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
“연못 아냐?”
제이미가 눈을 깜박였다.
“연못이잖아.”
그녀는 재차 중얼거리며, 산중에 웬 연못이, 그것도 가장자리의 돌을 보아하니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었거나 이미 있는 것을 이렇게 장식한 듯한 그것에 조금씩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수면에 비치는 달이 저 하얀 돌과 함께 밝은 모습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연못…” 천천히 걸어가면서 또 중얼거리는 그녀.
그렇게 수면 앞에 다다른 제이미는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마치 커다란 거울을 연상케하듯 넓고도 평평하며, 그 주변은 밤인데도 어째 벌레 우는 소리 하나 없어 이상하리만큼 조용한 분위기였다.
아니, 정말로? 제이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 들어올때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이 연못 근처 빙 둘러진 주변에는 정말 풀만, 그것도 저 아래처럼 무성한게 아니라 아기 손처럼 조그만 것들만 돌이나 흙 사이로 몇가닥 삐죽 고개를 내미는게 전부였고, 그 외의 생물이란 생물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 이 연못 안에도 마찬가지일 것임을 제이미는 곧바로 짐작했다.
그렇게 너무나 조용하고, 거의 오싹할 정도로 조용한 연못의 수면은 그 침묵에 가까운 고요함을 거울처럼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 제이미가 다시 내려다보면 그 평평한 물빛은 그녀를 끌어당길 것 같으면서도, 정작 누군가가 손이라도 대는 순간 바로 밀어내 버릴 것 같이 도도하고도 아름다웠다.
제이미는 한참동안이나, 심지어 자신이 왜 여기 왔는지도 까맣게 잊은 채 그 말없는 연못만을 자신도 아무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계속 홀려있다가 갑자기 정신을 차린 것은 그녀의 손에 잡혀있던 영 덩어리가 갑자기 빛을 강하게 뿜어냈을 때였다. “앗,” 놀란 제이미는 마치 뜨거운 물건을 만진 것처럼 덩어리를 떨어뜨렸고, 그녀가 뭐라 하기도 전에 하얗고 푸른, 청록빛의 그것은 땅에 뚝 떨어지더니 곧 그 위에 살짝 떠올라서 그대로 뒤의 길을 따라 산을 내려갔다. 그러고보니 여긴 벌레고 저런 덩어리고 뭐고 없는데 혹시 그런 생명체–제이미는 어느새 저것들이 생명체라는 결론을 내린 뒤였다–들이 피할만한 뭔가가 있는 걸까? 정작 그녀 자신은 별다른걸 느끼지 못한 것이다.
”……”
제이미는 그렇게 둥둥 떠나간 영 덩어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곧 무릎에서 통증이 느껴지자 얼굴을 찡그렸다. 역시 그 덩어리가 그녀를 어떻게 치료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것이 떠나가자마자 무릎과 그 아래의 다리가 탁 풀리면서 다시 쑤시기 시작한 제이미는 결국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옆으로 눕혀야만 했다. 이러면 그나마 나아지니까.
그렇게 연못 앞에 앉은 제이미는 다시 수면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거울처럼 저 위의 모든 것을 매끄럽게 담는 중, 이번엔 더 가까이서 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제이미 자신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제이미는 그렇게 연못을 통해 보이는 젊은 여자의 얼굴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수면에 비친 그녀의 뒤로는 달과 별이 아름답게 빛났고, 그에 비해 먼지가 묻고 긁히기도 한 이 아가씨의 얼굴은 거의 공주 옆에 선 거지처럼 너무나도 초라해보이기만 했다.
“칫,”
단순히 얼굴을 때문만은 아니었다. 공주는 자신을 낳아준 왕과 왕비에게 언제나 사랑받으며 자라는데, 거지는 부모가 있지도 않은걸?
“제이미,”
엔시나가 아까처럼 그녀의 생각을 막아섰고, 방해받은 제이미는 불평 대신 손을 움직여, 혼령이 허리에 찬 칼을 꺼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자신의 머리 쪽으로 가져가는 제이미를 보며 눈이 동그래지는 엔시나.
“제이미?”
“도와주기나 해.”
혼령은 군말없이 제이미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거들어주었고, 그렇게 제이미는 물 위에 비친 자신을 보며 아직 정리가 안된 나머지 머리카락을 슥슥 잘라냈다. 마치 누군가를 죽이기라도 할 기세로, 한 가닥 한 가닥 놓치지 않고 잘라내는 제이미는 마치 자기 자신을 내던지는 듯한 느낌도 들었지만, 그녀는 이런 불쾌함과 왠지모를 새로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엔시나는 이런 그녀를 말없이 도와줬고, 잠시 뒤 제이미의 손에는 금발의 매끄러운 머리카락이 한줌 뭉쳐있었다.
그것을 든 채 잠시 수면을 내려다보는 제이미. 최소한 머리는 전부 어깨에 닿을 정도로 정리된 여인이 보였다. 그리고 제이미는 이를 기념이라도 하듯 손에 들고 있던 머리카락을 그대로 저 침묵의 연못 위에 던졌고, 거울 같았던 연못은 갑작스런 노크에 놀라 물결을 치며, 방해한 사람의 모습을 포함해 모든걸 잠시 흐트러뜨렸다.
