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
“으야,”
아린은 주섬주섬 옷을 입고서 말했다. “이거면 돼얘?” “응.” 제이미가 슥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정도면 그냥 외국인이겠지 하고 말거야.”
“야.”
다만 제이미보다 키가 좀 작은 자신에게는 그렇게 맞진 않는지라 약간 불편해할 뿐이었다. 어쨌든 옷을 입고서 거울 앞에 우두커니 있는 아린–지금까지는 자기 모습을 볼땐 물에 비친걸 봤다고 한다–을 두고서 대충 짐을 챙기다가, 저쪽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준비했니?” 하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자 “거의.”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새벽에 깨서 계속 울다가 다시 잠들고, 또 깨서 울고 하기를 반복한 흔적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러고보니,”
가방을 탁 닫은 제이미가 물었다.
“엔시나가 너한테 뭐라고 말하지 않았어? 그걸 뭐랄까… 느낀 것 같은데.”
이제는 이 모든걸 헛것이니 우연의 일치니 뭐니 할 기력도 없어 그러려니 하는 식의 그녀였다. 아린은 “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 그, 말하지 말랬으야. 어차피 언니야도 알게 될거라고.”
“그래?”
제이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지칠대로 지친 와중에서도 저게 뭐길래 그러나 하는 생각에 엔시나는 “일단 가자.” 혼자 뭔 생각을 계속 하면서, 그리고 제이미에게 그걸 숨기면서 간단한 대답만 했다.
“그럼,”
제이미는 아린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사실 처음 봤을때부터 생각한 거지만 애가 제법 귀엽기도 하달까. 다만 다른 세상에서 왔다고 하는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애가 말하는게 좀…
“집에 잘 가고, 나중에 봐.”
비록 웃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친근한 인사와 함께, 제이미는 아린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곧 마크윈과 함께 차에 타고 떠나는 모습을 보며, 아린은 그래도 엄마가 죽었다는 사람에게 방글방글 웃지는 못해서 손만 흔들었고, 이어서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주위를 둘러보더니 다시 제이미의 집으로 들어갔다.
“에, 그러니까,”
문 앞에 다다른 아린은 주머니에서 머리핀을 꺼내들어(“야 세계에선 이걸로 머리를 묶으얘?”) 문에 걸린 무언가, 불룩 튀어나와 있고 숫자가 써져 있는 무언가의 위에 살짝 끼웠다. “리냐,” 아린은 핀을 이쪽저쪽으로 움직여보며 리니아에게 어제 엔시나가 뭐라고 말했는지를 물었다. 이에 혼령은 아예 그녀의 손을 직접 움직여 한 번에 휙 돌렸고, 그러자 저 숫자가 써진 무언가를 누르지 않았는데도 띠릭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 집이 음, 그러니까 누군가 들어오면 들어왔다고 저 제이미 아버지에게 메시지… 아니, 연락이 닿거든. 너는 지금 건너갈 수도 없고 일단 집에 계속 있는 편이 좋으니까, 내가 알려준 대로 하면 수신기… 그러니까 그 연락이 가게 하는 장치를 피할 수 있을 거야.”
이쪽 세계에서만 통하는 용어는 빼느라 애를 쓰며 엔시나가 설명해준 말이었다. 그리고 저 수신기인지 뭔지 하는 것을 피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문이 열리자 아린은 마치 누가 감시라도 하는 마냥 얼른 들어가서 문을 꼭 닫았다.
이어서 제이미의 방으로 후다닥 달려간 아린은 그 컴퓨터라는 것을 잠시 멀뚱히 쳐다보다가 곧 전원을 발견해 꾹 눌렀고, 그러자 위쪽에 있는 평면의 무언가에서 뭐가 막 화려하게 뜨고 그러는 것을 바라봤다. “우야,” 산에 올라가 해돋이를 보는 것처럼 눈이 동그래져서는 입이 저절로 벌어지는 아린. “신기하네.” 리니아도 인정했다.
“그런데 가만히 있지 말고, 아린, 빨리.”
