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
바스락,
“그래서얘,”
무성한 나뭇잎이 가린 자리를 헤치고 아린이 먼저 걸어나오며 말했다.
“어무가 나한테 말했으야. 나는 뭐 어른되고도 맨날 정신없이 살 것 같다고얘, 나를 좀 붙잡아둘 수 있는 혼령이 필요하다고야. 그래서 어무가 골랐으얘. 리냐가 이것저것 많이 가르칠 거라고.”
“잘 선택하셨네.”
제이미가 웃으며 말했다.
“넌 정말 정신없는 애야.”
이에 입을 삐죽 내민 아린은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셋 중 가장 활발하게–애초에 더 다쳤다고 해도 아린 자신이 다쳤다고 빌빌거리는걸 참지 못했겠지만–먼저 나서며 이진이 말해주는 대로 길을 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계속 입을 쉬지 않는 아린.
“솔직히 리냐가 싫진 않얘. 하지만 잔소리 너무 많야. 가끔은 그냥 조용히만 있어줬으면 좋겠–”
“애초에 너가 잔소리할 상황을 만들잖아.”
리니아가 아린의 말을 뚝 끊어 버렸다. 이에 아린은 잔뜩 혼난 어린애처럼 목소리가 작아지면서도 뭐라고 툴툴거렸고, 이를 본 제이미는 아린이 혼령에게 한 소리 들었음을 대충 짐작해서 자신도 더이상 묻지 않았다. 한편 가장 많이 다쳐서인지는 몰라도 영 혼자서 조용히, 발을 절며 걸어오는 그의 얼굴에는 사실 다친 게 문제가 아니라 지금 몇시간째 계속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보이고 있었다.
“저기,”
이런 그를 잠시 쳐다보던 제이미가 말을 걸었음에도 조용히 있자,
“이진…이라고 했어요? 이름이.”
라고 직접 불렀고, 이에 고개를 돌린 이진은 약간 피곤한 눈으로 “말 놔요.” 짤막하게 말하고는 다시 무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가만 놔둬야 할 듯 싶어, 제이미는 다시 아린을 따라가기만 했다. 그리고 아린은 어느새 다시 입이 살아서 이런 제이미를 돌아보며 물었다.
“언니얘는 어쩌다 혼령이랑 만났으얘?”
“어?”
어쩌다가 혼령이랑 만났냐니. 생전 처음 들어보는 질문에 제이미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아니 애초에 혼령이랑 만났다는 거 자체를 뭐랄까, 그녀에게 있어선 여전히 생소한 느낌이 남아있던 것이다. 때문에 제이미가 입을 연 채 아무 말이 없자, 옆에서 이진, 아니 잠시 자리를 바꾼 다일이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맞춰볼까.”
어머니가 동반자였고 그녀의 부탁으로 딸에게 간 거라는 상황을 아는 다일에게 있어 답은 뻔했다.
“한 마디 인사도 없이 무작정 달려들고 봤겠지, 안그래?”
“으흠,”
엔시나가 헛기침을 했다. 왠지 다일에게 뭐라고 할 듯한 표정–역시 표정이라기보단 그런 느낌뿐이었지만–의 그녀를 제이미는 가만히 쳐다보고, 느끼고 있다가 그녀가 보란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에 다일이 “그래야지.” 장난스럽게 한숨을 내쉼과 동시에 엔시나는 조용히 뒤로 내뺐다.
제이미는 다일을 가만히 쳐다봤다. 생각해보니 그녀가 본 그 기억들, 나르사의 기억 속에서 본 그는 아주 오랜 세월, 사람이라면 절대 감당할 수 없는 세월이 흐르기 전에 살았었다. 그런데 이런 그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꽤나 신기하다고 해야하나? 이런 느낌은 흔하지가 않았기에 제이미는 마치 오래된 유물을 보는 눈으로 다일을 그렇게 쳐다봤다.
“저기,”
그렇게 쳐다보다가 다시 입을 연 제이미.
“그럼, 다일? 그쪽은 얼마나 저 세계… 사람들만 살던 곳에 있다 돌아간 거예요?”
다일이 다시 제이미를 쳐다봤다. “글쎄,” 제이미의 호기심을 본 혼령은 엔시나가 말해주지 않냐고 대답하려다 고개를 돌려 앞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시간이 꽤 긴 것을 보면 그 또한 엔시나만큼은 아니어도 꽤 오래 있었던 모양. 제이미는 그가 대답할 때까지 저 앞에서 아린이 큼지막한 돌 몇 개를 치워내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옆에서 다일이 입을 열자 다시 그를 쳐다봤다.
“아마도 한–”
“으얏!?”
