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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장님과 드래곤


1


지난 이틀 동안 하늘을 감추고 있던 검은 먹구름 사이로 가느다란 달빛이 떨어진다.
가문의 가보로 내려져오던 창고의 낡은 고서에서 중얼거리듯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나를 이끌었고, 고서를 펼쳐 알아볼 수 없는 이공간의 글씨에 서린 작은 어둠의 기운을 발견했을 때, 진즉 조만간 그 분을 살아서 뵈리란 것을 직감했다.
천 년이란 긴 세월동안 봉인되어있던 드래곤 카나토스가 선조의 계시에 따라 오늘 눈을 뜨게 된다.
이 몸은 죽음의 드래곤을 떠받드는 하수인 혈통 에르빈 가에서 태어난 179대손.
방년 107세의 나이로 ‘끈질기게’ 버티다 고약한 임질에 걸려 생을 마감하신 아버지의 거룩한 숙명을 이어받아 오늘 카나토스님의 자유에 축배를 들 것이다.
 
“오오, 여기인가.”
고서가 품은 기운에 홀려 반쯤 넋을 놓고 있다가 정신이 들어보니 깊은 산중을 걷고 있었다.
동네사람들은 요즘 들어 내가 치매에 걸렸다는 둥, 오랫동안 짝사랑해오던 젊은 마담에게 차이자 충격을 받아 미친 것이라는 둥 어림짐작으로 그럴듯한 추측들을 늘어놓지만 다 틀린 얘기다.
느닷없이 마당 밖을 나와 있거나, 저도 모르게 남의 집 안에 드러누워 있던 사건들은 나이를 먹고 보니 정신이 오락가락하면서 저지른 실수였단 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이번엔 분명 실수가 아니었다.
몽유병에 시달릴 때는 반드시 이전에 가본 적이 있는 장소만을 본능적으로 찾게 된다.
지금은 고개를 돌리면 마을이 바로 내려다보이니 그리 멀리 나오지는 않았으나 이런 장소는 처음이었다.
발목까지 자란 잡초 사이로 단단한 것이 밟혀 자세히 살펴보니 박석이 곳곳에 깔려서는 더 깊은 숲으로 향하는 길을 이루고 있다.
이젠 늙고 몸이 따라주질 않아 농사도 짓는 일도 관두었건만, 평소라면 산 오르기는 질색이라도 이번만큼은 예외라 길을 따라 올라가보기로 굳은 결심을 한다.
드래곤이니 뭐니 이상한 미신을 믿는다고 주책이라며 아버지를 미친 사람 취급해오던 동네사람들에게 이제는 떳떳해지고야 말겠다.
이 왼쪽 가슴에 새겨진 것은 아버지가 이교도에 미쳐 내와 함께 새긴 문신이 아닌, 태어날 적부터 가지고 있던 진짜 드래곤 가디언의 증명임을 오늘에야말로 확신하게 될 것이다.
고서의 알아들을 수 없는 속삭임과 글씨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기운이 길을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점점 강해지고 있다.
드래곤은 왕족들과 어울리는 고결한 존재라고 하였나, 그 분을 만나 뵙는다면 높은 격식을 갖춘 인사부터 해야겠지.
 
“비록 다 부서져가는 낡은 몸뚱어리일지언정 이 생명이 꺼지기 직전까지 카나토스님을 향한 영광과 충성을 맹세할 것이오!”
예행연습 치고 이정도면 꽤나 수려한 편인가.
괴팍한 노인네라는 인식이 틀에 박혀 남들과 어울릴 기회가 없다보니 집배원이 집에 들르지 않으면 두어 달씩 대화 한 마디 나누지 않은 적도 있으나 결코 말 실력이 녹슬지는 않았다.
그 분을 모시고 마을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힘이 되찾으실 때까지 어느 귀족 못지않게 잘 보필해내리라. 또한 드래곤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경멸당해오던 가문의 수모를 단숨에 뒤엎어 주리라.
숨이 턱까지 차오르며 저녁으로 먹은 닭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려한다.
지금 당장의 고통도 말이 아니지만 이대로라면 내일 아침엔 온몸이 결려서 해가 떠있는 동안은 감히 일어나지도 못하겠다.
오르막길은 조금 전이 마지막이었지만 이제는 그냥 평지를 걷는 것도 죽을 맛이다.
마당에서 쉴 적엔 마냥 깊은 감개를 불러일으키던 귀뚜라미소리가 지금은 성가시기 이를 데 없었고, 바람 한 점 들이지 않는 이 숲은 찌는 더위만 머금고 있어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주체하지 못한다.
지쳐 흐릿한 눈앞에 달빛이 들지 않는 그늘이 보여 그곳은 좀 시원하려나 하는 내심 기대로 잠시 기대어 앉으려는데, 공교롭게도 한 발짝 올리자마자 돌부리 같은 장애물에 걸려 발목을 접질리며 앞으로 고부라진다.
 
