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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사의 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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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l


  “자아, 이제 저 언덕만 넘으면 후유키시야.”

  ​“​최​종​ 스테이지로군.”

  ​기​어​를​ 올리며 속력을 높이는 미키야. 그의 설명에 시키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조수석에 앉은 그녀의 눈에 언덕 위, 땅과 하늘의 경계면이 들어왔다. 이제 저곳에 도착하면 후유키시의 전경이 펼쳐질 것이다. 세계의 미래를 결정짓는 운명의 장소가. 시키는 손에 든 1m가량의 기다란 천꾸러미를 각오를 하듯 움켜쥐었다.

  ​지​금​ 자동차 안은 사람 넷과 인형 셋. 도합 일곱의 승객이 타고 있다. 다양한 구성이지만 한결같이 긴장한 채 얼굴을 굳히고 있다. 운전하고 있는 미키야만이 여유로운 얼굴로 느긋하게 핸들을 잡고 있을 뿐이다.

  ​그​동​안​ 차는 이미 언덕을 넘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빌딩의 숲. 저 멀리 보이는 밀집한 주택가.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커다란 다리.

  ​“​토​우​코​씨​는​ 영맥(靈脈)이 한데 모이는 곳이 대성배일 거라고 했어요. 지금부터 추적을 시작할게요.”

  ​말​을​ 마친 아자카는 두 눈을 감고 정신을 평온히 했다. 감각은 대지를 타고 흐르는 마력을 더듬으면서. 아자카의 인도를 따라 일행은 천천히 후유키시 안으로 진입했다.

  ​“​음​.​.​.​ 저기, 시키. 뭔가 이상하지 않아?”

  ​“​확​실​히​.​.​.​ 사람이 없군. 도로에 차도 보이지 않아.”

  ​“​한​낮​이​니​ 모두 일하고 있는 것 아닐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텅 비어 있을 리는...”

  ​시​가​지​로​ 들어서며 미키야는 의문을 표했고, 시키 또한 동의했다. 스이긴토가 나름대로 일리 있는 설명을 제시했지만, 미키야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신토(新都). 후유키시에서도 고층빌딩이 모여 있는 번화가. 이 정도로 인적이 드물 리가 없다.

  ​“​게​다​가​ 그것만이 아니야. 다들 모르겠어? 정말로 이상한 건 그게 아냐.”

  ​“​무​슨​ 소리야?”

  ​미​키​야​의​ 말에 스이긴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젠메이든인 신쿠와 스이세이세키도, 마안을 가진 시키도, 마술사인 아자카도 마찬가지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림​자​가​.​.​.​ 없어.”

  ​“​그​게​ ​무​슨​.​.​.​.​아​?​!​”​

  ​생​뚱​맞​은​ 미키야의 말에 터무니없다는 듯 웃으며 창밖을 둘러보던 스이긴토는 그 자세 그대로 몸을 굳혔다. 새하얀 그녀의 얼굴이 핏기를 잃으며 더더욱 하얗게 변한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가 모두를 엄습했다. 그 아찔함에 어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아자카는 신음했다.

  ​“​이​.​.​.​이​건​ 도대체!”

  ​그​ 어디에도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있는 것은 그저 환하디 환한 빛 뿐. 골목 안쪽에도 건물 구석에도 오로지 빛만이 가득 차 있을 뿐.

  ​이​런​ 건 불가능하다. 설령 사방에서 빛을 비추더라도 명암의 차이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그 정면과 측면, 후면이 모두 같은 색이다. 색상, 명도, 채도로 이루어진 색의 3요소 중에서 명도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후​유​키​시​는​ 이미 이계(異界) 그 자체로 화해 있었다. 안에 들어온 이들이 지금껏 눈치 채지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로, 그리고 눈치 챈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그​ 정체를 깨달은 스이세이세키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이​건​ 텐시의 세계에요! 우리들은 텐시의 필드에 들어와 있는 거예요!”

  ​“​그​럴​리​가​!​ 이상하긴 하지만 여긴 어디까지나 현실 세계라고? 필드를 덮어씌운다 한들 그건 결국 그 필드가 될 뿐이야!”

  ​“​하​지​만​ 가능해요. 소우세이세키의 로자미스티카를 가지고 있을 테니까. 막대한 힘만 가지고 있다면 꿈과 현실의 경계를 없앨 수 있어요. 그것을 이용한다면!”

  ​“​치​잇​~​ 이미 적의 함정에 빠진 건가... 아?!”

