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네! 맘에 들어요!”
아주 좋아요.
방을 둘러보는 내내 입가 미소가 떠나질 않습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콧노래까지 부를 것 같은 기분을 힘들여 억누르고 있습니다. 아직 겨울은 다 지나가지 않았지만, 제 생활에는 이미 봄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습니다.
핸드폰을 들고 한참 동안이나 신호음을 기다리던 부동산 업자 분이, 결국 통화를 끊더니 어머니께 말을 겁니다.
“죄송해요. 집주인이 해외에 나가 있어서, 대리인에게 전화해봤는데 전화를 안 받네요. 그래도 이 정도면 가격대에 비해서 상당히 좋은 방이에요. 거실이나 주방이 공동구역인 특이한 구조라 가격을 낮춰 부르는 건데, 이 정도면 거의 거저죠.”
“그러게요. 저도 맘에 드네요. 얘, 넌 어떠니? 네가 살 방이잖아.”
어머니는 상당히 맘에 드신 듯한 표정으로 제게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조금, 성에 차지 않는지 작은 목소리로 “공동구역이라니, 위험한 거 아닌가요?”라고 부동산 업자에게 질문하십니다. “그래도 잠금장치가 확실해요. 그런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도 꽤 맘에 들었어요.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참기 힘듭니다.
“네! 맘에 들어요!”
드디어 오늘, 이사를 했습니다. 아침에 부모님의 출국을 배웅하고 바로 이사했습니다. 짐이라도 미리 옮겨놓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는데, 옮겨야 할 짐도 많지 않아서 한꺼번에 하는 걸로 미뤄졌습니다.
오늘이 기대돼서 기대돼서 얼마나 마음이 두근거렸는지 모릅니다. 아직 입학식은 하지 않았지만, 고교생활의 시작이자, 자취생활의 시작입니다. 이사업체 분들께 인사를 드리고, 어머니가 이런 건 현금으로 바로, 팁도 좀 포함해서 드리는 게 좋다고 주신 돈봉투를 넘겨드렸습니다.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제 정말로 혼자인 셈입니다.
옷장이나 화장대는 붙박이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책상을 배치하고 옷가지를 옷장에 집어넣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옮겨야 할 짐이 적다는 건 좋은 일입니다. 침대는 원래 살던 분이 쓰시던 걸 그대로 쓰기로 했습니다. PC는 노트북이라 무겁지 않았고, 게임을 좋아해서 콘솔 게임기를 소지중인 저지만 요즘 게임기는 사이즈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여자인 제가 들고 다녀도 부담이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게임기에 연결할 TV가 없네요. 생활비를 아껴서 작은 걸 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거실에 남겨져 있는 큰 TV에 연결해도 괜찮은걸까요? 게임 소프트를 진열할 책장도 있으면 좋겠네요.
아버지가 미국지사로 발령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는 적잖게 당황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을 미국에서 보내다니, 가볍게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가 보고 싶다는 생각도 안 한 건 아닙니다만, 10대의 마지막 시절을 말도 잘 안 통하는 타향에서 고생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부모님은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결국 제 의사를 존중해 주셨습니다.
학교는 아직 가보지 않았지만, 멀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생활은 즐거울 거라고 믿습니다.
서해안에 인접한 모 시에서 이어지는 갯벌을 간척해 만든 이 도시는 제3기 신도시 계획의 일부로서, 선진 자율형 교육지구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워 중고등학교가 많습니다. 본래는 국립 대학교도 세울 계획이었지만, 계획이 진행되면서 개교가 뒤로 미뤄졌다고 합니다. 일단 캠퍼스 건물은 거의 완성되어 있습니다. 인터넷 등지에서는 학원도시라고도 부르던데, 어디서 따온 이름인지 알 것도 같습니다.
제가 오늘부터 살게 될 이 집은 구 시가지와 학원도시가 만나는 지점에 있습니다. 학교도 가깝고, 15분 거리에 지하철 역이 있으니 학생의 주거 환경으로서는 아주 좋다고 할 수 있겠죠. 건물은 중앙의 공동거주공간을 중심으로 양 측면에 커다란 방 두 개가 붙어있는 특이한 구조입니다. 베란다로 나가 보니 전망이 탁 트여있어 기분이 좋습니다. 바로 앞에 공원이 있어,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 산책이라도 나가면 되겠죠.
시선을 돌리자 중앙을 거쳐 오른쪽 방까지 이어진 베란다가 보입니다. 이윽고 오른쪽 방까지 시선이 가고 맙니다. 오른쪽 방에는 누가 살고 있는 걸까요? 부동산 업자 분도 잘 모르시는 것 같던데. 우선 제가 이사했을 때엔 이렇다 할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안 살고 계실 가능성도, 없지는 않겠네요. 물론 누군가 살고 계실 확률이 더 높겠지만요.
우선 근처 편의점에서 사 온 샌드위치로 가볍게 점심을 먹고, 이사로 피곤하기도 하고 새로운 환경에 긴장하기도 한 것 같아서 목욕을 하기로 했습니다. 개인 방에는 샤워 룸밖에 없고 목욕탕은 공동거주공간에 있다는 점이 조금 불안한 점입니다만, 탈의실도 붙어있으니 문제는 없겠죠. 목욕탕에 딸려있는 세탁실에는 드럼세탁기까지 남겨져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따뜻한 물에 입욕제를 풀고 몸을 담그자 기분이 좋습니다. 피로와 긴장이 풀리면서, 약한 신음소리가 입에서 새어나옵니다. 아, 이거 약간 에로했을지도.
얼마나 지났을까요, 온몸에 온기가 돌고 피부가 약간 붉게 상기되기 시작했습니다. 욕탕에서 나와 타올로 가볍게 물기를 닦고 거울 앞에 서봅니다. 음, 여전히 완벽? 공기가 차갑게 느껴집니다. 빨리 방으로 돌아가 옷을 입어야겠습니다. 배스타올을 두르고 탈의실을 나섰습니다.
눈앞에 보인 건, 트레이닝복을 입고 오른쪽 방에서 막 나온 동년배의 남자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