀아준것도, 모두 사오리의 덕택이다.
말하자면 그 녀석은 우리 모두의 은인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데, 나는 그 녀석이 원한다면 죽는 시늉까지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사오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것. 사실 사오리가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가 같게 생각하는 거겠지만, 나는 그것을 전력을 다해 지킬 의무가 있다.
일찍이 커뮤니티의 중심인 언니가 결혼을 하게 되면서 커뮤니티가 붕괴되는 아픔을 겪었기에, 이번에는 자신이 모두를 묶어주는 커뮤니티의 중심이 되어서 그 커뮤니티를 지키려고 하는 사오리.
그것이, 나의 바보같은 장난으로 시작된 불화로 깨져버린다면, 나는 평생동안 죄책감에 빠져 살아갈게 틀림없다.
나는 거기까지 생각을 마치고, 일단은 나와 같은 공범자인 쿠로네코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보고했다
"그렇게 된건데 말이지"
「그리 탐탁지 않은 결과네」
전화너머의 쿠로네코는 아직 의문이 남았다는 듯한, 납득하지 못했다는 목소리였다.
"그래? 역시 생리하냐고 물어보는게 나았을까?"
「죽어. 시스콘」
쿠로네코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한뒤 담담히 말했다.
「그래서 나도… 계약이행의 예외를 사오리로 정한거야」
혹시나 해서 그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지만, 물론 쓸모없는 짓이었다. 사려깊은 쿠로네코가 그런 점을 생각 안했을리는 없겠지.
"흠… 그래서 무슨 계획이라도 제대로 있는거냐?"
「어머 잊었니? 선배는 참으로 둔한 생물이네. 못들었어?」
쿠로네코는, 전화 너머로도 알 수 있게 '훗' 하고 코웃음을 치고, 도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작전명 발라(Wala)는 순조롭게 진행중이야. 오히려 너무 내 생각대로 흘러가서 소름이 끼칠 정도인걸」
"그러냐?"
공범자로서, 작전의 개요라도 설명해주는게 좋지 않냐? 라는 질문에, 쿠로네코는 이렇게 대답했다.
「선배는 모르는게 약이야. 하지만 이건 확실하게 말해둘게. 이번 작전, 선배에게는 후회스러운 일이 될거야」
"후회될게 확실하면 안하는게 차라리 낫지 않냐?"
그냥 지금쯤 사과하면 괜찮을것 같기도 한데…
「후…」
전화너머로 쿠로네코는 한숨을 쉰뒤, 왠지 슬퍼보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그 여자도, 언젠가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야. 단지 우연한 계기로 일정이 빨라졌을뿐. '아카식 레코드'에 적혀있는, 이미 결정된 미래」
평소같은 중2병 멘트에 뭐라고 딴죽을 걸고 싶어도, 구슬픈 음색의 쿠로네코에게 딴죽을 거는건 나의 딴죽스킬로는 무리였다.
「나는 내 나름대로 최선의 결과를 위해 움직일테니까」
"그래, 힘내라"
그런 대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기 직전에 전화너머의 쿠로네코가 나에게 '멍청이' 라고 하는 말을 들은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