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
“짜안–”
방으로 들어서는 제이미에게 팔을 활짝 벌리는 아린. 뭔가 했더니 언니얘가 잘 자리를 만들어준 거였다. “어,” 제이미는 정말 애 엄마 말대로 언니 생겼다고 좋아하는 그녀의 머리를 웃으며 쓰다듬었다. 방긋 웃으며 헤헤 소리를 흘리던 아린은 곧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이미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그얘? 여기서 지낼그얘?”
“으응.”
제이미는 한 번 더 아린을 쓰다듬었다. “그래야지.” 이어서 볼을 꼬집으며 말하는 그녀.
“내가 여기 아니면 어디 있겠어. 혹시 괜히 걱정하거나 그런 거야?”
“으야~”
잔뜩 신난 아린이 제이미의 품에 한 번 안기고는 방을 빙 돌아다녔다. 제이미는 방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넓지도 않고, 컴퓨터도 뭐도 없었기에 왠지 있어야 할 게 없어 답답하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곧 익숙해지겠지 하고 넘겨 버리는 그녀였다.
“정말이야, 제이미?”
엔시나는 제이미가 이렇게 쉽게 대답하는 게 마음에 걸렸는지 조용히 물었고, 제이미는 그럼 내가 어딜 가겠냐는 식의 생각으로 못을 박았다. 이에 엔시나는 아까 연못을 내려다보며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내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자신은 먼저 자겠다고 하며 조용해졌다.
“아, 그런데 일단 씻고 자야겠네. 어디서 씻어?”
엔시나가 먼저 잠들자 제이미가 입을 열었고, 그렇게 둘은 방을 나가 집의 뒷뜰로 갔다.
그렇게 혼령계에서의 하루가 지나고 모두가 잠든 밤,
“흠,”
하지만 제이미가 코를 골고 아린이 새근새근 누워있을 때, 그 반대쪽에 있는 방에서는 두 남자가 가만히 눈을 뜬 채 저 천장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몸은 물건 정리하듯 이불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고, 두 팔도 마찬가지로 반듯하게 놓여있었으나 그것은 곧 천천히 움직이더니 팔짱을 낀 채 멈춰 버렸다.
”……”
눈을 감은 이진의 머릿속에서는 작고 검은 것들이 들짐승처럼 무리지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높이 있는 상자를 밀어 떨어뜨리는가 하면 사람을, 그것도 생전 본 적도 없을 게 분명한 다른 세계의 인간들에 빙의하고서도 잘만 날뛰는 모습 등, 이진의 기억 속에서는 그렇게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본 광경이 다시 한 번 재생되고 있었다. 잠시 뒤 제이미를 뒤에서 기습한 그것들이 곧 하나하나 죽어가더니, 마지막에는 전부 도망치려 들기까지 한 모습이 지나갔을 때 눈을 뜬 이진. 마지막 사령을 죽인 자신의 모습을 생략하고 그는 입을 닫은 채 천천히 혼령에게 말을 꺼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아무래도,”
반면 다일은 자신이 기억하는 사령들의 모습을 책장 넘기듯 천천히 훑어보던 중이었다. 그렇게 둘은 서로 자신이 아는 것들을 넘겨보면서 그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들을 침묵 속에 공유하던 중이었고, 그렇게 모든 과정이 끝나고서 다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군 그래.”
“그렇지?”
이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린의 것보다 조금 좁지만 주인이 전혀 불만하지 않는, 한쪽에는 옷장이 놓여있고 다른 쪽에는 서랍과 그 위의 그림 몇 장이 놓인 방에서 그는 이불 위에 조용히 앉아있다가, 곧 한 손을 들어올린 채 눈을 감았다. 그러자 방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거실에 있던 영 덩어리 하나가 막 잠에서 깬 듯, 그 기운이 흐릿한 채 밝아지려는 듯 꺼지려는 듯한 빛을 내면서 들어왔다. “미안.” 이진은 왠지 투덜대는 듯한 그것을 살살 어루만진 뒤, 곧 다른 손도 뻗어 살포시 잡고는 눈을 감았다.
“란, 할 얘기 있어요. 늦은 밤에 미안하지만 곧 그쪽으로 갈게요.”
조용히 말을 전한 그는 영을 날려보냈고, 그것은 피곤한 듯 마치 사람이 터벅터벅 걷듯 느릿느릿 가더니 곧 속도를 내서 먼저 날아갔다. 이진은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뒤 그것을 따라나갔고, 곧 어두컴컴한 거실에 다다랐다. 다행히 모두들 자는 모양이었다.
“내가 보기엔 란보다는 먼저–”
“아냐.”
이진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만나야겠지만, 오늘은 너무 늦었어.”
