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바다를 넘어서
그건 사소한 변덕이었다.
혹시나 향수병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그런 향수가 끓어오르는 일이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만큼, 좀 의외였다.
딱히, 지금 생활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주변 사람들은 상냥하고, 자신도 딱히 낯을 가리진 않으니 비교적 쉽게 적응한 편이라 좋은 관계를 쌓아가고 있다는 자부도 있다.
그래도 휴일에 혼자 거리를 돌아다니거나 방에서 조용히 독서에 몰두하거나 하다보면 간간히 고독을 느낄 때가 있다.
그건 분명 피할 수 없는 감정이겠지.
그래서, 시즈카는 손으로 수화기를 잡았다.
한 번 시계를 본다. 시차를 생각하면, 지금은 일본의 시간으론 밤이긴 하겠지만, 깊은 밤이라고 할 정도까진 아니다.
그리고 수첩을 넘기며, 한동안 고민한다.
이윽고 입꼬리를 약간 들어 올리곤, 수화기를 손에 들고 전화를 걸었다.
벨소리가 울린다.
잠시 뒤, 전화가 연결됐다. 반대편에서 인기척을 느낀다.
『――예, 후쿠자와입니다.』
남자 소리가 들린 건, 좀 예상 밖이었다. 아버지라고 생각하기에는 젊다고 할까, 높은 목소리기에, 아마 남매겠지.
“밤늦게 전화해서 죄송해요. 저, 카니나 시즈카라고 하는데 유미 양은 집에 계신가요?
전형적인 방법으로 전화를 바꿔달라고 부탁한다. 문득, 릴리안 여학원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게 좋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쓴웃음이 나온다.
전화하는 상대로 유미를 고른데 깊은 의미는 없다.
유미 말고도 여럿을 후보로 올렸었지만, 시마코와는 편지를 주고받고 있고 세이에게 연락할 생각은 없다. 사치코나 레이, 미나코같은 동급생들도 떠오르긴 했지만, 그렇게 친하다고 할만한 사이는 아니다.
그 상황에서 불현듯 떠오른 게 유미였다. 학생회 선거를 거치며 조금 친해지게 된, 한 학년 후배인 사랑스런 여자애. 솔직하고, 표정이 풍부하고, 함께 있으면 내 마음이 상냥해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조금 심술을 부려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유미가 상대라면, 분명 잡담을 나누면서 마음에 편안을 찾을 수 있으리란 생각도 들었다.
과연 놀라려나. 아니, 분명 놀라겠지. 수화기 너머에서 눈을 크게 뜨곤, 신바람 나는 목소리로 이것저것 물어보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쪽은 어떠셔요, 건강하셔요, 맛있는 음식은 뭔가요……상상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흘러넘칠 것만 같다.
하지만.
『아, 죄송합니다. 유미는 지금, 욕실에 있어서요.』
“그런가요…….”
타이밍이 나빴다. 조금 유감스러워진다.
『지금 막 들어간 참이라서 30분쯤 지나면 나올 것 같은데, 나오면 전화 걸라고 전할까요?』
“아뇨, 괜찮아요. 대수로운 용건도 아니라서요.”
대수롭기는커녕 용건조차 딱히 없는 거다. 거기에, 볼일도 없는데 국제전화를 상대쪽에서 걸어달라고 할 수도 없고.
기세가 꺾여서 한숨을 내쉰다.
『정말 죄송합니다……유미 녀석, 정말 타이밍 나쁘다니까.』
그런 소리가 전화를 통해 들려왔다. 후반부는 아마 혼잣말이었겠지만, 시즈카의 귀까지 들려와 무심코 웃어 버렸다.
『아, 이런. 들렸었나요?』
이번에는 시즈카의 웃음소리가 반대편에 들렸던 모양이다. 당황한 듯한 말투로 물어본다.
“예, 뚜렷하게……실례지만, 유미 양의 오빠분이신가요?”
유미, 라고 반말을 쓰는 걸 보면 연상이겠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아뇨, 남동생이에요.』
“어머.”
누나한테 반말을 쓰는 건 일반적인 걸까. 외동딸인 시즈카는 그런 부분에 대한 지식이 없지만,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날카롭진 않았고, 오히려 친애의 정마저 느껴졌으니 분명 사이가 좋은 거겠지.
“남동생이라는 건 중학생인가요? 굉장히 착실하네요.”
『아, 아니, 유미랑 같은 학년이에요.』
“에?”
『연년생이에요.』
그 이야기로 방금 느낀 의문이 풀렸다.
“미안해요, 아까부터 저, 실수만 하네요.”
수화기를 고쳐 잡고, 반대쪽 귀로 옮긴다.
빈손으로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시즈카는 쓴웃음을 지었다.
“실례하는 김에, 이름을 물어도 괜찮을까요?”
『아, 죄송합니다. 후쿠자와……후쿠자와 유키예요.』
“유키 군, 이군요. 저기, 혹시 괜찮으면 잠시 이야기에 어울려 주지 않으실래요? 사실 저, 얼마 전에 릴리안 여학원에서 전학가서 지금은 다른 곳에 있어요. 재학중에는 유미 양에게도 신세를 졌으니까……혹시, 유미 양의 이야기라거나.”
