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 (1)
“하여간,”
제이미는 애꿎은 돌바닥이나 차며 “이래서 장례식은 싫어.” 혼자 투덜거렸다. 바깥으로 나온 그녀는 그래도 숨은 좀 트였는지 크게 심호흡을 몇 번 하면서 돌아다니다가, 잠시 멈추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혼자 멀쩡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엄만 이런 꼴이 보고 싶어서 그렇게 간 거야?”
그렇게 말하는 제이미의 눈동자는 무겁게 흔들리고 있었다. 두 입술을 꾹 닫은 채 제이미는 그렇게 저 푸르고 하얀 곳만 바라보다가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었고, 곧 고개를 내리는 순간 갑자기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응?” 폰은 방에 두고 왔을 텐데? “아,” 그러자 엔시나가 이에 반응했고, 그녀에게 주머니 안쪽을 뒤져보라고 했다.
제이미는 이년이 자기 몰래 뭘 가지고 온 건가 하는 불쾌한 심정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과연 무언가 아주 조그마한 것이 만져졌고 그녀가 집어들자 웬 조그마한 수신기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수신기에는 829.33이라 써져있었다. “아!” 엔시나의 얼굴, 뭐 얼굴이란 게 있다면 말이지만 어쨌든 혼령의 기분이 밝아졌다. “다일!” “응?” 제이미는 꿈에서 본 그 혼령의 이름이 왜 나오나 싶다가, 엔시나가 자신이 아는 것을 약간 전달해주는 것에 그 묘한 느낌을 떨쳐내기 위해 손을 저으면서도 무슨 일인지 대충 이해를 했다. “그래서,” 그녀가 말했다.
“걔 데리러 왔다고?”
“우리도 같이.”
“우리?”
한 번 자고 일어나 기운이 돌아왔는지 다시 한 번 짜증이 밀려오는 제이미.
“웃기지 마. 누가 누굴 데려가? 그냥 남매들끼리 알아서 돌아가라고 그래.”
“어차피 결국 돌아가야 하는걸 어쩌겠어.”
“그럼 너 혼자 가든지.”
“이미 말했지만, 제이미–”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애초에 저딴게 죽을 때까지 옆에 붙어있다는 것부터가 완전 기생충같은 소리 아닌가? 제이미는 기생충이라는 소리에 엔시나의 눈이 가늘어지는 것도 무시하고 계속 뭐라고 투덜거렸다. 일단 처음 만났을 때 멋대로 달려든 것하며, 이후에 별별 일이 벌어지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는 등등 아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먹이는 패턴. 엔시나도 이런 제이미에게 정말 신물이 났는지 이제 제대로 한 번 뭐라 할 기세였는데,
“아, 거기 있었니이?”
“네, 네에?”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제이미도 엔시나도 얼른 상황을 종료하고서는 뒤를 돌아봤다. 아까 그 여자가 잔뜩 취했는지 걷는 것도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오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제이미의 입가가 비틀리며 얼른 달려가 부축하려 하자 여자는 “아냐아.” 손을 휙 저었다.
“괜찮아. 괜찮아. 그냥 그렇지 뭐.”
“저어…”
제이미가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 가만히 있자 엔시나가 “안나. 안나 퀸 블루. 네 어머니 친구야.” 라고 이름을 알려주자 제이미는 그걸 믿고 말고도 제쳐두고 “그, 블루–” 하자 안나는 놀란 얼굴을 하더니 갑자기 소리높여 깔깔깔 웃었다. “날 아는구나!” 그녀가 굉장히 기뻐하는 목소리로 말하자 그제서야 엔시나는 “아, 맞다.” 하고 혀를 찼다. 그리고 영문을 모르는 제이미에게 방긋, 취하고 지친 웃음과 함께 말하는 안나.
