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
“으우야,”
누군가가 그녀의 혼을 쏙 빼놓은 듯, 머리가 띵하면서 주위의 모든게 흔들리던 아린은 곧, 리니아가 “아린,” 그녀를 부르는 말에 고개를 휙휙 저었다. 이에 그녀의 검고 긴 머리도 이리저리 흔들리며, 얼굴을 가볍게 탁탁 때려 그녀가 정신을 차리는 데 약간의 도움을 주었다. “아린,” 리니아가 다시 그녀를 불렀다.
아린은 이에 고개를 흔들던 걸 멈추고 “야?” 그제서야 눈을 떠서, 도대체 뭐가 일어났는지 보는데,
“으야,” 아린의 풀빛 눈이 동그랗게 깜박였다. ”저 언니 누구얘?” 생전 처음 보는 옷차림을 하고서, 매끄럽고 긴 금발을 한 어느 여자가 그녀에게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지금 뒤에 있는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걸까.
다시 눈을 끔뻑이며 아린은 자리에서 “읏챠,” 일어났고, 이 이상한 언니에게 뭐라 하기 전에 “잠깐,” 리니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 사람, 왠지 '동반자' 같은데. 혼령이 같이 있는 게 느껴져.”
“당연하지얘.”
아린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애기가 아니고서는 다들 그러니까야.”
“아니, 내 말은,”
리니아가 고개를 저었다. “방금 생각한 건데,” 이어서 그녀는 지금 아린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들을 한 번 더 둘러봤다.
“지금 우리가 인간계에 온 것 같아. 아까 그 구덩이도 그렇고.”
“야아!?”
화들짝, 그 자리에서 쭈삣 선 아린이었다. “인간계얘!?” 너무 놀란 나머지 그녀는 입에서 소리를 다 냈고, 이에 그 금발의 언니는 뒤를 돌아봤고, “아,”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아린을 보고 입을 열었으나 뭐라고 말은 하지 않았다.
한편 아린은 그녀가 몸을 돌리자 보이는 틈 뒤로, 웬 두 남자가 서 있는 게 보였는데, 바로 그 순간 리니아가 갑자기 흔들렸다. “아, 아린, 저거!” 꽤나 당황했는지 말도 더듬으며, 왠지 다리에서 피를 흘리는 둘을 가리키는 그녀.
“저 뒤에 둘, 사령에게 빙의됐어!”
“제이미!”
엔시나는 뒤의 검은 머리 여자–왠지 젊은 소녀같기도 하지만 아닌 것 같기도 하고–를 빤히 쳐다보던 제이미를 불렀다. 이어서 그녀는 저 가짜 경찰들, 뭔지는 몰라도 그 검은 무언가가 스며들고 나서 벌떡 일어선 둘에게 집중했고, 이에 제이미도 그 시선을 느껴 다시 고개를 돌리자, 그 둘은 어째서인지 방금 전의 그녀처럼 머리를 감싸쥐고 있었다.
“으,”
한 손이 아니라 두 손으로 감싸쥐고, 마치 뇌 질환이라도 온 듯 별 괴상한 소리를 흘려내면서.
“으으, 윽, 어어…”
왠지 누가 봐도 자기 머리를 점점 짓누르는 듯, 점점 힘에 부쳐가며 온몸을 마구 비틀기까지 시작한 그 둘은 정말 괴로워 보였다. 제이미는 갑자기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둘을 빤히 쳐다보다가, 일단 공격해올 것 같지는 않으니 총을 내리려고 하는데,
“안돼! 제이미!”
엔시나가 채찍처럼 다그치는 것에 그녀는 “읏,” 잠시 멍해졌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총을 들으며 “왜?” 물었다. 저렇게 무슨 중환자처럼 비틀대는 걸 또 쏘기라도 하라는 걸까? “아니,” 이에 고개를 세게 젓는 엔시나.
“저 둘은 사령에게 빙의된 거야. 너가 방금 본 그거에.”
“사령?”
사령은 뭐고, 또 빙의했다는 건 뭐야? 제이미는 얼굴을 찡그렸으나 곧, 엔시나가
“별로… 좋지는 않은 것들이야.”