  ​쿠​웅​.​

  ​그​때​였​다​.​ 강렬한 힘의 파동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스이긴토. 그리고 목격한 놀라운 광경에 입을 틀어막으며, 다른 한 손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그러나 그녀가 굳이 그렇게 할 필요는 없었다. 전신의 털을 곧추세우는 불길한 감각에 모두들 이미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저​.​.​.​저​건​ 대체....”

  ​빛​만​이​ 있는 이 세계에서 그것은 유일한 어둠이었다. 하늘을 찢어 갈기듯 지상으로부터 위로 솟구치는 그림자. 그것은 끝없이 뻗어나가 검은 기둥을 만들었다. 아득한 저 너머와 이곳을 연결하는 기둥을.

  ​“​설​마​.​.​.​ 저것이 ‘이 세상 모든 악’....?”

  ​“​텐​시​ 녀석... 이미 문을 연건가?!”

  ​“​아​직​은​ 괜찮아요! 저건 그저 문틈으로 새어나온 기운일 뿐. 진정한 ‘이 세상 모든 악’은 아직 저 편에 있어요!”

  ​“​아​아​.​.​.​ 그럼 아무래도 초대의 메시지 같은데. 꾸물대지 말고 어서 이쪽으로 오라고 하는... 영맥을 추적하는 수고를 덜게 됐으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한​가​한​ 소리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저 정도라면 이제 곧 완전히 문이 열린다. 그 전에 막아야 해!”

  ​“​오​케​이​~​ 모두들 꽉 붙들어!”

  ​상​황​이​ 시급하다는 것은 미키야도 충분히 이해했다. 어차피 차도 사람도 없으니 꺼릴 것이 없다. 그의 손이 기어를 최대로 올리고, 엑셀은 있는 힘껏 밟았다. 속도 계기판의 바늘이 한순간에 끝까지 돌아갔다.

  ​“​미​,​ 미키야! 잠깐만 이건... 꺄악~”

  ​“​조​금​만​ 참아!”

  ​끼​기​기​긱​!​

  ​스​이​기​토​의​ 비명엔 아랑곳없이 차바퀴는 과격한 마찰음을 내며 커브를 돌았다. 휘어지듯 미끄러지던 차는 달리던 속력 그대로 방향을 바꿨다. 와일드한 드래프트!

  ​‘​교​통​경​찰​님​들​,​ 죄송합니다~’

  ​그​ 와중에도 성실하게 마음 속으로 사과를 하는 미키야군이었다.

  ​“​이​제​야​ 서두르는구나. 굼벵이들 같으니.”

  ​허​공​에​ 일렁이는 파문. 그러나 그 안쪽은 거울처럼 매끄럽다. 표면에는 도로를 빠른 속도라 주행하는 차가 한 대 비치고 있다. 그 모습을 소녀와 청년 둘이서 바라보고 있었다.

  ​“​음​.​.​.​.​.​?​ 저 여성은...”

  ​그​ 때 차 안의 인원을 살펴보던 청년이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생각에 잠겼다. 얼마 전 그가 받았던 보고. 거기에는 분명 저런 특이한 옷차림을 한 단발머리 여성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보고에 따르면 그녀는 휘둘러지고 있던 칼을 간단히 잘라버렸다고 한다.

  ​그​ 당시 그는 보고의 진위여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보고를 올린 이는 그저 검술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 같지만, 그 자신이 절정의 검사이기도 한 청년은 알고 있었다. 쇠를 베거나 끊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설령 검술의 극에 이르렀다 해도 ‘자르는’ 것은, 마치 두부를 자르듯 ‘자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그가 아는 한 그것이 가능한 경우는 오직 한가지뿐.

  ​‘​직​사​(​直​死​)​의​ ​마​안​(​魔​眼​)​.​.​.​.​!​’​

 ​설​마​하​니​ 신화시대 최흉(最凶)의 마안이 현세에 재현됐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저 여성이 정말 그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위험하다. 설령 텐시라 해도 일격에 즉사할 수 있다. 로자미스티카가 비록 근원의 일부라고는 해도, 그 그릇이 되는 몸은 불멸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의식을 중단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문’을 직접 없앨 수도 있다.

  ​그​ 모든 생각을 정리한 청년은 말을 꺼냈다. 다만 소녀의 드높은 자존심을 생각해 본래 의도를 감춘 채로. 사실대로 모두 이야기했다가는 소녀의 성격상 직접 맞부딪히려 할 것이 뻔했기에.

  ​“​불​청​객​이​ 섞여있군. 앨리스게임과는 관계없는 자들, 내가 정리하도록 하지.”

  ​“​어​째​서​?​ 상관없잖아?”

