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
“아아~”
아린이 입을 크게 벌리자 놀랍게도, 한 접시를 다 채울 만했던 토스트가 굉장히 작게 보였다.
그리고 굶주린 열아홉 소녀가 한 입 크게 물자, 무슨 폭풍이라도 지나간 듯 남아있는 부분은 거의 절반도 안 되었다. “으우~야!” 이어서 얼굴에 활짝, 머리에 달린 그것보다 더 화사한 꽃이 피는 아린.
“배고팠구나.”
그동안 몸을 싹 씻고서 잠옷을 입고, 몸 곳곳에 연고를 바르던 제이미가 한 마디 했다.
저 토스트가 첫번째일 리 없다는 걸 증명하듯, 저쪽 부엌에 제법 많은 흔적이 남아있던 것이다. “으얘.” 아린이 대답했다.
“정말 배고팠으얘. 저는 배고픈거 진짜로 못참고예, 그리고, 요거, 요거 너무 맛있으야.”
이어서 나머지를 그대로 입 안에 밀어넣고는 “행복해얘.” 한 마디에 제이미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도 생각한 거지만, 완전히 조카를 데려다가 먹이는 기분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이렇게 재밌을 줄이야.
“많이 먹어. 금방 또 만드니까.”
간만에–아니, 정말로 간만에–집에서 웃음기를 띈 얼굴을 한 제이미가 말했다.
비록 여러 군데가 아직까지도 쑤시고, 특히 까진 다리가 따끔거렸지만 이 정도는 어떻게 참아낼 수 있고, 무엇보다 더 큰 문제에 비하면 몸 상한 거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 더 큰, 아니 너무나도 큰 문제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이런 그녀에게 엔시나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그러지 않았으면 너가 죽었을 테니까. 너도 알잖아, 제이미.”
“누가 그걸 몰라서 이러는 줄 알아?”
제이미는 금방 얼굴이 구겨지면서 버럭 성질을 냈다. 비록 아까 창고에서처럼 벌벌 떨지는 않는 그녀였지만, 경찰이 절대 바보가 아닌지라 어떻게든 이 제이미 앨리슨이 살인자가 되었다는 건 결국 밝혀질 게 뻔했다.
그리고 언제가 되든 그날이 왔다간 정말 빼도박도 못할 상황이고. 것도 총으로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을 쏴댄 건데?
“젠장.” 제이미는 아린의 특이한 먹성 덕분에 피었던 웃음이 언제 있었냐는 듯, 다시 얼굴을 손에 파묻었다. 기묘한 연고 냄새 속에서 이를 바득바득 갈으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나름대로 시나리오를 짜보는 그녀.
”…후우,”
하지만 역시나,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어떻게 좋은 수단이 생각날 리 없었다.
다른 거라면 몰라도, 대놓고 사람을 죽여놓고서 그걸 어떻게 넘어갈 방법을 생각할 수 있을 리가.
적어도 지금까지 무슨 위험한 일 한 번 해본 적 없이, 그냥 곱게 자라서 교사 일이나 하는 그녀가 뭘 떠올릴 가능성이 없는 것을.
“언니얘,”
한편 이런 그녀의 세상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뭐가 뭔지 모른 채) 멀뚱히 있던 아린이 곧 팔을 툭툭 건드렸다. 고개를 살짝 든 제이미는 피로가 겹친 눈으로 초록빛의 동그란 시선을 마주했고, 아린은 둥글둥글한 웃음과 함께
“뭐가 그리 심각히야?”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그리고 제이미는 그걸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속 편한 애네.
그러고 보니 얘도 분명 사람을 상자로 깔고 어떻게 하고 별 난리를 쳤을 텐데 뭐 저렇게 태평한 걸까.
아마도 자신은 죽이기까지 하진 않았으니 저러는 건지. 제이미는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탓에 다시 얼굴을 손에 파묻었다.
“야아?” 아린이 눈을 깜박였다. 저 언니 참 이상하다 하는 얼굴로 가만히 보던 그녀는 안되겠다 싶어 아예 팔 하나를 끄집어냈다.
“그러지 말고예, 뭔 사람이 그렇게 죽상을 하고 있으만 안되야.”
하면서 제이미의 입고리를 옆으로 찢을 듯이 쭉 늘리는 게 아닌가. “웃으얘, 좀. 웃으–” 하지만 그건 곧 오래가지 않았고, 곧바로 검은머리 소녀를 한 번 더 콱 쥐어박으면서 결말을 맺고 말았다. “으얏!” 머리를 감싸쥐는 아린.
