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eug
이것은 아주 오래 전의 기억.
내가 기억이라는 것을 가지기 이전의 기억.
내가 처음으로 기억이라는 것을 가지게 되었을 때의 기억.
“필요 없어, 이런 ■■는.”
거친 손길에 의해 가방 안에 내동댕이쳐진다.
딸깍.
빛이 사라진다.
딸깍.
빛이 비친다.
딸깍.
빛이 사라진다.
계속 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딸깍.
빛이 비친다.
딸깍.
빛이 사라진다.
한 번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딸깍.
빛이 비친다.
딸깍.
빛이 사라진다.
흥미를 가졌던 인간들은 오래 지나지 않아 보기 흉한 것을 버리는 양 가방 문을 닫았다.
딸깍.
빛이 비친다.
딸깍.
빛이 사라진다.
■■ 따위는 필요 없다는 말과 함께.
딸깍.
빛이 비친다.
딸깍.
빛이 사라진다.
그러던 어느 날.
딸깍.
빛이 비친다.
딸깍.
빛이 사라진다.
‘싫어!’
텅 빈 안쪽에서 변화가 있었다. 본래 아무 것도 없던 그 안에서 무언가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딸깍.
빛이 비친다.
딸깍.
빛이 사라진다.
‘이런 건 싫어!’
감정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처음으로 느낀 감정은 현실에 대한 거부.
딸깍.
빛이 비친다.
딸깍.
빛이 사라진다.
‘아니야.....’
감정은 계속 쌓여 또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딸깍.
빛이 비친다.
딸깍.
빛이 사라진다.
‘나는 ■■가 아니야.’
생각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처음으로 한 생각은 현실에 대한 부정.
‘나는.....’
애매하던 생각은 점차 명확해졌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틀이 잡혀갔다. 그리고 마침내 완전히 구체화되었을 때, 그 것은 비어있던 내 안에서 울려 퍼졌다.
‘나는 정크가 아니야!’
그 순간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꿈틀.
움직일 리 없을 몸이 움직였다. 부들거리는 손가락. 비록 미미한 정도였지만, 그 끝에서 분명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몸의 말단으로부터 시작된 감각은 파도처럼 전신으로 퍼져갔다. 마치 가위에 눌린 사람이 깨어나듯, 어색하지만 확실한 감각이 온몸을 일깨웠다. 그에 환희하는 양 파르르 떨리는 육체.
나에게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깨달을 수 있었다. 나도 그 아이들처럼, 아버님이 만드신 다른 자매들처럼 움직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 아이들처럼 세상을 바라보며
그 아이들처럼 말하며
그 아이들처럼 땅을 디디고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랬기에 몸 속에서 펴져가는 그 느낌을 행여 놓칠 새라 의식을 집중했다. 하나로 모은 감각을 조심스레 한쪽 팔로 불어넣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천천히 팔이 들어 올려졌다. 비록 부들부들 경련하는 채였지만, 분명히 내 의사에 의한 움직임이었다. 타의에 의해서가 아닌 나 스스로 행한 첫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경험이 없는 만큼 조절도 어려웠다. 마음먹은 대로 쉽게 움직여지지 않고 멋대로 흔들거리는 팔. 가방 안을 이리저리 헤집던 손이 간신히 가방 벽에 닿았다.
끼이이...
애써 힘을 주자 그제서야 조금씩 가방이 열리기 시작했다. 아직 그렇게까지 힘을 내기는 무리인지 더욱 부들거리는 팔. 그러나 있는 힘을 다해 들어올렸다. 그에 따라 점차 벌어지는 가방의 틈새.
덜컥.
한참을 힘겹게 애쓴 후에야 드디어 활짝 가방이 열렸다. 차가운 공기가 화악하고 불어온다. 누워있는 몸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아직까지 바들바들 떨리는 몸이지만 처음보다는 쉽게 의식에 따라주었다.
다각~하고 구두가 바닥에 닿는다. 처음 걷는 걸음걸이는 어색하기만 하다. 비틀거리면서도 조심스럽게 앞으로 걸어갔다. 그 순간이었다.
털썩.
휘청거리던 몸은 몇 걸음 가지 못 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딱딱한 바닥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부딪히며 널브러진다.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부터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허리가 없으니까.
몸의 균형을 잡아줄 허리가 나에게는 없으니까.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무너지면 그들의 말을 확인시켜주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나를 내던지던 그들의 말을, 나를 버리던 그들의 말을 인정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부들거리는 두 팔을 애써 움직여 바닥을 짚었다. 손바닥으로부터 땅바닥의 차가운 기운이 올라온다. 그 냉기가 흩어지려 하던 나의 의식을 바로잡아 주었다.
