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10권. 9화
"아, 그…"
아야세가 없어졌(?)다면 찔릴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어쩔줄을 몰라하며 말을 잇지를 못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건 키리노만 그런줄 알았는데 나도 그런가보다.
쿠로네코는 그렇게 당황해하고 있는 나를 본채만채 하며, 뒷짐을 진채 자신도 안절부절하며 눈동자를 쉴새없이 움직였다.
"생각보다는 깨끗하네"
쿠로네코는 방 안을 둘러보고 그렇게 말했다. 원래라면 '그럼 더 더러워야 했어!?' 같은 소리를 했겠지만, 심적으로 여유가 없는 나는 그러한 리액션을 취하지는 못했다. 아니, 리액션도 리액션이지만 지금 나의 관점으로는 충분히 더러운데 말이야.
그런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쿠로네코는 싱크대 옆에서 뚜껑이 뜯어져 있는 컵라면을 발견하더니 말을 이었다.
"역시, 제대로 먹고 있지 않구나"
"가끔 먹는거야. 평소에는 제대로 먹는다고?"
"당신이 생각할만한건 편의점 도시락 정도겠지"
"윽…"
"그것도 아니면, 카레 김 라면 순서일까. 자취하는 사람들이 몸을 망치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식습관이니까"
내가 생각한 '맛있고, 별다른 조리가 필요하지 않아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쿠로네코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간단히 말했다. 그러고 보니, 쿠로네코는 꽤나 자주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을 맞추는 경향이 많은데 말이야. 설마 나, 그렇게 읽기 쉬운 사람인가? 이제는 별로 꽤나 익숙해지는 쿠로네코의 사기안 비슷한 능력에 놀라고 있자, 쿠로네코는 그 작은 손을 입으로 가져가 '크.크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당신은 어쩔 수 없는 짐승이네"
라며, 어디서 꺼냈는지 방금까지 보이지 않던 네모난 자주색 보자기를 꺼내 내 책상위에 올려놨다. 아무리 내가 정신이 없었다고는 해도 저만한 크기의 보자기를 들고 있는걸 눈치채지 못했을리는 없는데… 아마 쿠로네코는 의도적으로 그 보자기를 감추고 있었던것 같다.
"응?"
그리고 쿠로네코가 왠지 부자연스러운 손놀림으로 그 묶여 있는 보자기를 풀자, 확 하고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보자기의 안에 있던 것은 두개의 네모난 도시락통이었다. 하나의 통에는 꽉꽉 눌러담아서 2인분은 되어보이는 밥이 들어 있었고, 다른 통에는 불고기, 돼지감자조림, 구운 생선, 그리고 장아찌와 샐러드라는 조금은 신기한 조합이었다. 하지만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것이, 엄청나게 식욕을 자극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쿠로네코가 날 위해 음식을 가져온것 같은데. 어느 누구라도 이 상황에 놓여있다면 똑같은 생각을 할테니까, 자의식 과잉은 아니라고. 그리고 쿠로네코는 그런 나의 생각을 증명하듯, 빈 그릇에 보온병으로 가져온 된장국을 따르며 말했다.
"당신이 영양실조로 아사한다면, 여러모로 모두에게 피해니까"
"그, 그러냐…?"
하다못해 그냥 불쌍하다고 해줬으면 괜찮았을텐데. 괜시리 나 자신이 굶어죽은 모습을 상상하게 되잖냐.
나는 그 후에 쿠로네코가 거의 나를 잡아먹을듯이 노려봤기에 재빨리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준비성 좋게도 쿠로네코가 준비해준 파란색 플라스틱 젓가락을 사용해 먼저 밥을 조금 입으로 가져가고, 그 다으엔 불고기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우물우물.
"어, 어때?"
"우오오오… 살짝 간이 싱거운 감도 있긴 한데, 엄청나게 맛있어!"
잔뜩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쿠로네코에게 그렇게 대답하자, 쿠로네코는 '후…' 하고 한숨을 쉬면서 잔뜩 긴장하고 있던 몸에서 힘을 뺐다.