곧 마당을 나선 그는 산을 올라가기 시작했고, 저 앞에서 영 덩어리가 작은 새처럼 먼저 날아가는 길을 밟고 가기를 몇 분 뒤, 마냥 기다리고 있기만은 뭐한지 란이 약간 피곤한 눈으로 저쪽에서 내려오는 게 보였다. “죄송해요.” 이진이 먼저 입을 열자 고개를 젓는 란.
“아냐. 이 시간에 부르면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겠지. 그래서 뭔데?”
“사실,”
이진이 천천히 말했다.
“그쪽 세계에서 사령들과 싸웠어요. 물론 그쪽의 요원들과도 충돌이 있었지만, 막판에 사령들이 숨있다가 뒤를 치더군요.”
“응?”
신관의 눈이 동그래졌다.
“사령들이 숨어있다가 뒤를 친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저도 생각할수록 좀 그래요.”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이진.
“게다가 저쪽의 그 요원들한테 빙의하고도 잘만 덤벼들었어요. 단순히 막무가내로 달려든 게 아니라 정말 싸우려고 달려든 것 같았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 알고 있나요?”
이 말에 란은 대답 대신 얼굴이 살짝 바뀌었다. “네.” 마르한이 대답했다.
“알죠. 몇 번 봤으니까. 하지만 최근에 그랬다는 건 조금 이상하네요.”
“그래서 부른 거예요.”
이진은 속에서 다일이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말했다.
“모레 사람을 보낸다고 했죠?”
“네.”
회의 얘기가 마르한은 살짝 미소지었다. 하지만 이진은 미소 없이 잠시 생각하다가, 곧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생각을 꺼냈다.
“저를 보내주세요. 서릿눈 대표로. 아무래도 제가 가서 얘기해야겠어요.”
“흠,”
란과 자리를 바꾸는 마르한. 부드러워졌던 표정이 좀 더 딱딱해졌다.
“무슨 생각인지는 알겠지만, 장로들 얘기도 좀 들어봐야 해서… 일단 말해보기는 하지.”
“농담하는 게 아녜요, 란.”
여전히 웃음기 하나 없는 이진은 좀 더 강경하게 나갔다.
“전 사령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나름대로 알고 있다고요. 제가 직접 말해야 할 것 같아요.”
란은 자신을 뚫어질 듯 바라보는 이진을 조용히 마주했다. 그렇게 밤공기가 흐르는 사이 두 남자가 서로를 쳐다보며, 한쪽은 정말 작정하고 덤벼드는 기세에 다른 쪽은 조금 난감한 듯, 혹은 상대의 생각을 꿰뚫어보려는 듯 그렇게 조용히 있던 중, 무언가가 이진의 어깨를 툭 치자 청년은 고개를 돌렸다. 아까 란에게 보냈던 그 영 덩어리가 둥둥 떠서는 이진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미안.” 이진은 그제서야 살짝 미소를 띄며 그것을 두 손가락으로 살살 어루만졌다. “알았어요.” 한편 이런 그를 지켜보던 란, 아니 마르한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긴 이제 어엿한 어른이기도 하고… 먼저 준비하고 계세요. 가면 켈샤한테 안부 좀 전해주고요.”
“네.”
이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르한 또한 잘 자라는 말과 함께 돌아서서 산을 올라갔고, 천천히 시야에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올려다보던 이진은 손 안에서 밝게 빛나는 덩어리를 든 채 집으로 돌아갔다.
“으음?”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자마자 천천히 눈이 떠진 제이미. 혼령계에서의 첫 아침은 그녀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애초에 일어나자마자 자신이 다른 세상에 있고, 밤에 찬물로 씻으면서 덜덜 떨고는 생전 처음 보는 기이한 옷, 그러나 제법 편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잤다는 사실이 곧바로 스쳐갔다는 건, 그만큼 평소와는 다른 상쾌함이 아침부터 느껴진다는 뜻이었다.
“엔시나?”
일단 혼령을 불렀으나 그녀는 아직 자는 듯했고, 이에 제이미는 먼저 일어나서는 저쪽에서 쭉 뻗은 채 숨죽여 자는 아린을 보며 싱긋 웃은 뒤 방을 나갔다.
“으아—하!”
거실로 나간 제이미는 쏟아지는 햇빛 앞에서 있는 힘껏 몸을 쭉 폈다. 고개도 좌우로 몇 번 꺾어본 그녀는 깨끗한 숨을 크게 들이키고는 인간계와 별 다를 게 없는, 다만 그 크기는 좀 더 작아보이는 혼령계의 햇빛을 올려다보았고, 이런 그녀의 눈에는 제법 생기가 돌고 있었다. “좋은 아침.” 제이미가 한 마디 던지고는 곧 신발을 신어 마당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