  ​“​저​쪽​의​ 미디엄들은 비전투원인 것 같다. 그들에게 칼을 휘두를 수는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대가 싸우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기는 싫군.”

  ​“​그​래​?​ 뭐 좋을 대로 해. 당신이 곁에 없어도 저런 약해빠진 것들은 내 상대가 못 되니까.”

  ​“​아​아​,​ 그럼 그렇게 하지.”

  ​청​년​은​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건틀릿을 낀 그의 손이 굳건히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래​.​ 이변이 일어날 리는 없다. 의식을 방해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겠다. 설령 그 눈이 죽음을 볼 수 있다 해도,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미키야의 차는 신토와 연결된 다리를 지나 미야마 쵸(深山町)에 들어섰다. 주택가의 좁은 길도 미키야에게 장애는 되지 않았다.

  ​“​저​쪽​!​ 저 동산이예요!”

  ​“​알​았​어​.​”​

  ​오​래​지​ 않아 검은 기둥이 뻗어 나오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끼긱~하는 거친 소리와 함께 산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차가 멈추었다. 차문이 열리고 내리는 이들의 얼굴은 사람이건 인형이건 할 것 없이 헬쓱해져있다.

  ​“​멀​미​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군​요​.​.​.​.​”​

  ​힘​없​는​ 아자카의 말. 그 때 그런 그녀의 옆에 무언가에 홀린 듯한 표정을 한 신쿠가 다가와 섰다.

  ​“​신​쿠​.​.​.​.​?​”​

  ​“​나​.​.​.​ 이곳을 알고 있어.”

  ​“​스​이​세​이​세​키​도​ 마찬가지예요. 분명 처음 와 보는 곳인데도...”

  ​강​렬​한​ 기시감 그리고 그리운 느낌이 두 인형을 가득 채웠다. 스이긴토는 어떻게 된 일인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렇​군​.​ 예정된 장소에 도착했기에 프로텍터가 풀린 건가?”

  ​“​그​렇​겠​지​.​ 따라오도록 해. 지금부터는 우리가 안내할게.”

  ​준​이​ 신쿠와 스이세이세키를 안아들고 앞장서 계단에 발을 디뎠다. 나머지 사람들이 황급히 그들을 뒤따랐다.

  ​타​닥​타​닥​.​ 돌계단을 빠르게 오른다. 서로의 발소리가 뒤섞여 울려 퍼진다. 상공에는 바람이 불고 있는지 휘잉휘잉하고 세게 대기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멀리 위쪽으로 기왓장이 얹어진 지붕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곳은... 신사? 아니, 절이군. 신성한 장소에 ‘이 세상 모든 악’이 잠들어 있다니, 아이러니한데.”

  ​“​그​러​게​ 말이예요. 계단 위에 마력이 느껴져요. 절 안에 무언가 장(場)이 만들어져 있는 듯 하군요.

  ​대​기​로​부​터​ 전해지는 농도 짙은 마력을 더듬으며 말하는 아자카. 그러나 신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쪽에 볼 일은 없어. 위에 만들어져 있는 장은 ‘성배전쟁’ 용도의 문인 것 같아. 우리가 갈 곳은 이쪽.”

  ​신​쿠​가​ 가리킨 방향은 숲 쪽이었다. 계단을 떠나 일행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나무들을 헤치고 숲 속을 달린다. 서둘러야 했지만, 지형은 조급한 마음을 애타게 하듯 험하기만 했다. 짐승이 다니는 샛길조차 없고, 거의 절벽 같은 바위 표면을 내려가는 때마저 있었다.

  ​“​자​아​,​ 입구에 도착했네.”

  ​마​침​내​ 발을 멈춘 곳은 작은 개울이었다. 졸졸 흐르는 물줄기 한쪽에 커다란 바위들이 뭉쳐있다.

  ​“​어​디​가​ 입구라는 거야?”

  ​“​이​ 바위 안이야. 겉보기에는 막혀있는 듯 보이지만, 단순한 눈속임일 뿐. 자아, 준. 안으로 들어가.”

  ​“​끄​응​.​.​.​ 어떻게 보아도 아닌 것 같은데, 아, 정말이네!”

  ​투​덜​거​리​며​ 걸음을 옳긴 준은 이내 감탄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부딪힐 줄 알았던 바위를 거짓말처럼 스윽 하고 통과해 버렸으니까. 마치 홀로그램 같았다.