짧지만 너무나 명확한, 그야말로 방금 전 제이미가 그 검은 걸 봤을 때 느꼈던 것들을 딱 한 마디로 요약하는 말에, 그녀는 설명이 단지 그것뿐이었음에도 곧바로 수긍하며, 다시 총을 치켜들었다. 이어서 빙의했다는 게 뭔지도 바로 눈치채는 그녀.
뭐라고 해야 할까, 지금 저 둘은 마치 뭔가에 의해 억지로 움직이는 것처럼 저렇게 괴로워하고 있던 것이다.
“그래, 좋지는 않아 보이네.”
영화에서 별 이상한 도구나 틀 가지고 고문당하던 주인공이 대부분 저런 표정을 짓던가?
제이미는 그 배우들의 리얼리티한 표정과 지금 저 두 남자의 얼굴이 매치가 되며, 어쨌든 대충이나마 이해를 했다. 물론 제이미는 그런 고문도 당해본 적 없고, 지금 저 둘이 정확히 뭘 느끼는지도 잘 몰랐–
휙,
“제이미!”
“으와!?”
고양이는 무언가가 갑자기 눈앞에 달려오면 으야앙! 비명과 함께 펄쩍 뒤로 물러난다.
그리고 지금 제이미가 엔시나의 외침과 함께 냉큼 뒤로 튕겨나가듯 뛰어오른 것을 보면, 사람이나 고양이나 별 다를 게 없을지도. “앗,” 이어서 발이 닿자마자 잠시 비틀거리는 것만 빼면 말이다. 제이미는 재빨리 중심을 잡고서 고개를 들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자기도 모르게 몸을 피했는지 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고개를 채 들기도 전에, 방금 그녀에게 손을 휘둘렀던 한 명이 다시 손찌검을 하려는 듯, 이상하리만큼 빠른 속도로 달려들어왔다.
“쏴, 제이미!”
생전 주먹질 한 번 해 본 적이 없는 제이미였는지라 이 순간 마치 온 세상이 멈추고 만 중에, 엔시나가 그녀의 새하얘진 머릿속에 날카롭게 칼을 꽂았고, 이에 제이미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다는 걸 미처 깨닫기도 전에,
탕, 탕, 다시 저 남자의 다리를 이번엔 양쪽 다 쏘고 있었다. “흐익–”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뒤늦게 인지하자마자 그녀는, 이번엔 자신의 평소 이성이 번쩍 하는 대로 총을 그대로 내던지려고 했으나, 이런 상황에서 그걸 허락할 엔시나가 아니었다. “정신 차려!” 얼음 바람과도 같이 그녀가 제이미에게 매섭게 다그치자 제이미는 고개를 저었으나, 곧 입을 열고서
“또 쐈어. 또 쐈다고. 젠장, 나 또 쐈어…”
제이미 앨리슨, 올해 스물 일곱의 아직 사회생활 시작한 지 몇 년도 안 된 여교사.
오늘 갑자기 총을 잡더니 살아있는 사람을 네 번이나 쐈다. 네 번이나! 제이미는 머릿속에 그 네 번이라는 게 떠나지를 않았고, 그렇게 '네 번 쐈다'라는 말뚝이 박힌 흡혈귀처럼 꼼짝없이 서 있었다. 이건 미쳤어. 이건 미쳤다고. 이건–
퍽,
“아악!”
엔시나도 난처해할 정도로 머릿속이 걷잡을 수 없이 뿌옇던 제이미는, 순간 누군가가 자신을 들이받는 것에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그런데 뒤로 날아가도 왠지 너무 날아간 걸까, 거의 한 초가 지나고 나서야 등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부딪히는 것을, 아니 딱딱한 것에 자신이 날아가 쿵 부딪힌 감각에 “어흑,” 제이미는 다 쉬지도 않은 숨이 울컥 쏟아져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는 바로 스르르 몸이 미끄러지며, 곧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제이미는 충격에 입이 벌어진 상태에서, 고개를 살짝 돌려 자신이 뭐에 부딪혔는지 보았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나르사의 눈으로 봤던 그 크레인.
