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 모델! 2화
"그래서? 아침일찍 무슨 일이야?"
내 방에 도착하고, 난 내 의자에 거꾸로 앉은채 등받이에 양팔을 올린 상태로 싱글벙글 웃으면서, 연인의 귀여운 모습을 곱씹으며 말했다.
"무슨 잠꼬대야 당신?"
그러자 쿠로네코는 입고 온 털파카를 벗으면서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당신 여동생이 도와달라고………… 잠깐."
말끝을 흐리던 쿠로네코는 그대로 키리노 쪽으로 고개를 돌려 키리노를 지긋히 노려봤으나, 키리노는 머리위에 물음표를 띄운채로 '왜그래?' 하는 표정으로 일관했다.
"…혹시 당신 여동생에게 아무말도 듣지 못했을까?"
"못들었는데?"
"하아…"
나의 대답에, 쿠로네코는 한손으로 자신의 얼굴 반쪽을 가리는 제스처를 취하려다가, 자신이 끼고 있는 안경 때문에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재빠르게 다시 팔짱을 꼈다.
아마 나나 키리노만큼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게 귀엽다면 또 귀엽지만 말이야…
그거보다, 지금 쿠로네코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무언가 키리노가 도움을 청했던것 같은데 그걸 내가 모르고 있는것 같다.
"약속이 다르잖아"
무슨 일인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쿠로네코가 기가 막히다는 음색으로 키리노에게 그렇게 항의하자, 키리노는 오히려 나에게 화를 내며(어째서!?) 말했다.
"잠깐! 내가 분명 어저께 말했잖아! 왜 모르는척 하는건데!?"
"어제 대체 뭘…"
나는 혹시라도 키리노가 진지하게 말한걸 또 경솔하게 듣고 까먹은건 아닐까, 하고 걱정하면서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일단 이곳저곳에서 둔감하다고 욕을 먹는 나니까,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에, 어제 무슨 일을 했더라… 학교 갔다와서 '내일은 휴일이니까 오랜만에 놀아볼까' 하면서 인터넷을 하고, 밀려서 못본 신작 애니메이션 몇개보고, 다시 인터넷 하면서 다른 녀석들이랑 말싸움좀 하고…
……………딱히 기억날만한게 없는데!?
"저,저기 키리노… 미안한데… 이 오빠가 정말로 기억이 안나서 그러거든. 무슨일인지 다시한번 말해주지 않을래?"
"오늘 한가하냐고 물어보니까 한가하다며"
"……하?"
나를 바보취급하는 눈빛으로 보면서,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키리노 때문에 잠깐 멍해있었지만, 나는 방금 키리노가 말한걸 토대로 어제의 기억을 살려냈다.
…
……
………
확실히, 7시가 조금 넘어서였을까? 밀린 애니메이션을 3화정도 봤을때, 옆방에서 키리노가 벽을 주먹으로 치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우리 남매의 방 사이의 벽은, 방음 효과가 전무하기에 사소한 소리까지 옆방에서 다 들린다. 그러므로, 당연하게도 나는 내 방에서 컴퓨터를 할땐 헤드셋을 이용하게 됬다.
기본적으로 헤드셋을 이용하면 소리가 빠져나갈 일도 없고, 키리노의 방에서 들려오는 소음 (뒤척이는 소리라던지, 무엇보다 에로게임을 하면서 발광하는 소리)가 안들리기 때문에 헤드셋은 무척이나 유용하다.
하지만 그렇게 헤드셋을 끼고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는 도중에 깜짝 놀랄 정도니, 얼마나 심하게 벽을 친건지 알 수 있겠지.
나는 꼭 에로사이트를 보다 걸린것 처럼, 급하게 일시정지를 하니 키리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오래비~ 내일 한가하지?"
"한가해서 미안하구만!"
"알았어"
다시 뭔가 인생상담이 있다던가, 무슨 일 때문에 나를 부릴것 같은 뉘앙스로 물어보던 키리노는 의외로 맥없이 대답했다.
나는 별일 아닌가보다 하면서 그대로 애니메이션 시청으로 돌아갔는데… 어이, 설마 이거야?
"아니 잠깐, 방금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루리한테 뭔가 부탁이 있다고 한거 같은데, 너 어제 나보고 '한가하냐?' 라고 물어서 '한가하다' 라고 대답한걸로 내가 다 알고 있어야 되는거였냐?"