“나 좀 가만 냅둬.”
한숨과 함께 한 마디 흘린 제이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프야, 아프야,” 뒤에서 끙끙대는 아린을 놔둔 채, 그녀는 거실로 향하고는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았다. 어제 누가 여기로 들어왔었지. 제이미는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
무슨 몽마가 어쩌구 했던가. 그래서 침대 밑에 들어가서는 웬 이상한 감시카메라도 보고, 그 다음엔 저기 저, 그러니까 웬 총들이 잔뜩 있는 것도 보고, 아아, 제이미는 머리가 점점 복잡해졌다.
생전 듣도보도 못한 일들이 너무나 겹치는 탓에 어쩌다가 여기까지 온 건지 정리도 제대로 되지 않는 그녀였기에, 아무래도 그냥 자야겠다 싶어 그녀는 다쳐서 휘청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방으로 향했다. “아,” 그러면서 아린에게 말하는 그녀.
“너도 어서 자든가. 쓸데없이 뭐 건드리지 말고.”
왠지 쟤 성격상 뜬 눈으로 무슨 사고라도 칠 것 같지만, 지금 그런걸 염려하기엔 너무나 피곤하고 몸이 아팠다.
심지어 지금 저 애를 어디서 자게 할지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그냥 알아서 어디 눕겠지 할 정도였으니까.
제이미는 “야아.” 한 대 맞은 게 꽤나 아팠는지 눈물을 글썽이던 아린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자마자 그대로 방에 들어갔다.
……
…..
….
…
..
.
탁,
“아무래도 당신들,”
도저히 답답함을 참지 못했는지 탁자를 내려친 남자가 윽박질렀다.
“지금 상황을 잘 이해 못하는 모양인데, 당신들 때문에 사람 다섯이 저렇게 떡이 되었단 말야.”
“네에,”
'떡이 되다'는 게 저런 뜻이었구나 하고 말할듯한 얼굴로, 슨우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 시선을 따라 나르사도 고개를 돌리자, 마치 자신들을 바라보기를 기다렸다는 듯 조용히 있던 저 인간들이 갑자기, 무슨 죽어가는 꼴이라도 되는 마냥 끙끙거리며 신음하기 시작했다. 분명 한 시간쯤 전에만 해도 인상 한 번 험악한 이들이었는데.
그러니까 슨우와 어깨를 부딪히고서는 뒤돌아서 뭐라고 할 때만 해도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그래, 한 번 생각해 보니 저걸 '떡이 되다'라고 표현하는 게 제법 맞는 것도 같았다.
하긴 갑자기 구석에 몰아넣고서는 그렇게 협박을 해오는데, 어떻게 말로 넘기려는 걸 갑자기 주먹을 써오니 어쩌겠는가. 적어도 그녀와 슨우, 키리 이렇게 셋 중 단 한 명도 그냥 얌전히 맞아줄 만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쨌든 상대가 체격도 좀 있고 수도 여럿이겠다 싶어 (비록 맨손이지만)전력으로 상대했더니, 저렇게 '떡이 되어' 널부러진 꼴인 걸까. 그리고 나서는 이렇게 '경찰서'란 곳에 끌려와서 이 난리라니.
“확실히 그렇네요.”
애기마냥 막 우는 소리를 내는–허리가 어쩌구 어깨가 어쩌구, 아니면 맞지도 않은 목이 어쩌구 하면서–이들을 가만히 보면서, 슨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어서 다시 저 남자, 이곳의 책임자인 듯한 사람을 보며 계속하는 그.
“그 문제라면 저쪽에서 먼저 공격해왔기에 저희 쪽에서 제압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그게 문제란 게 아니라,”
책임자는 아까부터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해왔는지라 가슴을 툭툭 두드렸고, 사실 나르사도 그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무리 저쪽 입장을 이해한다고는 하지만 저 남자도 계속해서 우리한테
“당신들 신분증만 보여주면, 아니 어디 사는 누구라고만 말해도 적당히 넘길 수 있다는데 왜 그러지를 못하냐고.”
저렇게 아까부터 자꾸 신상을 밝히라고 강요하는데, 지금 여기서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는가.
때문에 지금까지 어떻게 둘러대면서 버텨온 셋이었지만, 그렇다고 지금 여기서 도망가기라도 할 수는 없는 노릇임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인간계에 처음 왔다지만, 그 정도는 대충 감으로도 알 수 있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뭘 어떻게 해야…
“흐음,”
슨우 또한 굉장히 난처함이 뒤섞인 얼굴로, 아주 땅에 깔릴 듯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아마도 그는 지금 이런 상황에서 무언가 만능의 효력을 보일 만한 문장을 찾으려고, 머릿속 한가운데에서 허우적대고 있으리라.
