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tschuldigen
“음? 이건.....?”
팽팽히 당겨있던 실이 툭 끊어지는 느낌. 텐시는 자신과 미디엄 간의 계약이 파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보 같은... 고작 인간 둘을 감당하지 못한 건가? 뭐어, 좋아. 그런 얼빠진 미디엄이라면 없어도 괜찮아.”
안을 더듬자 그녀의 손에 가득 들어오는 따듯하고 단단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그대로 그것을 뽑아내었다. 혼이 빠져나간 껍데기가 땅으로 떨어졌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은 온통 자신의 손에 들린 무언가에만 쏠려 있었다.
움켜쥔 손을 펴자 은은한 초록빛이 주변으로 펴져나간다. 그 중심에 있는 초록색 돌. 텐시는 그 돌을 황홀한 듯이 바라보았다.
“어차피 이제 곧 나는... 앨리스가 될 테니까!”
순백의 빛이 초록빛을 삼켰다. 그와 함께 텐시로부터 어마어마한 힘이 뿜어져 나왔다. 대기이건 대지이건 한결같이 숨을 죽였다. 오직 부들부들 몸을 떨 뿐.
“아하하하하핫~ 그래, 이거야. 바로 이 힘이야!”
만물이 겁에 질린 와중에 오직 텐시 하나만이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나 밝고 유쾌한 웃음소리가 공동 안 가득 울려 퍼졌다.
“후후훗... 아하하핫~”
그 모습을 모두는 절망적인 얼굴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스이세이세키의 로자미스티카마저 텐시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이윽고 웃음을 그친 텐시의 시선이 저 아래 바닥을 흩었다. 짓이겨진 붉은 장미가 소년의 품에 안겨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텐시의 입가가 벅찬 흥분으로 비틀려 올라갔다.
“자아~ 이제 남은 로자미스티카는 마지막 하나.”
날개를 접으며 그녀는 천천히 바닥에 내려섰다. 준은 흠칫 몸을 굳혔다. 또각또각하는 구두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때마다 텐시의 모습이 가까워진다.
“오, 오지 맛!”
그의 말이 통할 리 없었다. 점점 줄어드는 거리. 준은 이를 악물고는 일어서서 앞을 가로막았다. 신쿠를 지키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담자, 반지가 환한 빛을 내며 붉은 방벽을 만들어냈다.
“신쿠는... 신쿠는 넘겨줄 수 없어!”
비장한 그 모습에도 텐시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후우~ 하고 입김을 불었을 뿐.
“커헉!”
그것만으로 방벽은 산산이 깨져 버렸다. 준은 피를 토하며 뒤로 날아갔다.
“준!”
신쿠는 그가 쓰러진 쪽으로 힘겹게 몸을 옮겼다. 스이세이세키의 포격에 직격당한 몸은 이미 부서지기 일보 직전. 거기다 한쪽 다리마저 잃어버렸다. 어쩔 수 없이 그나마 멀쩡한 두 팔로 땅을 짚고 기어갔다.
“준! 준! 정신 차려!”
자신을 흔드는 손길,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에 준은 깨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눈을 뜸과 동시에 그의 동공은 급속히 확대되었다.
“시, 신쿠, 뒤에!”
황급히 고개를 돌린 신쿠. 그와 함께 반사적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나 허공만을 갈랐을 뿐, 오히려 팔뚝이 턱 하고 잡혀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텐시는 손을 움켜쥐었다.
우지직.
텐시의 손아귀에서 신쿠의 팔이 으스러졌다. 끊어져 나간 반쪽 팔이 툭 하고 땅에 떨어진다. 주춤거리는 신쿠를 향해 텐시는 재차 손을 뻗었다.
“자아~ 이걸로 끝이야.”
“그렇겐 안 돼!”
초승달 모양의 궤적이 환영처럼 그려졌다. 그러나 이미 사라진 텐시의 모습. 대신에 공중으로부터 그녀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계속 끼어들 생각이야? 여흥을 위한 게스트로 용인해주었긴 하지만, 이미 너의 역할은 끝났어. 남은 것은 게임의 엔딩, 앨리스의 탄생뿐이니까. 관계없는 녀석은 꺼져버려!”
“그딴 것... 알게 뭐야!”
말하는 와중에도 속으로부터 올라오는 피. 그로인해 잠겨버린 목소리로 스이기토는 외쳤다. 겨우 그 정도의 움직임도 견디지 못하고 땅에 쓰러진 몸. 칼을 지팡이 삼아 휘청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운다.
“나는 아직.... 싸울 수, 있어. 그러니까 싸울 거야. 너에게 마지막 로자미스티카를 넘겨줄 수는 없어!”