“20년만에 보는데! 날 아는구나, 응? 하긴 엄마가 말해줬을 거야. 언니가. 아, 그러니까 친언니는 아니지만, 그래, 친언니는 아니지만 응, 언니야 언니. 나랑! 이 안나 퀸과 그 니콜이! 서로 죽고 깨어나고 아주 생판! 별 꼴을 다 봤던 언니동생. 응, 언니동생이지, 제이미. 안 그래? 우리 제이미. 아주 애기때 본 이후로…”
“직장 동료야.”
엔시나가 짤막하게 요약했다. “둘이 많이 친했어.” 제이미는 얼떨떨하게 가만히 서서 그 여자가 계속 뭐라고 주정부리는 소리를 가만히 듣다가, 순간 그녀가 무슨 잔치에라도 온 듯 신나게 떠벌리다 갑자기 어깨가 들썩이더니, 곧 흐느끼기 시작하는 모습에 “으음,” 조금 당황하며 살짝 물러났다. “미안.” 어느새 정말로 눈물까지 뚝뚝 흘리며 안나가 말했다. “어어,” 제이미는 물러선 발을 움직여 그녀에게 다가갔고, 이에 안나는 기다렸다는 듯 제이미의 어깨를 탁 쳤다.
“내가, 못했어. 아무 것도. 그렇게 죽고, 그런 식으로… 그런 식으로 죽는데 내가 못했어. 뭣도 못했어. 제이미, 제이, 정말 미안해 내가. 정말로. 난 정말 쓸모없어. 그렇게 같이 지내고서, 그렇게 지내고서 그거 하날 몰라가지고, 그렇게 죽는걸 몰라가지고,”
“저, 그,”
사람이 이렇게 울고 그러는 걸 보기는 그렇지만, 왠지 걸리는 게 있어 제이미가 입을 열었다. “제이미,” 엔시나가 주의를 주었지만 전혀 아랑곳않고 묻는 제이미. “그런 식이요?” 이에 안나는 “응?” 무슨 소리냐는 듯, 흐느끼던 것도 멈추고 제이미를 빤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또 태도를 바꿔 “아아,” 이번엔 마치 제이미가 아닌 그 뒤의 저편을 보는 듯, 왠지 조금 멍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런 식. 하지만 제이미, 열심히 살아. 열심히 살고, 으응, 열심히.”
난데없는 동문서답에 제이미는 엔시나의 한숨과 함께 조금 답답해져서 “그러니까 그런 식이–” 조금 더 직접적으로 물어보았으나 안나는 그저 고개만 연신 끄덕였고, “제이미,” 곧 양손을 제이미의 두 어깨에 탁 얹었다.
“정말 잘 커줬어. 정말 잘, 잘 커줬어. 하지만 버텨. 앞으로도. 앞으로도. 정말, 으응? 앞으로도 더 버텨. 제이미.”
“네,” 아무래도 제대로 된 대답을 얻기는 틀린 듯 했다. “네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안나는 그대로 제이미를 한 번 꼭 끌어안더니(정말로 조카를 끌어안듯) 곧 그녀를 지나 저쪽으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그녀가 걸어가는 쪽에는 차 한 대와 운전기사로 보이는 사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이미는 그녀가 차에 타서 떠나는(“가자아!!!”)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이후 그녀가 입맛을 쩝 다시고는 다시 별장으로 돌아갈 때, 엔시나가 그녀에게 한 마디 했다.
“이제 말하지만, 지금 다일에게 우리 위치가 송신되었을 거야.”
“오라 그래.”
제이미가 말했다. “난 안 가.” 갑작스레 죽은 엄마가 왜 죽었는지도 모르는데 가긴 어딜 가겠는가.
“아빠,”
“미안하구나.”
하지만 그날 저녁에도,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도 제이미는 별다른 대답을 얻어내질 못했다. 왠지 자신만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건 이미 확실하게 느껴서, 슬슬 속이 터질 지경임에도 도대체 뭔가 답이 될만한 걸 아무도 말해주지 않자 결국 그녀는 아버지 앞에서 얼굴 근육 하나하나가 일그러졌다. “정말!” 결국 어제 안나만큼은 아니지만 소리를 지르는 딸내미.