그러나 절대로 그를 과소평가하는 나르사가 아니었음에도, 그가 무언가를 생각해낼 리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키리 또한 옆에서 굉장히, 아니 정말로 굉장히 겁을 먹고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어느새 나르사에게 착 달라붙어 있는 그녀는, 지금 이곳이 무슨 사령들의 소굴이라도 되는 양 자꾸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입은 철저하게 잠근 상태.
그리고 나르사 또한 지금같은 때에는 (인간계에서는)별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느니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는게 좋겠다 싶어, 왠지 슨우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 것 같지만–사실 그가 저 다섯 중 넷을 상대했다. 나머지 하나는 본인이–뭐 어쩌겠는가.
경찰이란 게 뭔지 아직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지금 여기서 도망치거나 하면 별로 좋지 않을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대체 뭘 어쩌라는 말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인간계에서 하루종일 이러고 보낼–
“알겠습니다.”
갑자기 슨우가 대답했다. 이에 두 여자의 시선이 그에게 돌아갔고, 그 중 나르사는 얘가 뭘 알았다고 하는 건지,
그에게 먼저 눈치를 좀 주려고 했다. 그런데 아예 먼저 그녀와 키리를 한 번씩 번갈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그.
“정 그렇게 신원을 확인하시겠다면 알려드리겠지만, 아무래도 자리를 좀 옮기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요.”
“엉?”
그의 앞에 선 남자는 갑자기 뭔 소리냐는 표정으로 그를 빤히 쳐다봤다.
하지만 지금 슨우는 정말로 진지한 결심을 했음을 얼굴에 다 드러낸 상태였고, 이런 그를 보면서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되도록이면 우리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은폐하는 게 좋았을 텐데.”
엔시나가 짧게 불평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인걸 어쩌겠는가. 나르사는 조용히 슨우와 이 경찰이란 사람들의 행동을 기다렸다.
……
…..
….
…
..
.
“으야야야야!”
누군가가 막 시끄럽게 소리지르면서 돌아다니는 탓에 제이미는 잠이 깨기 전에 먼저 정신이 어디론가 날아가고 말았다.
“으,” 눈을 비비고 고개를 돌린 그녀는 “뭐야,” 여느 평범한 날처럼 미친듯이 울려대는 알람시계들, 그리고 이 사이에서 방방 뛰며 마치 불이라도 난 듯 허둥지둥 난리를 치는 검은머리 소녀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뭐얘!? 뭐얘!? 뭐 무너지야!? 가라앉으야!? 부서지야!? 으야야!”
“아, 알람…”
온 세상이 무너지는 듯 침대 주위를 뛰어다니며 소란스럽게 구는 아린을 두고, 제이미는 느릿느릿 하품을 한 뒤, “가만 있어, 좀.” 한 마디 툭 던지고는 가서 알람을 하나씩 차례로 껐다. 곧 방 안은 조용해졌고, 이에 사방으로 뛰어다니던 아린도 덩달아 잠잠해졌다. “우야,”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이미를 바라보았다.
“거 뭐였으야? 어제 '교감'할때 이런건 확인하지를 못해서예.”
“알람이라는 거야.”
아직 눈이 반쯤 감겨있는 제이미가 왠지 뻐근한 목을 문지르며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려고 쓰는 건데, 별거 아냐. 아우, 목아파.”
이제는 저게 아무리 시끄럽게 울려대도 저게 알람이라는걸 스스로 알고 있어서 별 소용이 없는 탓일까.
제이미는 사실상 저 어린애같은 여자 덕분에 깨어났음을 인정하고, 언제나처럼 먼저 물 한 잔 마시려고 방을 나갔다.
“그러고 보니, 이름이 뭐라고?”
그런 자신을 졸졸 따라오는 그 기집애한테 묻자, “아린. 아린예.” 아린은 알람 때문에 겁을 집어먹은 탓에,
제이미의 설명이 있었음에도 행여나 또 뭐라도 벌어질까 조마조마해하고 있었다.