이것 또한 사소한 변덕이었다. 이제와선 전화를 끊고 다시금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 마음도 안 들어서, 그러면 이대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재밌지 않을까 싶었던 거다.
유미의 남동생이라서 그런지 이야기하기 편한 분위기가 느껴진 것도 큰 이유였다. 왠지 모르는 사람 같지 않아서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꼈으니까.
『에? 저기, 저 말인가요?』
하지만 갑자기 상대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만난 적 없는 사람한테서 전화로 갑자기 그런 소리를 들었으니 당연하려나.
“아뇨……미안해요, 갑자기 이런 말 하면 실례겠지요.”
가볍게 한숨을 흘린다.
약간이나마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걸로 만족하자고 자신을 설득한다. 거기서 시즈카는 처음으로, 자신이 예상치도 못하게 일본이 그리워졌었던 걸 깨달았다.
‘……뭐, 하룻밤만 지나면 괜찮아 지겠지.’
돌아가고 싶다거나 눈물이 나올 것 같다는 레벨은 아니다. 이게 일시적인 일이라는 걸 스스로도 이해하고 있으니까, 이야기를 밀고나갈 필요는 없다. 그래서 시즈카는 침착하게 물러서려 했다.
“급작스레 저녁에 실례했어요. 유미 양에게도 안부 전해 주세요. 그럼……”
하고 끊으려고 했을 때.
『……아, 자, 잠시 기다려 주세요!!』
수화기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려와 깜짝 놀랐다.
『에에, 저로 괜찮으시면, 좋아요. 뭘 이야기하면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에?”
『대화 상대로……라는 이야기였죠?』
“예……그래도, 정말로요? 폐가 아닌가요?”
『그럴리가요. 사실은 너무 한가했어요.』
갑자기 무슨 일인 걸까.
시즈카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대답했다.
“그럼, 부탁해도 괜찮을까요?”
『예. 아, 그럼 말인데요』
“예.”
『전화번호, 가르쳐 주세요.』
“―――에.”
급작스런 이야기에 시즈카는 그대로 굳었다.
설마, 그게 목적이었던 걸까. 유미의 남동생이니까 믿을 수 있는 상대라고 생각했었는데, 착각이었던 건가.
“저기, 갑자기 그건 좀…….”
말끝을 흐린다. 그런데 어떻게 대답하면 괜찮을까. 너무 날카롭게 말하는 것도 어떨까 싶으니, 완곡하게 거절하는 뜻을 전해야 할까.
“에에, 실례지만, 아직 저희는 만난 적도 없고…….”
『…………엣?! 아, 아니, 아녜요, 그게 아녜요! 그런 이상한 의도가 아니라!!』
허둥지둥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제쪽에서 다시 거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던 거지, 당신의 전화번호를 알아내려 한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아아 그래도 그런 게 되어 버린 건가?!』
“다시 걸어요?”
『아니, 그치만 유미도 없고, 미안하잖아요. 그러니까.』
「차암, 제 쪽에서 멋대로 대화 상대가 되어 달라고 부탁한 거니까, 그런 걱정은 필요 없어요.」
『아니―, 그래도, 으으, 난처하네. 죄송해요.』
“후훗.”
수화기를 손에 잡고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면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만난 적도 없는데도 눈에 떠오르는 것 같았다.
이상한데 신경 쓰는 애다.
“저야말로, 이상한 오해를 해서 미안해요.”
『오해 시킬만한 말을 한 건 저니까요.』
“그럼, 쌤쌤인 걸로 해요.”
『예. 에에, 그래서, 이 뒤론 어떻게 할까요?』
묻고 있는 건 무슨 이야기를 하면 괜찮을지에 대해서겠지. 서로 지금까지 접촉은 커녕 존재조차 몰랐던 상대니까, 당황하는 게 당연하다.
“그렇네. 그럼, 유미 양에 대해서 가르쳐 줄 수 있을까?……그리고 유키 군에 대해서도.”
『저, 저에 대해서도, 말인가요?』
“응. 그도 그럴게, 유미 양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재밌을 것 같은 걸.”
『으, 그런! 너무해요.』
“어머, 그런 소리 하면, 유미 양에게 실례인게 아닐까?”
『아―, 그럴지도. 그럼 이건 둘만의 이야기로 부탁드려요.』
“응.”
전화를 통해 서로 쿡쿡 웃는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만난 적도 없는데, 정말 평범하게 이야기를 하고 웃을 수까지 있다는 건.
뭐 대단한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다.
그래도,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이야기가, 시즈카의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 간다. 후쿠자와 남매의 사소한 에피소드에 귀를 기울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전화를 시작하고 나서 이미 30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 있었다.
“……미안해요, 너무 길어져서. 슬슬 실례할게요.”
『에? 그치만, 저기, 곧 유미도 나올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으으응, 이미 볼일은 마쳤으니까.”
『―――??』
『―――??』
그래,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
시즈카의 마음은 전화를 걸기 전과 굉장히 달라졌다.
“저기, 마지막에 한 가지, 물어도 괜찮을까요?”
