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어느새 모락모락 김이 피는 상이 눈앞에 있었다. “으야!” 아린이 냅다 달려들어 자리를 잡았고, 제이미가 그 뒤를 따랐다.
“그럼 이따 봐.”
서아는 이미 밥상에 영혼을 뺏긴 아린에게 인사하고는 집으로 돌아갔고, 아린은 그래도 엄마를 기다리느라 그저 침 고이는 것만 계속 삼키고 있었다. 잠시 뒤 나타난 아레인은 이런 딸아이를 보며 웃더니 볼을 꼬집었다.
“으유, 하여간 애가 참…”
그리고는 자신을 애원하듯 바라보는 아린에게 어서 먹으라고 하자, 그녀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제이미가 생전 본 적도 없는 수저놀림(?)으로 밥이며 반찬이며 쓸어먹기 시작했다. “허,” 그러고보니 인간계에서도 태어나서 처음 봤을 음식들까지 거리낌없이 막 먹어댔던가. 제이미는 저건 사람의 입이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그런 아린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잠시 뒤 세수를 했는지 약간 젖은 얼굴로 나타난 이진이 먹으라고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진,”
한편 네 식구들 중 가장 느긋하게 먹던 아레인이 아들을 보며 물었다.
“아침부터 뭘 그렇게 정리하고 그랬니?”
이 말에 이진은 아차 싶어, 젓가락으로 든 나물을 뚝 떨어뜨렸다. 그 나물은 상에 미처 닿기도 전에 아린의 입으로 들어가 제이미를 다시금 경악케 했고, 이미 저런 모습에 익숙한 둘은 이진이 “어…” 곧 말을 꺼냄으로써 얘기를 계속했다.
“말씀을 안드렸네요. 죄송해요. 저 내일 대표로 가게 됐어요.”
“응?”
아들이 말하고서 다시 먹기 시작한 순간 이번엔 엄마가 손을 정지했다.
“대표라니? 망령들한테 간다고?”
“야?”
갑자기 아린까지 먹는걸 멈추고–어느새 그녀는 상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있었다–고개를 들었다.
“망령이 우야?”
한편 제이미도 “망령?” 처음 들어보는 말에 관심을 보이며 셋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 엔시나는 말해주는걸 잊었음을 알고 잠시 혀를 차더니 동반자에게 어서 먹으라고 하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부터 말을 해주면 될까… 사실 혼령들이 처음부터 인간과 공존한 건 아냐, 제이미.”
“응.”
제이미는 혼자서 생각하며 밥을 한 숟갈 먹었다. “그래서,” 애초에 자기도 엔시나와 그나마 공존(?) 하게 되기까지 며칠을 싸워댔으니 곧바로 이해한 그녀를 보며, 엔시나는 헛기침을 하고는 계속했다. 그런데 혼령이 말을 이으려던 찰나, 제이미는 눈앞에서 조용해졌던 세 식구가 갑자기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껴, “응?” 왜 그러냐는 얼굴로 멍하니 있다가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웬 영 덩어리 하나가 자신의 머리 높이까지 떠서 그녀를 부르는 듯 묘한 기운을 전해오고 있었다.
“제이미, 엔시나,”
그리고 덩어리에서 곧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제이미는 흠칫했다. 이게 말도 하는 거야? 하지만 다시 보니 이건 란의 목소리였고, 제이미는 뭐가 뭔지 몰라 두 눈만 동그래진 얼굴로 자신에게 말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신령님께서 부르신다. 식사중이라면 마저 끝내고 올라와라.”
역시 란의 목소리가 맞았다. 저 덩어리를 무슨 녹음기처럼 쓸 수도 있는 건가? “응.” 엔시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이미는 말을 다 전하고는 유유히 집을 나가는 영을 빤히 쳐다보다가, 다시 밥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자신을 가만히 보는 셋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 사람, 원래 말하는게 저래요?”
“원래는 아녔어.”
씁쓸하게 웃는 이진.
“신관이 되고 나서, 너무 어린 나이에 되다보니 음… 좀, 나이든 분들에게 무시당했다고 해야 하나? 그 후로 저러는 거야.”
“원래는 거의 마흔 이상을 뽑거든요. 다만 이번엔 신령님께서 직접 정하셨어요. 아마 마르한 때문이겠죠.”