“아이고오, 허리야. 죽는다! 죽어!”
시커먼 그늘 아래 쓰러지며 정수리를 바닥에 찧는데 머리숱이 없어 훨씬 아프게 느껴지는 것이 어째 늙어서 더 서럽다.
맨 정신으로 집을 나온 것이 아니다보니 지팡이는 두고 나왔고, 잡아끌어서 일으켜줄만한 사람조차 하나 주변에 없다.
가만있어보자.
너무 아파서 신음을 흘렸는데 목소리가 메아리를 타고 돌아온다.
게슴츠레한 눈을 부릅뜨고 자세히 돌아보니 밝은 바깥으로 향하는 구멍이 보여 이곳은 분명한 동굴 속임을 확실케 한다.
분명 동굴이라 함은 눈에 띄지 않는 은신처를 의미하니 박석 깔린 길 끝에 이런 공간이 나왔다면 역시 범상치 않은 성과라 봐야겠다.
 
“끌끌, 헛걸음한 것은 아닌 게로군.”
한바탕 뒹굴었다가 약간의 출혈과 함께 엇나간 정신을 가다듬고 벽을 더듬으며 몸을 일으킨다. 그 와중에 허리가 뜨끔하여 잠시 멈칫했지만 마저 일어나서 걸을 기운은 충분했다.
넘어지면서 묻힌 물기를 털어내고 동굴 바닥을 미끄러져 내려간 고서를 다시 힘겹게 주워들자 어둠의 기운이 한층 가까워진 것을 느낀다.
늙은 몸이 환경이 바뀌면서 변덕을 부리는 착각일지도 모르겠으나 이전엔 없던 새로운 변화가 생긴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글씨에도 어떤 변화가 있지 않을까하여, 짐작을 확신으로 돌리기 위해 고서를 펼쳐보았더니 갑자기 책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다가 허공에 떠올랐다.
짐 역할만 해오던 이 무거운 잡동사니가 드디어 제 역할을 하겠다고 나를 인도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책장을 펄럭이던 고서가 무언가에 이끌리듯 동굴 깊숙한 곳으로 슝하고 사라진다.
 
“누가 감히 이곳에 발을 들이는가.”
급한 마음에 사라져가는 고서를 쫓아가려다 순간 맞은편 끝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뒤꿈치의 도약을 멈췄다.
이 몸은 평범한 인간과는 다르다. 드래곤을 섬기는 특별한 혈통이기 때문에, 생각의 뿌리가 깊은 곳까지 내리뻗기도 전, 제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 의지를 본능으로 따른 것이다.
거룩하고 늠름하며 위용이 넘치고 한편으론 두렵기까지 한 그런 목소리를 생각했었지만 현실은 애석하게도 약간의 가녀린 기운이 있어보였다. ...하지만 상관없다. 수컷이 됐건 암컷이 됐건 간에(극존칭을 붙어야할 대상에게 짐승의 구분법을 쓰는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분은 내가 영원토록 섬겨야할 주인이자 감히 인간과는 견줄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이다.
 
“이,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제 선조이자 카나토스님의 전 가디언의 위계를 맡으셨던 함그록의 후손 에르빈 로어라고 합니다.”
예행이 아닌 실전에서 내뱉는 첫마디.
극한의 상황과 맞닥뜨린 인간은 아주 길면서도 실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 각성의 시간을 갖게 된다.
정말 그는 드래곤이며 나는 그의 인정을 받는 하수인인가.
나는 그의 하수인이 될 준비와 자격이 충분하여 그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가.
만약 내가 너무 늙어버린 탓에 그의 종이 되지 못하고 버림을 받는다면 그때부턴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하나.
이것이 정말로 지나친 망상이 빗어낸 꿈이 아니라 지금도 흐르고 있는 현실의 현재인가.
한 순간이지만 지금껏 살아오면서 겪은 모든 사건들이 스쳐지나가기도 한다.
그리고 위아래로 격동하는 심정을 이래저래 진정시키는 동안 어둠 저편 너머에서 대답이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수 초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군.”
그것이 대답의 전부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기다려보지만 이어지는 것은 보이는 어둠처럼 기나긴 침묵뿐이었다.
인정받은 것인가. 아니면 잠시 후 꿈에서 깨어나게 되는 걸까.
 
“바보, 잠에서 깨어난 건 바로 어제였어.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 문제라도 생긴 줄 알았지.”
안쪽에서 인간을 경계하지 않는 무언가가 불쑥 다가와 늙은이의 손을 붙잡고 동굴 밖으로 이끈다.
쥐어 잡힌 손뼈가 으스러질 것만 같았으나 그 감촉은 부드러웠다.
이윽고 심연을 벗어나 동굴 밖으로 나왔을 때, 달빛 아래에서 감히 바라본 그 분의 뒷모습은 마치 아름다운 여성과도 같더라.
 
“저, 저기. 주인님.”
뭐랄까.
천민 출신에 곡괭이질을 천직으로 삼긴 했지만 귀족이나 관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산골짜기 촌락에서 일생을 보내온 나에게 ‘주인’이란 수직관계적 호칭은 느끼하다거나 멋쩍은 감이 있었다.
 
“야, 침 튀었잖아. ... 준비해온 망토 같은 건 없나? 인간 흉내는 낼 수 있어도 뿔은 감추지 못한단 말이야.”
하지만 그 어느 누가 존엄한 왕을 앞에 두고 무릎을 꿇으며 충성을 맹세치 않을 수 있겠는가. 내게는 이 분에게 목숨을 바치는 것이 일국의 왕을 향한 충성보다 더 가치 있음이라.
잠잠하던 숲에 여름치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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