필사적으로 토해내는 선언. 그 모습을 텐시는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유야. 다만...”
텐시의 날개로부터 수십의 깃털들이 떠올랐다. 탄환들이 허공에 장전된다.
“실행 가능한지의 여부는 별개라고!”
비웃음과 함께 깃털들이 허공을 날았다. 그에 맞서 스이긴토의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퍼억! 퍽! 퍼벅!
검은 바탕에 흩뿌려지는 하얀색 점들. 스이긴토의 날개는 텐시의 공격을 잘 막아내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 순간 스이긴토는 황급히 검을 들어올렸다. 찡 하는 소리와 함께 깃털 하나가 검신에 부딪혔다. 그것을 시작으로 옆으로부터 상당수의 깃털이 나타났다.
“큿, 유도인가?”
하나뿐인 날개로는 몸 전체를 감쌀 수 없다. 그 빈 공간을 노리고 측면으로 휘어져 들어오는 탄환. 스이긴토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빙글 회전시켰다. 빗자루를 쓸듯 날개로 주변을 쓸어간다. 그것으로 사각은 사라졌다.
“제법 머리를 쓰잖아! 그럼 이건 어때?”
텐시의 주위에 아까의 몇 배는 될 듯한 깃털들이 떠올랐다. 그 모두가 일제히 발사되었다. 순백의 해일이 스이긴토를 덮쳐왔다.
피잇! 퍽! 퍼벅! 파앗!
제아무리 빨리 몸을 회전시킨다 해도 그것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방어가 불완전한 이상,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것이 비록 수백분의 1초에 불과한 찰나라 할지라도, 압도적인 숫자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큿!”
처음에는 가슴에 하나. 일순 몸이 움찔한다. 이윽고 팔에 하나. 회전하는 속력이 둔해진다. 다시금 가슴에 하나. 마지막으로 다리에 하나. 그것으로 회전축은 완전히 어긋나버렸다.
그리고 소녀의 몸은 새하얗게 물들었다.
퍽! 퍼벅! 퍼퍽! 퍼버벅!
“스이긴토!”
달려온 미키야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 서둘러 깃털들을 뽑아내자, 하얗게 되었던 몸이 이제는 붉게 물들어간다.
그 순간 또각 하며 구두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미키야는 반사적으로 스이긴토를 감싸며 몸을 웅크렸다.
콰가가.
텐시의 날개가 뻗어가며 둘을 덮쳤다. 튕겨나간 미키야의 몸이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간다.
“코쿠토형!”
신쿠를 안고 있던 준은 급히 그쪽으로 달려갔다. 축 늘어진 채 눈을 감고 있는 미키야. 준이 다가가자 그 몸이 움찔거렸다. 이윽고 그 안에서 스이긴토의 모습이 나타났다. 미키야는 그 순간까지도 그녀를 놓지 않았던 것이다.
“미...미키야? 미키야! 미키야! 미키야!”
정신을 잃고 있는 그의 모습을 발견한 스이긴토가 당황하며 매달렸다. 그러나 그저 흔들리기만 하는 몸. 미키야는 깨어나지 않았다. 신쿠는 서둘러 경동맥을 짚었다. 느리지만 분명한 맥이 느껴졌다.
“괜찮아, 스이긴토. 일시적으로 정신을 잃은 것뿐이야.”
공황에 빠진 스이긴토를 진정시키는 신쿠. 그제야 스이긴토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주... 죽지 않았어? 살아 있어?”
“그래! 일단 잠시 휴식하게 하면...”
“그럴 여유는 없을 텐데?”
부드럽게 타이르는 목소리. 하지만 모두들 몸이 굳어버렸다.
“어떻게 내 공격에도 살아있는지 의아하긴 해. 그것도 벌써 두 번씩이나. 정말 운이 좋아. 하지만 그 운도 이제 끝~”
순백의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그것도 모자라 계속 부풀어 오르며 커져갔다. 상공을 가득 뒤덮으며.
“마침 모두 한데 모여 있으니... 다 함께, 한번에 끝내주지!”
그리고 하얀 하늘은 땅으로 내리 꽂혔다.
콰가가각.
“크...크읏!”
스이긴토의 입가에 피가 흘러내렸다. 몸에 새겨진 상처 하나하나에서도 피가 배어 나온다.
애처로울 정도로 작은 검은 날개가 모두를 지키고 있다. 두 팔을 뻗어 허공을 받치고 있다. 자신의 몸을 기둥으로 삼아 떨어지는 하늘을 들어 올리고 있다.
“이 정도에... 큿, 포기할 것... 같아?”
