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zweiflung
한 줄기 바람이 시야를 가로지른다. 망막에 그저 희미한 잔영만이 남겨질 정도의 빠르기. 그러나 그것이 시키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까앙!
쇠와 쇠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또다시 울려 퍼진다. 시키가 손에 쥔 무명의 칼이 상대가 든 양손검에 가로막힌다. 본래라면 상대의 검을 흘리면서 반격을 가했을 시키. 그것이 그녀가 익힌 검술의 특징인 것이다. 하지만 공격이 무산되자마자 그녀는 황급히 뒤로 몸을 튕겼다. 아까 전부터 계속된 패턴이다.
그래. 그녀는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공방조차 그저 상대가 검격을 나누기를 원하기에 일부러 내보인 빈틈을 파고든 것에 불과하다. 뻔히 알고 있음에도 발악하고 있는 처지에 불과하다.
화르륵!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대기를 태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검과 검이 서로 떨어지자마자 육중한 대검을 휘감으며 붉은 불꽃이 피어난 것이다. 불길은 그대로 파도가 되어, 물러서고 있던 시키를 덮쳤다.
“큭!”
빠르게 칼을 내리긋는 시키. 일순간이나마 불길의 기세가 꺾였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시키는 더욱 뒤로 몸을 피했다. 방금 전까지 그녀가 있던 자리에 불기둥이 솟아오른다.
“역시 놀라워! 이 발뭉이 토해내는 화염마저 죽일 줄이야. 불이라는 ‘현상’ 자체를 배제하지는 못 해도, ‘순간’이라면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아쉽군. 되도록 검과 검만으로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이쪽에 만에 하나라도 패할 가능성이 있어서는 안 되기에... 이렇게 할 수 밖에 없군.”
강자의 여유를 부리듯 눈앞의 영령은 감탄사나 늘어놓고 있다. 그래, 우리들의 공격은 그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지금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qnfto!”
극도로 압축된 영창. 상대가 대비할 틈조차 주어서는 안 되기에, 불과 한 발음밖에 안 되는 영창을 내뱉으며 마술을 발현했다. 제발... 제발 닿아줘!
“어리석은!”
그러나 나의 불꽃은 상대의 검에서 튀어나온 거센 화염에 휩쓸려버렸다. 이번에도 실패인가... 낙담하는 순간,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이 바보가!”
그 순간 내 목을 누군가가 낚아챘다. 평소라면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말을 내뱉으면서. 하지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조차 파악하지 못한 나의 사고로는 그 말에 반박할 수조차 없었다. 채 그러기도 전에...
콰가가!
내가 있던 자리를 붉은 폭풍이 삼켜버렸다.
“하...하아...”
그만 주저앉아버렸다. 숨이 막힌다. 죽을 뻔 했었다는 현실이 나를 짓누른다.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다. 여성을 죽이는 것은 내키지 않아 지금껏 살려두었지만... 더 이상 끼어들면 용서하지 않겠다. 나의 여흥을 방해하지 마라.”
뭐라고.....? 내가 지금껏 살아있을 수 있던 것은... 자기가 봐주었기 때문이라고?
“어쩔 수 없어. 뒤로 물러나 있어라, 아자카. 녀석의 화염을 피하거나 막을 수 있는 수단이 너에게는 없어. 그러니까 녀석을 자극하지 않는 편이 좋아.”
칼을 고쳐 쥐며 일어서는 시키. 나는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큿.. 기, 기다...”
뭐야? 왜 다리에 힘이 없는 거야? 일어서야... 하는..데.
타닥.
땅을 박차는 시키의 발소리. 눈앞에 두 검사의 공방이 펼쳐진다. 아니, 공방이라 할 수도 없겠지. 시키는 그저 버티고 있는 것뿐이니까. 조금의 도움이라도 필요할 때다.
하지만 나는...
그래.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어찌 모를까? 같은 불의 속성이기에 이렇게나 생생히 느낄 수 있는데.
지크프리트의 검, 발뭉. 그것의 본래 이름은 그람(Gram). 멸망을 막기 위하여, 무스펠하임의 지옥불에 대항하기 위하여 주신 오딘이 만들어낸 신검.
불에는 맞불로 대항한다는 논리로 만들어진 그것은 그야말로 불의 정수. 소유자를 적의 불꽃으로부터 지키며, 오히려 자신의 불꽃으로 적을 재로 만든다.
그야말로 수준이 다르다. 나의 불이 조그만 성냥불이라면 발뭉의 그것은 대지를 태우는 업화. 발뭉의 주인에게 불로써 피해를 입히기 위해서는 최소한 무스펠하임의 지옥불 이상의 불길이 필요한 것이다. 나로서는 결코 구현해내지 못할 정도의 불길이...
하지만 그래도 빈틈을 노리면 타격은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결국 이렇게 되어버리는 건가.
