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grund
“제7돌.... 이라고?”
스이긴토는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돌(Doll)이 눈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머리 속이 비어버릴 지경인데, 그 돌은 그에 그치지 않고 자신을 일곱 번째 로젠메이든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분명 그녀가 만나본 제7돌은 키라키쇼. 둘 중 하나가 가짜라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혼란스러워하는 스이긴토를 바라보며, 소녀는 싸늘하게 웃었다.
“너 같은 것을 부수어봐야 아무런 이득도 없지만....”
눈부시도록 새하얀 날개가 크게 펼쳐진다.
“마음에 안 들어. 그 주제에 나와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빛이 어둠을 덮쳐왔다.
“근본적인 전제라고?”
“그렇다네. 안타깝군. 일곱이나 되는 로젠메이든이 있는데, 왜 하필 그녀를 택한 겐가?”
미키야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스이긴토와 똑같이 생긴 소녀. 자신을 로젠메이든 제7돌이라고 밝힌 소녀는 무턱대고 스이긴토를 공격해왔다. 지금 공중에서는 흑과 백의 두 소녀가 격렬히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만둬! 같은 로젠메이든이잖아. 어째서 싸우는 거야?”
“시끄럽네.”
퍼억!
하얀 날개가 뻗어 나와 미키야를 후려쳤다. 일반인에 불과한 그가 대마술급의 공격을 막아내기란 불가능했다. 비명조차 내뱉지 못 하고 날아가 벽에 처박힌 미키야. 그대로 고개를 떨구고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미키야!”
황급히 그에게 날아가려는 스이긴토. 그러나 어느새 등 뒤에는 텐시가 다가와 있었다. 그녀의 하얀 손가락이 스이긴토의 목을 틀어쥐었다.
“크흑!”
숨이 막혀 괴로워하는 스이긴토. 그녀를 바라보며, 텐시는 비웃었다.
“로젠메이든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이까짓 게, 이런 추한 실패작 따위가 장미의 소녀일 리 없잖아?
“그녀가.... 로젠메이든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네. 그대가 깨닫지 못 한 것이 이상할 정도로군. 그녀의 허리부위가 없는 것을 보았을 텐데? 앨리스는 완전한 소녀. 앨리스를 고대하는 내가, 앨리스가 될 빛을 품고 있는 로젠메이든을 그런 불완전한 몸으로 만들 리 없지 않은가.”
“우.... 웃기지 마!”
파앗!
스이긴토는 순간적으로 힘을 끌어올려 텐시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뒤로 돌아 다시 그녀를 마주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스이긴토! 로젠메이든 제1돌 스이긴토다!”
그러나 그 것은 텐시를 향해서라기보다는 흔들리는 자신에게 외치는 다짐이었다. 오래 전부터 그녀의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던 불안. 그녀가 처음 몸을 움직이게 되었을 때부터, 아니 그 이전 그녀가 만들어졌을 때부터 품어왔던 불안감. 그럴 리 없다고 끊임없이 부정해왔던 두려움. 그 막연한 두려움이 텐시와의 만남으로 인해 커져가고 있었다. 그 감정을 떨쳐내기 위해 스이긴토는 스스로에게 외쳤다.
그러나 현실은 잔혹했다.
“어이가 없구나. 지금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하지만.... 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말했어. 자신이 로젠메이든 제1돌이라고! 허리가 없는 것은 로젠이 앨리스를 만들어 내지 못한 것에 실망하여 모습을 감추었기 때문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돌(Doll)의 넘버는 당연히 만들어진 순서겠지? 첫 번째 돌을 남겨두고, 다른 돌들을 먼저 만들어 완성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런.... 그런.... 거짓말이야! 그럴 리가 없어!”
스이긴토는 텐시의 말을 애써 부정하며, 그녀를 공격해 갔다. 그녀의 입이 더 이상 열리는 것을 막으려는 듯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진실은 스이긴토의 존재 자체를 거짓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텐시는 가볍게 공격을 피하고는 다시금 그녀를 비웃었다.
“게다가 스이긴토라고? 뭐야, 그 우스꽝스런 이름은.”
“그렇다면 스이긴토라는 이름은? 설마 당신이 붙여준 이름조차 부정하는 건가?”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으려는 듯이 다그치는 토우코의 말에 로젠은 고개를 저었다.
“부정이란 표현을 쓸 것도 없네.”
“뭐라고?”
어리석다는 듯이 혀를 차며, 로젠은 그녀에게 물었다.
“그대는 내가 로젠메이든을 언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장미십자회의 창설과 함께일 테니, 못 되어도 사백년 전 이겠지?”
고개를 끄덕인 로젠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수은등(水銀燈, 스이긴토)이 만들어진 것이 언제라고 생각하나?”
“뭐?”
토우코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그녀로서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사안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다. 무심코 지나쳤던 지독한 모순을.