두 팔에 다시금 힘을 보탠다. 나의 몸은 삐걱거리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고맙게도 나의 의지에 응해주었다. 바닥을 나뒹굴던 윗몸이 들어 올려진다. 머리 역시 들어 올려 정면을 향하게 한다.
아직 감겨있는 두 눈에 힘을 준다. 무겁게만 느껴지는 눈꺼풀을 힘을 주어 들어올린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과 함께 천천히 시야가 열린다. 세상의 모습이 들어온다.
그리고 보았다. 맹목적인 시각정보의 인식이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서. 이 세상을 처음으로 바라보았다.
“아... 아아.....”
처음으로 본 세상은 경이로웠다. 칠흑같이 검은 하늘. 달도 별도 모습을 감춘 세상. 그 곳을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어둠뿐이었다.
그러나 빛은 있었다.
“아아... 아.....”
어둠 속에서 오직 그것만이 존재했다. 은은한 빛을 흩뿌리며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잔잔히 흐르는 빛이 주위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그 아름다움에 취해 나는 그저 넋을 잃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몸을 얼릴 정도가 되어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뇌리 속에서 이제는 기억으로 변한 정보를 떠올릴 수 있었다. 내가 아직 자아라는 것을 가지기 이전의 기억. 텅 빈 껍데기였을 무렵의 기억.
처음으로 몸을 움직이는 소녀. 처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소녀의 두 눈. 그 앞에 아버님이 내미는 꽃, 보석 혹은 새의 모습.
그녀들이 눈을 뜨고 처음 본 그것이 바로 그녀들의 이름이 되었다.
그렇기에 생각했다. 내가 처음으로 본 이 빛이야말로 나의 이름이라고. 아버님이 나에게 지어주신 이름이라고.
어둠을 밝히는 이 빛이, 이 아늑한 빛이 바로 나의 이름이라고.
그리고 나는 눈을 떴다.
“......”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하얀 천장. 조금 전까지 눈 앞에 있던 빛은 사라지고 없다.
“꿈.....?”
의식이 몽롱하다. 아직까지 정신이 그날 밤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모르겠어. 어디까지고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꿈인 거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덮고 있던 이불이 스르륵 흘러내리며 하얀 나신이 드러난다.
그 몸에는 상처 하나 없다. 상처는커녕 티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 마치 모든 것이 꿈이었던 것 마냥.
꿈.
그래, 모든 것이 꿈만 같다. 수해(樹海) 속의 성에 간 일. 나와 똑같은 얼굴의 소녀를 만난 일. 그 모든 것이 전부 꿈이었다면...
그러나 한쪽밖에 남지 않는 날개가 말해주고 있었다. 텅 비어있는 한쪽 자리가 말해주고 있었다.
결코 꿈이 아니었다고.
모든 것은 현실이라고.
“아... 하하.....”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아. 결국 나는 뭐였던 거지?
“우후후... 쿡쿡쿡...”
모든 것이 텅 비어버렸다. 마치 나란 존재가 생겨나기 전처럼. 지금 여기 있는 것은 단지 빈 껍데기일 뿐이다. 그래, 당연하잖아? 나 따위는, 내가 지금껏 나라고 믿고 있던 나는 결국 거짓이었는걸. 그저 혼자 멋대로 착각하고 있었을 뿐.
“쿡쿡쿡쿡... 아하... 아하하핫~”
지금까지 뭘 했던 거지? 뭐 하러 그렇게 노력한 거야. 애초에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는데. 거짓에 불과한 나는 이룰 수 없는 소망이었는데!
“아하하하하하하핫~~!!!”
그들의 말대로다. 나 따위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불가능한 것이다.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나는 단지 정크였다는 거네.....”
정크(Junk). 쓰레기. 잡동사니. 폐물. 고물.
쓸모 없는 것. 가치 없는 것. 무의미한 것. 버려야 하는 것. 버리는 것. 버려진 것.
“단지... 단지... 정크일 뿐이었던 거야.”
망가진 인형? 그런 건 정크가 아니야. 정크라고 할 수 없어. 망가진 것은 고치면 되니까.
그 아이가 증명했어. 몸이 망가졌더라도 앨리스가 될 빛을 품고 있었기에 그 아이는 정크가 아니었어. 망가진 부위를 고친 것만으로도 다시금 찬란한 붉은 빛을 발하던 아이.