”……”
분명 저 뒤에 있었을 텐데 어느새 친구라도 되는 양 등을 맞대고 있는 크레인을 보며, 제이미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다가 자신이 날아온 쪽을 바라보자, 그녀를 어깨로 들이받은 남자가 다시 머리를 감싸쥐고 몸을 비트는 중이었다. 별 들어본 적도 없을 정도로 괴상한 신음을 뱉어내며, 마치 온 몸이 고기처럼 기계에 갈려나가는 듯이.
“바로 그거야, 제이미.”
엔시나가 조용히 말했다.
“사령에게,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닌 여러 마리에게 빙의되면 저렇게 정신이 찢겨나가면서 먹히고 말아. 너도 지금 막 당했으니 알겠지. 저 인간은 이미 그 힘부터가 일반인을 넘어섰어.”
그리고 이 말에 제이미는 몸이 들이받히자마자, 정말이지 믿을 수 없지만 진짜로 공중에 붕 뜨게 된 느낌을 떠올렸다.
바로 몇 초 전의 일이지만 거의 몇 년 전의 일인 것처럼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 도대체 뭔 사람이 저런 힘을 내지?
하지만 분명 지금 벌어진 일이다. 엔시나가 그걸 확실히 해주는 게 제이미의 텅 빈 머릿속에 전해졌고, 이에 제이미도 무슨 먼 우주를 헤매다가 갑자기 확 하고 지금 이 자리로 돌아온 것처럼, 눈에 번뜩 생기가 돌아왔다. 동시에 자신이 의도하지도 않은 채 숨을 훅 들이마시며, 그녀는 저 남자의 무릎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바라보았다.
“사실 사령이 두 마리 이상 빙의하는 건 나도 처음 봤어. 어쨌든 단순히 근육이나 신경을 어찌 하는 것만으로는 안될 것 같아.”
제이미의 시선을 통해 총알이 남자의 무릎에 박히면서 난 구멍과 그 밖으로 줄줄 새어나오는 피를 보며 엔시나가 말했다. 하지만 그녀가 이어서 “죽일 수밖에.” 하는 순간, 제이미는 방금 정신이 든 데 이어 2차적으로 무언가 확 깨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너 지금 나더러 사람을 죽이라는 거야?”
어림도 없다고 고개를 홰홰 젓는 그녀였다. “넌 내가 대체…” “정신 차리라고!” 참다못해 소리를 지르는 엔시나.
“지금 한 번 부딪히고서, 내가 설명도 해줬는데 모르는 거야? 저건 이미 인간이 아냐, 제이미!”
“인간이 아니고 뭐고 누굴 죽인다는게 무슨–”
그러나 둘의 말싸움은 저쪽에서 계속 끙끙 앓던 남자가 다시 달려든 순간 뚝 끊겼고, 제이미는 그가 발을 날리는 걸 보고는, 그냥 몸으로 밀쳤는데도 저만치 날아가는데 저렇게 발로 차는 걸 맞았다간 어떤 꼴이 날 지 몰라서, 일단 옆으로 휙 굴렀다.
바닥에서 구르는 사이 그녀는 옆에서 쩡 소리가 울려퍼진 것에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고, 이어서 몸을 굴린 반동으로 벌떡 일어난 그녀는, 저 남자의 발에 지지대 하나가 그대로 찌그러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
아무리 오래되었다고 하지만 저게 무슨 플라스틱도 아니고… 사실 그녀는 그 플라스틱 하나 제대로 찌부러뜨리지 못하는데.
제이미는 기겁하기도 전에, 엔시나가 그녀를 강제로 일으켜세우려는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인형인 마냥 실로 조종하는, 아니, 무언가로 조종한다기보다는 어제 새벽에 바쁘게 움직였던 것처럼, 그녀로 하여금 그렇게 움직여야 한다는 강한 무언가가 들게 만들었다고 해야 할까, 그런 일종의 자극과도 같았다. 그리고 엔시나는 이걸 한 번 더 해서 제이미가 바로 권총을 다시 들게 했고, 이에 제이미는 그녀에게 저항했다.
