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
달빛은 언제나처럼 환하게 퍼졌고, 그 아래에서 배움을 얻는 영광 또한 역시 언제나처럼 빛을 발했다. 이렇게 매일 밤이면 찾아오는 축복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 깊이 닿아 울려 퍼지는 말씀을 되새기며, 한편으로는 거의 끝날 시간이 되었음을 느끼며 서운해지기도 했다.
“시히델,”
그리고 이런 그녀에게 따끔한 한마디가 가시처럼 꽂히자, “네!” 그녀는 놀라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가 곧 당황해서 자신을 누그러뜨렸다.
“죄송해요, 신령님.”
“됐다.”
그녀가 잠시 정신이 팔린 이유를 꿰뚫어보고는, 평소 그녀가 얼마나 열정 넘치는 학생인지를 알고서 넘기는 신령님이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던 듯 바로 마무리를 하고는 이만 내려가 보라고 하는 신령에게 모두들 인사와 감사를 전했고, 이렇게 오늘의 수업이 끝나자 시히델은 거의 마지막까지 남아 오늘 밤 배운 것들을 속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이런 그녀가 오늘도 대견한지 격려의 뜻으로 그녀의 기운을 살짝 감싸주고 가는 신령.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렇게 칭찬받을 때마다 시히델은 속에서 분수가 솟아오르는 듯 넘치는 영광과 함께 크나큰 기쁨으로 몸을 사릴 정도였다.
“시히델,”
한편 이렇게 황홀해 있는 그녀를 부르는 이가 있어, 시히델은 오랜 잠에서 깬 것처럼 다소 신경질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다른 한 명이 그녀를 부르고서는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 미안.”
그제서야 그녀는 자기가 뭘 하고 있었는지 깨닫고 얼른 생각을 정리한 뒤, “가자.” 먼저 한 마디와 함께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은 가벼운 움직임으로 딱딱한 돌바닥 위에서 미끄러져 내려갔–
“우와아!?”
갑자기 정신이 퍼뜩 든 제이미는 스스로 찬물을 뒤집어쓴 느낌 속에 얼른 자신의 발부터 내려다봤다. 멀쩡히 바닥 위에 놓인 두 발. 발가락을 움직여보자 다섯 개 모두 별문제 없이 꼼지락거렸고, 발 전체를 구부렸다 폈다 하는 것도 별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휘둥그레진 눈으로 자신의 몸 구석구석 훑어보고 움직여보는 그녀에게 유가 물었다.
“무슨 일이냐?”
“그, 그게,”
아무 이상이 없음에도 계속 뭔가 걸리는 느낌을 버리지 못해, 제이미는 고개만 연신 저었다.
“좀 이상했어. 잠깐 내 몸이… 없어진 것 같았는데?”
“없어진 것이 아니다.”
신령이 대답했다.
“다른 몸이 된 거지. 인간인 너에겐 생소할 것이다만, 조만간 익숙해질 것이니 안심하거라.”
그녀를 안정시키듯 부드럽게 감싸는 말에 제이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가도, 역시나 아무리 꿈 비슷한 것에서라지만 생전 처음 느껴본 그것이 도저히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사람의 몸, 아니 애초에 그녀가 알던 생명체의 몸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사람도 다른 동물도 아닌(비록 그녀가 다른 동물이 되어본 적은 없지만), 오로지 손에 잡힐듯 말듯한 무언가로 이루어진, 그럼에도 분명 그것을 하나의 몸이라고 할 수 있는 무언가가 그녀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라니. 마치 바람이 생명을 가지고 스스로 움직인다면 그런 느낌일까 싶었다.
정말 이러다 내가 평소에도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될 것 같다… 라고 생각한 제이미였지만, 곧 설마 뭐 있겠어 하고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눈을 감으려다가 아차 싶어 “잠깐,”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걸 왜 보여주는 건데?”