갑자기 아린이 소리를 지르자 다일도 제이미도 그쪽을 쳐다봤다. 아니, 제이미의 경우 쳐다보려고 했다. 그녀가 미처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퍌을 꽉 붙잡는 느낌에 놀라서 고개가 돌아가다 멈췄기에. 하지만 그녀가 놀라는 순간 이미 다른쪽 팔도, 이어서 두 다리에 이어 아예 몸 전체가 사방에서 압축하듯 눌러대는 감각에, 완전히 그 자리에 뻣뻣하게 고정된 제이미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우와아–” 이런 그녀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마치 누군가가 멱살을 잡고 들어올리듯 그렇게 땅에서 발이 떨어져 원래의 발목 위쪽까지 올라간 그녀는 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아, 잠깐,”
당황한 다일, 아니 이진은 제이미를 향해 각각 한 손이나 양손을 뻗은 상태로 천천히 다가오는 어떤 사람들에게 입을 열었다.
“여기 이쪽은 엔시나라고요. 누군지 알아보기도 전에 그런 식으로 대하면…”
이진의 한 마디에 제이미를 당장이라도 죽일 듯이 포박했던 그 사람들은 서로 뭐라고 수군거리거나, 아예 말이 없이 눈빛만 서로 교환했다. 이에 이진은 다시 뭐라고 말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사람들 뒤에서 “아린!” 한 여자가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려왔고 제이미가 그쪽을 바라보자 어느 중년의 여성, 왠지 아린을 많이 닮으면서도 이진처럼 얌전해보이는–지금은 다짜고짜 달려오고 있지만–사람이 이쪽에 오자마자 먼저 아린을 붙잡고서 성난 목소리를 냈다.
“도대체 어딜 가서 이렇게 다친거야! 하여간 애가 잊을만하면 또 나가서!”
“으, 으야,”
아린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미안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아린을 게속 붙잡은 채, 어머니는 이번엔 이진에게 고개를 돌려서 물었다.
“너까지 그렇게 다쳤어? 도대체 뭔 일이니 이번엔? 저 사람이 무슨 짓을 한 거야?”
“저 사람이,”
조금 답답해졌는지 이진이 말했다.
“바로 엔시나의 동반자예요, 엄마. 저희들 인간계에 갔었다고요.”
“뭐?”
어머니의 눈이 동그래짐과 동시에 제이미를 계속 붙잡고 있는–이쯤되니 제이미는 손을 직접 대지도 않은 이들이 이전에 엔시나가 썼고 자신도 어쩌다 한 번 쓴 그 힘을 쓰고 있음을 알았다–사람들도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뭐라고 떠들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동요하자 그들보다 살짝 뒤에 있던, 키가 큰 남성 하나가 몇 발짝 걸어나오면서 입을 열었다.
“분명 영이 느껴지긴 하지만, 옷차림과 생긴걸 보니 저쪽에서 건너온 건 확실해. 무슨 수법을 써서 속였을 수도 있지 않나?”
뭐가 느껴진다고 하는건지를 떠나, 제이미는 말하는 것부터 딱딱한 그 남자를 약간 기분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마치 커다랗고 절대 움직이지 않는 바위가 딱 서있는 것처럼, 꽤나 큰 그의 키도 그렇지만 얼굴부터가 고지식하고 꽉 막혀보이는, 왠지 저런 표정을 언제나 짓고 사는 듯한 그런 느낌. 그 때문에 왠지 젊어보이는, 기껏해야 이진보다 몇 살 정도 더 많아 보이는 모습에도 제이미의 눈에는 웬 딱딱한 아저씨가 저기 서서 말하는 것만 같았다. “란,” 이런 그를 보며 이진은 짜증을 냈다.
“엔시나 맞으니까 괜히 분위기 잡지 말고 풀어줘요. 게다가 인간계로 간거 이미 알면서 보아하니 여기 사람들한테 말 안한 것 같은데 왜 그랬어요?”
이 말에 사람들, 아린과 이진의 어머니까지 포함해서 모두가 그 남자를 쳐다봤다. 이에 돌처럼 차갑게 굳어있던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흐트러지더니, “그,” 입을 열었다가 안되겠다 싶어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때 무언가가 일어나서인지는 몰라도 제이미는 지금 자신을 공중에 띄운 게 저 사람임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그리고 거의 1초만에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거의 위화감이 들 정도로 온순한 얼굴을 했다. 이제는 이진보다도 더 어려보일 정도로.
“정말로 엔시나인가요?”
“잠깐,”
지금까지 조용하던 엔시나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마르한?” 그녀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뭐가 뭔지 모르는 제이미는 차라리 그냥 너가 직접 얘기해보라는 식으로 신호를 보냈고, 자신도 살짝 눈을 감은 채 혼령이 앞으로 나서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보았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는 항상 엔시나가 거의 강제로 밀고 나왔었는데.
“마르한인가요?”