어째서? 왜 하필이면 지크프리트인 거지? 겨우 영령에게 대항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했는데, 왜 하필 지크프리트인 거냐고!
화르륵!
불의 장벽이 사이를 가로막는다. 시키는 그에 굴하지 않고 굳건히 앞으로 걸음을 내딛는다. 한 걸음에 한 번씩 칼을 휘두른다. 자세는 정안을 유지한 채로. 내리친 칼날의 궤적에 다음 칼날이 겹쳐진다. 그리고 그때마다 불길의 기세가 사그라진다. 마침내 여덟 번째. 상대가 바로 코앞이다. 하지만 거기까지. 다시금 몸을 피하는 시키. 타오르는 화염은 그녀가 죽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있다.
이 싸움의 끝이 멀지 않았다는 것은 나조차 쉽게 알 수 있다. 전투형으로 변한 시키의 몸. 싸움 외에 다른 기능을 배제한 지금의 시키. 그런 그녀의 얼굴에 굵은 땀방울이 맺혀 흘러내리고 있다. 두 손은 칼자루를 굳게 움켜쥐고 있지만, 그 칼의 끝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인다. 무리도 아니다. 불길에 타버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계속 격하게 움직여 왔으니까. 쉴 틈도 없이 칼을 휘둘러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싸우고 있다. 지크프리트를 그리고 발뭉을 꺽을 수 있는 것은 그녀뿐이기에.
나는... 나는 뭐하고 있는 거지?
또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물러나 있다.
그녀는 싸우고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가만히 앉아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있다.
그래... 마치....
미키야가 의식불명이 되었던 그 때 가을처럼.
미키야가 다리를 다쳤던 그 때 겨울처럼.
미키야가 한쪽 눈을 잃었던... 그 날처럼.
‘조금만... 조금만 더....’
어느덧 스이긴토와 텐시와의 거리가 지척으로 줄어들었다. 그녀가 다가갈수록 더욱더 격렬히 바이올린을 연주해대는 텐시. 바람이 갈수록 거세졌다. 하지만 이제 바로 앞이다. 스이긴토는 칼을 든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녀가 그 칼로 바이올린의 줄을 끊어버리기만 하면, 이 바람도 잠잠해질 것이다.
‘제발... 닿아줘!’
그 순간 바람이 멎었다.
“너 같은 것을 인간들이 뭐라고 하는지 아니?”
감미로운 섬뜩함을 담은 목소리가 스이긴토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스이긴토는 급히 방향을 바꾸려 했으나, 한 발 늦은 후였다.
“바로... 죽음을 찾아드는 불나방이라고 하지!”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스이긴토의 뒷머리에 강한 충격이 가해졌다. 충격은 그대로 그녀를 저 아래 바닥으로 추락시켰다. 거친 땅바닥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쿠웅!
“스이긴토!”
충돌음과 함께 거대한 크레이터가 움푹 파였다. 미키야는 경악하며 그 쪽으로 달려갔다. 쪼개진 바위 파편들 속에 자그마한 검은 인영이 쓰러져있다.
“스이긴토! 스이긴토!”
참혹한 모습에 미키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소녀의 이름만을 연거푸 부르며 그 몸을 안아들었다.
“....미키...야.. 크, 크흡!”
그의 몸 안에서 애써 정신을 차린 스이긴토.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시뻘건 피를 한 움큼 토해내야만 했다. 검은 드레스가 피에 젖어 검붉게 물든다. 뿐만 아니다. 가격당한 그녀의 뒤쪽, 그녀의 새하얀 머리카락에 선명한 선홍색이 번져간다.
“우후훗~ 함정인줄 모르고 달려들다니. 정말 어리석구나~”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텐시는 비웃었다. 스이긴토에게 휘두른 바이올린을 손에 든 채로.
“텐시!”
신쿠는 분노하며 그녀에게 덤벼들었다. 이미 움직임을 방해하는 바람은 그친 상태. 꺼릴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바라보는 텐시의 입가에는 한층 더 비웃음이 짙어졌다.
촤르륵!
텐시로부터 가느다란 딸기 넝쿨이 뻗어 나왔다. 이미 여러 번 겪은 일. 신쿠는 예상한 듯, 꽃잎들을 불러내 끊어버리려 했다. 하지만 그것들이 노리는 부위는 오직 한 군데뿐이었다.
“이... 이건!”
신쿠는 당황했다. 넝쿨들이 그녀의 두 손을 한데 모으며 칭칭 감겨버린 것이다. 마치 한 덩이 털실뭉치 같은 커다란 녹색 공 속에 신쿠의 양손이 박혀 버렸다.
“꽃잎들을 불러낼 때마다 항상 특이한 손동작을 취하더군. 어때? 이러면 불러낼 수 없겠지? 게다가 주먹조차 쓸 수 없어. 네 특기인 타격기는 이제 불가능하다고.”
“크, 크읏!”