“이 세계의 삶에 대한 기원이 담긴 기억이다. 여기서 살아가려면 아주 중요하지. 이 마을에 사는 모든 이들이 이미 그 기억을 봤고, 너 또한 이 세계에 대해 알고 이해해야 여기서 더 편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느냐. 다만 그 기억은 우리가 인간계를 발견하고 한참 뒤에 거둬들인 것이라, 엔시나도 그걸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시히델이라면…”
엔시나도 어느새 자신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분명 이 세계에 사는 이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 그녀가 직접 만나본 혼령도 아니고, 단지 여성이라는 점밖에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 둘이 이렇게 생각을 주고받는걸 지켜보던 유가 덧붙였다.
“너가 스스로 궁금해하지 않았느냐, 제이미.”
“응?”
제이미의 눈이 동그래졌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건 또 어떻게 안 거야?”
“뭐야, 내 생각은 못본다며?”
“네 얼굴을 본 것이다.”
유가 대답하면서 살며시 미소지었다. 신령의 장난 섞인 웃음을 본 제이미는 자신 주위의 무언가에 사로잡히는 듯 움찔했다가, 곧 “아, 알았어,” 손까지 휘휘 내저으며 최대한 표정을 숨기려 애를 썼다.
“알았으니까 계속해.”
그리고 유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다시 잠에 빠지듯 눈앞이 흐려지는 그녀였다.
어제 복습에 얼마나 정신을 쏟아부었는지, 시히델은 해가 뜨고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으음,” 아직 피곤함이 남아 몸을 펴지 못하다가, 곧 그녀 자신을 이루는 기운과 그 흐름을 모았다가 쭉 펴기를 반복하며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이런 그녀가 지금쯤 일어날 것이라 짐작했는지 저쪽에서 어제 그녀와 같이 산을 내려온 친구가 다가왔다.
“마르한,”
시히델은 매 수업마다 늦게까지 남는 자신을 거의 유일하게 챙겨주는 그에게 물었다.
“내가 얼마나 잔 거야?”
“열 시간. 이제 좀 정신이 들어?”
“응, 조금.”
시히델은 평소에 누워 자던 부드러운 잔디 위에서 일어나, 그와 함께 덩굴을 옆으로 치우고 나가 나무 사이를 이리저리 피해다녔다. 곧 광장이 눈앞에 들어오자 둘은 마지막 잎을 헤치고 나가, “흠,” 하필 지금 깨다니 하고 후회하는 그녀의 눈앞에서 수많은 인간들이 줄을 지어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
맨 위에 달린 머리, 그 밑으로 두 개의 팔과 다리, 그리고 이를 이어놓은 가운데의 몸. 아주 그 형태부터 단순할 정도로 선명하고 간단하기 짝이 없는 그들이 수많은 혼령들의 시선 속에서 숨죽여 움직이고 있었다. 시히델은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주 죽은 듯이 조용하게, 감히 옆으로 새거나 하려는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마치 저들의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잡아서 자유고 뭐고 완전히 없애놓은 동물들이 그들의 신호에 따라 줄지어 기어가듯…
“시히델,”
옆에서 마르한이 건드리자 그녀는 시선을 홱 돌렸다. “왜?” 조금 신경질적으로 묻자 그는 약간 걱정하는 듯 조심스럽게 움츠러들며 말했다.
“너무 그렇게, 어어… 그러지 마.”
시히델은 대답 대신, 아니 거의 무시하듯 그런 마르한도 한 번 쏘아보고는, 그 시선을 그대로 저 인간들에게 다시 던졌다. 애초에 신령님들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저런 생물에게까지 가르침을 베풀어주시는 걸까. 원래 자애로운 분들인 건 알고 있었지만, 너무 이해심이 많은 것도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무엇보다 저들의 사는 방식을 대충 봐온 그녀로서는 도대체 저들이 무슨 자격이 있다는 건지…
한편 그녀의 유달리 차갑게 타오르는 시선 속에서, 인간들은 누군가가 자신들을 그렇게 노려보고 있는걸 느꼈는지 그 중 몇몇이 그녀를 쳐다보는 것을 시작으로, 그 뒤에서 줄지어 오는 거의 모든 인간들이 마치 하나의 관례처럼 이 여성 혼령을 한번씩 쳐다보고 지나갔다. 시히델은 그 옆에서 혼자 안절부절못하는 마르한을 무시하다가 그래도 너무 신경쓰여 결국
“좀 가만히 있어.”