“야?” 아린은 흠칫했다. “으, 으야.” 곧 엔시나가 말해준 대로 마우스란 것(왠지 좀 쥐를 연상시켜서 귀여운 무언가)을 잡고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눌러 보더니, 곧 화면에 창 하나가 뜨자 리니아가 기억을 더듬으며 말해주는 대로 화면 앞의 무언가를 딱딱 눌렀다. “에, 3하고 7, 그리고,” 두 검지를 세워 쿡쿡 찌르면서. 이쪽 세계에서는 그런 모습을 흔히 독수리에 빗대어서 말하는 걸 엔시나가 알려줬을 리 없었다.
그리고,
“니콜 킹 루이즈… 앨리슨입니다.”
곧 녹음된 음성이 들려오자 아린은 화들짝 놀라며 마치 그 화면이 자신을 잡아먹기라도 할 듯 의자를 뒤로 뺐다가, 곧 다시 다가오면서 그 목소리가 웃는 것을 들었다.
“네, 결혼했어요. 나 같은 년한테 그런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벌써 딸내미도 하나 있어요.”
“으야.”
말투가 제이미와는 다르지만 기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임에도 시원시원한 느낌이 있는 건 비슷했다. 아린은 신기해하면서 다시 멍하니 있다가 곧 제이미 어머니의 목소리가 계속하자 다시 키보드라는 것에 손을 대고 무언가를 딱딱 눌렀다.
“지금 이걸 열어보는 게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면… 네, 어쩔 수 없네요. 맘대로 뒤져보세요. 저에 대해서든 아니면 이 골칫거리 엔시나에 대해서든. 아 그리고 혹시 안나라면 너 내가 말했던–”
“정말이네얘.”
아린이 두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이며 눈을 끔벅였다. “으응.” 리니아도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둘은 여자가 계속 말하는 것을 들으며 무언가를 입력했다.
”……”
한편 제이미는 한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 말이 없었다. 마크윈이 중간중간 눈치를 보는 걸 알면서도 아무 말이 없자, 보다못한 아버지는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창 너머만 바라보는 딸에게 “속 안좋니?” 물어보았고, 이에 제이미는 그를 쳐다도 안본 채 대답했다. “속 뿐이야?” 지금 속이고 뭐고 좋을 게 뭐가 있냐는 대답에 마크윈은 다시 운전대에나 신경썼다. 제이미도 지금까지처럼 그냥 조용히 있다가, 마크윈이 중간에 차 한대가 갑자기 들어와 경적을 울리자 마침내 고개를 돌렸다. “잠깐,” 그녀가 말했다.
“아빠가 직접 운전하는 건 오랜만에 보는데. 다 어디갔어?”
평소에 대신 운전해주던 아저씨들은 어떻게 되었냐는 말에, 마크윈은 아차 싶어서 얘기했다.
“말 안했구나. 아빠 관뒀다… 그러니까 돈이야 지금도 들어오긴 하지만, 이제 나랏일이고 뭐고 끝났어.”
“아,” 이때 그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지자 제이미는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구나.” 하긴 아빠도 지금 기분이 참 뭐할 것이라 생각하니 조금은 안쓰러워, 백미러로 보이는 그의 표정을 가만히 보다가 그가 또다시 먼저 말을 걸자 흠칫했다. “어제 그렇게 울었니?” 하긴 다른 사람이 봐도 티가 나는데 부모의 눈에 보이는 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빠는?” 제이미가 이번엔 차 바닥 쪽으로 고개를 내리며 묻자 마크윈은 한숨을 깊게 쉬었다.
“아빠는 그냥, 세상이 텅 빈 것 같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앨리슨 부녀는 더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나서 한 시간쯤 더 지났을까, 아직 그린라임 시를 벗어나진 않은 듯한 지점에서 슬슬 차 속도가 느려지자 어느새 자는 듯 깨어있는 듯 했던 제이미가 퍼뜩 정신이 들어 고개를 돌렸고, 때마침 웬 철조망 같은 것을 넘어서 가는 게 보이자 “여기 어디야?”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입을 열자 마크윈이 속도를 좀 더 줄이며 말했다.