로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어째서인지 그녀는 스스로를 스이긴토라고 칭하고, 로젠메이든들 역시 그녀를 그렇게 부르고 있네만....”
나직이 로젠은 고했다.
“나는 그녀에게 이름 같은 걸 지어준 적이 없다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스이긴토. 싸움조차 잊은 듯 그저 허공에 멈춰 있을 뿐이다. 그 틈을 타서 텐시가 덮쳐왔다. 스이긴토는 그제서야 황급히 막으려고 했지만, 겨우 팔을 들어 올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콰직!
“아아악!”
스이긴토의 팔은 무참하게 부러져 버렸다. 그 안을 지지하던 뼈는 산산이 부서졌다. 힘을 잃은 두 팔이 추욱 늘어져 덜렁거린다.
스이긴토로서는 처음 겪는 고통. 과거 무기질 몸에서의 의사감각이 아닌, 처음으로 느끼는 실제의 아픔. 머리 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그 안을 가득 채운 것은 팔로부터 올라오는 생소한 감각. 차마 몸을 움직일 수 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 것이 끝이 아니었다.
콰아앙!
스이긴토는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홀바닥에 둥근 크레이터가 패였다. 고통에 몸이 굳어버린 스이긴토를 낚아챈 텐시가 그대로 그녀를 잡고 날아가 바닥에 내려꽂은 것이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온 몸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을 뿐. 마력으로 보호하지 않은 스이긴토의 몸은 연약한 인간소녀와 다를 바 없었다.
엎어진 스이긴토의 등을 텐시의 발이 지긋이 내려밟았다. 구두굽이 날카롭게 등을 파고들었다. 고통에 정신을 잃어버렸던 스이긴토는 이번에는 고통에 의해 정신을 차렸다. 막혀버린 목. 부러진 갈비뼈가 박혀 들어간 폐는 더 이상 공기를 내보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이긴토는 애써 소리를 쥐어짰다.
“그럼.... 그럼 나는 대체.... 뭐지?”
비탄에 빠진 목소리. 텐시는 잔혹한 웃음을 머금었다.
“말했잖아? 추한 실패작일 뿐이야.”
“그렇다면 그녀는 대체 뭐지?”
“이야기하지 않았나. 앨리스를 만들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억지력이 막아섰기에.”
“그리고 당신은 억지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로자미스티카를 일곱 조각으로 나누었어. 설마! 그렇다면 그녀는!”
“그렇다네.”
로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앨리스를 만들려다 실패한 인형. 본래 완전한 하나의 로자미스티카를 가지고 앨리스로 태어나야 했으나 그러지 못 한 인형. 그 것이 바로 그녀일세.”
콰직!
“아악!”
텐시의 발이 스이긴토의 다리를 내려찍었다.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다리가 부러졌다.
“이제 알겠어? 더러운 인형 같으니! 실패작 주제에, 본래라면 그 자리에서 부숴 졌어야 할 네가 무슨 염치로 나돌아 다니는 거지?”
“그렇다면.... 어째서 그녀를 그대로 두었지? 어째서 그녀에게 영혼을, 정신을 주었나? 어째서 그녀에게 움직이는 몸을 주었나!”
토우코는 알고 있었다. 스이긴토, 그녀가 간직한 슬픔을. 비록 그녀는 한 번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강인해 보이는 모습 너머 마음 속은 눈물로 가득 차 바다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토우코는 알 수 있었다. 둘의 몸은 본래 같은 것이기에. 스이긴토의 마음 속 슬픔은 이미 넘쳐서 그녀에게까지 흘러 들어오고 있기에.
불완전한 몸에서 느끼는 자괴감. 아버님, 로젠에게 버림받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 잡으며, 자신을 만들어 준 이에게 보답하기 위해, 그의 소망을 이루어주기 위해, 눈물을 속으로 감추며 애써 강한 모습을 보이려 하는 스이긴토.
다른 자매들이 정크(Junk)라고 업신여길 때, 그녀 혼자만 따돌릴 때, 그럴 때마다 상처 입으면서도 겉으론 태연한 척 행동해왔다. 사실 그녀의 마음은 찢어질 것 같은데도, 서러움에 흐르는 눈물이 흠뻑 적시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기에 그녀를 지탱하는 것은 오로지 의지뿐. 설령 악(惡)으로 매도당하더라도, 오로지 앨리스가 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녀에게는 그 길 밖에 없었다. 자신이 정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그 것뿐이었다. 자신이 아버님께 버림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그 것뿐이었다. 그렇기에 그 길이야말로 그녀의 모든 것.
그런 그녀가 부정당하고 있다.
그녀의 노력, 의지가 단지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그녀의 모든 것은, 그녀가 그것들을 바쳐온 상대에게 부정당하고 있다.