"다행이다…"
쿠로네코는 그렇게 말하며, 쑥쓰러운듯한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무척이나 아름다워서, 쿠로네코와 연인이었을때 나에게만 보여주던 그 미소를 떠오르게 하는데 충분했다. 그 미소에 그때를 회상해서 그런걸까. 동시에 쿠로네코와 연인이었던 마지막 날의 밤. 그 불꽃놀이 축제에서 쿠로네코가 보여주던 울것같은 미소까지 떠올랐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떠올라서 그런걸까. 설레임같은 두근거림과 하께 밀려오는 우울한 기분을 어떻게든 떨쳐내기 위해, 나는 억지로 쾌활한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요번에는 고기가 많네?"
"당신이 그렇게 원했었잖아"
아. 그런 일도 있었지.
엄청나게 사소한 일이었을텐데도 쿠로네코는 기억해주고 있구나.
"저번에 싱겁다고 하길래 약간 간을 세게 해봤는데 내입엔 너무 짠것 같아서 걱정했었는데… 당신은 도대체 얼마나 짜게 먹길래 그런거야?"
"음… 그런가? 별로 짜게먹는것 같지는 않은데"
"계속해서 그렇게 먹으면, 당신에게 심어둔 내 저주가 발동하기도 전에 고혈압으로 죽어버릴걸"
"묘하게 디테일하다!?"
"후훗,"
그런 대화를 하며, 나는 10분도 채 되지 않아 그 무지막지한 양의 도시락을 남김없이 비워버렸다. 만족스러운 만복감과 배가 터질것같아 느껴지는 약간의 괴로움이 기분이 좋을 정도였다. 이거, 너무 많이 먹어서 오늘 저녁은 안먹어도 될것 같은데. 아 맞아, 스프까지 뿌려놓은 컵라면은 비닐봉지에 넣어서 보관해놔야겠다.
따로 말할것도 없지만, 쿠로네코는 처음 자취를 시작한 내가 걱정이 되어서 도시락을 가져다준것일 것이다. 예전에 살던집보다는 가깝다고 해도, 휴일에 요리까지 한채 찾아오는 것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닐텐데도 말이야. 나는 그 점에 무척이나 고마운 기분이 들었다.
"고마워 쿠로네코. 덕분에 오랜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한것 같네. 엄청 맛있었어"
그러자 쿠로네코는 훗, 하고 고혹적인 야마의 여왕의 표정을 지으며, 평소의 중2병 스러운 포즈를 잡으며 말했다.
"맛있게 먹었으면 그걸로 좋아. 당신도 내 요기를 담은 요리를 일부 먹었으니, 나락의 근본에 한걸음 더 가까워 진거야. 후후후… 그 영혼부터 나의 노예가 될 날이 멀지 않았네"
얼굴을 약간 붉힌채 말하는게 또 무지하게 귀엽지만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뭔가 쿠로네코도 요즘 들어서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해 저런 대사를 하는것 같은데… 기분탓이려나?
"음. 그래서 이제 바로 돌아갈거야? 논다고 하더라도 나 혼자로는 만족하지 못할텐데"
"글쎄"
그리고 쿠로네코는 다른 보온병을 꺼내더니, 그 뚜껑에 안에 담긴 내용물을 담았다. 색깔이나 냄새로 보아하니 녹차구만.
"전혀 도움이 안되는 당신은 이거라도 마시고 있어"
"응? 뭐하게?"
"이 돼지우리를 청소하지 않으면 내 신경이 남아나지 않을것 같아"
"오,오우…"
그렇게 말한 쿠로네코는 휙, 하고 그 고스로리 드레스의 윗부분을 벗었다. 저번 여름 코미케에서 봤었던 그 하얀색 차림이다.
"나는 뭘 도와주면 될까?"
"…이미 방을 이정도의 카오스(혼돈)로 만든 인간이,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죄송함다"
나는 거의 쿠로네코에게 반 강제적으로 밀려나서, 어쩔 수 없이 침대위에 앉아 쿠로네코가 준 녹차를 마셨다. 너무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하지도 않은게 딱 좋은 온도다.