“난 누구 자식이야!? 자기 부모가 뭐 때문에 죽었는지도 모른다는 게 말이 돼?”
“미안하구나.”
마크윈은 그 이상의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얼굴에는 정말 엎드려서 절이라도 할 만큼 미안하다는 기색이 너무 솔직하게 드러나 있었고, 그런 아버지에게 제이미도 더이상 뭐라고 할 수 없어, 혼자 씩씩거리며 노려보다가 곧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녀는 나가기 전, 니콜의 영정을 한 번 바라보고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나는 조금 잘게, 제이미. 수면이 필요해졌어. 다일이 지금 바로 올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 그래,”
어차피 듣고 싶은 말은 한 번도 해준 적이 없는 저 쓸모없는(“제이미…”) 녀석은 그냥 조용히나 있으면 됐다. 제이미는 그렇게 있는 대로 욕을 해주고는 다시 밖으로 나가기 위해 복도를 지나며 혼자 투덜거렸다.
“이 인간이나 저 인간이나, 아주 그냥 입에 뭘 채워가지고–”
“네?”
조금 놀란 목소리가 들리자 제이미는 뒤를 돌아봤다. 이제 막 지나친 방문을 열고 레브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혹시 부르셨나요?” 평이한 눈으로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자 제이미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가던 길을 가려던 그녀는 잠깐, 다시 생각해 보니 혹시 저 사람도 하는 생각에, 거의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잠깐만요.” 뒤를 돌아봤다.
“저기 그, 엄마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네.” 레브는 묵묵히 대답했다. “직접 뵌 일도 있습니다.” 이에 제이미는 혹시 지푸라기가 아니라 밧줄인가 하는 희망이 아주 조금 생겨서, “저, 그럼,” 그래도 왠지 저렇게 자신을 아무 감정 없이 차분히 바라보는 눈 앞에서는 직접적으로 묻기가 좀 그래서, 말을 살짝 돌려보기로 했다.
“엄마 장례식 때는 그, 왜 끝까지 있었어요?”
“그야,”
레브가 대답했다. “그게 제가 배운 예의니까요.” “아,” 너무나도 쉽게 나오는 대답에 제이미는 웃음 아닌 웃음이 나왔다.
“죄송해요. 난 혹시나 그쪽이 내 숨겨진 동생이나 뭐 그런가 해서…”
이에 레브도 이런 그녀가 웃겼는지 조그맣게 웃더니,
“이래보여도 앨리슨 양보다 두 살 더 많습니다.”
한 마디 했다. 이에 제이미는 눈썹을 올리며 “아, 그래요?” 아무래도 너무 똑바른 모습 때문에 좀 어려보였나 싶어, 아니, 지금 내가 이런 얘기를 하려고 한 게 아닌데 하고 혼자 정신을 차렸다. “말이 나와서 그런데,” 그녀는 조금 더 주제로 들어갔다.
“엄마에 대해서 뭐 더 아는 거 없나요? 그, 다른 뭐라도…”
“아,”
청년은 무언가 이해했다는 듯 눈이 살짝 동그래졌다.
“그러고보니 집에 자주 들어가시는 분은 아니었군요. 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제이미가 살짝 재촉하자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짓는 레브.
“죄송합니다. 저도 많은 건 알지 못해서… 이번에 정확한 사인이 무엇인지도 잘은 모르고 말이죠. 아버님께서는 별 말씀 안하셨습니까?”
“별로요.”