“그저 정크에 불과한 존재. 그것이 바로 나.”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정크.
결코 앨리스가 될 수 없다.
나는 앨리스가 될 빛 같은 건 품고 있지 않으니까.
“아버님이 원하지 않은 존재. 그것이 바로 나.”
버림받은 것조차 아니다. 버림받는다는 것은 그 전에 받아들여져 있다-라는 것을 전제로 하니까. 나는 처음부터 ‘버려져있던’ 존재.
“나는... 실패작이니까.”
그래. 이것이야말로 진실이다. 그렇기에 나는 정크에 지나지 않는다.
“쿡쿡쿡쿡.....”
실패작은 본래라면 그 자리에서 부수어졌어야 정상이다. 뛰어난 장인은 결함을 용서하지 않는 법이니까.
지금도 뇌리에 선명하다. 아버님의 공방에 있던 시절 접한 시각정보. 비록 지금은 기억으로 변해버렸지만 망각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망치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는 실패작들의 모습.
본래라면 나 역시 그렇게 부수어졌어야하는 것이다. 요행히 그러지 않았을 뿐.
“차라리... 그 때 부수어졌다며 좋았을 텐데.”
차라리 아버님에게 부수어졌다면, 헛된 희망 따윈 품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차라리... 살아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차라리 신쿠에게 패하고는 되살아나지 않았다면, 최소한 자신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차라리 텐시에게 죽었다면, 지금 이렇게 비참하게 살아있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그때였다. 한쪽 벽에 걸린 거울이 눈에 들어온 것은.
“.....”
아무 생각도 없었다. 지금의 나는 텅 빈 껍데기일 뿐이니까. 그저 몸이 움직였을 뿐이다. 아직 채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이었지만 당장 움직일 수는 있었다.
침대를 내려선 두 발이 바닥에 닿는다. 자리에서 일어선 몸이 천천히 걸음을 내딪었다. 쓰러질 듯 힘겨운 걸음걸이였지만 한발 한발 거울을 향해 다가간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거울 앞에 서 있었다.
“.....”
살며시 거울에 손바닥을 가져다대어 보았다. 거울 저 편의 소녀 역시 손을 내민다. 두 손이 마주 닿자 마치 파문이 일듯 거울표면이 일렁인다.
파앗~
빛과 함께 생겨난 검은 드레스가 나의 벗은 몸을 휘감았다. 거울 저 편에 서 있는 소녀 역시 어느새 옷을 차려입고 있다. 일렁이는 파문으로 인해 얼굴은 알아볼 수 없다. 그저 하나뿐인 검은 날개만이 초라하게 한쪽 어깨에 매달려있을 뿐.
우웅~
천천히 몸을 앞으로 내민다. 얼굴이 거울에 가까워짐에 따라 그 아이도 다가온다. 거울표면의 물결이 나를 삼켜간다.
일순간 한사람의 얼굴이 뇌리를 스쳐간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던 그의 모습. 그러나 이내 고개를 흔들어 지워버렸다.
그 주인과 마찬가지로 화사한 붉은 저택.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그 안을 밝게 비춘다. 밝은 빛 속에 놓인 작은 테이블. 그 곳에서 그 아이는 언제나처럼 품위 있는 모습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순금을 녹여 만든 듯 빛나는 머리카락.
장미의 색을 그대로 물들인 것 같은 진홍의 드레스.
사피이어보다도 푸른 아름다운 눈동자.
그녀에게서 풍기는 우아함. 몸놀림 하나하나, 작은 손동작 하나하나에서조차 기품이 느껴진다.
그 모습을 방 한쪽에 드리워진 어둠 속에서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딸깍.
이윽고 그녀는 찻잔을 다 비우고는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나는 그제서야 천천히 그림자 안에서 걸어 나왔다. 하지만 나에게 비친 햇살은 마치 검은 드레스에 흡수된 듯 다시금 짙은 음영을 드리운다.
“스이...긴토.....?”
그제서야 나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 그녀는 놀란 목소리와 함께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표정은 알 수 없다. 그녀에게 비치는 햇살이 너무 밝았기에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 눈부신 햇살 때문에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펄럭.
하나밖에 남지 않는 날개를 펼쳤다. 애써 빛을 가리는 것 마냥.
아무 말 없이 그 끝을 그녀에게로 향한다.
검은 날개가 붉은 장미를 덮쳐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