“어라,”
곧 주방에 들어선 제이미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뭔 일인지 주방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분명 어제 얘한테 토스트 잔뜩 해주고, 그냥 휙 자러 갔는데? 그녀는 가만히 눈만 끔벅이다가, 아마도 이 애가 살았다던 곳에도–물론 그런 곳이 정말 있긴 하다면–설거지는 여기랑 비슷하겠지 싶어서,
곧 어깨를 으쓱하며 “잘 치웠네.” 한 마디와 함께 다시 정수기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곧 컵을 꺼내려는 찰나, 등뒤에서 들려오는 대답에 그녀의 팔이 허공에서 딱 멈췄다.
“저도 고생했으야. 아무리 언니 기억 뒤져서 알아냈다고는 해도얘, 저런거 영 처음 하니 뭐가 뭔지 알 수 있으야쟤.”
“뭐?”
뒤돌아서는 제이미. “기억을 뭐?” 아린을 빤히 쳐다보자, 검은 머리 소녀도 그 동그란 눈을 가만히 반짝이더니,
곧 그녀가 뭘 물어보는 건지 알고서 “우야,” 고개를 살짝 갸우뚱했다.
“언니는 혼령이 '교감' 안 가르쳐줬으야? 하긴 그거 안하고 잘만 사는 사람도 있지만얘.”
”'교감'이라니?”
제이미의 눈썹이 올라갔다. “아, 맞아,” 이에 엔시나가 손뼉을 탁 치는, 아니 정말로 쳤다기보단 그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고, 이어서 그 혼령이 무슨 늙은 학자마냥 가만히 생각만 하고 있던걸 멈추고는 가까이 오자, 제이미는 약간 불편해했다.
하지만 엔시나는 여전히 자신에 대한 거부감이 있든 없든 신경쓰지 않고, 제이미에게 빠르게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혼령과 그 동반자가 서로에 관한 기억이나 지식을 공유하는 거야. 정확히는 서로가 아니라 일방적으로도 가능해. 다만 지금까지 말해주지 않은 건 그게 꽤나 힘든 일이라서 그런 거야. 아직 너는 많이 알고 받아들여야 하니까. 물론 내가 괜한 걱정을 한 것도 있어. 지금 생각해보니 오직 당사자들끼리만 흐름이 통하는 거라 저들에게 들킬 염려는 없거든.”
설명을 끝낸 제이미는 안그래도 아침에 물을 항상 마셨던 습관이 있던 게, 목이 더 타들어가게 되었다.
기억과 지식을 공유한다고? 이젠 아주 별 소리를 다 하는구만. 힘든 일이라느니 무슨 들킬지도 모르는 게 어쩌구 저쩌구, 정말 이 혼령이라는 작자는 세상에 못 내뱉는 말이 없다고 여기며 제이미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일단 물이라도 좀 마시고 보자. 그녀는 엔시나가 뭐라고 말을 잇기도 전에 마치 입을 막아버리기라도 할 듯 컵을 꺼냈고, 곧 물을 따라서 한 번 쭉 들이킨 그녀는 “하,” 어제부터 속에 쌓여 있던 것들을 모조리 뱉어낼 기새로 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어서 아직 눈을 감은 채 입을 여는 그녀.
“교감이라 이거지. 기억이니 지식이니 그런걸 볼 수 있다고.”
이렇게 한 마디로 딱 정리를 끝낸 제이미는 눈을 떴고, 아린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너,” 눈이 가늘어지는 그녀.
“대체 어디서 뭐하다 온 앤지는 몰라도, 나는 요즘들어 이 혼령인지 뭔지 때문에 진짜 암 걸려 죽을 것 같거든? 먹이고 재워주는 것도 정도지, 니 어디서 사는지 알기만 하면 당장 돌려보낼 테니까 그리 알고 있어, 응?”
“어차피 지금은 돌아가지도 못하잖얘.”
바로 코앞에서 이를 바득바득 갈 기세인 제이미에게 아린은 입을 삐쭉 내밀고 대답했다.
암 걸리고 뭐고 간에 이 언니가 어제부터 화가 잔뜩 난 얼굴만 하고 있어서, 바로 쫓겨나기 싫으면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야 하니까.
“아니면 지금 가서 저 사령이랑 또 싸우야? 언니도 그건 싫어하잖얘.”
“그,”
하긴, 맞는 말이었다. 뭐가 뭔지는 몰라도 일단 그 사람인지 괴물인지 뭔지 모를 것과 또 싸우기는 싫었고,
일단 무엇보다 지금 그녀는 여기서 한가롭게 입방정이나 떨고 있을게 아니라 어서 일하러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건 뭐,” 제이미는 정말 뭐라고 해야 할 지 몰라서 일단 물 한잔을 더 마신 뒤, 정해진 것처럼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쨌든, 설거지는 잘 했어.”