아레인이 설명해주자 제이미는 “네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어쨌든 빨리 가야겠다 싶어, 나머지 밥을 긁어먹고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먹었습니다 한 마디와 함께 그녀는 얼른 마당을 나섰고, 이런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본 셋은 아린이 다시 수저를 현란하게 휘두르는 것을 시작으로 하던 일을 계속했다.
“갑자기 거긴 왜 가려고 그러니?”
“할 일이 있어요. 제가 직접 말해야 할 것들이 좀 있어서.”
이렇게 말한 그는 구체적인 건 꺼내지 않은 채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잔을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게다가, 인간계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데 아직 엔시나를 보낼 순 없잖아요.”
“정말 그것뿐이니?”
하지만 역시 자식이라는 게 뭔지, 무언가 말하지 않은 게 있다는 낌새를 어머니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진은 그런 아레인을 잠시 쳐다보다가, 역시 못 이긴다는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쪽에 제가 알고 지내는 몇 명이 있어요. 내친 김에 만나려고요. 그게 다예요.”
“그래…”
애가 어쩌다가 멀리 지내는 이들과 알고 지내게 됐는지는 묻지 않는 그녀였다. 그리고 마침 아린이 “잘먹었으얘!” 한 마디 던지고는 배를 퉁퉁 두드리자, 그녀는 미소와 함께 빈 그릇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족들이 식사를 끝냈을 즈음 제이미는 산으로 올라가며 엔시나가 책을 읽듯 말해주는걸 듣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혼령들이 인간과 함께 사는 법을 알아낸 뒤에도, 그걸 모두가 받아들인 건 아냐.”
“그렇겠지.”
인간도 세상에 별의별 인간이 다 있는데 혼령이라고 오죽할까. 애초에 10년도 되지 않았다지만 선생 일을 하면서 그녀는 이미 그런 사실쯤은 충분히 익힌 뒤였다. 엔시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계속했다.
“공존을 택한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은 그렇게 갈라졌어. 새로운 삶에 정착하지 않고 거부한 그들을 우리는 망령이라 부르게 되었지.”
“그거 좀 비하하는거 아냐?”
제이미가 한 마디 하자 엔시나는 한숨과 함께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언젠가 그들을 보면 알게 될 거야.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그들은 우리들과는 다소… 차이가 많이 있어. 삶에 대한 것은 불론이고 영에 대한 관점이나 그런 것들도 말야.”
이러면서 엔시나는 그 망령이라는 이들을 추억하는 건지 잠시 무언가 묘한 기분에 잠겨들었다.
“사실 내가 태어난 건 그렇게 갈라진 이후였기에 잘은 몰라. 그저 이쪽의 혼령들과 인간들 그리고 저쪽의 망령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며 단지 그렇게 알고만 있거든.”
“그으래…”
엔시나가 이렇게 막연하게 말하는 건 처음이었기에 제이미는 약간 어색함을 느끼며, 곧 오르막길의 끝에 다다랐다. 그리고 한 번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그 연못에 가려 하는데, “아니,” 누군가가 그녀에게 말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를 가볍게 두드린 것 같은 느낌에 뒤를 돌아본 제이미.
“이쪽이다, 제이미. 오거라.”
“어,”
어제 본 그 신령이 연못 밑, 신관의 거처라고 하는 그곳 앞에서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제이미는 자신을 바라보며 서있는… 아니, 잠깐, 그런데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것처럼 그 영이라는 기운을 퍼뜨리는 모습이 아닌, 마치 정말로 평범한 사람 혹은 혼령과 같이 그냥 별 느낌 없이 그 모습만 덩그러니 있는 유였다. 어린아이에서 노인 사이를 왔다갔다하던 것도 없이 이제는 초등학생 정도로 되어보이는 소녀의 모습이 유지되어 있고. 다만 역시 눈으로는 확실히 볼 수 없어, 사람의 모습이 아닌 건 여전했다.
“왜 그렇게 서있느냐?”
정말 느낌만으로는 그냥 좀 특이한 어린 소녀가 저기 서 있는 것 같아, 어제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에 제이미가 멍하니 있자 유가 그녀를 다시 불렀다. “어, 응,” 제이미는 정신을 차리고 신령이 그 작은 집으로 들어가는–역시 걸어간다기보단 가볍게 떠가는 듯한–뒤를 따랐다.
“어서오세요, 제이미.”