아, 저항하는 게 가능했던가? 그녀는 뭐가 어떻든 지랄이든 남을 죽인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에 들어올리던 총도 다시 내려놓고는, 자기가 마냥 저 혼령인지 뭔지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아님을 알고 다시 놀라는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하진 않은 것이,
“우아, 잠깐!”
다시 한 번, 사령에게 빙의당했다는 그 남자가 또다시 달려들자 제이미는 먼저 자신의 옆구리 쪽으로 날아오는 발을 휙 피했다.
그렇게 뒤로 물러서고 나서, 다음 차례로 마치 곰이 팔 휘두르듯 자기 몸을 채찍마냥 휘두르는 걸 한 번 왼쪽으로 피하고, 다음은 오른쪽으로 목과 허리를 동시에 꺾으며 피하고, 그렇게 제이미는 자기가 어디서 이렇게 피하는걸 배웠는지도 모른 채, 지금 누군가가 자신을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또다시 하얗게 변한 머릿속에서 그저 흐릿한 감각만으로 어찌저찌 피했다.
엔시나는 이런 제이미가 사실 자신이 도와주고 있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아니 정확히는 알지도 못할 정도로 정신없는 것을, 어떻게든 싸움 경험 한 번 없는 그녀가 제발 정신을 똑바로 할 수 있게 자극을 주려고 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코치가 지시를 내리듯 하면서 그녀가 손이든 발이든 뭐든 최소한 피하기라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그녀였으나,
휙, 휘휙, 퍼억–
“헉,”
결국 무리였다. 힘만 이상하게 세졌을 뿐만 아니라 움직이는 것도 굉장히 빨라진 걸 언제까지 피할 수 있는 그녀가 아니었기에.
자신의 왼쪽 뺨을 보호하려고 몸을 옆으로 꺾었다가 그 상태로 남자가 몸을 돌려 옆구리를 발로 차내는 과격함에, 제이미는 아파할 새도 없이 다시 저쪽으로 몸이 날아가, 눈앞에서 공장 안의 광경이 빠르게 지나가는 걸 다 보기도 전에, 곧 바닥에 닿음과 동시에 마치 던져진 포대자루처럼 주욱 미끄러졌다. “으흐으,” 다리가 불에 타는 것만 같았다.
몸이 옆으로 기울은 상태에서 그런 탓일까, 곧 이를 악물고 땅에 손을 짚음과 함께 일어난 제이미는 오른다리가 까진 걸 봤다.
“아프, 다, 고, 제기랄,”
이를 악물고서 당장이라도 피가 날 것만 같이 빨갛게 부어오른 다리를 내려다보는 제이미. 그러면서 엔시나가 한숨을 내쉬는 것이 들린, 아니 지금 그녀와 같이 통증에 상당히 불쾌해하는 거를 느낀 그녀였다.
혹시 감각도 연결된 걸까. 제이미가 그렇게 생각할 새도 없이 엔시나는 “안되겠어.” 고개를 천천히 젓더니, 마치 사람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려는 것처럼, 그녀를 향해 다가옴과 함께 무언가를 하려는 느낌이 전해져왔다.
“물러서, 제이미.”
“으?”
제이미는 이를 악문 채 짧은 소리만 냈다. 물러서라니 이건 또 뭔 소리인 걸까.
이미 저놈으로부터 저만치 물러난, 아니 나가떨어진 꼴인데. 하지만 엔시나는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다시 젓더니, 순간 그녀가 무언가를 했는지 몰라도, 제이미는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밀치고서 앞으로 나서는 듯한 무언가와 함께, 갑자기 정신이 멍해지면서 한없이 뒤로 밀려나는 느낌을 받았다. “무어!?” 제이미는 이대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아, 온 몸에 힘을 주면서 그 이상한 느낌을 떨쳐내려고 했으나, 이에 엔시나가 “가만히 있어.” 말함과 동시에 그 느낌은 더 강해졌다.