제이미는 눈을 감았다. 이제 끝났다는 생각이 그녀를 감쌌고, 이제 그녀가 살아갈 곳은 이곳이라는 새로운 사실이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이미,” 엔시나가 조용히 말을 걸자, 제이미는 눈을 감은 채 혼령에게 천천히 말했다.
“너는, 계속 있어줄 거지?”
아직 속으로만 말하는 거에 익숙치 않은 그녀였기에, 조용한 산 안에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너만은 계속 있어줄 수 있지? 앞으로 계속?”
“그래, 제이미.”
고개를 끄덕이는 엔시나. “약속할게.” 그녀는 더이상의 말 대신 자신의 동반자를 조용히 감싸주었고, 제이미는 이런 그녀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래, 이렇게라도 살아가면 그녀는 만족할 수 있었다. 이렇게라도. 그렇게 입으로 말하다가 곧 속으로만 되뇌던 그녀가 감았던 눈을 떴을 때, 어느새 잠잠해진 연못 위에서는 그녀가 던진 머리카락이 불타고 있었다.
“아!?”
제이미는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저 금빛, 아니 금빛이었던 머리카락이 불타면서, 것도 그냥 불타는게 아니라 마치 저 수면처럼 혹은 저 위의 밤하늘과 달빛처럼 하얗게, 그리고 하얀 것보다 더 강한 파란빛으로 불타고 있었다. 제이미는 휘둥그레진 눈을 깜박였다. 특정 물질을 태우면 불의 색이 달라진다는 얘기는 화학 담당 선생님한테서 들어봤지만, 저건 그냥 머리카락이잖아? 아니, 애초에 물 위인데 어떻게 불에 탈 수가 있지? 게다가 타는 소리도, 냄새도 전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불에 손을 가져다 대보려는 제이미. 그러자 확실히 온기가 그녀에게 전해졌다. 아니, 온기를 넘어 무언가가 더 느껴진다고 해야할까. 마치 지금까지 얘기를 들은 그 '영'이라는 힘이 뜨겁게 느껴지는, 마치 누군가가 그 힘을 가지고 불을 붙일 정도의 열기로 바꾼 듯한 그런 느낌. 처음 보고 느끼는 거였지만 너무나 강하고 생소했기에 제이미는 단번에 그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그녀에게,
“너는 누구이냐?”
마치 물결처럼, 혹은 바람처럼 퍼져오면서 살랑이는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네?” 고개를 든 제이미의 눈앞에는 웬 소녀가 조용히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인간이구나.”
새하얗고, 은빛과 동시에 약간의 회색도 감도는 그 소녀가 다시 그 특유의 일렁이는 목소리를 냈다. 단순히 귀에 들리는 목소리가 아니라, 마치 그렇게 말하는게 다른 감각으로도 전해지는 듯, 제이미의 몸과 마음에까지 퍼졌다. “아,” 생전 처음 보는 소녀, 아니 처음 봤음에도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음에도 도저히 사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저 아이에게 제이미는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몰라 입만 뻥끗거렸다.
“그, 그게, 난,”
“아! 잊고 있었어!”
엔시나가 벌떡 일어서는 게 느껴졌다.
“저분이 그 신령님이야, 제이미.”
”…엔시나?”
그리고 엔시나가 제이미에게 말한 순간, 그걸 꿰뚫어보기라도 한 것인지 소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는 다시 제이미를 유심히 훑어보는 그녀.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고 신관이라는 작자도 전혀 확신하지 못하는 것을 단숨에 알아본 그녀를 제이미는 멍하니 쳐다봤다.
“너, 인간계에서 온 것이냐?”
“어, 으, 응.”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제이미는 그 신령이라는 애, 아니 어린애라고? 이제 보니 최소 아흔은 넘은 할머니 같은… 아니, 다시 어린애같기도 하고, 다 자란 아가씨같기도 하고, 다시 할머니, 소녀, 그렇게 모습은 하나인데 전해지는 느낌은 계속 왔다갔다하는 그 신령이란 이를 바라보았다.
이제보니 소녀는 옷을 입은 것 같지도, 아니 아예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애초에 눈으로는 그 모습조차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눈에 보이는 건 그저 하얗고 은빛의, 그리고 회색의 무언가가 하나의 형체로 뭉쳐져, 사람처럼 저기 서있는 것일 뿐, 딱히 피부라고 할 것도 없었고 눈이나 코 입 등도 아예 없어 보였다. 다만 다른 느낌으로는… 아직 익숙하지 않지만 그 영인지 뭔지 하는걸 느낄 수 있는 그것으로는 분명히 저 존재가 보인다고 할까. 일단 소녀이면서 아가씨이면서 노파라는 그 정체불명의 나이는 둘째치고, 더 거대한 모습을 할 수 있음에도 일부러 저렇게 열 살쯤 되어보이는 소녀의 크기로 압축해 모아놓은 듯했다. 하지만 그런 어린 모습으로 계속 유지하기가 힘들기라도 한 것인지그 소녀였던 느낌이 다 자란 아가씨로도 바뀌고, 다 늙은 노인으로도 바뀌다가 다시 소녀로 돌아가는 등, 자기가 계속해서 자라고 퍼져나가는걸 억지로 가두고 억제하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확실히 손이라고 할 만한 건 있는 듯 했고, 발도, 앞을 보는 눈도, 충분히 있는 것 같았다. 일부러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는 걸까? 제이미는 저 신령이라는 여자의 새하얗고, 은빛을 내는 머리카락이 바람도 없이 이쪽저쪽으로 살랑이는 것을 볼 수… 아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구나.”