집이 작다는 거 빼고는, 그리고 영 덩어리가 무슨 벌집 근처의 벌들 붕붕대듯 여기저기서 날아다니는 것 빼고는 아린의 집과 그렇게 다를 것 없었다. 제이미는 환영해주는 마르한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먼저 방으로 가는 유를 따라갈려다 멈추고서 신관의 혼령을 돌아보며 말했다.
“당신 그… 동반자한테 좀 전해줄래요? 말 그렇게 딱딱하게 뱉는다고 사람이 위엄있어보이거나 그러지 않는다고. 말을 안해서 그렇지 그사람 말하는거 때문에 기분 상한 사람들도 분명 있을 거예요.”
”……”
제이미를 반히 쳐다보더니 마르한은 “네, 네에,” 조금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이런 그를 두고 방에 들어간 제이미는, 어느새 다소곳이 거기 앉은 유를 내려다보았다. “앉거라.” 신령이 차분히 말했다. 제이미는 시선을 내렸다. 유가 앉은 방석과 같은 것이 자신의 발밑에 있었고, 그녀는 곧 속으로 어깨를 으쓱하더니 그 위에 편하게 앉으려다가 엔시나가 “제이미,” 따끔하게 꾸짖자 곧 자신도 무릎을 꿇고 앉아 신령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인간계에서 왔다고 했지.”
유가 이렇게 말할 때 제이미는 그녀의 뒤에 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영 덩어리, 최소한 수박이나 호박 정도의 크기를 가진 것들이 두 개 있어, 그것들은 중간 정도의 높이에서 저 벽에 붙기라도 한 듯 미동도 없이 떠 있었다. 한편 그 밑으로는 촛대 두 개가 있었는데, 거기 붙은 불은… 아니, 불인가? 제이미는 눈을 깜박였다. 이제 보니 어제 그녀의 머리카락을 태웠던 그 파랗고 하얀 불이었다. 혹시 이 신령이라는 애가 저 불을 다루는 걸까. 제이미는 대충 그럴 것이라 짐작하고는 그 밑으로 있는 나무로 된 매끄러운 서랍장들까지 모두 구경하고는, 이런 그녀의 시선이 움직이는걸 알고 잠시 가만히 지켜봤는지 곧 말을 시작하려는 유를 바라보았다.
신령은 제이미의 푸른 눈이 자신에게 돌아오자 먼저 앉은 채로 몸을 천천히 숙였다가 폈다. 약간 놀란 제이미에게 조용히 말하는 그녀.
“인사가 늦어서 미안하구나. 어제는 많이 바빴으니 너가 이해해라.”
“어, 어어,”
제이미는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 가만히 있다가 일단 고개를 끄덕였고, 이에 유가 말을 계속했다.
“혼령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 제이미. 그리고 엔시나와 함께 무사히 와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구나. 네 혼령과 만난지는 몇년이나 되었느냐?”
“몇년?”
피식 웃는 제이미였다.
“한 달도 안됐는데.”
이에 유는 놀란 듯, 그녀를 감싼 기운이 잠깐 살랑이더니 곧 잠잠해졌다. 제이미는 그녀가 어쩌면 사람이나 다른 동물과는, 달리 아예 저 영이라는 무언가로 이루어진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저렇게 사람에 가까운 모습을 하려고 일부러 그걸 스스로 압축해놓은 거라고. 엔시나도 이에 고개를 끄덕였고, 제이미는 자신을 신기한 듯 바라보는 유의 목소리를 전해들었다.
“한 달도 되지 않았다고? 그럼 엔시나가 꽤 급하게 여기로 왔다는 뜻이 아니냐?”
제이미는 몇 번 끄덕였고, 신령은 제이미를 잠시 가만히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그래,” 곧 자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시 엔시나와 얘기할 수 있게 해주겠느냐? 둘이 위치를 바꾸는 거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으응,”
제이미는 곧 눈을 감으면서 힘을 뺐고, 이런 그녀의 몸이 휘청거리기 전에 엔시나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신령은 제이미의 얼굴이 묘하게 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오랜만이예요, 신령님.”
엔시나가 허리를 숙인 뒤 입을 열었다. 유도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뒤에 떠있는 커다란 영 덩어리 중 하나에 손, 아니 자신의 기운을 뻗으면서 말했다.
“급하게 왔다고 하니 본론부터 다뤄야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