“무, 나 어떠케 되는–”
이를 악물고서 중얼거리며, 왠지 자신의 몸이 아닌 뭐랄까, 정신이 저 멀리 날아가는 듯, 혼이 쏙 빠지는 느낌에, 제이미는 엔시나가 뭐라고 하든 어떻게 이겨내려고 애를 썼지만, 곧 그녀가 “가만 있으래도!” 버럭 화를 내자,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일단 가만 두기로 했다. 무엇보다 다시 저 남자가 달려들 것 같으니.
그리고 제이미가 이렇게 자신을 멀리 떨어뜨리는 무언가에 대해 긴장을 놓은 순간, 갑자기 그녀는 한 번 느껴본 것 같은 무언가를, 무언가가 자신에게 갑자기 날아들면서 자신은 밀려나는 것 같은 느낌에 휩싸여 굉장히 당황했다.
잠깐, 혹시 이거, 그녀는 별로 확신하진 못했지만, 그때 이상한 빛을 보고서 쓰러지기 직전에 느낀 그것과 비슷한 걸까?
제이미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이 엔시나는 계속 무언가를 하는 중이었고, 그러다가 곧, 팽팽했던 실이 뚝 끊어지는 것처럼……
휙,
“으얏,”
후욱,
“얏, 야앗,”
아린은 다른 한 명이 자기 손바닥만한 칼까지 꺼내들고서 자신에게 휘둘러 오는 것을, 그 주위를 빙빙 돌아가면서 피하고 있었다.
한 쪽으로 내리치듯 하면 옆으로, 가로선을 긋는 동작엔 몸을 숙이거나 펄쩍 뛰고, 또 대각선으로 휘두르면 뒤로 물러나고,그녀는 비록 다 자란 어른만큼은 아니었으나 나름 익숙해진 움직임으로 머리카락 한 올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알겠지, 아린,”
한편 이런 그녀에게 리니아가 아까부터 계속 설명을 해주다가, 아린이 한 번 뒤로 펄쩍 뛰어서, 가볍게 재주를 넘듯 몸을 공중에서 한 바퀴 구르고 탁, 두 발로 착지하자마자 그녀에게 빠르게 결론을 말해줬다.
“이쪽에선 힘을 쓰면 안돼. 일단 이쪽에 그게 얼마나 희박한지도 모르고 또 그밖에–”
“알았으야, 알았으야,”
아린은 입을 열지 않은 채 속으로 혼령의 말을 뚝 끊어 버리고는, 다시 한 번, 허리를 뒤로 휙 꺾은 뒤, 그대로 뒤의 바닥을 손으로 짚어, 몸을 거꾸로 일으켜 자신을 찌르려 한 남자의 팔을 두 발로 꽉 잡았으나,
“야?”
이대로 상대를 저 뒤로 던져 버리려던 아린은 그가 꼼짝도 하지 않자, 당황해서 잠시 멍해진 틈에 그만 등에 발길질을 당했다.
“으야야!” 저 뒤로 데굴데굴 굴러간 아린은 무언가에 부딪힘과 함께 벌러덩 나자빠졌고, 그러나 바로 일어선 그녀는 곧, 등을 슥슥 문지르며 일어남과 함께 자기가 무엇에 부딪혔는지를 보았다. “야,” 눈에 보이는 건 꽤나 커다란 나무상자들.
아린은 하나하나가 자기보다 머리 하나쯤 작아보이는 높이의 그 상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곧 뒤에서 느껴지는 소리에
“흐얏!”
그 자리에서 펄쩍, 몸을 공중에 띄우며 뒤로 뺀 아린은 곧바로 발을 날리려다 아까 그가 꿈쩍도 하지 않은걸 생각하고서, 일단 반쯤 들은 발을 그대로 착지를 하자마자 바닥에 탁 치고서, 그 반동으로 다시 뛰어올랐다.
“리냐, 저 상자 얼마나 무거워 보예?”
그러면서 혼령에게 물어봤으나 리니아가 고개를 젓기만 하자, 그녀는 어쨌든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는 듯, 하던걸 계속했다.