무리라는 것은 그녀 역시 알고 있다. 견딜 수 있는 순간은 불과 수초. 그러니까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의 시간이라도, 아주 약간의 시간이라도 생을 연장하기 위한 몸부림.
빠득.
그녀의 발 아래 암반에 금이 가며 움푹 파인다. 가녀린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드디어... 찾았어. 크흣, 수백년 만에 처음으로 큭! ‘정(情)’ 이라는 것을...”
태어난 이래 줄곧 갈구해왔다. 텅 빈 가슴. 비어있는 마음. 그 안을 채워줄 한줄기 온기를.
그러나 거부당했다. 버림받았다. 버려졌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계속해서.
그리고 마음의 문을 모두 닫아버렸을 때. 메마르고 부서진 이후에야... 마침내 그녀는 만날 수 있었다.
“나는... 큿, 나는...”
'...스이긴토.'
그 모습을 신쿠는 아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빠직! 빠직!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눈에는 눈물이 흐른다. 겨우 이정도 밖에 하지 못 하는 무력한 자신에 대한 분노의 눈물이.
그러나 이를 악물고 몸을 버틴다.
“지켜낼, 큿! 거야. 소중한... 사람들을, 크흣!”
미키야. 시키. 토우코. 아자카.
그녀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따스함을 나눠준 이들.
너무나 소중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사람들.
“그들의, 행, 복을. 크흣, 그들이 살아, 가,는 큿! 이 세계를!”
설령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게 된다 하더라도.
“반드시... 반드시...”
자신에게 다짐하는 처절한 각오. 그것은 동시에 지금을 이겨내길 바라는 간절한 소망. 그러나 그 모두가 아무런 소용없다는 것 또한 현실. 마음만으로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념하지 않고 노력하는 의지.
“스이긴토...”
그 모습을 보며 신쿠는 고개를 숙였다. 하나밖에 남지 않는 손을 꼬옥 움켜쥐었다. 그렇다. 비록 지금은 뒤로 물러나 보호받고 있는 처지지만 그녀의 마음 역시 같은 것이다. 소중한 이들을 지키겠다는 마음만은.
“...준. 나를 스이긴토에게로.”
그리고 그녀 또한 의지를 굳혔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미 몸은 한계. 스이긴토는 마음속까지 쥐어짜 모은 힘으로 무너지려는 육체를 부여잡았다. 그 순간이었다.
‘이건.....?’
그녀는 무언가 따스한 것을 등 뒤에서 느꼈다. 일순 미키야의 손인가 했지만 아니었다. 훨씬 더 작은 손. 온기가 몸을 타고 흐르며, 금방이라도 쓰러지려는 그녀를 지탱해주었다.
‘신...쿠.....?’
“그랬구나, 스이긴토.”
그녀의 의아함에는 아랑곳없이 신쿠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너한테...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이 있어. 그때 이후로 줄곧.”
붉은 빛이 스이긴토의 몸을 감싼다. 아늑한 기운이 그녀의 다친 몸을 어루만진다.
“너를... 정크라고 불러서 미안해. 어떤 아이든... 설령 로젠메이든이 아니라 할지라도... 앨리스에 부족함이 없는 반짝임을 품고 있는데. 그러니까 미안해.”
“...너, 무슨.....?”
난데없는 고백에 당황하는 스이긴토. 소녀다운 귀여운 반응. 계속 편견에 싸여있었다면 알아보지 못했을 순수함에 신쿠는 절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잘 부탁할게. 이 세계를. 나에게도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이 세계를....”
“...너 설마? 그, 그만둬!”
그제야 그녀가 하려는 짓을 눈치 채고 당황하는 스이긴토. 그러나 신쿠는 고개를 저었다. 슬쩍 옆을 바라보니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 했는지 어리둥절해 있는 준의 모습. 신쿠의 입가에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녀라고 안타깝지 않을 리 없다. 그러나 지금의 망가진 몸으로는 아무런 힘도 될 수 없다는 것은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불확실하지만 혹시 모를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
하지만 한 줄기 미련은 남아있는지, 눈시울이 촉촉이 젖어가는 것을 막지는 못 했다.
“이 세계를...”
붉은 빛이 더욱 강렬해지며 진홍의 색을 머금었다. 하지만 이내 그 빛은 급속도로 사그라졌다. 마침내 그 근원이 완전히 옮겨간 것이다. 여태껏 머물고 있던 붉은 꽃봉오리를 떠나 검은 둥지 속으로.
툭.
그와 함께 스이긴토의 등에 대고 있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화려했던 장미는 고개를 숙이고 시들었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씨앗을 남긴 채로.
‘지켜줘.’
마무리하지 못한 마지막 말 한 마디가 허공에 맴돌았다.
그리고...
어둠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