『예, 무슨 일인가요?』
“어째서 알지도 못하는 제 대화상대가 되어 주겠다고 말해 준 건가요? 처음에는 주저하고 있었죠?”
그래. 처음에 부탁했을 때, 틀림없이 주저하는 듯한 기척을 느꼈다. 그리고 그게 거절에 가까운 주저였다는 걸 시즈카는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OK했던 건 어째설까. 그게 이상했다.
『에에……그, 듣고 화내거나 웃거나 안 할거죠?』
“이야기에 따라 다르려나……아, 농담 농담. 안 해요.”
『에―, 그럼……그게 말인데요. 처음에 제가 주저하는 걸 듣고, 전화를 끊으려고 했었잖아요?』
“예.”
『왠지 그때……이대로 끊으면 안된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뭐라고 할까, 예를 들어 말하자면 미아가 된 어린애를 혼자 두면 안된다거나 싶은……아, 당신이 미아라거나 그런 의미는 아니에요. 그래서, 미안해요. 제대로 설명이 안 되겠네요.』
“…………아뇨.”
놀랐다.
우연일지도 모르고,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즈카는 왠지 몰라도 확신을 느꼈다. 그는 그때 시즈카의 마음 속을, 생각을, 전화를 통해서 느끼곤 바로 시즈카를 불러세운 거라고.
놀란 마음을 숨기면서 시즈카가 전화 너머로 입을 열었다.
“……어머, 그건 저를 꼬시려는 건가요?”
일부러, 놀리는 듯한 말투로.
『에엣?! 아, 아니에요! 그, 정말로 그건 죄송해요.』
“쿡, 농담이에요.”
『그, 그만둬 주세요…….』
남매 둘 다 놀리는 보람이 있다. 시즈카는 입가를 손으로 눌러 웃음을 참는다.
“미안해요. 그럼, 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요.”
『아뇨. 그것보다 정말 괜찮으신가요? 유미라면 곧.』
“고마워요. 그래도, 괜찮아요.”
이미 넘치도록 이야기 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가요……그럼 유미에게는 전화가 왔었던 걸 전해 둘게요.』
“아니……그것도 괜찮아. 오늘 전화는, 비밀로 해 주지 않을래? 나와 유키 군 둘만의 비밀이라는 걸로.”
『엣?! 저는 상관없지만, 그, 계속 끈질긴 것 같은데, 정말 괜찮으신가요?』
“응.”
『당신이 괜찮다면, 뭐……그럼 안』
“아, 잠깐 기다려 줘. 중요한 걸 아직 하나 잊고 있어.”
『에?』
“내 전화번호……알고 싶지?”
전화 너머에서 당황하는 소리를 듣곤, 시즈카는 유쾌한 듯 웃었다.
전화를 마치고, 복도에 내려가자 아주머니가 점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침 잘 됐어. 부르러 가려고 하고 있었단다.”
남편 분은 외출한 모양인지 보이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전화는 끝났니?”
“예, 죄송해요. 전화를 오래 하게 돼서.”
국제전화 요금은 부모님이 내 주시게 된다. 버는 돈도 없는 학생에다가 식객 신분인 걸 생각하면, 조금 면목이 없다.
“괜찮아. 친구니?”
“아뇨.”
아주머니를 도우려 주방에 걸음을 향한다. 피자의 구수한 향기가 감돌며 위를 자극한다.
“아아……연인이구나.”
“에, 차암, 아니에요 아주머니.”
“그러니? 그런 것치곤 시즈카 양, 굉장히 기운나 보이고, 좋은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그런가요?”
자신의 뺨에 손을 대 보지만, 그걸로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스스로는 깨닫지 못한 게 아닐까? 그럴 때의 기분은 자연스럽게 표정에 나오는 법이야.”
그럴지도 모른다.
확실히 전화를 하기 전과 비교하면 굉장히 속이 편해졌다. 그래,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오늘 하늘처럼.
피자 접시를 옮기면서 시즈카는 미소지었다.
“아주머니, 그렇네요.”
접시를 테이블 위에 얹고, 흘러내린 머리칼을 손으로 치우면서 시즈카는 즐거운 듯이 혼잣말을 했다.
“―――혹시나, 아직 보지 못한 미래의 연인, 이었을지도 모르겠는데.”
“어머머, 굉장히 로맨틱하네. 다음에 꼭, 그 시즈카 양의 미래의 연인분이라는 사람을 소개해 주렴.”
아주머니도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솜씨 좋게 점심 준비를 해나간다.
“그렇네요. 그래도, 지금은 그것보다 점심 쪽이 중요해요.”
“어머……뭐라고 하더라, ‘금강산도 식후경’이었니? 미래의 연인분도 불쌍하게도.”
“후훗.”
자리에 앉아, 평소와 다르게 아주머니와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점심을 즐겼다. 아주머니는 자꾸 전화 상대를 물어왔고, 시즈카는 농담섞인 말로 뺀질뺀질 피해가며 대화를 받았다.
느긋한 오후의 한 때.
열렬히 불타올랐던 피자의 치즈는, 입속에서 지르르 녹아 펼쳐져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