아린은 먼저 계속 칼을 휘둘러대는 그 남자를 한 번, 그리고 두 번에 이어 계속 물러나기만 하는 동작으로, 다른 쪽으로 빠지거나 하지는 않은 채 최대한 그를 상자에서 멀리 떨어지게 유인했다. 그리고는 곧,
“으야–앗!”
다시 대각선을 그리는 칼을 몸을 한 바퀴 돌려서 피해, 그렇게 다시 상자 쪽으로 빙그르르 위치를 바꾼 뒤, 짧은 기합과 함께 상자를 향해 돌진했다. 물론 저 사람이 사령에게 빙의되어있으니 곧 따라잡힐 거라 생각하는 그녀였지만, 애초에 그녀가 고려하던 게 그거였으니까. 아린은 상자들이 쌓인 곳에 거의 다 온 즉시 가장 아래에 있는 상자를 힘껏 발로 찼다.
덜컹, 상자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나자 아린은 그걸 확인하고는, 뒤에서 자신을 찌르려는 남자를 피해 펄쩍 그 자리에서 뛰어, “야!” 이번엔 밑에서 두 번째 상자를 두 발로 쳐내며 자신은 저 멀리 튀어나갔다.
“저 기둥 뒤로!”
리니아가 외치는대로 그녀는 발이 땅에 닿자마자 재빨리 저 앞의 기둥으로 달려가 그 뒤에 숨었고, 등을 바짝 대고 있는 그녀의 뒤로 커다란 상자들이 우르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야,” 그녀가 말했다.
“내가 떨어뜨렸지만 저런걸 참 높게도 쌓아두고, 여기 별로 좋은 곳은 아니예.”
그리고 이어지는 먼지의 파도에 입과 코를 막은 그녀는 뿌연 기운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둥에 붙어 있었다.
제이미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몰랐다. “으응?” 진짜로 정신을 잃었던 걸까. 아니, 뻗은 건 아니었을 텐데.
잠깐 무언가 아찔하기는 했지만, 분명 그녀의 몸은 멀쩡하게 서 있고, 무엇보다 눈도 제대로 뜨고서 조용히 자세를 잡고 있었다.
…아니, 자세를 잡았다고?
“뭐야?”
제이미는 혼자 중얼거렸으나, 이상하게도 그녀의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이에 그녀는 “어?” 다시 뭐라고 말을 해보려 했으나, 여전히 그녀의 목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갑자기 웬 벙어리가 된 걸까? 분명 목소리를 내고는 싶은데 이상하게 몸에서 반응을 안하는 느낌.
그래, 소리를 못 내는 게 아니라, '안 내는' 듯, 한마디로 지금 그녀가 생각하는 대로 목이 움직이지를 않는 그런 느낌이었고, 도대체 뭐가 뭔지를 몰라서 주위를 둘러보려고 했으나, 웬걸, 그녀의 시선은 계속 저 괴로워하는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 제이미.”
머리가 한 치도 움직이지 않고, 눈동자가 한 끝도 움직이지 않는 중 엔시나가 영문을 몰라 당황하는 제이미에게 말했다.
하지만 이게 뭔 일이란 말인가. 갑자기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니. 분명 숨도 제대로 쉬고 있… 잠깐,
이제보니 숨을 쉬는 것조차도 그녀 스스로 하는 게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가 대신 그녀의 몸으로 숨을 쉬고 있는 듯이. 게다가 지금 다리가 꼭 시뻘건 벌레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물어뜯는 것만 같음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싸울 자세를 잡고 있다니.
그녀라면 분명 아파 죽겠어서 난리일게 분명한데 말이다. “그래서 내가 있잖아.” 엔시나는 이런 제이미의 생각에 대답했다.
“잠시 네 몸을 직접 맡아야겠다고 생각했거든. 아무래도 넌 이러다가 무엇도 못하고 끝날 것 같아서.”
“무, 뭐어!?”
제이미가 놀라서 소리를 질렀지만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일단 가만히 있어.” 그리고 이에 대답하는 엔시나. 이어서 그녀는 일단 바닥에서 총을 주워들고, 그러자마자 어느새 다시 들이받으려고 달려오는 남자를 날쌔게 피했다.
“내가 직접 싸울테니까, 넌 보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