사납게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이에 마르한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아니 오히려 누가 누구한테 성질을 내냐는 식으로.
“너야말로 좀… 지금 저기 인간들 다 널 쳐다보고 있어. 알아?”
“쳐다보라지.”
시히델은 마르한에게, 그리고 저 인간들에게 한마디 툭 던지고는 또 저들에게 매서운 시선을 던지며 계속 저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신령님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그렇게 바라보는 중에 별의별 생각이 왔다갔다하더니만, 결국 보다못한 마르한의 손에 끌려감으로써 제지되었다.
“너 정말,”
버둥거리면서도 질질 끌려가는 시히델은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 좀 가만 놔두라고! 그렇게 싫으면 너가 저리 가든가 하지 왜!”
“너야말로 제발!”
뒤의 나무들 사이로 그녀를 끌고간 마르한은 다른 혼령들 그리고 인간들의 눈에서 벗어나자마자 그녀를 세차게 꾸짖었다.
“내가 저번에 말했잖아, 저들은 그냥 신령님들께서 우리처럼 가르치는 거라고! 네 그런 태도 때문에 하다못해 혼령들까지 너를 멀리하려는 거 안 보여? 도대체 넌 뭐가 그리 못마땅해서 난리인 거야?”
바람 속에 칼날이 섞여 날아오듯, 그의 몸에서 흐르는 기운이 무섭게 때리자 시히델은 마르한의 평소의 얌전한 모습과는 다른 그것에 살짝 움츠러들 뻔했으나, 역시 그녀 또한 마치 인간들에 대한 경멸을 그에게 폭발시키듯 맞섰다.
“그래서 저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도, 저들이 얼마나 비열한 생물인지를 너도 봤으면서 감싸주겠다 이거야? 지금 이러는 순간에도 저것들은 우리 세계의 생물들을 수도 없이 감금하고, 죽이고, 먹어치우다 말고 내다버리는–”
그렇게 으르렁대던 시히델의 말은 순간 무언가가 둘을 거의 옆으로 쓰러질 듯이 후려치는 탓에 멈추고 말았다. “앗!?” 갑자기 거대한 돌풍이 일은 것처럼, 아니 단순히 바람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휘몰아치는 것에 거의 넘어질 뻔한 그녀는, 진짜로 넘어진 마르한을 이때까지 싸울 기세였던 건 그냥 잊고서 “마르한!” 얼른 일으켜주었다. 친구는 잠시 멍한 모습으로 기운을 누그러뜨리더니, 이어서 한 쪽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분명 그가 바라보는 쪽에서 무언가가 밀어닥쳤기에, 시히델 또한 이성을 버리고 화를 내는 중 갑자기 중심을 잃었는지라 그쪽을 바라보면서도 뭔가 생각하지를 못했다. 그런데 이런 둘에게 다음 순간 또다시 무언가가, 마치 나무로 막아놓은 물이 뚫고 나오면서 쏟아지듯 강한 흐름이 몰아쳤고, 이번에는 둘 다 넘어지고 말았다. 땅이 울리거나 하진 않았고, 단지 나무들이 심하게 흔들리는 정도였으나 어째서인지 두 혼령에게는 자리에 제대로 서지도 못할 정도로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세 번째, 둘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다시 무언가가 들이닥치며, 이번에는 저쪽에서 웬 비명소리가 들려오자 시히델과 마르한은 서로 마주 보면서도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어떻게든 그 근원지인 듯한 쪽으로 가려고 몸을 뻗었다.
“무, 뭐야 갑자기? 무슨… 으흑!”
마치 마른하늘에 천둥이 치듯 연달아 휘몰아치는 그것에 온몸을 떨며, 시히델은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려고 애를 쓰며 중얼거렸다.