후루룩, 하고 녹차를 마시며, 나는 침대 위에 앉은 상태로 청소를 하고 있는 쿠로네코를 바라봤다. 막힘없이 엄청 능숙하게 방을 정리하고 있는 쿠로네코의 모습을 보니, 쿠로네코의 가사레벨이 얼마나 높은지 다시한번 깨닫게 되었다.
"으음…"
엄청나게 맛있는 도시락과 녹차. 그리고 돼지우리가 되버린 나의 방을 청소해주는 쿠로네코. 나는 얼굴에 있는 근육에 힘을 전부 뺀체, 지금 느끼는 행복감을 곱씹으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천사구만"
콱.
"히이이이이이이이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무, 무슨 일이야?"
"아, 아무것도! 잠깐 뜨거워서 그런거니까!!"
나는 졸도할듯이 비명을 지르는 내 비명소리에 나보다 더 놀란듯한 쿠로네코를 어떻게든 진정시키고, 두근두근두근두근. 하고 터질듯이 뛰는 심장을 부여잡은채 서서히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히, 히익…"
콱. 하는 소리와 함께 발쪽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저항감. 설마설마 했지만, 이미 내 시야엔 침대 아래에서 뻗어나온 손이 나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거보다 아야세, 너 거기 있었냐!!? 무슨 닌자도 아니고!!
"호오… 맘껏 신혼기분을 즐기고 있네요. 오빠"
침대 아래에 있던 아야세는 꾸욱, 하고 손에 힘을 더 주면서 나에게만 들릴듯한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게다가, 천사라구요…?"
그렇게 말한 아야세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세상에, 어디가 기분이 나쁜거야!!? 등이 축축해질 정도로 식은땀을 흘리며, 시간이 가는지 멈췄는지도 모르는 기분으로 기다리고 있자, 방 청소를 끝낸 쿠로네코가 나에게 다가왔다. 끼아아아아아아아악! 이쪽으로 오면 곤란하다고!!
"어디 안좋은 거야?"
"아, 아무것,도…… 그냥 누적된 피로가 몰려온게 아닐,까, 하는데…"
"…그래?"
혹시라도 먹은게 잘못된게 아닐까, 하는듯한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쿠로네코에게 삐걱삐걱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그러자 쿠로네코는 마지못해 인정한다는 얼굴을 하더니 말했다.
"샴푸 바꿨나보네"
"오, 오우… 아무거나 사오긴 한건데, 왜…?"
"평소랑은 다른 냄새가 나는거 같아서"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피부로 느껴질 정도의 분노는 지금도 실시간으로 발목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나의 발목을 꽉 잡고 있는 아야세에게서 말이야!!!
"방청소란건 처음부터 더럽히지 않으면 정리하고도 훨씬 편한거야. 귀찮아도 음식은 제대로 된 요리를 해서 먹고, …잠깐. 듣고 있는 걸까 당신"
"드, 듣고 있어"
"나도 그렇게 자주는 못오니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권위는 찾아야 하지 않겠어?"
"오,오우…"
그러자 거의 동시에, 다시 띵똥. 하고 초인종이 울렸다.
"자, 잠깐 나가볼게"
나는 그렇게 말하며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발목을 잡고 있는 아야세의 손이 스륵, 하고 사라지는 감각을 느끼면서 말이다. 쿠로네코에게 들리라고 말한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아야세에게 말한거라고.
그렇게 아야세의 마수에서 벗어난 나는 이대로 초인종을 올려준 구세주에게 마음속으로 몇번이나 절을 했다. 이대로 자연스럽게, 마치 약속이 생각났다는 듯이 그 구세주를 돌려보내고 나도 밖으로 나가고, 쿠로네코까지 나오게 되면 완벽하다!
"네. 누구세요"
머릿속으로 그런 계산을 하며 문을 열자,
"열어"
그곳엔 왠지 모르게 무척이나 화가 난듯한 키리노가 팔짱을 낀채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