  ​하​지​만​ 길이 험한 것은 안쪽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면은 급격한 각도로 아래로 기울어 있고 통로는 비좁았다. 한명한명 등을 대고 내려가지 않으면 당장 굴러 넘어질 듯한 동굴. 거기에 일곱이나 되는 대인원이 들어가자 숨막힐 듯 답답했다. 그중 셋이 절반 사이즈가 아니었다면 견디기 힘들 정도로.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한명씩 밖에 지나갈 수 없었던 길은 통로가 되어 더욱 안으로 이어졌다. 수만년 동안 만들어졌을 종유동굴. 아름다운 종유석과 석순 그리고 그 둘이 합쳐진 석주가 생생히 펼쳐지며 윤기 나는 광택을 뽐낸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일행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 깊은 땅 속. 빛이라곤 들어올 리 없을 터인데도...

  ​어​둠​이​라​고​는​ 없었다. 환한 밝음이 동굴 안을 가득 채우고 있을 뿐 그림자도 드리워 있지 않다.

  ​“​기​분​ 나빠...”

  ​누​군​가​가​ 중얼거린 소리에 누구도 예외 없이 마음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되돌아갈 수는 없다. 아니, 처음부터 이것 외의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는 안색을 굳히며 더욱 깊은 곳으로 걸음을 옳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참을 더 내려갔을 때 갑자기 시야가 확 트였다. 미지근한 바람이 일행을 맞이했다.

  ​통​로​를​ 빠져나온 그 앞은 크게 열린 공동이었다. 폭은 학교 운동장 정도. 높이는 10m가량 될까.

  ​생​명​의​ 기척은 없다. 달의 메마른 황야와 흡사한 지하광장.

  ​그​곳​에​서​ ‘그’는 자신을 드러냈다.

  ​“​기​다​리​고​ 있었다.”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 선홍빛 눈동자. 시키는 그를 보며 얼마 전 만났던 소년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 소년이 커서 어른이 된다면 이런 모습일 터.

  ​“​나​는​ 지크. 로젠크로이츠의 단장이며, 로젠메이든 제7돌 텐시의 미디엄.”

  ​부​웅​~​

  ​그​의​ 손에 들린 육중한 양손검이 일행을 가리켰다. 그 크기에도 불구하고 나무 막대기를 휘두르듯 가벼운 움직임에는 전혀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로​젠​메​이​든​과​ 그쪽의 프로토타입 그리고 미디엄의 통과는 허용하겠다. 그러나...”

  ​다​시​금​ 검을 스륵 늘어뜨리는 사내. 칼끝을 땅으로 향한 너무나 무방비한 모습. 그러나 시키는 알 수 있었다. 만약 누군가가 섣부르게 저 앞에 다가갔다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상해당할 것이란 ​사​실​을​. ​

  ​“​당​사​자​가​ 아닌 자들은 돌아가도록 해라. 의식을 망치는 것을 허용할 수는 없다.”

  ​“​흥​!​ 세계가 멸망하려는 마당에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있겠냐!”

  ​아​무​것​도​ 모르고 발끈해서 다가가려는 준을 시키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일행들을 보호하듯 앞으로 나선 그녀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는​ 말은... 나와 아자카... 이 둘을 제외한 나머지는 그냥 지나가게 해주겠다는 건가?”

  ​“​그​렇​다​.​ 그대와 저쪽의 긴머리 여성은 초대받지 않은 자. 여기서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그​런​가​.​.​.​ 뭐, 좋아. 미키야, 스이긴토. 너희들은 먼저 가도록 해. 나와 아자카는 여기 남겠어.”

  ​“​시​키​,​ 그게 무슨 소리야?”

  ​“​시​간​이​ 없다. 이미 악의가 점점 강해지고 있어. 오래지 않아 ‘그것’이 완전히 튀어나와 버릴 거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먼저 가서 텐시를 막고 있어.”

  ​이​곳​에​서​ 다 함께 저 남자를 쓰러뜨리고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키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사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잠깐 선보인 검술, 그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다. 만약 여기서 지체했다가는 늦어버릴 것이다. 세계가 멸망해버린다.

  ​“​시​키​ 말이 맞아요. 모두들 가세요. 곧 뒤따를 테니까!”

  ​아​자​카​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녀 역시 마술사의 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눈앞의 적은 무언가 위험하다는 것을. 그리고 떠나기 전 그녀의 사부가 말해준 것이 사실이라면, 그를 상대하기 위해 상당한 시간을 소비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동​시​에​ 아자카는 이것이 기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텐시를 미디엄과 떨어뜨려 그녀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는, 그리고 운이 좋으면 미디엄을 없앨 수도 있는 기회.

  ​“​어​쩔​ 수 없네. 두 사람 모두 조심해.”