그럴 생각이라면 어째서 그녀를 만들었는가. 어째서 감정을, 정신을, 그리고 영혼을 주었는가. 차라리 단순한 무기물에 불과했다면, 차라리 평범한 인형이었다면, 최소한 그런 슬픔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토우코의 비난에 로젠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의도한 것이 아닐세. 애초에 실패작인 그녀를 남겨둔 것은 로젠메이든의 실험체로 쓰기 위함이었네. 로젠메이든 각자의 고유능력, 그녀들을 보조하는 인공정령, 개량된 미디엄 시스템, 로자미스티카의 출력측정.... 로젠메이든을 만들기 전 시뮬레이션을 해보기 위해서였지. 그녀는 비록 실패작이라고는 하나 앨리스에 가장 가까운 존재, 로젠메이든의 원형이었으니까. 실험체로는 최상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지. 실제로 모든 로젠메이든은 그녀를 통해 먼저 시뮬레이션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네. 내가 마지막으로 만든 가장 완성도 높은 로젠메이든은 사실상 그녀의 카피나 마찬가지일 정도지.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에게 영혼은 없었네.”
“없었다고?”
“그렇다네. 나는 그녀에게 제3법을 시행한 적이 없네. 그녀에게는 영혼, 정신, 감정.... 그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았지. 힘의 패스만 통해있을 뿐, 그 외에는 말 그대로 일반적인 의미의 인형이었네. 그러던 중 마술협회의 추적이 있었다네. 그 때 당시 몸을 피하는 와중에 그녀를 잃어버리고 말았지. 내가 다시 그녀를 만난 것은 이번 전생자, 사쿠라다 준의 앞에 그녀가 나타났을 때였네, 나도 놀랐지. 움직일 수 없어야 할 그녀가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그런....”
“뭐어,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지 않나.”
말을 멈춘 로젠은 다시금 토우코를 바라보았다.
“자아, 이 것이 자네 계획의 오류일세. 그녀를 소재로 택한 것, 근본적인 전제에서부터 자네 계획은 어긋나 있었던 거야.”
텅 비어버린 눈. 초점을 찾아볼 수 없게 풀린 눈동자. 그 눈에서는 그저 눈물만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다. 멈출 수는 없었다. 그 것을 담고 있던 마음은 이미 산산이 부서져 버렸기에.
새어나온 눈물이 바닥을 적신다.
“아니야.... 아...니야....”
연이은 충격으로 스이긴토의 몸은 쇼크상태에 빠진 듯 바들바들 떨리고 있다. 정신마저 놓아버린 몸은 그저 멋대로 경련할 뿐이다. 다만 그녀의 입은 끊임없이 아니야 라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알겠어? 아무리 나와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어도....”
꽈악.
텐시의 손이 스이긴토의 축 늘어진 날개를 들어올렸다.
“너는 그저 실패작일 뿐이야.”
하얀 손가락이 검은 날개를 파고든다. 움켜쥔 손이 힘을 더한다.
“결코 앨리스가 될 수 없어!”
콰지직!
“그녀는 결코 앨리스가 될 수 없어. 아무리 앨리스에 가깝다 해도 본질적인 것, 근원의 일부인 로자미스티카가 존재하지 않아. 애초에 완성된 하나의 로자미스티카를 위해 만들어진 몸이기에, 나누어진 로자미스티카를 모아 앨리스로 진화하는 것조차 불가능해.”
다시 한 번 나직이 로젠은 선언했다.
“그녀는 결코 「 」에 이르지 못 해.”
붉은 색 분수가 솟구친다. 그 선명한 색이 순백의 소녀를 물들인다. 소녀의 하얀 얼굴, 하얀 머리카락, 하얀 드레스 그리고 하얀 날개. 모두가 붉게 물들었다.
“아하하하하하~ 뭐야, 이건?”
입가에 맺힌 피를 스윽 혀로 핥으며 소녀는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녀의 한쪽 손에는 커다란 검은 날개 한 짝이 뜯겨진 채 들려있다.
“피잖아! 이제 보니 아버님이 주신 몸마저 내다 버린 거야? 쓰레기 같으니!”
힘 없이 바닥에 널부러진 또 한 명의 소녀. 그녀의 등에 있던 두 장의 검은 날개는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사라진 검은 날개의 자리에는 대신 붉은 날개가 솟아있다.
“아아, 됐어. 흥이 사라졌어. 너 같은 건 부술 가치도 없어.”
날개가 뜯겨 나간 자리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고 있다.
“그대로 바둥거리다 죽어버려! 쓸모 없는 실패작아!”
소녀는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이제는 붉게 변한 날개를 펄럭여 성 밖으로 사라진다.
다시 성 안은 텅 비어버렸다.
파득거리는 검붉은 날개의 소녀와 정신을 잃은 청년만이 바닥에 버려져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