할 말이 없을땐 상대를 칭찬하고 거기서 딱 끝내라. 그러면 뒷탈도 없고 자기 할 일 계속 할 수 있으니까.
그녀가 살면서 배운 한 가지를 여기서 써먹고, 제이미는 이제 옷을 갈아입으려고 다시 방으로 가려 하는데, “잠깐, 제이미,” 엔시나가 그녀를 멈춰세웠다. “왜?” 제이미는 또 뭐냐는 식으로 팔짱을 꼈고, 이런 그녀에게 천천히 말하는 혼령.
“생각을 좀 바꿨어. 지금 한 번 해봐.”
“뭐?”
”'교감' 말야. 저 애한테 한 번 해봐. 지금 너가 못할 정도로 어렵진 않으니까.”
뜬금없이 남의 기억을 읽어 보라는, 아니 애초에 그게 뭘 어떻게 하는 건지, 아니 그 전에 그런게 진짜 되는 건지도 모르는데, 도대체 뭔 생각을 더 어처구니없이 바꿨길래 지금 그걸 시키는 건지, 제이미는 “또 시작이네.” 조용히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너 지금 내가 뭘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인다면 말인데,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다시 말하지만 너가 못할 정도는 아냐. 일단 그 애한테 가까이 가봐.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돼.”
“아니, 너가 시키는 대로 하고 뭐고, 오늘 월요일이거든? 월요일이라는 게 얼마나–”
“부탁할게, 제이미.”
이제 엔시나도 더이상 엄한 소리를 늘어놓기가 싫어, 인내심이고 뭐고 할 것도 없이 그녀에게 진심어린 말을 전했다.
“얼마 걸리지도 않아. 몇 분이면 곧바로 끝나니까. 한 번만 해보고 맘에 들지 않으면 너가 그만둬.”
”……”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는 태도에 제이미는 정말 못마땅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으나, 그렇다고 지금 이렇게 부탁이랍시고 요청하는 사람, 아니 사람이 아니라 뭐든 간에 어쨌든 또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런게 정말로 가능한지는 잠깐 생각을 접어두자고 쳐도, 남의 기억을 읽는 짓이라니, 그런걸 왜 하란 말야?
아니, 저 애도 나한테 했다고 그랬으니 별 상관없으려나. 뒷정리 어떻게 하는지 알아내려고였다지만 어쨌든 이것저것 봤을 테니까.
“으,”
제이미는 잠시 끙끙거리다가 결국 어쩌지를 못하는 탓에 속에서 뭐가 확 치솟으며, 안그래도 엉킨 머리를 성질적으로 막 휘저었다. “알았어, 젠장,” 어쨌든 결국 입에서는 말을 하고 만 그녀. “알았다고,” 기억이고 뭐고, 할 거면 빨리 끝내고 보자는 생각으로, 그녀는 어느새 물을 마시고 있는 아린에게 가서 “너,” 뭐라고 말을 먼저 꺼낼지 생각하다 그냥 확 던져 버렸다.
“그, 그 '교감'인지 뭔지 그거 내가 너한테도 할 수 있는 거야?”
“야?”
그런건 또 왜 묻냐는 얼굴로 아린은 제이미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곧 고개만 끄덕였다. “그,” 그러자 제이미는 다시 입을 열었고,
“그 뭐냐, 어… 아, 그러니까 어쨌든, 그거 하래. 이 혼령인지 뭔지가. 지금 너한테.”
머리를 막 긁으며 딱딱 말을 끊어서 하는 제이미. 한편 아린은 이런 그녀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그럼 하시얘.” 대답했다.
“근디얘, 물어보려다 말았는데 언니 혼령은 누구얘? 암 걸린다니 언니랑 잘 맞지는 않는 모양이얘.”
“아, 몰라.”
누가 자기한테 있다는 혼령에 관해 물어보니 짜증이 확 치솟는 그녀였다. “이름이 '엔시나'래.” 그런데 이렇게 말한 순간, 평소에도 동그랗던 아린의 눈이 갑자기 탁구공이 테니스공 되듯, 거의 튀어나올 기세로 “으야!?” 갑자기 큰 소리를 냈다.
“정말얘? 그 엔시나 맞얘? 으야야, 정말 우리 오라부이가 말했던 엔시나얘?”
“무, 뭐어?”
갑자기 목소리가 커진 아린을 보며 흠칫한 제이미를 보며 아린은 그걸로는 부족함을 알고 말을 더 이었다.