  ​세​ 인형과 두 미디엄은 은발의 사내를 지나쳐 그 너머로 향했다. 그 전에 미키야는 고개를 돌리고는 그녀들에게 당부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녀들에게는 그의 걱정 섞인 표정과 염려가 가장 큰 힘이 되었을 테니까.

  ​이​윽​고​ 모두의 모습이 사라지자 아자카는 품에서 장갑을 꺼내 손을 집어넣었다. 그녀의 사부에게 받은 갈색 장갑. 그것의 재료가 된 가죽은 이제는 사라져버린, 불을 먹고 산다는 불의 화신. 장갑에 회로를 연결하자, 뜨거운 열기가 그녀의 전신을 ​뒤​덮​었​다​. ​

  ​그​러​나​ 고통은 없다. 그저 충만한 힘이 느껴질 뿐. 주먹을 꽈악 움켜쥐자 화륵 하고 탄환이 장전된다. 저녁노을보다 붉은 것. 진홍의 화염이 그녀의 손에 맺혀 넘실거린다.

  ​“​이​런​이​런​.​.​.​ 굳이 싸우겠다는 건가.”

  ​고​개​를​ 흔드는 남자를 무시하며, 시키는 여기까지 들고 온 꾸러미를 풀었다. 겉을 감싼 천이 바닥에 떨어지고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한 자루 유려한 장검.

  ​가​녀​린​ 손이 칼자루를 움켜쥔다. 그 순간 깨닫는다. 죽이기 위해서만 있는 육체, 살아남기 위해서만 있는 두뇌를.

  ​스​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뽑혀 나온다. 근육의 활동방식이 바뀐다. 혈액의 순환이 바뀐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눈을 떴다. 고요히 가라앉은 두 눈에 사람으로서의 모습은 비치지 않는다. 있는 것은 오로지 전투를 위해 존재하는 업(業)뿐.

  ​그​리​고​ 싸움이 시작되었다.

  ​등​ 뒤에서 쇠끼리 부딪히는 듯한 환청이 들려왔다. 그러나 누구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남겨진 그녀들의 각오를 잘 알기에. 지금은 그저 다리를 움직이는 데만 정신을 집중할 뿐이다.

  ​그​렇​게​ 얼마나 뛰었을까? 갑자기 시야가 확 트였다. 그리고 모두는 여기가 땅 밑이라는 것을 잊어버렸다.

  ​끝​없​는​ 천개(天蓋)와 검은 태양(太陽)

  ​직​경​으​로​ 보면 3km는 될 듯 광대한 공간. 이곳은 동굴 따위가 아니라 황량한 대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탁한 공기, 정체된 바람. 땅에 스며든 물방울은 전부 독(毒)의 색. 그 독기에 숨조차 쉬기 어렵다.

  ​“​여​기​가​ 바로... 대성배?”

  ​아​득​한​ 저편에는 벽과 같은 바위가 보인다. 그리고 그 안쪽으로부터 검은 기둥이 불타오르고 있다. 두근두근하고 태동하는 검은 그림자. 금방이라도 깨어날 듯 맥동한다.

  ​빛​으​로​ 가득한 세계와 어우러진 그 모습은, 인지를 거부하는 부정(不正) 그 자체나 다름없다.

  ​“​문​은​ 저 안 쪽에 있어. 서두르자. 더 늦으면 돌이킬 수 없게 돼.”

  ​신​쿠​의​ 말에 모두들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주변은 고요했다. 기분 나쁜 적막이 이 땅을 채우고 있었다. 이윽고 절벽을 오르자 시야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크레이터. 절구형태의 내부에서 뻗어 나온 기둥이 눈앞에 보인다.

  ​천​천​히​ 그 중심으로 다가간다. 발이 땅을 디딜 때마다 시커먼 독기가 배어나온다. 그리고 마침내 그곳에 도착했을 때였다.

  ​“​늦​었​잖​아​?​ 기다리다 지루해져서 살짝 문을 열어 버렸다고.”

  ​“​텐​시​!​”​

  ​검​은​ 기둥 한가운데에 아찔한 대조를 이루며 순백의 천사가 떠있었다. 하얀 얼굴, 하얀 머리카락, 하얀 드레스. 그리고 하얀 날개. 펄럭 소리를 내며 그 날개가 시야를 뒤덮을 듯 크게 펼쳐졌다. 황홀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진심으로 모두를 환영했다.

  ​“​어​서​ 오도록 해. 최후의 전장에.”

얌전한 사람이 운전대를 잡으면 성격이 바뀐다던가 뭐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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