자신도 잘 모른다는 말과 아빠에 대해서 묻는 것에 동시에 실망해 고개를 젓는 제이미였다. 이에 레브는 “네.” 자신도 조금 궁금하다는 듯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도움이 되지 못해서 죄송하군요. 저도 지금 아버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고는 싶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저는 그분에 대해 여쭤볼 권한부터 없습니다. 무엇보다 자식에게도 얘기해주지 않는 거라면…”
“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이 사람이랑 얘기하다 보니 어느새 그녀 자신의 말투도 점점 고지식해지는 것 같았다. 제이미는 그가 인사할 때마다 그렇듯 허리를 살짝 숙이는 모습에 한 번 웃어주고는 뒤돌아 다시 걸어갔다. 정말 여기는 도움 되는 사람이 없구나. 아니, 사람 뿐만이 아냐. 저 혼령인지 뭔지 하는 작자도… 하긴, 처음부터 방해만 됐지만 오늘따라 특히 자기 주위에 있는 모두에게 거부감이 생기는 그녀였다. 대체 다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왜 나만 혼자 모르고 있–
“앗,”
혼자 속으로 투덜거리던 제이미는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잠깐,” 곧 다시 걸어가기는 했지만 제이미는 다음 순간 레브의 말 한 마디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고는 싶습니다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아 한다? 제이미는 아주 조용했으나 이미 무언가가 떠올라 그것에 대해 한참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 밤,
마치 먼지가 두 발로 달려가듯 아주 소리없이, 제이미의 방 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제이미는 조심스럽게 그 틈 사이로 걸어나왔고, 불빛도 없이 어두운 중에도 낯부터 저녁까지 일부러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자기가 길을 스스로 외운 것을 토대로 차분하게 움직였다. 다행히도 엔시나는 아직 자고 있는 듯 했다.
곧 그녀는 복도로 나와 계단 쪽으로 걸어갔고, 곧 계단을 하나씩 천천히 내려가 지하 2층, 이어서 지하 3층, 4층, 5층… 그렇게 제이미는 지하 7층까지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고 천천히 내려갔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인지는 몰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알아내는 수밖에.
B709호실이었던가? 지하 7층 한쪽으로 걸어간 제이미는 조금 헷갈리기도 했으나 곧 어느 방문에 귀를 대자 안에서 가볍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왔고, 제이미는 문을 조심스럽게, 문고리부터 아주 천천히 돌려가며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열었다. 다행히 별 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후,”
제이미는 마크윈이 조용히 자는 모습을 보며 짧은 숨을 뱉었다. “죄송해요, 아빠.” 물론 자기 부모를 상대로 이런 짓을 함부로 한다는 게 많이 찔리기도 했지만, 뭐 딱히 건강에 해가 되는 것도 아닐 테고. 그냥 사람이 자는 사이 알아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다만 지금 무엇보다 제이미를 찔러대는 것은, 자기가 최근 자신에게 일어난 별 희한한 일들을, 이젠 믿는 것을 넘어 아예 자기가 활용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됐다, 됐어. 제이미는 자기가 정말로 미쳤다는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지금은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하면 되는 것이었다.
꿀꺽,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킨 제이미는 천천히 두 손–아린의 경우야 아린도 그 혼령 어쩌구와 같이 있는 애였고 멀쩡히 깨어있는데다 그걸 허락한 상태였지만, 그 세 조건 중 한 가지도 아닌 사람은 아무래도 두 손을 써야 할 것 같았다–을 뻗어, 마크윈의 머리 위에 천천히, 살포시 올려놓았다.
이러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지? 뭐, 그때는 그냥 아빠가 너무 힘들어 보여서 안마라도 해주러 왔다고 핑계를… 아니, 그건 너무 어이없으려나. 아니 그냥 잠 안와서 돌아다니다가 들어왔다고 대충 둘러대면 되겠지. 어쨌든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고, “자,” 제이미는 자기도 모르게 손에 살짝 힘을 줬다가 놀라면서 얼른 풀었고, 단순히 힘을 주는게 아닌 무언가를, 그녀가 지금까지 한두번 밖에 느끼지 못했지만 어쨌든 무슨 느낌인지는 아는 그 무언가를 저 어딘가에서 끄집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아, 그러고보니 네 번째 조건이 있었네. 엔시나가 지금 자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깨울 수도 없으니 제이미는 어떻게든, 자기 혼자서도 이걸 할 수 있다고 최대한 믿어보면서, 마치 처음 보는 물건을 가지고 이리저리 굴리기도 하고 깨물어보기도 하는 어린애처럼 어떻게 자기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려 애를 썼다. 다시 손에 힘을 줘보기도 하고, 머리에 힘을 줘보기도 하고, 어떻게든 그 무언가를 찾아내려 노력하면서 어느새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조금 맺혔다.