“그러니까얘, 예전에 그, 그 '나르사'의 혼령이었던 그 엔시나 맞으야? 야? 언니얘?”
“어, 어어,”
얘가 그 나르사라는 여자는 어떻게 아는 걸까. “응.” 어쨌든 고개를 끄덕인 제이미. 그런데 다음 순간 아린이 와락, 무슨 헤어진 가족을 만나듯 제이미의 품에 안겨오는 게 아닌가. “우야!” 아린은 기뻐서 노래라도 부를 기세였다.
“으야, 정말로 있었구야! '다일'이 걱정 많이 하고 있었으야. 아직 멀쩡하게 있었으얘, 정말 다행이얘.”
“다일?”
그 이름은 또 어떻게 알고 있지? 제이미는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일단 엉겨붙어서 떨어질 줄 모르는 이 기집애를 좀 떼어놓고, 엔시나가 그 이름을 듣고 반응한 걸 애써 무시하며 “뭔 말을 하는거야?” 잔뜩 부풀어 있는 아린에게 물었다. “으야,” 아린은 거의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오라부이가, 그러니까 오라부이 혼령인 다일이 얘기 많이 했으야. 언제부터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그래서얘,
뭐가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그야, 어쨌든 걱정하고 있었으얘. 그 엔시나란 혼령얘.”
”…아아,”
멀뚱히 있는 제이미는 엔시나가 말하는 걸 들을 수 있었다.
“그랬구나. 지금은 이 애의 오빠한테 있다니. 결국 세계가 하나든 둘이든 세상은 좁은 걸까.”
“잠깐, 잠깐,”
무슨 자기만 빼고 이 둘이서만 도저히 알 수 없는 얘기를 주고받는 것 같아, 제이미는 한 손을 들고서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둘 다 무슨–” 하지만 이런 그녀의 목소리는 오래 가지 못했고, 곧 저쪽에서 울려오는 벨소리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제이미는 지금 자기한테 전화가 왔음을 알고 나서야 “아!” 어서 학교로 가야한다는 사실이 곧바로 상기되었고,
난 오늘 죽었구나 싶어 얼른 폰을 들고서, 거기에 교감이라 적혀있는 걸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아직 출근 시간까지는 조금 여유가 남아있다는 사실따위, 지금은 안중에도 없는 게 그녀로서는 당연했다.
“네? 앨리슨입니다.”
아린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굉장히 드세고 짜증 잘 내던 언니가, 지금 저렇게 식은땀을 흘릴 듯한 얼굴로 어떤 네무난 무언가, 대체 뭐에 쓰는지는 몰라도 대충 보건데 저 쬐그만 걸로 다른 사람들이랑 얘기하는 것 같은 물건에 대고 말하는 걸 보았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저 언니는 곧 대화를 끝내고 저 네모난 거의 한쪽을 꾹 누르기 전까지 계속 “네, 네,” 거리는, 방금 전까지의 언니의 모습 가지고는 전혀 상상이 안되는 태도를 보이는 것도, 지금 그녀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대체 이쪽 세계 사람들은 뭘 어떻게 하고 사는 걸까. 아린은 혼자 이런저런 망상에 잠겨있다가 곧 제이미가 입을 열고서
“가족 문제라고? 난 그런거 말한 적 없는데. 애초에 내가 언제 학교 못나간다고 그랬지?”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까지 계속 가만히 지켜보다가, 곧 “언니얘,” 그녀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이거 무애? 뭔 쬐그만 걸로 사람들이랑 얘기하는 그얘? 신기해야.”
“잠깐만, 좀,”
제이미는 자신의 폰을 신기한 듯이 들여다보는 아린을 아까처럼 떼어놓으려다가, 다시 폰이 울리는 것에 또 뭐가 왔는지를 봤다.
이번에는 짧게 울리고서 만 제이미의 폰에는 '아빠'라고 적혀 있었고, 아린은 그녀가 이걸 보고서 놀란 얼굴로 멍하니 있더니, 곧 아까처럼 한쪽을 가볍게 누르자 갑자기 그 안에 있던 것들이 싹 바뀌면서 뭐라고 적혀 있는 것을 제이미의 옆에서 같이 읽었다.
[지금 가고 있다. 학교에는 잘 말해 놨으니까 일단 짐 챙겨라. 얘기는 가서 할테니까.]
“뭔,”
갑자기 저렇게 말하니 어딘가 오싹해지는 제이미였다.
“왜 하필 이런 때야,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