그리고 잠시 뒤 눈을 뜬 엔시나는 역시 제이미와는 약간 다른 얼굴을 하고서 물었다. 마르한이라니 지금 얘기하는 저 사람, 아니 수백년을 저쪽에서 살아온 엔시나가 아는걸 보면 혼령이겠지. 그리고 마르한이라는 그 혼령은 “네.” 그러나 자신도 지금 저 여자에게 있는 혼령이 누구인지는 모르겠다는 듯, 의아해하는 얼굴로 대답만 했다.
“죄송하지만, 너무 오래된 일이라 저도 확실하진 않네요.”
영 기대에 차지 않는 대답과 함께 입술을 깨무는 그를 엔시나는 가만히 바라보았고, 마르한은 혼자 생각하다가 그녀의 눈이 가늘어지고 나서야 아차 싶어 주위를 둘러보면 일단 놔주라고 한 마디 했다. 그런데 제이미가 다시 보니, 저 사람, 아니 사람과 혼령은 다른 이들처럼 손을 뻗거나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하지만 그녀를 공중에 들어올려 꼼짝 못하게 한 건 그 란이라는 남자가 분명했다. 딱히 몸짓도 없이 그냥 힘을 쓴다고? 사령들과 싸울때 별 고생을 다 해서 겨우 한 번 그 힘을 써본 제이미에게는 너무나 아득한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한편 이런 그녀와 혼령을 가만히 보며 생각하던 마르한이 말했다.
“신령님이라면 아시겠죠. 웬만한 건 다 기억하시니까. 어서 갑시다.”
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움직이기 시작했고, 한편 아린을 꼭 붙잡고 있던 그녀의 어머니는 아직 저 처음 보는 여자를 경계하는지 이진을 불러서 얼른 가자고 했다. 아린이 언니얘랑 같이 가자고 말했으나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온 제이미는 “괜찮아.” 싱긋 웃어보이며 둘을 먼저 보낸 뒤, 자신은 먼저 앞서가는 사람들의 뒤에 남아 천천히 따라갔다. 괜히 처음 보는 저 사람들 사이에 섞여가는 것도 그녀에겐 조금 부담스러웠기에.
“어차피 곧 익숙해질 거야.”
엔시나가 부드럽게 말하자, 제이미는 눈만 깜박였다. 익숙해지든 아니든 어차피 여기에서 살아야 할 것 아닌가. 그러면서 자기가 왜 여기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떠올리려는 것을 엔시나가 탁 쳐냈다. 어떻게든 그녀가 우울해질만한 쪽으로 가는걸 막기 위해.
“그러고보니,”
그런데 이렇게 뒤에서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녀에게 다가온 이가 있어 제이미는 고개를 들었다. 아까전의 그 마르한이라는 혼령이었다. 표정을 보니 확실했다.
“이름이 뭐라고 하셨나요?”
존댓말을 쓰는 혼령은 처음 보는 제이미. “제이미.” 그녀는 곧 대답했다. 어차피 앨리슨이라는 성따위 이젠 의미도… “제이미!” 엔시나가 다그치자 제이미는 곧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방금 생각을 스스로 지웠다. 그리고 이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마르한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소개가 늦었네요. 마르한이라고 합니다. 현 신관이자, 계승자들 중 하나예요.”
“계승자요? 신관?”
제이미가 눈을 깜박이자 엔시나는 곧 알게 될 거라고 말해줬다. 그리고 마르한은 살짝 미소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처음에 란이 무례하게 대한 건 잊어주세요. 워낙에 젊은 나이에 신관이 되다보니… 아직은 미숙한 탓에 냉정해지는 법밖에 모릅니다. 원래부터 그런 인간이었다면 제가 동반자로 선택하지도 않았으니까.”
“아,”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제이미. “네에…” 그리고 마르한은 제이미보다 조금 앞에서, 그러나 그녀가 일행을 놓치진 않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면서 움직였다. 하지만 역시 혼자 가고 있다는 건 변하지 않았기에, 제이미는 왠지 어딘가 빈 느낌과 함께 말없이 땅만 쳐다보면서 계속 걸어갔다. 이런 그녀에게 누구도 말을 걸어주지 않았지만 별 불만이 없이, 아니 사실은 아무 느낌도 없이, 마치 폭풍이 지나간 뒤 고요해진 것처럼 그냥 멍하니 걸어가는 제이미였다. 그리고 이렇게 걷기를 계속하다가 마침내,
“내 기억이 맞다면… 이제 다 왔어.”
엔시나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제이미는 고개를 들어, 앞에 가는 사람들이 나무 사이로 뚫린 길로 나가는걸 쳐다봤다. 잠시 뒤 자신도 그 길로 나가게 되었고, 그렇게 낯에서 저녁이 될 때까지 계속 어두운 숲속에만 있던 그녀가 나온 순간, 마치 새로운 세상을 본 듯, 아니 새로운 세상이 맞긴 하지만 진정 제이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혼령계에 온걸 환영해, 제이미. 하긴 나도 정말 오랜만에 돌아왔지만.”
집에 돌아온 기쁨에 찬 엔시나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