“제발,” 어느새 그녀는 스스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제발,” 정말 이 모든 게 사실이라면, 자신에게 벌어진 그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제발 그게 자신에게 아주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날도 좀 있어달라는 제이미의 소망은 점점 간절해졌고, 그러다가 어느새 손도 머리도 아닌, 아예 그녀의 몸이 아닌 어딘가에 그녀의 집중이 서서히 닿아가기 시작하는 것을 어느 순간 자신도 느꼈다.
“읏,”
여전히 생소하지만 낯설지는 않은 느낌이 제이미에게 서서히 흘러들어오는 순간, 그녀는 더이상 여기 있지 않았다.
……
…..
….
…
..
.
그녀는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 아직 젊은 나이의 한 청년. 완전히 젊은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한 명의 남자였고, 다만 지금 무슨 생각으로 눈앞의 이 골칫덩어리 여자를 바라보고 있는지는 어째 제이미 자신이 그 남자였는데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 정말 지긋지긋하고 당장이라도 몇 대 후려패고 싶은 여자는, 도대체 뭐가 재밌는 건지 뻔뻔하게 하핫 웃으며 제이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잡았네? 잘 했어, 마크. 이제 난 죽는 거야?”
”……”
제이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여자를 도대체 어찌 해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주 짤막하게나마 머리를 스쳤으나 그 생각도 곧 전혀 닿지 않은 뿌연 연기 속으로 사라졌고, 어쨌든 제이미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결정했는지 곧 입을 열었다.
“니콜 킹 루이즈. 그래, 난 지금 널 죽일 권한이 있어. 사실은 널 보자마자 당장 죽여야 하고.”
그리고 제이미는 이어서 뭐라고 더 말했으나 어째서인지 입은 움직이는데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니 지금 그녀가 여기 서 있다는 사실 자체도 점점 흐려지고, 눈앞의 여자도 흐릿해졌다. 아예 모든 것이 한 번 흐려지더니, 다음 순간 제이미는 깔끔한 정장을 입고 어딘가에 서 있었다. 눈앞에는 자신을 보며 미소짓는 사람들이 있었고, 옆을 본 제이미는 방금 전, 아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죽여야 했던 여자가 자신을 바라보며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띄우고는 손을 들어 그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자신을 아직도 어린애취급하는 태도에 뭐라 투덜거리려는 순간, 다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더니 역시 모든 것이 흐릿해졌다.
“우, 애애,”
한 아기가 뭐라고 웅얼거리는 것이 보였다. 제이미는 정말 말로 표현못할 행복과 함께 그 아기를 바라보고 있었고, 아기를 안은 여자는 그런 제이미를 바라보며 지친 웃음을 보였다.
“이름, 뭐라 하기로 했더라?”
“제이미.”
제이미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이미야.” 이를 들은 아기도 제이미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아기의 엄마, 자신의 아내인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인 순간, 다시 한 번……
철컥,
무거운 문을 열고 들어간 제이미. 안에는 한 사람이 손발이 묶인 채 의자에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마크.” 여자가 입을 열자 제이미는 무거운 한숨을 속으로 토해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니키.” 이에 여자는 그를 화가 나기도 하고, 조금 슬퍼하기도 하는 심정이 뒤섞인 얼굴을 하고서, 그렇게 제이미가 전혀 견딜 수 없는 얼굴을 하고서 그를 쳐다봤다.
“날 구하러 온 건 아니지? 아니, 왜 당신이 저들과 같이 있는 거야?”