“이미 얘기했는지 모르지만, 사실 죽은게 병이나 그런 걸로 죽은 건 아니라서… 너도 예전에 알았겠지만 네 엄마가 좀 특이한 일을 하고 다녔잖니.”
”……”
그러고보니, 그녀의 엄마는 누군가가 죽였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자살따위 할 사람이 아니었다. 할 이유도 뭣도 없었다. 갑자기 이 사실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제이미는 얼굴이 굳었다. 혹시 누가 죽였는지 잡은 걸까? “혹시–” “아직 수사 중이다.” 마크윈이 미리 대답하자 제이미는 입을 다물었다. “응.” 하긴 언젠가는 잡히겠지. 아빠도 만만한 사람은 절대 아니었기에.
“완전히 때려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할 일이지, 니콜에 대한 건.”
마크윈도 그렇게 말하고는 곧 차를 세웠다. 넓은 돌바닥에 차를 세우는 것과 동시에 저쪽에서 누군가가 오는 모습이 보였고, 그게 마크윈과 비슷한 연령대의 아저씨가 아닌 한 젊은 청년인 게 보이자 제이미는 그를 빤히 쳐다봤다. “오셨군요.” 그 청년이 깍듯이 경례하자 마크윈은 고개를 저으며 “은퇴했잖나.” 말했고 이에 청년이 싱긋 웃었다.
“어쨌든 가시죠. 주차는 제가 하겠습니다.”
열쇠를 받고 차 안으로 들어가는 그를 제이미는 아버지와 함께 걸어가면서도 계속 쳐다보다가 물었다. “저건 누구야?” 마크윈은 제이미를 한 번 쳐다보고는 대답했다.
“그냥 도와주는 사람이다. '레브'라고 불러라. 앞으로 아빠 별장 관리해줄 거니까.”
“별장?”
제이미의 눈이 동그래지면서 묻고는 지금 부녀가 걸어가는 방향을 보았고, 그제서야 저 앞에 있는, 별로 크진 않지만 애초에 위치도 그렇고 평범한 것 같진 않은 건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별장이라고?” “그래.” 마크윈이 대답했다.
“나중에 놀러오고 싶으면 놀러와라. 당분간은 바쁘겠지만.”
“어,” 제이미는 살짝 몸서리를 쳤다. “으, 응.” 그래도 어느새 별장까지 마련할 정도라니. 그리고 둘은 그곳을 향해 계속 걸어갔다.
손에서 먼지를 탁탁 털어내자 주변이 조금 뿌옇게 변했다. “여긴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다일이 중얼거리자 이진은 “그래?”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가 기억을 다시 보여주자 “아,”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래서, 여기가 그 세계구나. 신기하네.”
“앞으로 더 신기한 걸 많이 보게 될 거야.”
다일이 말했다.
“아니, 내가 보기에도 신기한 게 있으려나. 이쪽 세상은 빨리 변하는 편이거든.”
“그건 우리 쪽도 마찬가지잖–”
이진의 말은 허리쪽에서 무언가가 소리를 내는 것에 막혔고, 청년은 그것을 쳐다봤다. “뭐야 이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이런걸 챙겨온 혼령에게 묻자 그는 이진이 집어든 자그마한 것의 옆쪽에 있는 무언가를 누르라고 했다. 곧 손이 움직여 띡 하는 소리를 냄과 동시에,
“으, 야, 으으야, 야, 그러니까 여기 대고 말하는 거 맞얘? 신기하야, 이 마이크란 거.”
“아린?”
이진은 거의 본능적으로 그 손에 달린 무언가를 입에 대고 말했다. 그러자 “으얏!?” 화들짝 놀라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넘어지는 듯 요란한 소리가 났고, 잠시 뒤 주섬주섬 정리하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곧 “오라부이? 오라부이얘?” 아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다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사히 있나 보군.” “아린, 어디니?” 이진은 다시 목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