이제보니 저 신령이라는 여자–어쨌든 성별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가 말하는 것도, 목소리를 낸다기보단 자기 자신을 뻗어, 손이든 뭐든 뻗어서 듣는 사람을 만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서 저렇게 물결이나 바람같은 걸까 하면서 제이미는 대충 그러려니 하고 끝냈다. 저 여자의 정체가 뭔지에 대해 더 생각했다간 머리가 아파올 것 같았기에.
“돌아온걸 보니 인간계에서 무슨 일이 생겼거나, 아니면 더 조사할 것도 없다는 뜻이겠지. 맞느냐?”
자주 바뀌긴 하지만 주로는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일까, 제이미는 왠지 저 애가 자신한테 말하는 태도가 조금 건방지다는 대담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제이미!” 엔시나가 다그치면서 저 신령이 묻는 말에 대한 대답을 전해줬고, 이를 전해받은 제이미가 입을 열었다.
“둘 다라는데.”
“둘 다?”
신령이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는 제이미에게 천천히 다가오는 그녀. 일단 발이라고 할 만한 게 있는 것 같다고는 했지만, 저렇게 다가오는 모습은 걸어온다기보다는 마치 바닥 위에서 미끄러지는… 아니, 바닥이라고? 제이미는 눈을 깜박이고 다시 봤다가 순간 그녀를 처음 본 순간처럼 정신이 멍해졌다.
소녀는 물 위를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면 다시 돌아가서 오래 지낼 일은 없다는 것이구나.”
제이미가 놀란 사이 어느새 그녀의 눈앞까지 다가온 신령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자신의 세계에 온 손님을 바라보았다. “다쳤구나.” 그녀가 아무 감정 없이 말하자 제이미는 대답을 못하고 있다가, 순간 그녀가 손을 뻗어, 아니 손 뿐만 아니라 더 커다란, 아무래도 자신이 가진 힘을 뻗은 듯 제이미를 감쌌다. 놀라서 흠칫한 제이미는 다음 순간 무언가 굉장히 크고도 뚜렷한 기운이 전해져오며, 이리저리 쑤시고 따갑고 하던 상처들이 마치 시간을 역행하기라도 하듯 천천히 사라지는 게 온몸으로 느껴져 또 놀랐다.
“우, 우와…”
이제 영이라는 개념에 대해 막 들었는지라 저렇게까지 강한 게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그녀였다. 그리고 이렇게 입이 벌어진 채 멍하니 있기를 1분쯤 지났을까, 신령이 손을 거두고 물러났을 때 제이미는 옷이나 얼굴에 묻은 먼지 빼고는 완전히 멀쩡해져 있었다. “무슨,” 완전히 다 나은 자신을 둘러보며 도저히 할 말이 나오지 않는 그녀. 이를 보며 신령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보니 아린과 리니아가 인간계로 빠져서 이진, 다일이 데리러 갔다고 했지.”
인간과 혼령의 이름을 하나씩 다 언급하며 신령이 말했다.
“그래, 어떻게 왔는지 짐작이 가는구나.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부터 알아도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한 신령은 천천히 물러나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잠시 멈춰서서 물었다.
“이름은?”
“제이미 애…”
제이미는 그냥 이름만 말하고 끝났다. 어차피 뒤의 것은 별 의미도 없으니까. “제이미.” 눈을 깜박이는–눈이 정말 있는게 확실한 걸까?–신령에게 재차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저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까처럼 물을 밟으면서. 하지만 물에서는 누군가가 자신을 밟고 간다는 그 어떠한 흔적도 내지 않고 잠잠한 연못 위로 흘러가는 그녀를 보며, 제이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넌, 이름이 뭐야? 다들 널 신령이라고 하던데…”
이에 다시 멈춰선 소녀, 아가씨 그리고 노파는 제이미를 보면서 마치 물 덩어리가 한 방울을 떨어뜨리듯 제이미에게 무언가를 흘렸고, 그것이 닿는 순간 제이미는 저 신령의 이름을 알았다.
유.
누군가의 이름 치고는 정말 특이하다고 느낀 제이미였지만, 애초에 사람도 혼령도 아니고, 무엇보다 왠지 이쪽 세계에서는 자기 이름이야말로 가장 특이할지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관둔 그녀였다.
“그럼 가서 쉬거라, 제이미. 내일 다시 오면 될 것이야.”
우물을 건너 저 끝에 서서 조용히 앉으며 무언가를 하는 유를 두고, 제이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뒤 뒤돌아서서 산을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