“말하자면 길어.”
제이미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에게 설명할 방법이 전혀 없었기에. “아니,” 니콜은 고개를 저었다.
“전혀 길지도 않아. 너도 이쯤이면 알았을 거 아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 말을 들은 제이미는 생각나는 것이 있어, 역시 무엇이 생각났는지는 제이미, 그러니까 지금 이 남자가 되어 여자를 바라보는 제이미 본인에게는 전혀 보이거나 느껴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생각나는 것이 있음은 알고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이었군.” 다시 니콜을 바라보는 제이미는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졌다. 곧 고개를 젓는 그.
“정말로, 그 혼령이란 게 있긴 있었어. 그것도 하필 당신이라니. 왜 하필…”
“아무도 탓하지 마, 마크.”
니콜이 말했다.
“나도, 엔시나도, 당신도 그 누구도 탓할 게 아냐. 하지만 난 아직도 모르겠어. 왜 당신이 저 녀석들이랑 함께인 거야? 자기가 무슨 짓거리에 동참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어?”
고개를 끄덕이는 제이미. “알지.” 그는 당연한 듯이 말했다. 그는 머릿속에 자신이 들었던 모든 것이 스쳐 지나갔고(이 또한 제이미 본인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이어서 그는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다시 말을 꺼냈다. “맹세해.” 그의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었다.
“이 일에 더이상 참견하지 않는다고. 그러면 어떻게든 내가–”
“아니,”
니콜은 단호했다. “그건 안돼.” “멍청하게 굴지 말고,” 제이미 또한 흔들리는 목소리를 다잡고 단호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너가 죽을 거라고. 그것도 내가 너를 죽여야 한단 말야. 상황이 이해가 안되는 거야?”
“이해하니까 이러는 거야.”
고개를 젓는 니콜. 연한 갈색의 두 눈이 제이미의 심장을 무섭게 때려대고 있었다. 제이미는 눈을 감았다. 여전히 뿌연 머릿속에서 지나가는 몇몇 어떤 생각들. 그리고 잠시 뒤 혹은 한참 뒤 그가 눈을 떴을 즈음, 그 또한 만만찮게 니콜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 그가 말했다.
“그럼 당신은 죽을 거야. 이거 외엔 더 할 말이 없어, 난.”
그리고 뒤돌아서서 문을 열고 나가려는 그에게 니콜은 “변했구나, 당신.” 한 마디를 내던졌고, 이에 잠시 발을 멈춘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모두가 날 변하게 만들었어.”
말을 마치고는 문을 탁 닫은 그는 그대로 앞만 보고 걸어갔다.
……
…..
….
…
..
.
한 차례 폭풍이라도 지나간 걸까, 제이미는 도대체 뭐가 뭔지, 자기가 누구이고 이곳이 어디인지, 또 세상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혼란함 속에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곧 몇초만에 정신을 다잡으면서, 아니 정신을 다잡으려는 순간 그녀가 지금까지 본, 아니 자신이 아닌 마크윈 앨리슨으로서 기억하는 것들이 그녀를 매섭게 덮쳐왔고, 제이미는 머릿속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 몰려오는 기억들 때문이 아니라 그 기억 속에서 본 것들 때문에. “아아,” 제이미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교감 중에 그녀가 머리를 세게 쥐었었는지, 그녀의 눈앞에서 마크윈이 끙끙거리며 머리를 문지르더니 눈을 떴다. “으음,” 무슨 꿈이라도 막 꾼 얼굴로 정신없어하다가 곧 딸아이를 발견하고는 “제, 제이미?”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지는 그의 앞에서, 제이미는 그만 털썩 주저않고 말았다.
“아, 아빠…”
제이미는 겁에 질리고, 한 대 맞은 듯 멍하고, 너무나 정신을 걷잡을 수 없는 얼굴로, 심하게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빠…” 입에서 새어나오는 소리는 거의 죽은 사람의 숨결과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