“아하하핫~ 어때? 계략은 너희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내가 지금까지 계략을 쓰지 않은 이유는, 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고. 그저 하지 않았던 것뿐이지!”
텐시는 우쭐대며 말했다. 그렇다. 그녀의 강함이면 그저 정공법이면 충분한 것이다. 상대가 어떤 짓을 하건 압도적인 힘으로 눌러버리면 되니까. 지금 이렇게 계략을 쓰는 것은 그저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확실히 대단해. 하지만... 이건 어떨까?”
그 순간 신쿠는 텐시에게 몸을 날렸다. 핑그르르 굴러가는 동체. 그와 함께 돌아가는 다리에 회전력을 실어 텐시를 가격했다.
퍽!
신쿠의 공격은 텐시의 손에 가로막혔다. 하지만 뜻밖의 상황에 텐시는 당황한 듯 보였다.
“꽃잎을 불러낼 수 없어도, 두 팔을 쓸 수 없어도... 나에게는 아직 두 다리가 남아있어!”
곧바로 상체를 뒤집으며 썸머솔트킥. 텐시는 바로 몸을 피했지만, 신쿠의 다리가 채찍처럼 휘어지며 연이어 그녀를 노렸다.
퍼억! 퍽! 퍼벅!
마치 춤추는 듯 펼쳐지는 변칙공격에 텐시도 의외인 듯 방어만 할 뿐이었다. 화려한 공방이 잠시 동안 계속되었다.
“나도 도울께예요, 신쿠!”
힘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이세이세키가 지원포격을 행한 것이다. 굵은 줄기들이 텐시의 등 뒤를 노리고 날아갔다. 지금이라면 맞힐 수 있을지도 몰랐다. 누가 보기에도 텐시의 움직임은 어색했으니까.
바로 그때였다.
“재밌는 장난을 쳐볼까?”
속삭이는 텐시의 목소리. 그와 함께 그녀의 손이 신쿠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갑작스러운 위기상황에 신쿠는 미처 텐시의 말을 이해하지 못 했다.
그리고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 곧바로 온몸으로 깨달아야만 했으니까.
“자아~ 간다!”
그대로 텐시는 신쿠의 몸을 풀스윙으로 휘둘렀다. 눈앞에 뻗어오는 스이세이세키의 줄기를 향해서.
퍼걱!
준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그저 호두가 깨지듯 경쾌한 소리만을 들었을 뿐.
그의 눈에 공중으로부터 무언가가 너풀거리며 떨어져 내리는 광경이 들어왔다. 그것은 붉은 꽃이었다. 꽃치고는 조금 크긴 했지만.
쿠웅!
둔탁한 소리가 멍해있던 그의 의식을 깨웠다. 반사적으로 준은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내달렸다. 저 멀리 땅바닥을 나뒹구는 물체가 보였다. 짓이겨진 꽃의 모습이 보였다.
“신쿠우우우우~!”
그리고 준의 외침은 굳어있던 스이세이세키로 하여금 현실을 깨닫게 했다.
“꺄... 꺄아아아아악!”
그제야 자신이 저지른 일을 알게 된 스이세이세키는 패닉에 빠졌다. 물뿌리개를 쥔 손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혼란스러운 머리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처음 내지른 비명을 제외하고는 입에서 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덜덜 몸을 경련할 뿐.
그런 그녀를 보며 텐시는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한 손을 들어 그녀에게 보이면서.
“어머나... 지금 무슨 짓을 한 거니?”
그 손에는 본래 있어야할 자리에서 떨어져나간 무언가가 대롱대롱 들려있었다.
“아... 아아....”
“그래... 네가 이렇게 만든 거야. 불쌍해라. 같은 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을 텐데.”
기다란 그것은 하얀색 천으로 싸여있다. 다만 한 쪽, 굽어진 한쪽 끝만은 검은 가죽이 감싸고 있다.
“아...아니야... 내가 그런 게 아니라....”
그 모습이 스이세이세키의 확대된 눈동자 안에 가득 들어온다. 그녀의 망막에 가득 비친다.
“설마 자기 잘못을 남에게 뒤집어씌우려는 거니? 나쁜 아이로구나.”
“아...아흐...”
어느새 곁에 다가온 하얀 날개의 소녀. 소녀의 손이 사랑스럽다는 듯 스이세이세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소녀의 이름조차 떠올릴 수 없었다. 소녀가 누군지조차 떠올릴 수 없었다. 자신이 저지른 실수에 몸을 떨고 있을 뿐이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안쓰럽다는 듯 매만지던 손길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살짝 힘만 주면 비틀어질 듯 가녀린 목을 지난다. 겁에 질려 움찔거리는 작은 어깨를 감싸며 돈다.
이윽고 그녀의 가슴 한가운데에 손길이 다다랐다. 하얀 손이 그곳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나쁜 아이는... 벌을 받아야겠지?”
콰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