나는 아까의 쿠로네코가 안경 때문에 하지 못했던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 어깨 너머로, 쿠로네코가 약간 분한듯 쳐다보는건 기분탓이겠지.
"아. 말 안했나? 오늘 촬영에 모델들이 갑자기 몸이 아프다고 빠져서 경험있는 사람이 필요해. 까만게 너도 해야 한다니까 너도 도와"
"할까보냐!? 너임마 그건 부탁이 아니라 사후승락이잖아!? 불법이라고!? 법적 효력 없다고!?"
"뭐야, 어차피 한가하면 도와주면 좋잖아. 오래비가 정~말 좋아하는 귀여운 여동생이 부탁하는데도 안들어줄거야?"
"큭!!"
짜증나! 친동생인데 짜증나! 저번 쿠로네코와 화해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김에 혼자 자폭한 키리노가 불쌍해서 나도 너 좋아한다고 말했더만! 이게 그렇게 족쇄가 될줄은!
………같은건 좀 너무한 기분이 드니까 취소하고. 뭐, 나도 내 여동생을 좋아하는게 맞기야 한데, 너무하잖아 이건!
게다가 상황이 상황인만큼. 쿠로네코가 휴일 이 아침시간에 마츠도에서 우리집까지 직접 왔는데, 난 못하겠으니 돌아가줘. 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위치상 키리노에 뒤에있는 쿠로네코는 한손으로는 팔짱을 끼고 나머지 한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질린다는 표정으로 키리노를 보고 있었다.
"뭐, 오래비가 안도와주면 어쩔 수 없네. 그럼 까만거 돌아가라고 할까?"
키리노는 여기서 실실 웃으면서, 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장난기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너임마… 노렸구나!?"
"응?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
뭔가 이녀석, 날이 갈수록 영악해지고 있어!?
도박을 한다면 내 목숨까지 걸 수 있을 정도로, 이녀석 분명히 처음부터 노리고 이런거다…
"키리노"
"왜? 그래서, 도와줄거야 말거야?"
나를 놀려먹는게 그렇게 재밌는지, 아직도 나를 놀릴 의도로 말하는 키리노에게 나는 말했다.
"너가 도와달라고 하는걸 내가 거절할리가 없잖냐. 여태까지의 인생상담으로 알고 있을거 아냐? 이런일 있으면 다음부터는 그냥 솔직히 말해. 너가 곤란한 일이 있으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도와줄테니까"
"에,엣?"
내가 저번에도 말했지만, 이녀석이 카오리처럼 되는건 목숨걸고 막아야 된다고…
"……? 왜그래?"
"………"
그런 생각을 하며, 최대한 키리노 녀석을 설득할 요량으로 말을 하자, 왜인지 키리노는 홍당무같이 빨간 얼굴로 입을 뻐끔뻐끔 대고 있었다.
"키리노. 어디 안좋아?"
갑자기 열이라도 나는걸까, 나는 그렇게 말하며 키리노 녀석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려고 했다.
"으,우아아아아아앗!"
그러자 키리노는 바퀴벌레가 움직이듯 (묘사가 좀 뭐하구만… 미소녀한테 바퀴벌레라니…) 스무스하게 뒷걸음을 치더니, 닫힌 방문에 착 하고 등을 부딪혔다.
중간에 있던 쿠로네코가 부딪히지는 않을까, 싶었지만 키리노가 움직이는 방향에 정확히 있던 쿠로네코는 마치 다 알고 있다는듯, 팔짱을 낀채로 아무렇지도 않게 옆으로 피했다.
"자,잠깐 너 말이야! 뭔가 날이 갈수록 영악해지고 있는거 아니야!?"
"내가 너냐…"
참나, 내가 영악하다니. 태어나서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본다. 둔감하다고 욕할때는 언제고…
그래도 어느정도 키리노 녀석을 설득할 수 있었구만. 적어도, 쿠로네코와 사오리를 만나고 나서는 옛날보다 솔직해진게 장점인데, 솔직해지기라도 하면 카오리화 되지는 않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니, 쿠로네코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쿠로네코에게 엄지를 보이자
"…나중에도 당신 때문에 골머리를 썩을것 같아"
라며 심각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